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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현수)어머니
    어머니 김 윤 도새벽기도 나서시는칠순 노모의 굽어진 등 뒤로 지나온 세월이 힘겹다그 곳에 담긴내 몫을 헤아리니콧날이 시큰하고,이 다음에, 이 다음에어머니 세상 떠나는 날그 세월어찌 바라볼까가슴에산山 하나 들고 있다.어머니의 첫 글자는 모음으로 시작 된다. -어, 부르는 그 첫 음이__ .어머니의 사랑은 그 어떤 가치로도 비교할 수가 없다. 바로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사랑과 꼭 닮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기도는 무량하다.추울 때나 더울 때나, 비바람 눈보라 쳐도 첫 새벽 살며시 현관문을 열고 나서시는 노모….얼마나 엎드려 기도하셨을까, 이제 어머니는 등도 굽으셨고 힘도 없으시다. 하지만 기도는 쉼 없이 올려진다.“하나님이 너무 바쁘셔서 잠시 이 땅에 대리자로 보내셨다네.” 간혹 어머니를 풍자한 비유다. 어머니는 하나님께 드릴 이야기가 많고 많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교회와 이웃을 위해 자녀를 위한 기도는 사무엘의 아머니 한나가 기도한 것처럼 시인의 어머니는 생애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지 않을까.아들을 위한 기도는 더욱 간절하다. 낮아지고 작아지고 엎드린 등은 둥글게 휘어져 있다. 모나지 않게 엎드린 어머니는 한나가 새벽 일찍 일어나 여호와께 드린 경배다.그 사랑은 산과 같이 높고 깊다. 갚을 길 없는 은혜다,그래서 산 하나 들고 시인은 그 노모의 사랑을 알아가고 있지 않을까.
    • 칼럼
    • 기독시선
    2016-10-20
  • 선교는 하나님 말씀의 증거
    선교지에서 선교사의 일차적 책임은 무엇인가? 이는 말씀의 선포이다. 이 문제는 선교사가 지닌 신학의 유형에 따라서 일차적이냐 아니면 2차적이냐로 갈려지게 된다. 피터 바이어 하우스는 선교를 위한 말씀의 중요성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의 확신에 의하면 복음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중심과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고전적이며 복음적인 선교 이해에 본질적인 자료이다.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제7장에 복음의 교의와 교회의 표지로 언급된 성례는 가시적인 말씀으로서 넓은 의미의 말씀에 포함된다. 예수님이 행하신 치유의 기적은 천국 복음 선포의 구체적인 내용을 신뢰하게 하는 부수적인 표지로 이해되어야 한다. 4복음서 전체와 사도행전에 재현된 선교명령의 형식들에도 해당된다. 여러 곳에서 사도들에게 주어진 명령이 말씀에 대한 봉사로 나타난다. 그에 상응하는 개념들은 ‘설교하다’, ‘가르치다’, ‘증인이 되다’, ‘제자를 삼다’, ‘세례를 주다’, ‘죄 용서를 하다’ 등이다. 말씀에 대한 봉사는 다른 모든 목회 적이며 사회봉사적인 교회의 과제 중 가장 우선적인 것이다. 로잔 언약(5번 항목)에도 올바르게 표현되었듯이 사회정치적 책임은 선교 개념에 포함시킬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내포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은 직접적인 구원을 위한 교회의 파송의 부분이 아니라, 오히려 처음부터 의도된 하나님의 명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지시에 따른 선교에 의해 구원받은 사람들의 순종의 열매요 결과이다. 선교자료로서의 말씀에 대한 높은 가치평가는 무엇보다도 성경자체의 증언과 다음과 같은 체험에 기인한다. 그 체험이란, 성경은 의미 있고 깨달음을 주는 특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말씀이 살아 움직이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바로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창조와 구속과 성화를 이루신다. 그러면 선교사가 지녀야 할 복음의 진정한 내용은 어떤 것인가? 파송 된 자는 듣는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이 받은 바를 전하는 것이다. 사도들은 첫 번째 파송 받을 때부터 분명한 메시지, 즉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마땅히 회개해야 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복음의 내적 통일성은 두 가지 근거를 가진다. 첫째로, 예수님이 그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약성경의 참된 의미를 밝혔을 때,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분명하게 해석된 동일한 역사적 사건에 기인한다. 둘째로, 모든 사도들에 의해 확고한 전승재료로 보전되고 선포된 것에 기초를 둔다. 바울 역시 자신의 사도직이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주어졌음과 그에게 선물로 부여된 비밀의 인식을 열정적으로 변호하였지만, 때때로 그가 받은 전승을 증거로 제시하였다. 일찍이 문학적인 자질이 있는 일단의 기독교인이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에 관한 기록물들을 편찬한 후에(비교 눅 1:1f), 이 문서는 원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구두 선포를 의미했던 것인데 후에 “복음”(막 1:1)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성경은 세계 선교를 통하여 항상 선교지의 새로운 언어로 번역됨으로써 전 세계교회를 교의적으로 묶어주는 연결점이 된다. 고대 교회의 이러한 성경의 확정과 신앙고백의 형성 과정은 영지주의자들의 거짓 학설이 성경을 자의적으로 변경하는데 대응하는 영향력 있는 보호 장치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성경의 복음을 지시하는 것 자체가 복음화를 상황주의의 그늘 아래 새롭게 구성하는 시도와 시대사조의 흐름을 절대적인 위임으로 인정하려는 자의적인 경향에 대응하는 필수적인 경고가 된다.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진리인 성경이 문화의 벽을 넘어 갈 때에는 가변적 요소를 지닌다. 즉 16,17세기 인도와 중국에서의 예수회 선교 시대 이래로 다양한 개념으로 사용된 선교방법으로서의 적응의 노력과 논쟁은 선교 이론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적응을 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요청은 이미 사도들의 선교방법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지적되어야 할 것은 적응에는 신학 개념이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풍습에의 적응이 관건이다. 개념의 가변성을 통하여 생긴 차이점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관념의 차이이다.비록 문화적 가변성이 존재할지라도 선교사는 절대적인 진리인 성경을 인간의 사변적 이론을 들어 바꾸거나 훼손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선교의 일차적인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교)
    • 칼럼
    • 선교
    2016-10-20
  • 이웃의 자신감을 일그러지게 하는 언동에 대해서
    “선생님, 내 형제에게 명해서, 유산을 나와 나누라고 해주십시오.” 하며 다가오는 이에게 예수는 말한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분배인으로 세웠느냐?” 그리고 돌아서서 사람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눅 12장 13절 이하).”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2부에서 말했다. “자신의 정의로움을 과시하기 위해 많은 말을 하는 자라면 누구든지 믿지 마라!...그리고 그들이 착하고 의로운 자임을 자칭할 때 잊지 말라. 그들이 바리새인이 되는데 있어서 모자라는 것은 다만 권력뿐이라는 사실을!”예수 어록의 패러디 같다. <누가의 복음서> 12장 첫 머리를 아울러 읽어준다면 말이다. “너희는 바리새파 사람의 누룩 곧 위선을 경계하여라. 가려 놓은 것이라고 해도 벗겨지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 놓은 것이라 해도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것들을 사람들이 밝은 데서 들을 것이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그것을 사람들이 지붕 위에서 선포할 것이다.” 니체는 신종 바리새파 사람의 꽁무니에 감추어진 권력욕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는데 이골이 나있는 당사자들은 자신의 꽁무니를 살펴볼 여유가 없다. 힘과 돈을 가지지 못한 약자만이 정의이고 강자는 부정이라는 단순한 주장은 따지고 보면 힘을 가지지 못한 이들에 대한 모욕적 발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애써 고개를 돌려버린다. 어떤 약자에게도 자존심이 있고 삶에 대한 의욕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차라투스트라> 2부 ‘구제에 대해서’ 참조)단 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있는 사회는 복지국가가 될 수 없다며 기염을 토하는 이들, 있을 수 있는 여러 전제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는 이들의 히스테릭한 목소리에 지쳐버린 오늘, 니체의 목소리를 다시 한 번 음미해 보고 싶어진다. 니체는 나름의 독설을 내뱉는다. “여러분 평등의 설교자들이여!...독재자적 광기가 여러분 속에서 ‘평등’을 요구하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다...그들이 말하고 있는 불평 하나하나에서 복수의 가락이 들려온다. 그들이 제공하는 찬사 하나 하나에는 사람을 해치고자 하는 의도가 감추어져 있다. 그들은 타자를 재단하는 인간이라는 것이 더 없는 행복으로 여겨지고 있는가 싶다.”진정한 복지는 시혜도 은혜도 아닐 것이다. 곤경에 처한 이들이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는 동기와 의욕을 가지도록 도와주는 일이야 말로 가장 요긴한 복지가 아니겠는가. 겉으로 드러나는 동정이나 물질적 보호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악조건에 처해진 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자신이 져야 할 일부의 책임과 성격상의 결함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내성의 자세로 스스로를 가다듬을 여유를 가질 수 있어야한다는 말이다. 모두를 세상 탓으로 돌리며 “그래서 나는 불행하다” 하는 한 참다운 용기는 생겨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세상을 원망하는 실패자를 무수히 보아왔다. 못지않게 자신의 진정한 능력마저 알아차리지 못하고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어버린 성공자들 또한 많이 보아왔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서 말한다. “주사위를 던져 행운을 잡고서는 ‘왔다!’ 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수치심을 느끼는 인간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이 아니겠는가?” “혹 내가 부정한 내기를 한 것이 아닐까” 하고, 한 발 물러서서 스스로 의문을 품어보는 자야말로 차라투스트라가 이상형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우리 사회에 제도상의 불비가 많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이나 삶의 보람까지도 상실하게 하는 무차별적이고 일률적인 평등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다. 그것은 또 하나의 정의를 상실하게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10-20
  • 고슴도치의 딜레마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가 쓴 우화에는 재미있는 ‘고슴도치 딜레마’의 이야기다 있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두 마리 고슴도치가 서로 몸을 기대어 온기를 나누고 싶은데 너무 가까워지면 서로의 침에 찔려 아프고 그렇다고 떨어져 있으면 온기를 나눌 수 없어 적정 거리를 놓고 고민하는 내용이다. 이를 일컬어 ‘고슴도치의 딜레마’라 하고 또 이런 고슴도치들의 적정 거리 간격을 예절이라고 하는데 사람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예’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예’ 란 합당한 사람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주는 것을 의미 한다. ‘예’는 왜 지켜야 하나?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이기 때문이다. 만나는 사람이 예의 없고 품격 없으면 금세 싫증 나듯 그 누구도 예의 없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은 인사하는 것, 하나를 보더라도 그가 교양이 있는지 품위가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즉 부드러운 미소, 헤어스타일, 좋은 목소리, 단정한 옷차림, 절도 있는 동작 하나를 보면 그 사람이 준비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예의를 지켜야 한다. 예절은 사람의 인격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사랑도 예의라는 그릇에 격식을 갖추어 나 올때 품위 있고 존경스럽다. 아울러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린다. 사람을 무례하게 대하면 소인배들이 모여 든다. 그러나 예의를 갖추면 자신보다 더 뛰어난 사람과 교제 할 수 있다. 고로 실력 이전에 먼저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사소한 것이라고 우습게 여겨서는 안된다. 예의도 하나의 습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의를 지키는 방법이 무엇일까? 무례히 행지 말아야 한다. ‘무례’(헬.아스케모네이)란 말은 공정치 않게 행동함으로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을 의미 한다. 그것은 첫째로 공중을 위한 예의가 없이 행함을 가리킬 수 있다. 성도는 주님의 지체요. 고립되어 자행자지할 사람이 아니다. 개인이면서도 그리스도의 몸(하나님의 백성)의 모든 지체들과 함께 살 줄 알아야 한다. 주님의 속죄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인륜상의 질서도 더욱 강화 할지언정 약체화 시키지 않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책임을 다 할 줄 모르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겠는가(요일 4:21)? 하나님을 공경하노라 하면서 부모를 박대한 바리새인은 실상 하나님을 바로 공경하지 못한 자였다.(마 15:5, 6) 사람들에 대한 예의와 하나님에게 대한 경외는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 눅 18:4절에 불의한 법관의 말도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라고 하여 양자의 관련성을 암시 한다. 둘째로 권위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 역시 무례이다. 실례를 들면 부모는 자식의 권위요, 선생은 제자의 권위요, 노인은 젊은 자들의 권위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여 주셨다. 사람이 땅의 권위들을 존경하도록 하는 것은 그들이 그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 경외에 이르는 훈련을 받도록 한 것이다(레19). 고로 권위를 존경할 줄 모르는 자에게는 하나님을 알게 하기가 곤란하다. 존경의식은 어떤 의미에선 경건을 돕는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 중에 존경할 자를 존경하는 것이 우리의 경건도 증진 시킨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무례할까? 세 가지 병이 들었기 때문이다. 즉 돈병, 색병, 이름병이 그것이다. 이중 가장 무서운 것이 이름병이다. 돈병이나 색병에 걸리면 주위 사람들의 눈총을 줘 고칠 수 있다. 하지만 이름병에 걸리면 여간해서는 고칠 수 없는 고질병이 된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정치인이며 고위 공직자며 사업가들이 사단의 유혹을 받아 불의한 돈과 명예와 권력을 사랑하다가 평생 힘들게 쌓은 부와 명예와 권력을 하루 아침에 잃고 있는가? 그런데 이들은 여러 번의 불운이나 실패를 경험한 것이 아니다. 단 한번으로 영원한 파멸을 경험했다. 그런데도 이러한 것들에 맛에 길들여진 사람은 방자하고 교만하여 사람을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단의 유혹을 받아 재물에 대한 애착과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려는 명예욕을 물리치지 않으면 영과 육이 망한다. 이제 우리는 무례하지 말고 이렇게 하자. 스탠튼처럼 링컨을 모욕한 사람은 없다고 포스딕은 말했다. 스탠튼은 링컨을 ‘저급하고 교활한 어릿광대’라고 했다. 또 ‘고릴라의 원종’이란 별명을 붙여주고 듀 샤일류는 ‘바보보다 고릴라를 잡자면 일리노이스주의 스프링필드에 가면 간단 할 텐데 멀리 아프리카까지 갈게 뭐란 말이야’라고 말하기 까지 하였다. 링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스탠튼 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하였다. 그 직임에는 스탠튼이 적임자였기 때문이다. 링컨은 최대의 예절을 다해서 스탠튼을 대우해 주었다. 세월이 흘러 극장에서 암살자의 흉탄에 링컨이 쓰러진 날 밤이 왔다. 그날 밤 대통령의 유해가 안치된 좁은 방에 스탠튼이 서 있었다. 그는 이제 말없이 누워 있는 링컨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여기에 세계 사상 가장 훌륭한 통치자가 누워 있다’고 말했다. 사랑에 의한 인내가 드디어 승리하였던 것이다.
    • 칼럼
    • 목회자
    2016-10-20
  • (경현수)자판기 커피
    자판기 커피 감 태 준커피 속에 종이컵 바닥에 어른거린다향긋하고 달착지근한 맛에커피 주는 줄 몰랐구나.자판기 커피가 일생의 거울인 줄 몰랐구나.반품 안 되고 리필 안 되는딱 한 컵의 생애,마지막 한 모금 삼키고 나면누구든지, 그냥 빈 종이컵 하나.일상의 아주 작은 것, 시인은 그냥 스치고 지나갈 법 한 무심한 것들을 펼쳐 보이고 있다.빌딩 안 한 구석이나 혹은 역구驛區에 우두커니 서있는 자판기 기계 앞에서 자판기 커피와 종이컵에서 예사롭지 않은 비감悲感을 이끌어 내고 있다.이렇게 큰 울림은 주는 것은 무엇일까? 동전 한 닢을 투입구에 넣으면 신기하게 하얀 종이컵에 감미로운 따뜻한 한 잔의 커피가 튀어 나온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요술 램프인 가봐 ..., 자판기 커피는 도시 서민의 권태롭고 힘든 시간 앞에 즐거움을 선사 한다.바쁘고 가난한 연인들에게 더 없이 훌륭한 찻집이 되어 준다.이 환상적인 사건 앞에 왠일일까, 느닷 “삶은 무엇인가?” 그 존재의 물음에 접근 하고 있다.너무 비약하지 않는가, 그러나 중얼거리고 투덜대야하는 의문 투성이의 삶 앞에 명징하게 말 해주고 있다. (...자판기 커피가 일생의 거울인 줄 몰랐구나. )그 거울 앞에 시인은 구도자 같이 깨달음에 도달했다. 반품도 리필도 안되는 生생 의 한 가운데 엄숙하게 고개 떨구고 있다.가성비가 좋은 한잔의 자판 커피와 종이컵...그 물음 앞에서, 높이 尖塔첨탑에 있는 십자가가 보인다, 우리에게.
    • 칼럼
    • 기독시선
    2016-10-13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교
    성경은 이름을 복 주시겠다고 약속하였다. 대표적인 이름이 “아브라함” 이다. 창세기 12장 2절에 의하면 “...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라고 말씀 하셨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대로 성경에 아브라함의 이름이 가장 많이 언급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면 선교를 위해서 우리는 누구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이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영적인 직무수행자들의 말과 행동이 그 권위와 능력을 얻는 것은 하나님을 통한 전권위임을 통해서이다. 이러한 성경적 근본생각은 신적인 사명을 주는 자는 자신의 이름을 부름으로 해서 현존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표현을 발견한다.바울은 잘 알려진 유명한 구절에서-로마서를 시작하는 초두의 자기소개에서-자기의 개인적인 파송이해를 다음과 같은 말로 쓰고 있다: 즉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charis)와 사도의 직분(apostole)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한다.”우리는 이하에서 이러한 이름 모티브를 다양한 관점에서 선교학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첫째는 이름의 의미 속에는 개인적 현존으로서의 이름이 존재한다. 개인 이름에 대한 성경적 생각에 근본적인 것은 그것은 고대의 생각에도 마찬가지였겠는데 이름은 곧 바로 존재론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해는 개신교 교회가 모든 예배를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거룩한 형식으로 열 때 그 배후에 있는 것이다. 먼저 이것은 공동체의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는) “상향식의” 고백행위가 아니라, 그 언사에 있어서 예배 집전자는 전권을 위임 받은 상태와 삼위일체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향적으로” 행동한다. 여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불가시적으로 현존하면서 예배의 전체 사건 속에서 주도권을 넘겨받으심으로써 교회 공동체에게 그의 은총의 수단을 통하여 자신을 선물하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받아들이신다. 어떤 한 개인의 이름은 그 개인의 의미와 본질적 특성, 행동방식 및 현존의 규정을 동시에 표현한다. 이곳은 성경에 나타나는 구속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에게 다양한 이름을 부여하는 것 속에서 나타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민족의 조상으로 정해지며(창17:5), 세례요한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곧 도래할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를 위한 길을 예비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이 그 이름으로 불리울 때, 이것은 동시에 그 이름으로부터 비롯되는 거룩한 영향력에 대한 기대에 찬 소명 하에서 일어난다. 따라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특별한 특권을 나타내며 그 이름에 걸맞는 영향력을 갖는다.둘째는 우리가 세상에서 불려지는 이름 속에는 자리매김으로서의 이름이 존재한다. 한 사람의 이름에는 가끔 그 사람의 서열과 영향력이 나타난다. 신약성경의 기독론도 예수의 인격에 부가되는 존귀한 이름의 형태로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 매우 의미가 있다. 직접적인 과정 속에서 수행되는 바로 이러한 사건 속에서 하나님 편에서의 계시의 사건은 인간 편에서의 신앙과 교리의 발전과 함께 상응한다. 예수 자신은 숨기시기도 하고 동시에 드러내시기도 하시면서 자신을 인자라고 불렀다. 제자들은 그를 분명히 보다 일찍 헬라의 문화에 맞추어서 존경스러운 의미로 주님(kyrios)으로 불렀다. 부활이후 이 명칭은 엄청난 의미로 자리매김했으며 상승작용을 거치게 되었다. 그가 구약의 주-야훼와 동일시됨으로서 이제 결정적으로 인간적인 차원에서 신적인 차원으로 상승하고 이로써 그를 하나님과 동등한 것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좀 더 확실하게 고유명사로 된 다른 칭호는 그리스도라는 칭호이다. 즉 하나님에 의해서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요, 대제사장이며 동시에 예언자이다. 예수를 이스라엘뿐 아니라 전 세계의 구원자요 구속자라고 증언하는 것도 이러한 고백 속에 포함되어있다. 예수의 존귀를 나타내는 또 다른 호칭은 그리스도라는 이름과 연관 된다. 오늘날 선교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 오히려 그 위대한 이름 대신에 복지와 상담 그리고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소리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선교사들은 공중 권세 잡은 세력과의 영적 대결과 지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사역에서 결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포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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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16-10-13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교
    성경은 이름을 복 주시겠다고 약속하였다. 대표적인 이름이 “아브라함” 이다. 창세기 12장 2절에 의하면 “...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라고 말씀 하셨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대로 성경에 아브라함의 이름이 가장 많이 언급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면 선교를 위해서 우리는 누구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이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영적인 직무수행자들의 말과 행동이 그 권위와 능력을 얻는 것은 하나님을 통한 전권위임을 통해서이다. 이러한 성경적 근본생각은 신적인 사명을 주는 자는 자신의 이름을 부름으로 해서 현존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표현을 발견한다.바울은 잘 알려진 유명한 구절에서-로마서를 시작하는 초두의 자기소개에서-자기의 개인적인 파송이해를 다음과 같은 말로 쓰고 있다: 즉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charis)와 사도의 직분(apostole)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한다.”우리는 이하에서 이러한 이름 모티브를 다양한 관점에서 선교학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첫째는 이름의 의미 속에는 개인적 현존으로서의 이름이 존재한다. 개인 이름에 대한 성경적 생각에 근본적인 것은 그것은 고대의 생각에도 마찬가지였겠는데 이름은 곧 바로 존재론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해는 개신교 교회가 모든 예배를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거룩한 형식으로 열 때 그 배후에 있는 것이다. 먼저 이것은 공동체의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는) “상향식의” 고백행위가 아니라, 그 언사에 있어서 예배 집전자는 전권을 위임 받은 상태와 삼위일체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향적으로” 행동한다. 여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불가시적으로 현존하면서 예배의 전체 사건 속에서 주도권을 넘겨받으심으로써 교회 공동체에게 그의 은총의 수단을 통하여 자신을 선물하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받아들이신다. 어떤 한 개인의 이름은 그 개인의 의미와 본질적 특성, 행동방식 및 현존의 규정을 동시에 표현한다. 이곳은 성경에 나타나는 구속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에게 다양한 이름을 부여하는 것 속에서 나타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민족의 조상으로 정해지며(창17:5), 세례요한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곧 도래할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를 위한 길을 예비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이 그 이름으로 불리울 때, 이것은 동시에 그 이름으로부터 비롯되는 거룩한 영향력에 대한 기대에 찬 소명 하에서 일어난다. 따라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특별한 특권을 나타내며 그 이름에 걸맞는 영향력을 갖는다.둘째는 우리가 세상에서 불려지는 이름 속에는 자리매김으로서의 이름이 존재한다. 한 사람의 이름에는 가끔 그 사람의 서열과 영향력이 나타난다. 신약성경의 기독론도 예수의 인격에 부가되는 존귀한 이름의 형태로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 매우 의미가 있다. 직접적인 과정 속에서 수행되는 바로 이러한 사건 속에서 하나님 편에서의 계시의 사건은 인간 편에서의 신앙과 교리의 발전과 함께 상응한다. 예수 자신은 숨기시기도 하고 동시에 드러내시기도 하시면서 자신을 인자라고 불렀다. 제자들은 그를 분명히 보다 일찍 헬라의 문화에 맞추어서 존경스러운 의미로 주님(kyrios)으로 불렀다. 부활이후 이 명칭은 엄청난 의미로 자리매김했으며 상승작용을 거치게 되었다. 그가 구약의 주-야훼와 동일시됨으로서 이제 결정적으로 인간적인 차원에서 신적인 차원으로 상승하고 이로써 그를 하나님과 동등한 것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좀 더 확실하게 고유명사로 된 다른 칭호는 그리스도라는 칭호이다. 즉 하나님에 의해서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요, 대제사장이며 동시에 예언자이다. 예수를 이스라엘뿐 아니라 전 세계의 구원자요 구속자라고 증언하는 것도 이러한 고백 속에 포함되어있다. 예수의 존귀를 나타내는 또 다른 호칭은 그리스도라는 이름과 연관 된다. 오늘날 선교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 오히려 그 위대한 이름 대신에 복지와 상담 그리고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소리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선교사들은 공중 권세 잡은 세력과의 영적 대결과 지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사역에서 결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포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6-10-13
  • 포클랜드 스피릿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의 영구차가 세인트폴 대성당으로 가던 도중, 관이 포차(砲車)로 옮겨지면서 런던탑에서는 1분 간격으로 예포가 울렸다. 3대의 대포 중 2대는 포클랜드 전쟁에서 쓰던 것. 관을 실은 포차 뒤로는 해군음악대와 포클랜드 전투에 종군했던 부대가 따랐다. 대처의 장례는 포클랜드 전쟁의 회상 그것이었다. 그녀가 취임 4년째였던 1982년에 아르헨티나와 치렀던 그 전쟁 말이다. 남미대륙 남쪽에 위치하는 포클랜드 제도는 영국이 1833년에 식민지화한 이래 아르헨티나와는 영유권을 두고 승강이가 가시지 않았다. 1960년대로 들어서면서 영국은 “통치는 계속하되 주권은 아르헨티나에게 이양해도 좋다”며 한 발 물러선다. 1981년 12월, 정권을 잡은 갈티에리 장군이 주도하는 군사정권이, 실패한 경제정책으로부터 국민의 눈을 돌리기 위해, 1982년 4월 2일,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하자, 영국은 즉각 항공모함들을 파견하여 전투가 시작된다. 대처수상이 개전을 선언하자 각료와 우호국들이 교섭과 양보를 종용하지만 수상은 일체의 타협을 배제한다. 기어이 섬을 탈환해서 군사적 승리를 거두겠다고 나섰다. 대처가 말했다. “흔해빠진 독재자가 여왕의 백성을 지배하고, 부정과 폭력으로 승리를 거두게 버려둘 것인가? 내가 수상인 한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대처가 “철의 여인”의 긍지를 드러낸 것은 동맹국인 미국에 대해서였다. 20세기 초, 세계의 패권이 영국으로부터 미국으로 옮겨지고, 영국은 미국을 지탱하는 주니어 파트너가 되었지만, 대처는 의연한 자세로 미국을 대한 것이다. 당시 포클랜드의 인구는 약 1800만, 목축과 어업 말고는 주목할 만한 산업이 없는 터에, 레이건 미 대통령은 “얼음과 같이 차고 쓸모없는 땅”이라며 화해를 권했다. 그러나 대처는 대통령의 중재를 거부하는 편지를 쓴다. “침략자가 점령하고 있는 데도 전투를 피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큰 착오입니다. 그것이 잠재적 긴장지역이나, 작은 나라에 미치는 의미는 지극히 심각한 것입니다. 자유세계가 의지할 수 있는 근본적 원칙을 깨뜨려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영국으로 부터 1만 3000킬로 떨어져 있고, 항공모함을 파견하는데도 3주나 소요되는 남대서양에서의 전투에 무려 2만8000의 병력과 100척의 군함을 투입했다. 6월 14일 아르헨티나는 항복했다. 74일간에 걸친 전투에서 아군 255명, 적군 649명의 전사자를 내고. 그만한 손실을 치를 가치가 있었을까? <대처 회고록>은 말한다. “영국의 존재감이 작아짐으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경험은, 1956년 수에즈운하에서의 퇴패였다. 그것은 영국인의 혼에 스며들었다. 세계 속 영국의 지위에 관한 국민의 시선을 왜곡되게 해버렸다.” “전시이건 평시이건 영국은 자국의 이익을 지킬 의지와 능력이 없는 나라로 인정받게 되었다.” “수에즈위기는 영국사회를 갈라놓았고, 국민은 자신감을 잃고 내향적이 되었다. 젊은이들에게는 정치를 멸시하는 풍조가 생겼다. 베트남 전쟁이 미국을 내향적으로 만들어버린 ‘베트남 증후군’을 따라 ‘수에즈 증후군’이라 일컫게 되었다.”포트랜드전의 승리에 환호하는 국민에게 수상은 말했다. “우리는 퇴패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머리를 쳐들고 영국인임을 자랑합시다.” 미국의 뉴스위크지(1982년 4월 19일자)는 “The Empire strikes Back”(제국이 역습했다.) 하고 썼고, 취임 1년 반에 23%이던 대처의 지지율은 하루 밤 사이에 그녀를 영웅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또 하나의 여인 엘리자베스여왕과의 관계는 한 동안 어색하고 서먹서먹했다. 계급이 다를 뿐만 아니라 개성도 달랐기에. 여왕은 대처에 대해서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의 업적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에 반해버렸다고 했다. 영국의 수상은 매주 한 번, 여왕과 회견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여왕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 제도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나마 영향을 끼칠 여지는 남아 있었다. 회견에는 아무도 동석하지 않고 그 내용은 절대로 드러내서는 안되었다. 대처는 11년에 걸쳐 매주 여왕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둘의 관계는 매스컴의 관심의 중심이었다. 만약 우리나라 정객이라면 몰래 녹음해서 SNS로 흘렸을 법도 하지만. 그녀와 영원한 이별을 고하면서 여왕은, 군주는 평민의 장례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전통을 깨는 것으로, 둘 사이의 불화설에 종지부를 찍었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10-13
  • 새 지도자들에게 바란다
    관심을 모은 한국교회 2016년 9월 총회가 막을 내렸다. 통합측은 전 총회장들이 총대들 앞에서 교권과 금권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회개하는 모습은 전 회원들의 진한 감동을 주었다.또한 기장총회에서는 예상을 뒤엎고 한신대 총장 서리 인준안을 부결시킴으로 교권에서 벗어나보려는 몸부림의 모습에서 새로운 희망의 새로운 싹을 볼 수 있었으며 감리교 선거도 과거와는 달리 큰 잡음 없이 끝난것도 성숙한 모습이라 볼 수 있다.이제 새로 선출된 지도자들에게 바란다.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삶의 근본정신이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초대 교회는 그 시대와 사회에 새로운 정신적 기풍을 불러일으킨 것을 볼 수 있다. 교회는 지역 사회 속에서 참된 삶의 이념과 정신을 불러 일으켜 주어야 한다. 민주 사회 안에서는 참된 삶의 이념과 경제를 발전시키고 과학을 아무리 발전시킨다 해도 정신적인 참된 기반이 없다면 다면 그것은 모래위의 집과 같을 것이다. 집을 지을 때 그 기초돌을 어디다 어떻게 놓느냐에 따라 집 모양이 정해지듯이 머릿돌을 바 로 놓아야 한다. 그 다음 축조 공사가 진행 되듯이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 안에 건설함에 있어서 교회 자체가 하나의 머릿돌로서 제자리에 제대로 놓였느냐에 따라서 이 사회에 하나님 나라를 바르게 확장 되어 질 것이다.이미 알려진 대로 우리 민족의 문화적 바탕은 종교였다. 고대에는 소위 민족 종교라는 사머니즘이 짙게 깔렸었다. 우리에게 있어 종교 문화는 곧 민족 문화요 민족 문화의 뿌리는 바로 종교였다. 우리 민족 문화는 종교의 토양 속에서 자라 왔다. 종교는 이렇게 우리 삶과 같이 했고 활력소 역할을 감당해 오기도 하였다그런데 이런 종교가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종교적 정신 풍토를 더욱 돈독히 유지하고 발전 시켜 민족 화합에 기여하고 나아가 인류의 공영에 이바지하기를 새로운 지도자들에게 바란다.교회 안에서 분열 작용이나 하고 지도자답지 못한 자가 아무리 좋은 언어를 구사해도 응답 이 없는 메아리에 불과 하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해서 창고에만 쌓아 두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꼭 필요한 수요인에게 공급해 주어야 되는 것 같이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역군이기를 소원 한다. 주님의 십자가는 장식으로 사용 되거나 묵상만 하고 찬양은 하면서도 막상 그 십자가를 져야 할 때가 오면 외면하는 지도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지도자들이 모이면 말은 풍성한데 어느 정치 단체나 사교 단체 같거나 어떤 사업 단체나 기업 같은 실망감을 안겨 주는 일이 더 이상 없게 되기를 소원 한다. 내 나라 내 사회 내 이웃 내 민족이 한데 어울리는 하나님나라 건설을 위해 이 땅에 부패와 부도덕을 쓸어내고 아름다운 사회 건설에 지도자들이기를 소원한다.끝으로 마땅히 지도자는 당연히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로 가슴을 무장하고 평안의 신을 신고 머리에는 구원의 투구를 쓰고 믿음의 방패와 성령의 검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 하게 가지는 것은 두 말할 필요 없다 그렇지 않으면 앞서 말한 모든 것이 이념 운동으로 전락 할 것이기 때문이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6-10-12
  • 마지노선의 이야기
    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 이었다. 병기로 등장한 기관총 때문이다. 병사들이 참호를 파거나 요새에 숨어서 총을 겨눈 채로 적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기이한 전쟁이 되었다. 당시 프랑스가 독일군의 대포를 막아낼 수 있었던 것도 근대적인 요새 덕분 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프랑스의 육군 장관 앙드레 마지노는 프랑스-독일 국경 사이에 설치한 기존의 요새를 획기적으로 보강하는 거대한 시멘트 장벽을 쌓자고 제안했다. 독일의 침략을 온전히 분쇄할 수 있을 거라는 주장 이었다. 그래서 쌓은 것이 길이 750km에 달하는 콘크리트 방벽의 마지노선 이었다. 서울-부산 길이의 2배가 넘는 엄청난 규모다. 공사 기간도 거의 10년이 걸린 당시로서는 세계적인 공사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마지노선을 따라 개인용 참호를 파고 중·장형 대포를 촘촘히 설치했다. 이후 독일군의 어떤 공격에도 안심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프랑스 전역에 팽배했다. 그러던 중 독일에 히틀러가 등장하여 서서히 전쟁의 기운이 감돌았지만 프랑스는 병력을 예비군으로 돌릴 정도로 여유 만만했다. 마지노선을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은 벨기에를 가로질러 마지노선을 우회하여 프랑스를 침공하였다. 프랑스는 힘 한번 쓰지 못하고 무너졌다. 모든 방어 전략이 마지노선을 중심으로 짜여 있었기 때문에 허둥대다가 무너진 것이다. 독일군은 프랑스가 그토록 자신만만해 하던 마지노선의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여기서 ‘마지노선의 법칙’ 이 생겨났다. 마지노선은 허물진 않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 견고한 방어선은 심리적 무장을 부른다는 것이다(이 영직. 마지노선의 법칙 41쪽). 다른 하나는 중국 진나라의 이야기이다. 전국시대의 혼란을 평정한 진나라 시황은 영원한 제국을 꿈꿨다. 중국은 통일했으나 북방 유민족인 흉노족이 마음에 걸렸다. 유목민들은 초원에 먹을 것이 부족해지면 어김없이 농경사회를 침략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안의 씨앗을 없애기 위해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았다. 이어 주나라의 군현제를 폐지하고 강력한 중앙집권 제도를 확립했다. 이에 유생들의 불만이 터지기 시작했다. 유생들은 공자, 맹자 등 유가 사상에 근간을 두는 덕치를 펼칠 것을 주장했다. 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높아지자 진시황은 유생 460명을 잡아들여 생으로 매장하고 고서들을 불태웠다. 그것으로 내외의 불안요소를 모두 제거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만리장성을 쌓느라 국력은 소진되었고 국고는 비어갔다. 결국 진나라는 건국 143년 중국 통일 후 15년 진시황 사후 3년을 넘기지 못하고 내부로부터 무너져 내렸다. 외적을 막으려던 만리장성이 오히려 내부의 적을 만들어낸 격이 되고 말았다(이 영직 수도가 견고하면 나라가 위태롭다 42쪽). 이 같이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만들어 낸 안전 보장책이라는 것은 언제나 인간에게 완전한 안정을 보장해 주지 못하고 결국 그 한계를 들어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가나안의 여리고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성경을 보면 철옹성 같은 요새를 지어 놓고 안전하다고 믿었던 여리고 성의 주민들은 그야말로 그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난공불락의 견고한 성을 지어 놓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대적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성을 치셨을 때 견고한 줄로 믿었던 성은 너무도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수 6:20, 21). 또 하나는 핵의 이야기이다. 가장 확실한 세계 평화와 인류 안전의 수단이랍시고 고안한 핵무기는 어떠할까? 사람들은 핵무기를 만들면 이 핵무기가 있는 한 인류는 더 이상 섣불리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까? 아니다. 핵무기와 상관없이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났으며 오히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스러운 요인들 중에 하나가 되고 말았다. 고로 오늘 날 국내외의 지도자들은 핵문제에 대하여 깊이 고민을 해야 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미·소간에 냉전이 시작될 무렵 소련의 후르시초프 서기장은 쿠바에 핵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말하자면 미국의 턱 밑에 핵 군사 기지를 설치함으로써 미국을 위협함과 동시에 자신의 위상을 강화하려 한 것이다. 물론 이는 세계 공산화를 위한 일환이기도 한 것으로 미국은 물론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심각한 위기 속에서 케네디 대통령은 세계 지도를 앞에 놓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한다. ‘이 위기로 인하여 최대의 희생을 지불하게 되는 것은 전 세계의 어린이들이다. 그들은 이 시대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없으면서 모든 것을 잃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때 만일 그 계획이 성사 되었더라면 인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데 북한의 철없는 김정은은 핵을 가지고 날마다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의 지혜나 능력이나 과학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돈을 마지노선으로 삼지 말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결코 요동함이 없는 진정한 안전을 보장받게 될 것이다(잠 29:25).
    • 칼럼
    • 목회자
    201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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