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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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내 형제에게 명해서, 유산을 나와 나누라고 해주십시오.” 하며 다가오는 이에게 예수는 말한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분배인으로 세웠느냐?” 그리고 돌아서서 사람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눅 12장 13절 이하).”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2부에서 말했다. “자신의 정의로움을 과시하기 위해 많은 말을 하는 자라면 누구든지 믿지 마라!...그리고 그들이 착하고 의로운 자임을 자칭할 때 잊지 말라. 그들이 바리새인이 되는데 있어서 모자라는 것은 다만 권력뿐이라는 사실을!”
예수 어록의 패러디 같다. <누가의 복음서> 12장 첫 머리를 아울러 읽어준다면 말이다. “너희는 바리새파 사람의 누룩 곧 위선을 경계하여라. 가려 놓은 것이라고 해도 벗겨지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 놓은 것이라 해도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것들을 사람들이 밝은 데서 들을 것이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그것을 사람들이 지붕 위에서 선포할 것이다.”
니체는 신종 바리새파 사람의 꽁무니에 감추어진 권력욕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는데 이골이 나있는 당사자들은 자신의 꽁무니를 살펴볼 여유가 없다. 힘과 돈을 가지지 못한 약자만이 정의이고 강자는 부정이라는 단순한 주장은 따지고 보면 힘을 가지지 못한 이들에 대한 모욕적 발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애써 고개를 돌려버린다. 어떤 약자에게도 자존심이 있고 삶에 대한 의욕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차라투스트라> 2부 ‘구제에 대해서’ 참조)
단 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있는 사회는 복지국가가 될 수 없다며 기염을 토하는 이들, 있을 수 있는 여러 전제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는 이들의 히스테릭한 목소리에 지쳐버린 오늘, 니체의 목소리를 다시 한 번 음미해 보고 싶어진다.  
니체는 나름의 독설을 내뱉는다. “여러분 평등의 설교자들이여!...독재자적 광기가 여러분 속에서 ‘평등’을 요구하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다...그들이 말하고 있는 불평 하나하나에서 복수의 가락이 들려온다. 그들이 제공하는 찬사 하나 하나에는 사람을 해치고자 하는 의도가 감추어져 있다. 그들은 타자를 재단하는 인간이라는 것이 더 없는 행복으로 여겨지고 있는가 싶다.”
진정한 복지는 시혜도 은혜도 아닐 것이다. 곤경에 처한 이들이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는 동기와 의욕을 가지도록 도와주는 일이야 말로 가장 요긴한 복지가 아니겠는가. 겉으로 드러나는 동정이나 물질적 보호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악조건에 처해진 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자신이 져야 할 일부의 책임과 성격상의 결함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내성의 자세로 스스로를 가다듬을 여유를 가질 수 있어야한다는 말이다. 모두를 세상 탓으로 돌리며 “그래서 나는 불행하다” 하는 한 참다운 용기는 생겨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세상을 원망하는 실패자를 무수히 보아왔다. 못지않게 자신의 진정한 능력마저 알아차리지 못하고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어버린 성공자들 또한 많이 보아왔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서 말한다. “주사위를 던져 행운을 잡고서는 ‘왔다!’ 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수치심을 느끼는 인간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이 아니겠는가?” “혹 내가 부정한 내기를 한 것이 아닐까” 하고, 한 발 물러서서 스스로 의문을 품어보는 자야말로 차라투스트라가 이상형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우리 사회에 제도상의 불비가 많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이나 삶의 보람까지도 상실하게 하는 무차별적이고 일률적인 평등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다. 그것은 또 하나의 정의를 상실하게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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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의 자신감을 일그러지게 하는 언동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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