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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완벽’(完璧)과 얽히고 설킨 이야기
    <사기(史記)> <인상여열전(藺相如列傳)>에 나오는 이야기. 전국시대 말기 조(趙)의 혜문왕(惠文王)이 천하제일의 구슬로 알려진 화씨벽(和氏璧)을 소유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진(秦)의 소양왕(昭襄王))이 성(城) 열다섯과 맞바꾸자고 청해 왔다. 구슬을 받아 쥐면 성은 내주지 않을 것이란 속셈을 눈치 챈 조에서는 중신 회의를 열었고, 목현(木賢)의 추천으로 인상여(藺相如)가 사신으로 나선다. 구슬을 건네받은 소양왕은 몹시 기뻐하면서도 정작 내어줄 성에 대해서는 내색도 하지 않았다. 사신이 입을 열었다. “그 구슬에는 티가 있습니다. 신이 그것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하고 구슬을 손에 되받아드는 순간 뒤로 물러서면서 왕에게 말했다. “조나라에서는 진나라를 의심하고 구슬을 주지 않으려 했습니다만, 신이 굳이 진과 같은 대국이 신의를 지키지 않을 리 없다고 우겨서 구슬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런데 대왕께선 성을 내주실 생각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고로 신은 다시 구슬을 가져가겠습니다. 대왕께서 구슬을 강요하신다면 신의 머리는 이 구슬과 함께 기둥에 부딪칠 것입니다.” 그제야 왕은 지도를 펴놓고 땅을 내주라고 말한다. 꾸며낸 짓거리임을 아는 사신은 구실을 만들어 구슬을 들고 숙소로 돌아온다. 날이 새기 전 몰래 수행원에게 들려 돌려 보내버렸다. 진왕은 속은 것이 분하지만, 대국으로서의 체면 때문에, ‘인상여’를 후히 대접해서 돌려보냈다는 이야기. 진나라는 구슬 보다 더 귀한 인재를 가졌기에 “완벽(完璧)”이라 일컬어지는 구슬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런고로 “완벽”은 흠이 없는 구슬이란 뜻도 되고, 구슬을 온전히 보존한다는 뜻도 된다. 다음 이야기는 한비자(韓非子)의 화씨편(和氏篇)에서... 변화(和)는 초(楚)나라 구슬감정인. 어느 날 산에서 귀한 보석이 될 원석을 얻어 여왕(王)에게 바친다. 옥을 맡고 있는 이에게 감정을 하게 했더니, “그냥 돌에 불과하다”는 것. 화가 난 왕은 거짓말쟁이라면서 화의 왼발을 잘라버렸다. 여왕이 죽자, ‘화’는 원석을 무왕(武王)에게 헌상했다. 왕은 다시 그를 거짓말쟁이로 다스려 오른 발을 잘라버렸다. 무왕이 죽고 문왕(文王)이 즉위하지만, 이제 ‘화’는 진상하지 않는 대신, 품에 원석을 안고 초산 기슭에서 삼일 밤낮을 통곡하는 것이었다. 눈물이 말라버리자 피를 흘렸다. 소식을 들은 문왕이 그 연유를 물었다. “천하에 발을 잘린 사람은 많지 않는가. 그런데 너는 왜 그리 슬피 우는가?” “발이 잘린 것이 슬퍼서가 아닙니다. 보석을 돌이라 하고, 나처럼 정직한자를 거짓말쟁이로 인정하는 것이 슬플 뿐입니다.”왕은 옥을 다듬는 사람을 시켜 원석에서 귀한 보석을 얻었다. “화씨의 벽(壁=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세월이 흐르면서 완벽(完璧)이란 이름이 더해진 그 구슬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쯤해서 한비자의 평가에 귀를 기울여 보자. “구슬은 군주가 탐을 내는 것. 그렇다고 구슬감정가 ‘화’가 헌상한 원석이 설사 아름답지 못하다 하더라도 군주에게는 적어도 해는 끼치지 않을 것인데도, 두 왕은 성급하게 ‘화’의 두 발을 잘라버렸다. 그런 다음에야 그 돌이 아주 귀한 보석이란 것을 알게 된다. 보석을 분별하는 것은 이렇게도 어려운 일이다.” 옥석(玉石)을 가리기가 그래서 어렵다는 것일까. ‘화’가 진상한 원석에서 아름다운 구슬을 얻어낸 후, 그 원석이 그냥 돌일 뿐이라 감정했던 전문가는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 만약 그가 한비가 말하는 법술(法術)이나 중인(重人)라면 문책은 면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한비는 “법술(法術)의 사(士)”란, 사람들이 숨기고 있는 일과 나쁜 짓을 바로 잡을 역할을 다해야한다고 했다. 한편 “중인(重人)”이란 주군의 명령 없이도 제멋대로 행동하고 사복을 채우면서도, 더하여 군주를 자기편에 끌어드리는 힘을 가진 자로 규정했다. 한비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 군주가 ‘법술’을 대하는 것을 보면, 아직은 ‘화씨의 구슬’을 구할 만큼 절실하지는 않는 것 같고, 신하들과 백성의 악을 금단하는 일도 ‘화’를 벌한 것만큼은 엄격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원석을 잘못 감정한 ‘법술의 사’가 사형에 처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제왕에게 헌상할 원석을 품고 있을 뿐 아직도 왕에게 바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9-08
  • 작은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와의 전쟁에서 패전한 이야기이다. 어느 날 그는 중요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각 부대에 집결 명령을 내렸다. 모든 부대들이 모여 공격 준비 태세를 갖추었다. 그런데 한 부대가 오지 않아 공격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한 기병대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승기를 잃은 나폴레옹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이에 그 원인을 규명하라고 명령했다. 자초지종을 조사한 결과 기병대가 늦게 도착한 것은 1개 중대가 늦게 온 때문이요. 그 중대가 늦게 온 것은 1개 소대가 늦게 온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소대가 늦어진 것은 한 병사가 탄 말의 발굽에서 편자 못 하나가 빠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무패를 자랑하던 나폴레옹의 패전은 바로 자그마한 못 하나를 소홀히 한 실수가 국가의 운명을 그르친 큰 회한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생각해 보자. 우리 개인의 삶에서도 무심코 지나친 ‘작은 일’ 하나 때문에 큰 낭패를 보거나 뼈아픈 패배를 당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았던가? 실로 성공과 실패의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내는 일들도 막상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하잘 것 없는 사소한 것 한두 가지 때문인 경우가 많다. ‘저수지의 방죽도 개미구멍으로 무너지고, 마라톤 선수를 더 이상 달려가지 못하도록 주저 않게 하는 것도 운동화 속에 들어간 작은 모래알 하나 때문이다’ 라고 한다. 결국 작은 것 하나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높은 자리를 원하고 큰일을 하고 싶어한다. 대통령이 되는 것, 대권, 대자 붙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작은 일에 충실하면 큰일은 자연히 이루어진다. 작은 일을 중시하고 작은 일을 세심하게 처리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성공은 바로 매일 매일의 노력이 쌓여 계속 발전해 가는 과정이며 그 어떤 요행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로 한 뼘 차이는 사소해 보이지만 그것이 바로 인생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다. 이러한 사실은 큰 교훈을 준다. 우리는 큰 일 만을 위대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큰일에 감동하고 큰일만이 칭찬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큰일을 하겠다는 마음이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큰 일만 생각하고 작은 일을 하찮게 여기는 태도이다. 하지만 작고 지극히 하찮은 일을 경홀히 여기는 사람이 큰일을 잘할 수가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런 사람은 자기 앞가림도 못 한다. 고로 큰일을 하려면 작은 일부터 귀하게 여기고 그 일이 맡겨졌을 때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한다. 즉 남이 보지 않는 일 남이 알아주지 않는 일 남이 우습게 여기는 일도 귀하게 보고 최선을 다해 완수하는 그 사람이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을 수 있다.실례로 성경의 인물 다윗 왕을 보자. 그는 군사학교나 정치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내 하나님께 소명을 받지 않았다. 성경은 양 우리에서 젖양을 지키는 중에서 취하여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다고 한다(시78:70, 71). 그러면 그가 양 우리에서 어떻게 충성 했을까? 그는 형들이 다 사무엘의 잔치에 초청을 받아 갈 때에도 끝까지 남아 양들을 지켰다(삼상 16:11).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치 신데렐라 이야기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충성했다. 원망이나 불평 없이 자기의 일을 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그에 대해 당신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셨다(행 13:22). 또 그가 나중에 사울 왕 앞에서 고백 할 때 ‘사자와 곰이 와서 양 새끼를 움키면 겁을 내지 않고 끝까지 가서 찾아왔다’고 했다(삼상 17:34, 35). 이 얼마나 책임감이 강한 모습인가?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거대한 양떼를 맡기셨다. 또한 베드로와 요한도 작은 일에 충성한 결과 후일 그들에게 교회라는 양 떼를 맡기셨다(요 21:15~17). 그렇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지극히 작고 하찮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에게 큰 것으로 맡기신다. 또 그런 사람만이 크고 위대한 일도 능히 감당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도 지금 당장 크고 위대한 일을 찾기보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소한 일에 최선을 다해 충성해야 한다(눅 16:10). 사람들의 눈에 띄는 큰일에만 충성하려하지 말고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작은 일을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일부터 습관화해야 한다. 즉 작은 칭찬, 작은 양보, 작은 감사, 작은 사랑, 작은 의를 실천하는 반면 아주 미미한 죄는 무섭게 여기고 피해야 하며 아주 작은 죄를 범했어도 신속하게 회개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작은 죄를 경시하는 사람은 후에 큰 죄도 두려워하지 않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충성의 기회를 낭비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도 거두시고 또 우리의 간구와 기도도 들어주시지 않는 불행의 때가 오기 때문이다. 실제 우리 주변에는 한 때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가 충만하였다가 그 은혜와 은사를 낭비하고 상실한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건강을 잃거나 노년이 접어들어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때가 이르기 전 아직 젊을 때, 건강할 때, 은사와 은혜가 충만 할 때가 곧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는 기회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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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
    2016-09-08
  • (경현수)좋은 이름
    좋은 이름 엄 기 원좋은 이름“아버지”그 이름만으로도우리 가족에겐하늘이다.우리는 날개를 펴고마음대로 날 수 있는 새들이다“어머니”그 이름만으로도우리 가족에겐보금자리다우리는 날개를 접고포근히 잠들 수 있는 새들이다. 인간은 불완전하며 또 연약한 존재다.그러나 창조주의 무한한 섭리 안에서 살아가며 그 존재(存在)의 의미를 찾게 된다.내가 불러보는 좋은 이름은 무엇일까, 꽃 , 새 , 강아지 , 친구, 가족…내 안에 있는 많은 아름답고 소중한 이름을 부를 때 비로소 나의 존재감이 더욱 커지지 않을까, 무한대로 비상할 수 있는 넓은 우주와 같은 아버지, 그 품안에서는 무엇이든지 넉넉하고 어떤것에서든지 가능하다, 두려움도 걱정 근심도 없다.이름 한 번 불러 보는 것만으로도 아버지는 존재의 근원이라는 놀라운 비의(秘義)를 알게 된다. “어머니” 그 이름을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쉼터에 도달해서 쉬는 일이다.이리저리 달리기도하고 찢어지고 넘어지고 상처가 있을지라도 그 이름만으로도 치유된다.평온과 기쁨 위로가 있는 곳은 어머니 품이다.보금자리는 지친 날개를 접고 편히 쉬는 곳,가장 창조적인 일을 위해서 지어진 이름….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의 영원한 이름이다.
    • 칼럼
    • 기독시선
    2016-09-01
  • 리우 올림픽과 스포츠 선교
    리우 올림픽의 상징은 아무래도 산위에 버티고 서 있는 예수님상 이었다. 리우 항구를 내려다보고 있는 예수님상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신앙의 중심이 왜 예수님이신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특히 기독교 선교를 허락하지 않고 있는 북한의 최고위층 중의 한사람인 최룡해도 그곳을 방문 하였다고 하니 예수님상은 관광명소와 함께 종교적인 권위를 충분히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포츠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인간에게 기쁨을 주고 있다. 그리고 인종과 종교와 사상을 뛰어 넘어 하나의 공속체를 이루기도 한다. 사전적 의미에서 스포츠를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스포츠의 어원은 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이어서 프랑스 어로 사용되었다. 본래는 disport라 했으나, 영어로 바뀌면서부터 di가 없어지고 sport가 되었다. 원어에서 dis라는 것은 ‘분리(分離)’의 뜻을 나타내는 접두어로 away에 해당하며, port는 ‘나르다(carry)’의 뜻이었다. 따라서 disport는 carry away라는 뜻으로, 즉 ‘자기의 본래의 일에서 마음을 다른 곳으로 나른다는 것’, 다시 말하면 ‘일에 지쳤을 때에 기분을 전환하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는 것’, ‘생활의 성실한, 또는 슬픈 장면을 떠나서 기분 전환을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스포츠는 심한 육체활동이나 연습의 요소도 포함하는 말이다. 현대의 스포츠는 경기규칙에 따라 승패를 겨루는 신체적 활동이지만, 여기에 참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활동의 강약도에 따라 레크리에이션 또는 유희로 부를 수도 있다. 대개 신체의 육성을 목적으로 하는 신체활동을 체육이라고 하는데, 체육과 스포츠를 명확히 구분해서 말하기는 어렵다. 스포츠가 국제적으로 보급되고, 연구에 있어서의 국제적 교류도 활발해지자 그 개념을 국제적으로 통일할 필요가 생겼다. 또한 통일되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스포츠를 아곤적(Agon 的) 성격의 운동, 또는 경쟁·투기로서 하는 운동이라고 하는 사고 방식이 일반화되고 있다. 아곤(Agon)은 플레이의 한 범주이며, 그 원동력은 어떤 분야에서 자기의 우수함을 타인에게 인정 받고자 하는 욕망·욕구이다. 그것을 실증하기 위하여는 평등한 조건으로 자력(自力)에만 의지하여 다른 개인이나 팀과 경쟁하거나, 자연의 장애에 도전하여 이것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경쟁 또는 투기로서 하는 운동이 스포츠이다. 이상과 같이 여러 가지로 시도된 정의에 대해 살펴보면 그 표현 방법은 달라도 기본적 입장은 대체로 같다. 일례를 들면, ISPE(국제 스포츠 체육협의회)의 ‘스포츠 선언’에서는 ‘플레이의 성격을 갖고, 그리고 자기 또는 타인과의 경쟁, 혹은 자연의 장애와의 대결을 포함하는 운동은 모두 스포츠이다’라고 되어 있다.이번 리우 올림픽에서 양궁 금메달의 주인공인 장예진양은 금메달의 기쁨을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멘트를 우리에게 남겼다. 필자는 장예진 양이 자신의 신앙을 숨길만도 한 중요한 자리에서 믿음을 강하게 표현한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사이트를 통해서 얻은 그녀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올해 30세로서 초등학교4학년 양궁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대학교 4학년때 첫 태극마크를 달았지만 2012년 런던올림픽 때는 대표후보선수 4명에 포함됐다가 막판 탈락의 비운을 맞았다. 그러나 2014년 첫 금메달을 따고 이름을 알리게 되었으며, 2016년 올림픽 선발전 때에 강채영 선수와 피 말리는 접전 끝에 올림픽대표선수로 선발되었다. 이렇게 어렵게 출전한 그녀지만 하나님의 도움으로 중요한 승부처에서 금메달을 취득할 수 있었다. 언론에 의하면 장예진 양은 수없이 많은 난관을 의지로 극복했다고 한다. 그러한 인간 승리가 기대하지도 않았던 선수에게서 금메달을 따게 되었음을 보게 된다. 리우 올림픽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교훈을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의 삶은 경주와도 같다. 수없이 많은 난관을 극복해야한다. 마치 ‘철로 역정’에 나오는 순례자처럼 각종 시험을 이겨야 할 성도들이다. 언제 부터인가 교회는 세속화의 파고에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고난의 십자가 대신에 명예와 돈과 그리고 세상의 향락 그리고 심지어 도박과 같은 병들이 교회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 한국교회는 선교의 동력을 활용하여 세속화의 물결을 극복하고 승리해야 하겠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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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16-09-01
  • 지금 톨스토이의 ‘주인과 하인’을 읽는 것은
    톨스토이의 작품을 ‘다이제스트’하기는 불가능하다고들 말한다. 그럼에도 본란이 그 무모한 짓을 시도하려한다. 그것도 아주 거칠게.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만년이 된 톨스토이가 고리키에게 말했다. “인간은 생각하기를 익히게 되면, 어떤 일을 생각할 경우에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네...그러나 만약에 죽음이 오고 있다면 도대체 무슨 진리가 있다는 말일까”소설 <주인과 하인>은 죽음이 삶의 가장 큰 스승임을 보여준다. 쫓기듯 무언가를 추구하는 짓은 삶의 본질을 외면한 허망한 열정일 수도 있다고 일깨워준다. “적잖은 재산을 모은 여관 주인 바실리는 야비한 수단으로 하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가난한 사람에게 기회와 은혜를 베풀고 있노라 확신했다. 하인 니키타는 그러는 주인에게 따져 볼 배짱도 없이, 주는 대로 받으며 묵묵히 살아가는 위인. 주인 바실리가 숲을 사겠다고 겨울 눈보라를 무릅쓰고 썰매를 몰고 나섰다. 다른 사람이 사버릴까 봐 모험을 강행한 것이다. 심한 눈보라가 이정표는커녕 길을 파묻어버렸는데도. 하인 니키타는 그럴 때 일수록 입을 다물고 있어야한다는 것을 터득하고 있는 터였고. 한 마을에 들어선 바실리와 니키타는 농부의 집에서 휴식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눈보라가 그칠 때까지 하루를 묵어갈 여유가 바실리에게는 없다. 돈을 위해서만 일생을 받쳐온 바실리에게는 망설임이 있을 수 없었다. 내키지 않는 니키타는 운명이거니 달래며 따라나설 밖에.그러나 눈바람이 지친 말을 연달아 낭떠러지로 몰아가자, 니키타는 눈에 파묻혀 죽는 한이 있어도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판단하고 거기에 멈추기로 작정한다. 오로지 돈을 위해서 살아온 그가 코앞에 돈을 두고 잠을 잘 수는 없는 노릇. 하찮은 니키타가 죽는다고 눈 하나 깜짝할 소냐. 털외투를 껴입은 바실리는 혼자 말을 몰고 나아간다. 뒤에 쳐진 니키타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썰매 안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하다 점차 의식을 잃어간다. 방향을 잃은 채 혼자 말을 몰던 바실리도 마침내 공포에 휩싸인다. 하잘것없던 니키타의 부재가 이런 공포를 가져다 줄 줄이야. 눈보라와 싸우며 간신히 니키타를 버리고 떠났던 그 자리로 되돌아온다. 극심한 공포 속에서 뭉클한 무엇인가를 체험한 바실리, 그는 말에서 내려 죽어가는 니키타를 안아 일으킨다. 얼어붙은 눈을 떼어 내고 가만히 자신의 체온으로 그의 몸을 데워준다. 뭔가 말을 해보려 하지만 눈물이 흐르고 턱이 떨려 미처 말이 되어주지 않는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기쁨을 느끼면서 속으로만 되뇌었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니키타의 몸을 감싸 안은 자신의 몸도 얼어들지만 대수가 아니었다. 이 미련한 하인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알 수 없는 기쁨이 “니키타가 살아 있으니 내가 살아 있다”는 환희로 이어진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그것, 삶의 본질을, 지난날에는 알지 못했다는 것도 깨닫는다. 마지막으로 바실리는 니키타 없이는 자신만만하기만 했던 자신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낮이 되어 인근 마을 사람들이 눈에 파묻혀 얼어붙은 바실리와 니키타를 발견했을 때, 바실리는 이미 숨져 있었고, 니키타에게는 가냘픈 숨이 남아 있었다. 자신의 몸으로 니키다를 살려낸 그 모습이 마을 사람들이 기억하는 바실리의 마지막 모습이 된 것이다. 그렇게 살아난 니키타는 하인과 문지기를 이어가며 20년을 더 산다. 죽기 전에 아내에게 용서를 빌고, 결코 용서할 수 없었던 아내의 과거를 용서한다. 자식과 손자들에게도 미안하다는 말을 남긴다. 한 달 넘게 폭염에 시달리노라, 눈보라의 환영을 본 것이 아니다. 언론마다에 넘쳐나는 우리의 답답한 이야기들이 그렇게 한 것이다. <주인과 하인>(1895년)에서 톨스토이는 말한다. “하인 니키타를 데워주면서 죽어가는 주인공 브레후노프(=거짓말쟁이)에게 있어서, 자신은 곧 니키타이고, 니키타는 자신이었다. ”니키타는 살아있다. 그래서 나도 살아있다. “ 하고 생각하는 바실리는 말한다. “이제 나는 자유하다. 나를 거스르는 아무것도 없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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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6-09-01
  • 그리스도인과 우상 숭배
    오늘 날 우리나라 각처에는 단군상, 제사, 불상, 마을 어귀에 우뚝 솟은 장승 등이 많이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 보이는 형상에 음식을 차려놓고 절하는 모습이 우상 숭배의 모습으로 매우 민첩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우상 숭배란 사람이나 그 밖의 것들을 형상화한 대상에 예배하는 것을 우상 숭배(idolatry)라고 말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상 숭배에 대한 관한 좁은 의미의 정의에 불과하다. 성경이 말하는 우상 숭배는 어떤 특정한 형태를 가진 물체를 섬기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고 더 근원적인 마음의 태도를 우상 숭배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우상 숭배란 하나님보다 높아지는 것이 마음에 있는 상태를 우상 숭배라고 말하고 있다. 즉 자녀나, 배우자나, 명예나, 돈이나, 권력이나, 사상이나, 자연물이나,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그것이 우상 이라는 말이다. 왜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할까? 인간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만을 채우려는 ‘탐심’ 때문이다(엡 5:5, 골 3:5). 탐심은 어거스틴(Augustine)의 말대로 ‘충족하는 것보다 더 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고 주어진 것 이외의 것을 가지려고 온 마음을 쏟는 것이 바로 탐심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려고 불법적인 방법까지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탐심‘을 우상 숭배로 규정하고 있다. 실례로 오늘날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근래의 사건들 속에 성도들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를 자처하는 정치인들 가운데 표를 의식해서 이방 종교의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것은 우상을 승배하는 것과 같다. 우상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상의 배후에는 수없이 많은 우상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관한 관심이나 영광을 헛된 우상에게로 돌리게 하려는 사단과 귀신들이 있기 때문이다. 고로 우상 숭배는 사실상 사단과 귀신을 섬기는 것과 같다. 또한 우상 숭배의 현장에서 우상 제물을 나누는 것은 비록 제물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라 할지라도 실제적으로 귀신과 연합하는 의미가 있다(고전 12:20). 과거 유교적 전통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고 믿었고 인간의 화복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였다. 때문에 조상을 숭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번 죽은 사람은(히9:27) 더 이상 이 세상을 왕래를 하지 못하고 이 세상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사실 사람들이 조상신이라고 생각하는 영은 조상이 아니라 타락한 천사들이다. 이들이 곧 귀신이다. 고로 조상을 숭배하는 것은 사실상 조상신으로 가장한 악령 곧 타락한 천사들을 섬기는 행위이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조상 숭배를 한국인의 독특한 효 문화로 인정하고 허용 한다. 그것은 사단의 속임수이다. 성도들은 우리 조상이 살아계실 때 효를 다하고 돌아가신 후에라도 효라는 미명하에 귀신을 숭배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한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많은 성도들이 자기도 모르게 보이는 우상보다 보이지 않는 숭배에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스스로 많이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우상을 숭배하고 미신에 빠지는 자들이 많다. 박사 학위를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이 우상에게 가서 빌고 부적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기 때문이다(잠 1:7, 9:10).왜 우상숭배를 금해야 하는가? 첫째로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닌 피조물로써 부패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썩어질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사 44:18~22). 그런데 사람들은 우상이 자신들을 보호할 힘이 있다고 생각해 절하고 예물을 바친다. 한국만 보더라도 유교적 영향을 받아 조상신을 섬기는 제사나 희귀하게 생긴 돌, 오래된 나무, 맑은 샘물 큰 동상들이 화와 복을 주는 통로가 된다고 한다. 이러한 샤머니즘적인 우상뿐만 아니라 현대는 고도로 발달된 문명의 이기 아래 최첨단의 과학이 하나님을 제외시킨 또 다른 우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현대 매스컴 또한 우상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부추기는데 일조 하고 있다. 물론 문화를 소개한 목적일 수도 있지만 헛된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며 진노하시기 때문이다(사 42:8). 주님을 섬기면서 세상도 귀신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당신께 돌려야 할 영광과 찬송을 다른 존재에게 나누어 지는 것을 매우 싫어하신다.(출34:14, 신4:24) 실례로 구약 이스라엘백성들을 보자. 왜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을까?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폐한 일이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려 하였기 때문이다. 고로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과 겸하여 유무형의 우상을 숭배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상을 피해야 한다.
    • 칼럼
    • 목회자
    2016-09-01
  • (경현수)감자꽃
    감자꽃 임 인 진그 산 밑 모롱이 돌면열갈 물속보다 더 깊이엎드렸던 골짜기떨기마다 별무리로 일어서는새하얀 깃발들흙으로 다져 숨 쉬던올올(兀兀)한 소맘들이저린 가닥에 맺혀하늘하늘 피어오르는아릿한 향기그 밭머리 돌각담 돌아들면가슴 가득 고였던 눈물이소르르 녹아내린다한여름 산간 마을에는 아무도 없다. 산비탈에 비스듬히 누운 감자밭, 흰색과 보라색 감자꽃들이 뜨거운 햇살을 온 몸으로 받으며 피어난다. 열길 물속보다 더 깊은 산곡山谷…시인은 전설 속의 이야기를 도란 도란 듣고 있다.척박한 산간의 감자밭은 아무도 가꾸지 않아도 꽃은 피어나고 흙 속에서는 알알이 감자알이 영근다 소망과 결실의 꿈은 올올한 소망으로 자라고, 흰 꽃떨기들은 이내 별들과 무리지어 별 떨기가 되고, 감자꽃은 별이 되기도 하고 새하얀 깃발을 흔들며 또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일까.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이 아리게 저려 오기도 한다.그 정겨운 해후(邂逅), 얼마나 참고 견디었을까. 열길 물 속보다 더 깊이 고여있던 그리움이 .
    • 칼럼
    • 기독시선
    2016-08-18
  • 보석처럼 빛나는 선교적인 마음
    John W. Reed의 말에 의하면, 룻기는 칠흑 속에 뭍힌 아름다운 진주처럼 빛나는 보석 이라고 표현을 하였다. 룻기는 참으로 감동적인 스토리다. 이 이야기의 플로트(plot)는 비극에서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결국에는 해피앤딩(happy ending)으로 끝나게 된다. 이러한 해피앤딩의 스토리 속에 우리는 중요한 두 가지 어휘를 꼽는다면, “구속”과 “인애(헤세드)”이다. 여기에서 “인애(헤세드)는 믿을만한 사람에게 사랑과 인애를 베푸는 충심을 뜻하게 된다. 주인공인 룻은 모압여인 으로서 유대인인 남편이 죽은 후 그녀의 시모인 과부 나오미와 함께 이스라엘의 베들레헴 으로 이주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아래서 부유한 유대인의 농부인 보아스를 만나서 결혼 하게 되었고 먼 훗날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된 사람이다. 따라서 룻기는 ”룻“의 이름을 따서 ”룻기“로 명칭되었다. 이는 구약 성경에 ”에스더서“와 함께 유일하게 여인의 이름을 따서 기록된 말씀 이다.룻기는 총 4장 으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1장은 룻기 전체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나오미라는 한 여인이 남편과 함께 먹을 것을 찾아서 베들레헴 땅을 등지고 모압 땅에 갔으나 낮선 객지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며느리들을 집에서 돌려보내야 하는 비참한 현실이 묘사 되었다. 나오미는 이러한 상처를 안고 고향땅에 한쪽 며느리인 룻과 함께 쓸쓸한 귀향을 담고 있다.2장과 3장에는 룻과 훗일 남편이 되어 가계를 이어갈 보아스와의 관계에 대해서 기록되었다. 그들은 전원적인 풍경 가운데 이상적인 사랑이 싹트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리고 마지막 4장에는 그야말로 해피 앤딩으로 끝나는 룻의 상급이 나와 있다. 이렇게 볼 때에 룻기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 정도로만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참으로 중요한 신학적인 이슈가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보석처럼 빛나는 룻의 신앙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첫째는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알아야 하겠다. 나오미가 처한 형편은 참으로 비참했다. 그의 비참한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 하고 있다.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각각 너희의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맛 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룻 1:8-9)”이 얼마나 비참한 모습인가. 머나먼 이국땅에 먹을 것을 찾아 생존을 부지하려 왔지만 남편죽고, 두 아들마저 먼저 보내 버리는 비참한 모습을 상상해 보기 바란다. 그러나 이러한 나오미의 불행을 그대로 방치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며느리인 룻을 통해서 그 가정을 구렁텅이에서 건지어 내실뿐만 아니라 참으로 위대한 가계를 허락 하셨다. 룻기 4:13-15절에는 나오미의 나중형편이 어떤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제 한 가정을 완전히 회복 시켰고, 후일 이스라엘 왕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는 역할을 감당하였다.두 번째의 교훈은 사망을 인애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시다. 룻기에서의 또 하나의 중요한 신학적인 단어는 “헤세드(Kindness)”입니다. 나오미는 여호와 하나님께 그의 “헤세드”를 며느리들에게 나타내 달라고 간구 하고 있다. “... 여호와 께서 너희를 선대 하시기를 원하며...(1:8)”,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2;20)”, “가로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쫓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에 더하도다(3:10)” “헤세드”라는 말이 세 번 쓰여 졌는데 두 번은 나오미가 자신의 자부에게 한 말이고, 한 번은 보아스가 룻에게 한말이다. 하나님은 인애의 하나님 이시다. 그의 은혜는 우리에게 그의 사랑과 인애를 베풀어 주신다.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그의 거룩한 피로 사주셨다. 오늘 필자는 나오미와 그의 며느리인 룻과의 관계를 통해서 절망을 소망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사망을 인애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다. 선교는 이처럼 보석과 같은 마음을 가질 때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촉진시킬 수 있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6-08-18
  • 더위 먹은 천사론
    라파엘로(1483-1520)의 걸작 <시스티나의 성모>를 감상하노라면, 화폭 아래쪽에서 당돌한 모습으로 눈망울을 굴리고 있는 아기천사들의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니다. 이미 광고로 우리에게 친숙해지긴 했지만, 당장이라도 ‘포탈’에 <시스티나의 성모>를 입력해보시라. 녹색 커튼이 열리면서, 성 식스투스와 성 바르바라 사이, 성모자가 구름을 헤치고 나타나 있는 광경이 퍽이나 아름답다. 그러나 우리의 눈은 성모자를 쳐다보고 있는 아기천사의 모습에 멈추어지지 않을 수 없다. 난간에 손을 얹고 있는 쪽이나, 턱을 고인 채로 뭔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쪽이나, 곧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아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함부로 화살을 겨냥하는 큐피드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하는 아기천사의 장난기를 보며, 천사들이 이래도 되는가 하는 걱정이 들긴 하지만. 잠시 눈을 그림 위쪽으로 돌려보시라. 구름과 범벅이 되어있는 진짜(?)천사들의 모습을 수도 없이 볼 수 있을 터이니. 천사는 흔했다. 중세 이후 르네상스기 까지 서양의 그림이나 조각에서는 천사가 없는 작품을 골라내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그 천사들이 모두 어디로 가버렸느냐며 탄식하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마도 천사들이 화면을 벗어나 우리들 주변으로 내려와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망령된 생각을 해본다. “천사는 육체를 지녔다.” “아니다, 영적 존재다.”하는 주장들 사이에서 천사는 흔들리며 스스로의 역사를 엮어왔던 것 같다. 그러나 <시스티나의 성모> 아래쪽에서 장난기를 뿜고 있는 아기천사들처럼, 현실적으로 우리들 곁에 실재하는 천사들은, 신학적인 논의들과는 관계없이, 우리와 호흡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한숨을 곱씹기는 해도, “천사는 죽었다.”하고 단언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으니 말이다. 릴케의 시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는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는 천사들이 날개를 단 귀여운 어린이가 아니라, 중년의 남성들로 성장하여 등장하고 있다. 혹 <시스티나의 성모> 하단에서 눈망울을 부라리고 있던 아기천사들이 타락해서 이 땅에 떨어진 것은 아닐까 하고 짐작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약간의 배려를 더해서 “타락”이란 말 대신 “정착” 혹은 “귀화”라는 표현을 써주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영화에서 천사 다미엘이 스스로 이 땅에 귀화할 것을 결단한다. 밀턴의 <실낙원>의 루시퍼와는 또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다미엘은 영웅을 흉내내려하지 않는다. 그가 지상으로 떨어질 때, 천상에서는 필수품이었던 갑주가 함께 떨어진다. 다미엘은 그것을 고물상에 팔아 체크 무늬 점퍼를 사서 입는다. 떨어지며 입은 머리 상처의 붉은 피조차도 기쁨의 자료가 되어준다. 색이 없는 세계를 살아왔던 천사에게 선명한 원색이 갖는 의미를...지상에는 귀화해서 인간이 된 천사들이 꽤나 많단다. 그 중의 하나가 <형사 콜롬보>로 우리에게 친숙한 ‘피터 포크’. 이미 30년 전에 뉴욕에 정착했단다. 자신의 욕망을 동료 천사들에게 고백한 다미엘은 서커스에서 만난 마리온의 뒤를 좇아 그녀의 트레일러로 들어간다. 그녀는 천사를 볼 수 없지만, 천사는 그녀의 마음의 소리마저 들을 수 있다. 고독한 그녀가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는 것까지도. 이미 마리온은 다미엘이 불어넣어준 영을 지니게 된 것일까... 천사는 사람에게 영감을 주거나 고무할 수는 있다 하지 않는가. “사랑하고 싶다!”하고 그녀가 두 번 중얼거리자 화면은 흑백에서 천연색으로 변환한다. 영화의 중반, 삶에 지친 젊은이가 높은 빌딩 옥상에서 자살하려한다. 측은히 여긴 카시엘이 가만히 다가간다. 그럼에도 청년은 뛰어내리고 만다. 그 순간 카시엘은 통곡한다. 젊은이를 붙들어 줄 수는 없었을망정 그의 마음을 움직여 자살을 멈추게 할 수 는 있었을 지도 모르기 때문. 우리 곁에도 원래는 천사였는데, 이제는 대한민국에 적을 두고 있는 인사들이 적잖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들 중 하나에게 전화를 걸어 더위를 어떻게 나는지 물어보아야할 것 같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8-18
  • 하나님의 은혜
    어느 날 한 가난한 농부가 농사 자금을 얻기 위해 마을에 있는 은행을 찾아와 지점장실의 문을 노크했다. 지점장은 농부의 경제적 상태에 대해 꼼꼼히 조사한 후 이렇게 말했다.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이 있는데 어느 것부터 말씀 드릴까요?’ 이에 농부는 긴장하며 나쁜 소식부터 들어보겠다고 대답했다. 지점장이 유감스럽지만 담보로 할 만한 재산이 전혀 없기 때문에 대출을 해드리기가 어렵다고 말하자 농부는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안됐군요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지점장은 계속해서 더구나 선생님은 이미 부채가 너무 많아 어느 은행에 가도 대출을 받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농부는 그야말로 절망감으로 고개를 푹 숙이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러면 좋은 소식이란 대체 무엇인가요? 지점장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예. 그것은 아무리 그렇더라도 저는 선생님을 우리 은행의 VIP 고객으로 삼아 거래를 계속할 생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뜻일까.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던지 이렇게 천국백성으로 대접하신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조건 없이 ‘거저’ 은혜를 주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 지닌 의미는 무엇일까? 쉽게 말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호의다. 즉 전혀 그것을 받을 말한 가치가 없는 자에게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호의 곧 구원의 은혜를 말한다. 다음으로 구원 후에 베푸시는 보살핌, 즉 축복, 사랑, 관심, 연단 등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성도들에게 날마다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그런데 인간들은 실제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 할 때가 많다. 한 현명한 사람에게 풀기 어려운 질문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오래 전 폐허가 된 고대 건축물을 한참 동안 주시 한 후 담쟁이 넝쿨로 뒤덮인 무너진 벽 옆에 서 있었다. 그 때 의문이 생겼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빨리 노쇠해버리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이 가장 빨리 잊어버리고 가장 빨리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는 것은? 그것은 바로 감사하는 마음일 것이다. 가장 잘 잊혀지는 것은 감사하는 마음이다 라고 했다. 그런데 이 대답에는 아주 심오한 진리가 숨어 있다. 우리는 선물을 받자마자 그 즉시 선물 준이를 잊어버리는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매일 주어지는 자비에 대해서 감사하지 아니하는 정신은 오늘 내일 일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늘 그래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닫는 자가 되어야 한다.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풀어도 은혜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 고로 하나님의 영적인 깨달음을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 중에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너무도 많은 것 같다. 실례로 역경이 눈앞에 닥치면 하나님께 간절히 은혜를 간구하다가도 막상 고난이 지나면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노력이나, 지혜,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떠벌린다. 자녀의 입시를 눈앞에 두었을 땐 철야 기도도 마다 않고 하면서 입학만 하고 나면 자신의 자녀가 공부를 잘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거나 뒷바라지 덕분이라고 생각 한다. 또 가정에 불화가 생기거나 사랑하는 가족이 병들었을 때 주님께 간구하여 위험한 순간이 지나고 나면 자신의 노력이나 유능한 의사 덕분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는가 말이다. 고로 우리는 받은 은혜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한다. 독일의 훌륭한 정치가인 마티라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가난했던 젊은 시절 여행길에 올랐던 그는 시골 어느 여관에서 하루 밤을 묵었다. 그런데 이튼 날 일어나 보니 벗어 놓은 구두가 없어졌다. 마티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중얼거렸다. ‘세상에 훔쳐갈게 따로 있지 당장 신고 다니는 신발을 훔쳐가다니 하나님은 무심하시지 나 같은 가난뱅이의 신발을 가져가게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 때 한 청년이 낡은 구두를 한 켤레 빌려주면서 교회에 함께 나가자고 권유했다. 마티는 그의 성의를 거절하지 못하고 교회에 나가 맨 뒷줄 의자에 않았다. 그리고 무심코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는데 두 다리가 절단된 사람이 다소곳이 앉아 예배 드리는 모습이 보였다. 찬송을 부를 때도 뜨겁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불렀고 기도를 드릴 때도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기도를 쉬지 않고 드리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청년 마티의 가슴에 찡하게 와 닿는 감동과 함께 부끄러움이 일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나처럼 신발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두 다리를 전부 잃어버렸으니 신발이 있어도 신을 수 없겠구나, 신발이야 다시 사면 되지만... 그런데 어리석게도 나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었으니...’ 이렇게 뉘우친 마티의 인생은 그 순간부터 변화되기 시작했다 이제 그의 생활은 감사할 것을 찾는 감사의 생활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마침내 그를 독일 재무장관으로 세워 국가에 이바지 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 칼럼
    • 목회자
    201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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