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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스도인의 세상 살기
    3세기 라틴 교부의 한 사람인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T.C. Cyprianus)는 도나투스 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도나투스, 이 세상은 포도나무 그늘 아래의 나의 정원에서 본 것과 같은 이름다운 세상이지요. 그러나 만약 당신이 나와 같이 높은 산에 올라 거친 대지를 바라본다면 당신은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요. 노상강도, 바다의 해적, 군대의 싸움, 도시의 현란하고 방탕함, 원형 경기장에서 환호하는 관중을 기쁘게 하기 위해 벌어지고 있는 죽음의 결투, 자기 본위의 이기심, 잔인성, 화려한 지붕 아래 있는 고통과 절망들... 도나투스, 이 세상은 악이요,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악한 곳이요. 그렇다. 키프리아누스의 말처럼 인간의 소욕대로 이 세상은 얻을 것 많고 갖고 싶은 것 많은 아름다운 세상이다. 하지만 복음 안에서 말씀의 높은 산에 올라 세상을 바라본다면 세상은 사단의 지배아래 있는 악한 세상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헌데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상이라는 곳에 살고 있으며 세상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며 울고 웃으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세상이란? 세상의 본질은 두 가지 방향에서 볼 수 있다. 먼저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창조된 선한 창조물이며 하나님이 우리들로 하여금 누리도록 선물로 주셨다. 다음으로 세상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들의 다스림 가운데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반역하고 대항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늘 이 두 관점을 적절히 적용하며 살아야 한다. 만약 먼저 것에 관점을 둔다면 장미빛 에덴동산의 환상에 싸여 교회와 성도들을 향하여 달려드는 마귀와 세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핍박의 일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두 번째 관점만 가지고 살아간다면 늘 극단적인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악하다고 늘 불평하며 적대적인 태도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교회 밖의 모든 것 예컨대 하나님께서 인류 복지를 위해 일반 은총으로 주신 권력, 돈, 지식 등은 다 부정하고 더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합리적으로 처리하자고 말하면 곧 세상 지식을 앞세운다고 비난하며 세상의 통치자들은 모두 사단의 하수인이라고 말 한다. 또한 상품이나 증권이 거래되는 시장은 모두 도둑의 소굴이므로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곳에 가까이 해서도 안 되고 또 그러한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 한다. 그리고 세상과 평안히 지낼 수 있는 문제들에서도 괜한 충돌을 일으키며 세상에서 스스로 소외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구체적으로 생각하자. 먼저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악에 대한 기준이 달라야한다. 곧 세상 사람들은 사람의 눈을 기준으로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눈을 기준으로 살아가야한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악한 일을 해도 사람의 눈에만 드러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여 마음대로 행동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매사에 조심하고 거룩하게 살아야한다. 즉 세상 사람들이 악을 저지르고도 이를 속이고 감출 수 있다 하여 기뻐할 때 그리스도인은 적은 잘못과 실수에도 마음 아파하며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민족의 지도자 이상재 선생이 1911년 봄 일본 YMCA의 초청을 받고 일본에 간 일이 있었다. 일본의 속셈은 선생으로 하여금 독립 운동의 꿈을 버리게 하는데 있었다. 하지만 선생은 식사 후 총리대신 등 일본의 정치인들을 앞에 놓고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일본이 강대국이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할지 모르나 진짜 위대한 왕국과 왕은 따로 있습니다. 이 분은 한순간에 일본을 멸망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분을 두려워해야합니다. 그분은 바로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 이십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매사에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인은 선행에 대해서도 그 기준이 달라야한다. 곧 세상 사람들은 사람의 눈을 기준으로 하기에 사람들이 알아주는 한도에서만 선행을 하려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기에 어디서든 은밀하게 선행을 해야 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작은 선행이라도 사람들이 인정해 주면 기뻐하고 아무리 큰 선행이라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슬퍼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의 눈과 관계없이 일정한 모습으로 사명을 감당하며 하나님이 기뻐하는 선행을 계속해야 한다. 그러기에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사람의 옅은 눈을 기준으로 일희일비하는 얄팍한 삶을 살아갈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죄악 된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세상을 품고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복음을 전파하시며 적극적으로 선행을 행했던 것처럼 세상을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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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
    2016-07-21
  • (경현수)수박을 쪼개며
    수박을 쪼개며 -평화를 위한 기도시 안 혜 초수박 한 통을 반으로쪼개 그 반쪽을다시 또 반으로쪼개려다가 멈칫손놀림이 무거워 진다절로 또 하나님 소리가새어나온다, 가슴에서머리에서 뼈마디 마디에서무슨 일이 일어나지않게 하소서무슨 일이 일어나든두려워 말게 히시고다시는 이 땅이나지구촌 어디에서건피 흘리는 전쟁일랑발발치 않게 하소서싸워도 끝끝네입으로 싸우고가슴으로 머리로싸우게 하옵소서보다 큰 나와 너보다 큰 자유보다 큰 사랑을 위해보다 작은 것을비워 내게 하시고지켜야 할 것들은끝끝내 지킬 수 있게 하여주소서.여름철 무더위 속에 수박은 여름을 이겨내는 상징적 과일인 동시에 우리의 내재(內在)된 정서(情緖)이기도하다.시인은 평범한 일상의 사물적 개념을 새롭게 변용시켜 부제에서 그의미를 명명(命名)했듯이 <평화를 위한 기도시>로 환치(換置)시키고 있어 놀라운 감동을 주고있다.시가 좁은 안존의 테두리 머믈러 있지 않고 섀로운 우주적 목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이 시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염원이고 기도이기도 하다.시인은 더욱 간절히 그리고 겸허 하게 노래하고 있다.보다 큰 나와 너/ 보다 큰 자유/ 보다 큰 사랑을 위해/ 보다 작은 것을 /비워내게 하시고 시인은 수박 한 통의 시원하고 달콤한 즐거움 앞에서 되레 뼈마디 마디의 아픔을 노래하지않을 수 없는, 고뇌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 만 했다.이 어려운 현실을 누가 혼자 감당해낼 수 있을까 , 전쟁과 분단과 두려움….그러나 끝내는 더 큰 자유와 더 큰 사랑만이 절대적 가치로 다가올 미래를 기도하며 지켜나갈 것을 믿는다.비로소 우리는 시원하고 달콤한 수박을 두레상에 둘러앉아 함께 나누어 먹는 기쁨을 상상하며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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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시선
    2016-07-16
  • (경현수)산행 山行
    산행 山行 권 용 태길이 없다고산을 내려 오지 말라길이 보이지 않으면길을 열고 오라 산길이 열리면무거운 짐 내려놓고굴곡의 길 가지 말고곧은 길 따라어둡기 전에 내려오라더 오를 길 없거든그리움이 소진消盡되기 전에꽃 한 송이 들고 내려오라.삶은 언제나 산을 오르내리는 일이라고 비유한다.설레임으로 산행에 나선다. 앞 뒤 가늠하지 않고 산을 오르다 보면 낭떠러지와 바위를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새들이 지저귀는 수목, 숲을 지나고 능선을 타박타박 걷기도 하지만, 암벽에 이르러 자일을 던져 아슬 아슬한 줄에 매달려, 곡예를 하듯 산을 기어오르기도 한다.오도 가도 할 수 없는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순간에 맞닥뜨리기도 한다.시인은 길이 보이지 않으면 길을 열고 오라고 노래한다. 산길 열리기를 기도하는 시인의 간구(懇求)하는 행간을 읽게 한다. 산길이 열리면 적막과 고독, 위험과 무거운 짐 내려놓고 환하게 열린 산길, 나무와 숲도 아름답게 펼쳐있는 산...계곡의 맑은 물소리도 들으며 향기로운 꽃 한 송이도 들고... 내려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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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시선
    2016-07-08
  • 자리(Sito)
    <싯다르다(Siddhartha)>가 출판된 것은 1922년, 저자 헤르만 헤세(1877-1962)가 노벨문학상을 탄 것은 1946년. 그런데 미국을 중심으로 많은 젊은이들에게 <싯다르다>가 붐이 된 것은 1970년대였다. “카운터 컬처”로 일컬어지던 “스피리츄얼리즘”, “뉴에이지 운동”이 불붙으면서였다. “비트닉” 세대로부터 이어지던 “선”(禪)이나 “도교”(道敎)에 대한 관심이 서구중심의 세계관을 되돌아보게 하는 한편, 새로운 인류학의 한 갈래가 배경이 되고 있었단다. 그럴 즈음, 어깨를 겨누며 등장한 베스트셀러가 카를로스 카스타네다(Carlos Castaneda、1925-1998)의 <돈판의 가르침, Teachings of Don Juan 1968)이었다. 페루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작가요 인류학자로 알려지고 있는 카스타네다는 UCLA에서 문화인류학을 공부한 후, 야키 인디안 주술사 돈판 마투스 (카초라 기티메아 Cachora Guitimea)에게서 수행했다고 전한다. 책에는 주술사와 나눈 철학적 대화와, 약초로 의식의 변화를 체험한 이야기들이 르포르타주의 형식으로 그려지고 있다. 비서구적인 지혜는 독자들을 매혹해서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에 번져 나갔다. 중의 한 토막... “돈 판이 가스타네다에게 말한다. 나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거든 먼저 자신의 자리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는 내가 마룻바닥에 앉아 피곤해하고 있는 것 같으니, 지치지 않고 앉아있을 만한 ‘자리(Sito)’를 찾아내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그 때까지 무릎을 가슴에 대고 정강이를 안고 앉아 있던 나는 그 말로 등이 아프고 지쳐 있다는 것을 깨쳤다.” 가스타네다는 ‘약간 자리를 바꾸어 보면 어떨까’하는 제안쯤으로 이해하고, 바로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것은 가스다네다의 착각이었다. 돈 판은 가스타네다를 나무라면서 ‘자리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행복과 힘을 느끼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앉아 있는 곳이 그렇다면서, 가스타네다가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수수께끼를 내준 것이라고 덧붙였다. 가스타네타는 어리둥절해졌다. 티끌만치도 힌트는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있는 베란다는 3.6m×2.4m정도의 그리 넓지 않는 공간이기에 쉬 찾아질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자리’의 가능성은 무한한 것을. 돈판은 엄하게 충고했다. 이 문제를 풀지 못한다면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으니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모든 것이 자신의 세계에 주어진 것은 아니나, 배워야할 것은 빠짐없이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도 말했다. 한 시간 가량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자리의 다름을 느끼려고 마룻바닥을 두루 조심스럽게 옮겨다녀보지만, ‘그 다름을 분별할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참 만에, 두 손을 베개 삼아 덜렁 넘어졌다가는 잠시 동안 엎드려져보기도 했다. 벌렁 누었다 엎드려졌다하며 마룻바닥을 굴러다녔다. 비로소 막연하나마 문득 어떤 기준을 느낀 것 같게 된다...돈 판이 다시 나타나서,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니 찾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 했다. ‘눈이 올바르게 사물을 보고 있지 않을 때, 사람은 눈으로 느낄 수가 있는 것’이라며 덧붙여 일러주었다. 그로부터는 자리를 옮겨가며 시야에 나타나는 색상의 변화를 관찰했다.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거치며 모든 것이 헛되다고 느끼게 될 즈음에야, 한 곳에서 색상이 달라진 자리를 찾아낸 것이다. 거기에는 큰 바위가 있었다. 다른 자리에서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려고 천천히 뒤로 기어가서는 그 바위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돈판의 웃는 소리가 들렸다. ‘찾았군!’ 가스타네다가 누운 그 자리가 바로 그 ‘자리’였던 것이다. “ ....... 철늦게 <돈판의 가르침>을 들먹이게 되는 것은, 미처 맛보지 못하고 지나쳐버린 히피시대가 아쉽다거나 풍수설에 미련이 있어서도 아니다. ‘자리’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것은, 어쩐지 자리가 없어지고 있다는 안타까움, ‘자리’란 것을 잡고 있다고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처지임에도, 어쩐지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허전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범람하는 정보물결 탓이라며 짜증을 부리다가 딴은 얻어낸 ‘자리’인지도 모르고.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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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6-07-08
  • 신념의 사람보다 신앙의 사람이 되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상은 자기들 신념으로 살면서 믿음으로 사는 것처럼 신념과 신앙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가진 단순한 종교적 신념을 신앙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신념과 신앙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을 알아야한다. 신념과 신앙이 무엇인가? 신념은 자신이 가진 지식과 경험에 근거하여 스스로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얻어진다. 신념은 그릇된 사실에 근거 할 수 있다. 하지만 신앙은 절대 진리에 근거 한다. 그리고 신념은 결코 구원으로 인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신앙은 구원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신념은 사람으로 하여금 실패 없는 인생을 살게 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으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게 할 수 없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신념이 아니고 오직 신앙뿐이다. 실례를 보자. 고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한 김재규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이는 그가 얼마나 강한 신념을 가졌는지를 보여 주는 말이다. 헌데 그는 이 신념 때문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또 불굴의 의지로 세계를 정복함으로써 헬라 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도 전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다. 불굴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그의 사전에는 실패는 없었다. 그러나 신앙이 없던 그는 결국 구원받고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진정으로 성공적인 인생’ 은 살 수 없었다. 이렇듯 자기 신념에 대한 지나친 확신은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자기 신념을 버리고 신앙을 택한 사도 바울을 보자. 그는 주님의 소명을 받기 전에는 주님의 제자들을 잔해하는 자였다. 주를 대적하며 ‘핍박’ 하는 자였다. 즉 자신의 행위의 동기를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으로 생각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행위는 결코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의 성장 배경과 그가 받은 교육에서 비롯된 신념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주님을 다메섹에서 만남으로서 비로써 그의 신념을 과감하게 버리고 주님을 믿게 되었고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 고로 그리스도인들도 잘못된 신념을 버리고 참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한다. 자신의 작은 체험과 지식에 근거하여 자의적으로 어떠한 사실을 확신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령님의 조명하심을 받아 진리를 깨닫고 믿는 자가 되어야한다. 그래야 최후의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로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신념을 버리고 믿음으로 살아야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유일한 길과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오직 믿음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간적인 면모나 지식 혹은 사회적인 지위를 보지 않고 우리가 당신을 의지하고 당신의 약속을 확신하는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에 합당한 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특히 이 믿음이 요구하는 세 가지 덕목이 있다. 곧 그것은 아벨과 같이 하나님께 올바르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요.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을 하는 삶을 사는 것이요. 노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 땅에서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즉 예배, 동행, 실천 이라는 세 가지 삶의 양태를 요구하는 것이다. 고로 믿음이 있다는 것은 이 세 가지 삶의 모습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 있는 자의 기본적인 생활 태도며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견고히 세워야 할 자세이다. 이를 위해 끊임없이 우리의 자아를 죽이고 교만을 꺾고 게으름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 오래전 미국의 노스캐놀라이나 주에서 달려오던 한 유람 열차가 도개교 아래로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다리가 열리고 있을 때 열차가 그대로 돌진해 들어왔던 것. 이 사고로 열여덟 명의 승객이 목숨을 잃었다. 사고 장소에 있었던 기수는 분명히 붉은 기를 흔들었다고 주장했다. 다른 역무원들도 그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었다, 그렇다면 기관사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기관사의 주장은 기수의 그것과 정반대였다. ‘나는 그가 흰 기를 흔들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분명 흰 기였어요. 그래서 난 다리가 닫혀 있을 것을 확신하고 그대로 달렸던 것입니다’ 경찰은 기수에게 그 문제의 붉은 기를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사건은 그 즉시 해결되었다. 기수가 흔들었다는 깃발은 분명 붉은 기였다. 하지만 색이 바랜, 그래서 흰색이라는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 이었다. 이처럼 빛바랜 신호기가 참사를 가져왔듯이 우리의 믿음도 퇴색되어 가고 있지 않은지 늘 점검하고 누구보다도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며 주님께 무릎을 꿇는 겸손과 주님을 의지하는 성숙한 신앙을 가져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사단의 올무에 걸려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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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
    2016-07-08
  • 영혼의 웰빙
    요즘은 어느 때 보다 웰빙에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른 아침 새벽 기도를 마치고 가까운 산이나 공원을 가보면 나보다 일찍 운동하러온 사람들로 언제나 만원이다. 생활체육을 하는 팀이며 축구팀 또는 단호흡 파룬궁 신자들이 단체로 모여 기를 묵상하는 모습들은 한편 신선하게도 보였다. 모두가 웰빙 시대의 단면을 보게 된다.잠시 있다 사라질 육체의 건강을 위해 저렇게 이른 아침 공원에 나와 자기의 체질에 맞는 운동을 하는데 영원히 살아야 할 영혼을 위한 웰빙은 없을까?뒤로 걷는 분이며 뚱뚱한 몸을 풀기 위해 운동기구에 매달려 사력을 다한다. 이렇게 육체의 건강을 위해 음식을 고루 섭취하는 일과 몸에 맞는 운동으로 체중을 감소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영혼에 맞는 웰빙은 없을까?성경 다니엘 5:22-3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벨사살을 페하심으로 바벨론이 멸망하고, 페르시아에게 나라가 넘어간 것을 알 수 있다. 벨사살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달아 보셨을 때 함량 미달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이에 비해 다니엘은 왕은 바뀌고 나라가 바뀌어도 여전히 건재하였다고 소개한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저울로 달아 볼 때 함량이 충분했던 인물임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당신의 저울에 달아 보신다.어떻게 하면 존재의 무개를 더할 수 있을까? 세상의 저울은 무거울수록 무개는 더 올라가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저울은 그 반대로 비울 수록 무거워진다. 욕망과 교만을 버리면 무개는 더 무거워진다. 인간의 욕망은 본능에 의해 다스림 받는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우리를 리드한다. 사자는 배가 부르면 그만 먹는 본능의 명령에 따라 영양이 코앞을 지나도 멀 둥 말 둥 쳐다보고 있어 영양이 안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그 본능 지배마저도 거부하게 하여 재벌소리 듣는 자들이 더 많이 가지겠다고 가족끼리 작전을 하듯 소송 싸움을 하는 것을 본다.어제는 해양의 나라인 영국에서는 옛 향수를 못잊어 하던 기득권 층의 반란에 어렵게 형성된 유럽연합이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도되고 있다.자족하는 마음이 없는 한 세상의 그 누구도 만족하게 할 수 없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그 어떤 처지나 환경에서도 만족할 수 있다. 타락한 영혼은 욕망에 매달려 과거를 후회하고 현재를 원망하며 내일을 염려하는 가운데 주어진 삶을 허비하며 불행의 나락으로 미끄러져 빠져 들어간다.그러나 감사하는 영혼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피조물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축복받은 삶을 누리게 된다. 보라매공원의 운동장을 걸으며 우거진 나무의 모습을 보며 산소 공장에서 뿜어 나오는 공기를 마시니 막힌 담이 시원하게 뚫리는 듯하다.비둘기들이 잔디에서 잔디 씨를 쪼아 먹고 있는 모습이 처량하다 준비해간 빵조각을 날리니 떼를 지어 날아든다. 적은 것을 통해 비둘기들의 고맙다는 날개를 친다.감사의 마음으로 현실을 보는 사람은 행운의 네 잎 클로버를 찾고 행복이란 세 잎 클로버를 찾는 자들이다. 네 잎 클로버를 찾아 이리 저리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네 잎 클로버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이 세 잎 클로버가 발 한가운데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돌아보면 모두가 주님의 은혜인데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욱 움켜쥐려고 동분 서주했던 자신의 몸집이 너무 커진 것이 아닌가?나는 교포 선교한다고 하면서 베풂의 영성보다 좀더 선교의 확장이란 명분으로 몸집을 불리려는 뚱보의 몸집이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베풂으로 받는 기쁨은 받을 때보다 더 크고 더 진한 감동을 체험하지 않았던가?아직도 나는 영혼의 무게가 얼마인가? 욕심의 무게는 줄이고 감사와 긍휼 베풂의 무게는 올려야겠다. 하나님의 저울에 나의 영혼의 몸무게와 믿음의 척도는 어떻게 비칠까? 생각하며 링주위를 도는 가운데 5바퀴를 돌았다. 영혼의 웰빙이 시급하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6-07-08
  • (김지호)퇴행성
    퇴행성 전 민 정퇴행성이란 말은 참 슬프다삐걱거리는관절보다 더 슬프다보폭 맞추며 반듯하게 걸어온 나날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옛날의 말이다퇴행성이란 밀려난다는밀려나서 고독해진다는하염없이 내리는 빗소리를가슴으로 들으며멀어지는 것들 끌어 모아나는 자력갱생내일의 무릎을 세운다나이가 들면 청각이나 시력이 약해지기도 하고 퇴행성 관절염이 생기기가 쉽다. 특히 젊었을 때부터 꾸준히 운동을 해오지 않은 사람들이나 지병이 있을 경우 좀 더 이른 시기에 찾아올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어떤 단어 보다도 ‘퇴행성’이란 단어가 붙어서인지 퇴행성 관절염이 생기면 왠지 모르게 자신이 노쇠(老衰)해졌다는 낙오된 생각이 많이 든다. 그래서 마음이 답답하고 슬픈 마음이 들기도 한다. 화자도 그 슬픔이 삐걱거리는 관절보다 더 슬프게 다가왔고 밀려난다는 느낌이 들어 삶이 고독해진다고 하소연 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 슬픈 마음을 계속해서 가진다면 슬픔은 더 커지고 고독역시 더 커지게 된다. 슬픔이 올 때 기쁨을 찾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동안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좀더 밝고 긍정적인 면을 찾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즐거워짐을 알 수 있다. 퇴행성 관절염은 오히려 운동할 수 있는 좋은기회로 생각하고 튼튼한 관절을 위해 열심히 운동한다면 호전될 수 있다. 화자도 내일의 튼튼한 관절을 위하여 자력갱생의 길을 다짐하고 있다. 수 많은 퇴행성 관절염 환자들이 위축되지 않고 꾸준히 운동함으로 튼튼한 관절과 함께[ 삶의 활력을 되찾기를 바란다. 내 몸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므로 건강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다. 유엔에서 재정립한 평생 연령 기준을 보면 0~17세 미성년자, 18세~65세 청년, 66세~75세 중년, 80~99세가 노년, 100세~이후 장수노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요즘은 퇴행성이라는 수식어는 젊은이에게도 붙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절망은 허공에 뿌리고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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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시선
    2016-07-01
  • 다시 건너보고 싶은 홍해
    필자는 수년 동안 여름 방학을 맞이하여 학생들과 함께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이는 선교학을 가르친 교수로서 학생들로 하여금 현장감을 갖도록 하는 교육의 일환이다. 따라서 금년에도 이스라엘 일정이 잡혀 있다. 이스라엘은 성경의 땅이기 때문에 밟을 땅들이 모두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음을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설레임도 가보지 못할 땅이 있기 때문에 반감되는 것 같다. 그곳은 홍해이다. 홍해는 이집트 땅에 소속되어 있다. 최근 이집트에서 일어난 테러로 인한 안정상의 문제로 금년에는 그곳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집트를 여행하면서 모세의 사역을 둘러 볼 수 있고, 요르단을 횡단하면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충을 경험해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 땅들이 모두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 구약 성경에서 홍해가 대두된 말씀은 출애굽기 14장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모세를 통한 출애굽의 역사는 출애굽기 1장부터 13장을 통해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던 새로운 왕의 치세 때에 모세가 태어나고, 모세를 통해서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출애굽의 동의를 받고, 밤에는 불기둥 그리고 낮에는 구름기둥을 통해서 생명을 보존하셨다. 이후 홍해를 건너기 위해 비하히롯 앞 바알세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도록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바꾸어서 출애굽을 허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잡아 두기 위해서 군대를 보내어 쫓게 만듦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앞에는 홍해 바다를 바라보고 뒤로는 애굽의 막강한 군대가 그들을 죽이기 위해서 달려오는 상항이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히 두려워하였다(14:10). 그리고 자신들의 지도자인 모세를 원망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14:11). 그들은 차라리 애굽의 종살이가 자유를 얻어서 광야에서 죽은 것 보다도 낫겠다고 소리를 쳤다(14:12).애굽의 군대가 가까이 오자 모세의 책임감은 더욱 무거워졌다. 모세는 아우성치는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바라보라고 말씀을 하시고 계신다(14:13). 위기에 처한 백성들에게 모세는 참으로 위대한 신앙을 보여 준다. 모세는 어떤 사람입니까? 출애굽기 3장을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위해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출 3:14), 영적인 준비를 갖추고(출 3:11-12),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출 4장)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할 지도력을 갖추게 된다. 그는 40년간 애굽의 문화 속에서 왕자로서 백성을 지도할 지도력을 갖추었다. 그리고 자신의 백성이 고난 받는 어려움을 몸소 체험 하면서 그의 백성들과 동질적인 삶을 살았다. 그뿐만 아니라 변화하는 국제 정세와 자신의 입지를 바라보면서 변화의 주체로서의 삶을 살았다. 홍해 바다 앞에선 모세의 지도력은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야 할 표본이 된다. 지도자의 자세는 항상 준비를 갖추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절망적일 때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강하게 임하심을 알고 있는 지도자 였다. 모세는 “야훼께서 너희를 위해 싸우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 지어다”(14:15)라고 확신 있게 선포한 모습을 본다. 우왕좌왕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모세의 희망적인 메시지는 크나큰 힘이 되었고, 자신의 백성을 책임지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이제 시작이 되었다. 홍해에서 일어났던 사실을 기록한 성경은 여호와께서 싸워 주시는 모습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14장 21절에는 당시의 기적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모세가 바다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닷가 마른땅이 된지라” 라고 기록 되었다. 그토록 절망적인 상항을 일시에 소망이 넘치는 순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을 치려고 하였던 애굽의 군대들을 어지럽게 만들어 버렸다. 출 14:31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노래를 하였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라고 기록 되었다. 최근 IS의 준동과 한국인에 대한 테러의 위협 등의 이유로 가까이에서 볼 수 없는 홍해를 그리워하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다시 한번 홍해를 가르는 역사를 나타내시기를 기대해 본다.
    • 칼럼
    • 선교
    2016-07-01
  • ‘시편’에서 읽는 이스라엘의 시심
    다시 이마미치(今道友信)의 글을 소개하게 되면서, 전적으로 그의 책 <미에 대해서>를 의지했으면서도, 제목과 내용에서 본 칼럼에 걸맞도록 다듬지 않을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유명을 달리하게 된 그분께서 무례를 용서해주리라 믿는다. 지난번의 “‘창세기’로 읽는 예술론”에서는 예술이란, 일단 그 내용이 순종적이거나 도전적이거나 간에, 초월자를 향한 수직적인 방향에서 작용하는 것으로 풀이한 저자는 “그렇다면”하고 새롭게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시편’을 들고 나선다. ‘시편’ 137편 1-2절, “우리가 바빌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온을 생각하면서 울었다. 그 강변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수금을 걸어 두었더니”이스라엘 사람들은 수금연주를 거부한다. 노래대신 눈물을 흘리며. 왜? 3절을 보자, “우리를 사로잡아 온 자들이 거기에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고, 우리를 짓밟아 끌고 온 자들이 저희들 흥을 돋우어 주기를 요구하며, 시온의 노래 한 가락을 저희들을 위해 불러 보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이방 땅에서 주님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4절)한다. 야훼를 섬기는 이스라엘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노래할 수 있지만, 야훼를 모욕하는 바빌론 병사들을 위해서는 함부로 부를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노래였다. 그러니까 그들의 노래는, 직접적이 되었건 수직적이 되었건 간에, 노래불러야할 대상이 초월자이냐 아니냐를 두고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인간끼리의 수평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게 되었다는 점이 종래의 인식과 달라진 것. 예술은 인간과 신과의 수직적인 관계일 뿐만 아니라, 인간끼리의 수평적 호응을 이끌어내는 것. 동시에, 예술이란 승자가 패자에게 요구하는 위로가 될 수 없는 대신, 뜻을 같이 하는 이들끼리의 위로와 격려라고 주장하게된 것이다. 저자는 또 다시 “그런데” 하고 어조를 가다듬으면서 “예술은 단순히 상대방에게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호소하는 것으로만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일까” 하고 묻는다. 사울왕의 발작적인 질투를 피해 간신히 광야에 도망쳐온 젊은 다윗이, 밤에 동굴 속에 홀로 몸을 숨길 때,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초라한 신세로 절망의 늪에 가라앉아 있을 바로 그때, 그는 수금을 들어 조용히 노래한다. “내가 사람을 잡아먹는 사자들 한가운데 누워 있어 보니, 그들의 이는 창끝과 같고, 화살촉과도 같고,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과도 같았습니다. 하나님, 하늘 높이 높임을 받으시고, 주님의 영광을 온 땅 위에 떨치십시오. 그들은 내 목숨을 노리고, 내 발 앞에 그물을 쳐 놓아 내 기가 꺾였습니다. 그들이 내 앞에 함정을 파 놓았지만, 오히려 그들이 그 함정에 빠져 들고 말았습니다.”( 57편 4-6)슬픔을 노래한 다윗은 시와 음악으로 스스로를 격려한다. 의심과 두려움을 떨치고 다시 노래한다. “하나님, 나는 내 마음을 정했습니다. 나는 내 마음을 확실히 정했습니다. 내가 가락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결연한 모습으로 다시 일어나 노래한다. “내 영혼아, 깨어나라. 거문고야, 수금아, 깨어나라. 내가 새벽을 깨우련다.” (57: 7-8)버림받은 몸, 의지할 것이 없어진 젊은이가, 불안과 어둠을 밀치고 새벽을 깨우려한다. 새벽을 깨우다니... 절망의 늪에서 빛나는 미래를 창조해보려는 자기회복의 노래가 아니던가. 예술을 통해 다윗은 믿음을 되찾고 새로운 인생을 구축한다. 많은 고난을 극복한 다윗, 마침내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적의 손에 쓰러진 후, 그는 유다의 첫 번째 왕이 되고, 나아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영광의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예술의 힘으로 다시 일어선다는 것은 위인들의 옛이야기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철들기도 전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른들의 꾸중에 시달리다, 눈물에 어른거리는 불빛 아래 혼자 쓸쓸하게 동요로 마음을 달랜 연후에야, 벗들에게 돌아갔던 추억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자는 말했다. 예술은 초월자나 사회조직을 향한 한 인간이나 공동체의 호소일 뿐 아니라, 좌절한 인생의 지탱이 되어주고 있다는 고전적 전형으로 기록해두고 싶다고.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7-01
  • 거룩함이 상실된 시대
    오늘날 이 세상은 한마디로 ‘거룩함이 상실된 시대’ 라고 한다. 매스컴을 통해서 보도되는 가장 큰 사회적 이슈는 대부분 정직을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고발이다. 도시의 네온사인은 쾌락을 최고의 가치로 가장시켜 건실해야 할 가정의 남편과 아내를 유혹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가정들이 파산되었거나 파산 되어 가는 악에 대한 반감의 결여가 곳곳에서 한심스럽게 드러나고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의 감정 속에 이러한 악에 대한 반감을 찾아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도덕 불감증에 빠져 있기까지 한다. 그래서 자신의 이익과 안위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불법과 부정, 사기, 폭력, 강도, 절도, 살인 등도 묵인하는 경향이 있는데 악에 대한 반감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지녀야 할 감각이다. 고로 성도들이 지고선이신 하나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그 생각이나 행동이 죄와 연결되어서는 안된다. 만일 죄로 물든 생활 속에 거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설 수 없기 때문이다. 고로 성도들은 조금이라도 죄의 성질에 대해 호의를 베풀어서는 안된다. 어떤 것은 전혀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죄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죄의 씨앗으로서 조금씩 죄와 친숙하게 되어 멸망하게 한다. 아울러 악을 경계하는 마음과 거룩함을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거룩함이 상실된 시대에 살고 있는 성도의 자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먼저 세상에서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살아야한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 직분이 따로 있었다. 당시 제사는 오직 레위 지파 아론 계열의 제사장만 집전 할 수 있었다. 만일 제사장 외의 다른 자가 제사를 드린다면 사울 왕이나 웃시야 왕처럼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 하지만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제단에서 자기 몸으로 단번에 온전한 제사를 드리신 후, 누구나 스스로 하나님께 제사할 수가 있었다. 말하자면 성도는 누구나 제사장인 것이다. 이에 베드로는 성도를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였고(벧전 2:9)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영적 산제사를 드리라 하였으며(롬 12:1) 종교개혁자 루터는 만인 제사장이라는 교리를 확립하였다(롬 1:17, 히 7:27). 그런데 성도들은 제사장이라고 하면 목사나 사제를 생각하지만 그것은 바른 생각이 아니다. 고로 성도들은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성도들은 우선 하나님께 헌신된 삶을 살아야 한다. 즉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이 하나님에 의해 철저히 구별된 자들로서 하나님의 전에 머물면서 하나님께 제사하고 분향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던 것처럼 오늘날 성도들도 하나님의 제사장들로서 오직 하나님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 즉 성도들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서 해야 한다. 학업을 하든, 직장 생활을 하든, 사업을 하든, 정치를 하든 그 궁극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에 두어야 한다. 다음으로 세상에 대하여 중보자적 삶을 살아야 한다.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백성들을 위해 중보 하는 것 이었다. 즉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속죄 제사를 드리며 백성들의 간구를 하나님께 전해드리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러한 제사장의 직무는 이제 새로운 제사장이 된 성도들도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이다. 또한 자신과 가족과 일가친척과 이웃과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끊임없는 중보 기도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자신과 가족만을 위하여 기도한다. 기도한다해도 자신이 속한 교회를 위해서만 한다. 이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이제 신약시대의 제사장들인 성도들은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처럼 소외된 이웃과 나라와 민족과 세계만민을 위해서 중보 기도해야 한다. 끝으로 성도들은 정직한 삶을 살아야한다. 구약 시대에 제사장들이 지도자의 책임을 잘 감당할 수 이었던 것은 그들이 훌륭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율법에 따른 모범적인 삶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만일 그들의 삶이 바르지 못했을 때에는 어김없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삼상 3:12, 4:18). 이것은 오늘날 제사장인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성도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매일 감사와 찬송과 기도를 많이 할지라도 성경의 말씀에 어긋난 불의한 삶을 산다면 그는 이미 제사장으로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착한 행실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마5:16). 즉 우리의 행실을 보고 불신 세상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광을 돌리게끔 만들라고 하셨다. 하지만 성도들의 생활은 예컨대 마치 극중의 배우와 같이 살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 이제 우리는 삶을 어느 한 순간이라도 극처럼 만들어서는 안된다. 곧 정직을 버리고 외식된 생활을 하지 말아야한다.
    • 칼럼
    • 목회자
    201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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