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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식 기도의 의미
    링컨(Abraham Licoln, 1809~1865)은 남북 전쟁이 중반으로 접어들어 한창 치열했던 무렵인 1863년 4월30일 목요일을 ‘국가적인 금식 기도의 날’ 로 정하자는 연설문을 작성한바 있다. 링컨은 연설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것은 비단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우리 온 국민의 의무입니다. 죄와 허물을 겸손히 고백하고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는 나라들만이 축복받을 수 있었다는 숭고한 진리를 깨달아야 하며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를 황폐케 하는 이 남북 전쟁의 참화는 우리의 염치없는 죄에 대한 형벌이 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징조일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우리는 계속되는 성공에 도취되어 아무런 부족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오만해졌고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께 기도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교만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진노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들 자신을 낮추고 국가적인 죄를 고백하며 그분의 자비와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그들에게 남북 전쟁의 승리가 돌아갔음은 물론이다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지 국난을 당하면 하나님께 금식기도를 해야 할 그 이유가 무엇일까? 금식기도는 대게의 경우 어떤 중대한 사건을 결정해야 되는 순간이나 절박한 위기에 직면하여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구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실제 성경 속에서 큰 위기와 환난 앞에서 중대한 일을 두고 금식해서 하나님의 기적 같은 능력과 도우심을 체험했던 실례들은 금식에 대한 중대한 기대와 확신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 요즈음 우리나라 지도자들과 국민들을 보자. 나라가 위기에 있는데 기도하지 않는 것 같다. 즉 지정학적인 위기, 가정, 정치, 사회, 경제, 종교, 문화 등의 위기를 보고도 안전 불감증에 빠져 기도하지 않고 안일과 나태에 빠져 있다. 혹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기도를 한다지만 주님 당시 유대교인들처럼 외식으로 기도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성경을 보면 유대교인들은 금식을 많이 하는 것을 신앙 수준의 증표로 삼았다(눅 18:11). 그래서 일주일에 두 번씩은 반드시 금식했으며 어떤 이들은 그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았다. 그리고 머리를 풀고 옷도 아무렇게나 입고 매우 피곤한 모습으로 길거리를 다녔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는 자기들처럼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따지기도 했다(마 9:14). 하지만 금식을 자주하거나 오래하는 것이 자랑이 될 수 없다. 음식을 먹지 않고 자기 몸을 괴롭히는 행동이 하나님이 원하신 금식이 아니기 때문이다(사 58:6, 7). 금식기도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첫째 죄에 대한 고백의 표현이다. 금식에 해당하는 원어 히브리어는 ‘춤’이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자의로 일정 기간 먹고 마시는 것을 절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동의어로 종종 쓰이는 히브리어 ‘아나 네페쉬’는 문자적으로 ‘너희는 스스로 영혼을 괴롭게 하라’(레 16:29)는 의미이다. 이 두 가지를 원어상의 의미로 볼 때 ‘금식’이라는 것은 음식 먹는 것을 자의로 절제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간절한 심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나는 더 이상 살만한 자격이 없는 자이므로 먹지 않겠다’는 죄에 대한 간절한 고백을 의미한다. 곧 자신의 정욕을 절제하고 하나님께 지은 죄를 회개하며 더욱 영적인 생활을 하고자 금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중요한 일을 위하여 간구할 때 가장 널리 취하는 믿음의 자세 중 하나가 금식기도이다. 금식은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의 깊은 신앙과 결단을 보여 주는 것이기에 간구의 효과를 얻을 수 있고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된다. 둘째 하나님께 대한 절대 신앙의 표현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음식을 먹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이다. 사람은 먹어야 힘을 얻고 모든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식이란 아무 것도 먹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해보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의지하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해결해 주시기를 바라는 전적인 신뢰를 표현하는 것이다(삼하 12:22). 셋째 하나님께 대한 절대 헌신의 표현이다. 사람은 음식을 먹어야 힘을 얻고 모든 활동을 할 수가 있다. 헌데 먹어야 할 사람이 금식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육체적인 생명이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 살아왔던 것을 포기 하고 이제부터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겠다는 삶의 목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 칼럼
    • 목회자
    2015-10-10
  • (정신재)수박을 쪼개며
    수박을 쪼개며-평화를 위한 기도시 안 혜 초수박 한 통을 반으로쪼개 그 반쪽을다시 또 반으로쪼개려다가 멈칫손놀림이 무거워진다.절로 또 하나님 소리가새어 나온다. 가슴에서머리에서 뼈마디 마디에서무슨 일이 일어나지않게 하소서 …(하 략)… 얼마 전 C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시던 필자의 형님이 소천하였습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어, 형님은 열악한 선교지에서 동료 선교사들과 하찮은 음식을 먹고, 황사 바람과 싸우면서, C국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다가,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니,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영적 전쟁을 한 형님이 애썼다고, 주님이 천국으로 데려가셨습니다. 이제 남아 있는 자가 형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웃과 형제와 가족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체현되는 삶이 될 줄 믿습니다.“수박을 쪼개”다 보면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 내가 이제껏 물질적 욕망과 명예를 위해서 살아오지 않았는지.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보입니다. 주님이 나를 살아 있게 하시고, 글로써 “아름다운 땅”(<신명기> 8:7)에 이르게 하시며, 가족? 형제? 이웃과 화목하는 축복 주셨음을.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몸소 십자가 보혈을 흘리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심정으로 우리를 친밀하게 대하여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려고 옆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주님의 계획대로 하나님 나라와 의가 확장될 줄 믿습니다. 주여! 주님 뜻대로 이루소서.이 땅에 남북간에 평화가 정착되게 하시고, 한일간에 진실과 신뢰가 서게 하시며, 세계 평화를 위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자들이 일어서게 하소서. 주님 뜻대로 새벽마다 기도하는 이들의 소망을 이루어 주시고, 물질과 육신보다는 영적 권위를 가진 자들이 많이 나오게 하소서. 전지 전능하신 주님 뜻대로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 칼럼
    • 기독시선
    2015-10-02
  • 복음의 중심인 그리스도
    선교사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는 그리스도에 대한 소개이다. 사실 그리스도교 전파자의 과제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남에게 소개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일은 분명히 사도들이 지배적인 관심사였고, 이러한 관심은 사도행전 첫 머리에 기록되어 있는 설교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우리가 전파하도록 부르심을 입은 바로 그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유명한 학자인 위버는 이에 대해서 세가지 그리스도가 우리세계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즉 그리스도(Fale Christs), 왜곡된 그리스도(Distorted Christs), 그리고 성서적 그리스도(Biblical Christs)이다.첫째는 거짓된 그리스도(Fale Christs)이다. 그리스도에 관한 잘못된 견해는 그를 너무 인간화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신적인 예수를 가지지 못하게 하거나 그를 너무 신격화함으로써 더 이상 인간 예수를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예수를 “그냥 선한 사람”(Just a good man)이라고 보는 자유의적 견해는 분명히 전자의 범주에 빠지는 것이다. 이 견해는 19세기의 역사적 예수에 관한 탐구에서 유래되었다. 이 탐구는 예수의 복음(Gospel of Jesus)과 예수에 관한 복음(Gospel about Jesus)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가정 하에 행해진 것이었다. 예수에 관한 복음은 초기 자유주의자들이 말했듯이 제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복음이었다. 그들은 예수를 하나의 신으로, 형이상학적 피조물, 초자연적 실재로 만들었다. 두 번째는 왜곡된 그리스도(Distorted Christs)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문화의 수효만큼이나 많은 사고의 관점들이 있겠지만 그 중 세 가지를 언급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그것은 서양의 그리스도와 동양의 그리스도, 그리고 제3세계의 그리스도가 있다.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백인이고, 앵글로색슨족이며, 중산층에 속하는 그리스도는 논리적이고 교양 있고 세련되고 예의바른 누구나 좋아하는 대중 예수이다. 동방에서는 다소 신비적이고 사적인 이미지를 따라 빚어진 그리스도 상을 가지고 있다. 이 예수는 경험에서 다소 멀리 떨어져 있는 분으로서 그는 동정녀의 팔에 안긴 아기이거나 교회의 성상과 벽화에 그려져 있는 만물의 심판주이시다. 예수와 가까이 하려는 사람들은 특히 고행과 금욕적인 생활의 실천으로 예수님께 다가간다.제3세계의 그리스도는 혁명가로 나타난다. 그는 헤진 옷을 입고 있으며 가난한 자와 동일시된다. 그는 피킷을 들고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선동하거나 게릴라 단원을 지휘하기도 한다. 그가 어디 있든지 그는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과 모든 비참함에서 해방을 위해서 투쟁하는 한가운데 서 있다.세 번째는 성서적 그리스도(Biblical Christs)이다. 교회의 과제가 성서적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성서적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현재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간과되기 쉬운 두 가지 성서적 그리스도 상에 국한시키려 한다. 그것은 제2아담과 우주적 그리스도 이미지이다. 제 2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 이미지는 신약성서의 여러 구절들에서 발견되는데 가장 현저한 것을 로마서 5:12-21에 나타나 있다. 그는 그가 하나님과의 연합 안에서 그리고 창조질서 안에서 누리던 현실에서부터 분리되고 소외되어 땅 위에 있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에서서 멀어지게 된 것은 인간이 선택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구원은 또 하나의 인간 즉 하나님께로 향해 감으로써 삶과 창조질서를 재생시키려는 또 하나의 인간의 선택이라는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이 인간이 바로 그의 성육신과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제 1아담이 행한 것을 뒤엎고 인간과 피조물을 회복시키는 신인, 곧 그리스도이시다. 제 2아담인 그리스도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의 능력을 통해서 인간과 피조물을 그 두 번째 사다리로 끌어올려 만물을 새롭게 만든다. 제 2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 이미지는 바로 그가 고쳐서 행했다는 것이다. 우주적 그리스도는 제 2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 이미지와 그 안에서 모든 것을 다시 반복한다는 개념에 빠질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사도시대에 예수관의 명백한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창세기 1:26에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수인 제 2아담을 완전한 하나님의 이미지 즉 완벽하고 완성된 인간이다. 이 예수를 복음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 www.world.ac.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5-10-02
  • 유방(劉邦)의 경역학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영웅호걸들이 발호(跋扈)하는 법. 중국의 진 왕조(秦王朝) 말기가 그랬다. 이름이 알려진 영웅들에게는 자신의 꿈이나 앞날을 맡겨 보려는 인재들이 모여들었지만, 크고 작은 영웅들 가운데서 최종적으로 가장 많은 인망을 모아드린 영웅이 바로 유방(劉邦)이었던 셈이다.인망이 유방에게 쏠린 것은, 첫째로 그가 가진 “들을 귀” 때문이었다고들 말한다. 다른 영웅들이 자존심을 앞세워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하지 않는 반면, 유방은 아랫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그것이 가장 강력한 경쟁자 항우(項羽)에게는 없는 장점이었기에...항우가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자신의 탁월한 능력 때문이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아랫사람의 도움을 받아드릴 여지를 내줄 수 없었던 것이다. 명 참모로 알려진 진평(陳平)과 가장 뛰어난 무장 한신(韓信)도 원래 항우의 사람이었지만, 주공을 버리고 유방의 사람이 된 것은 항우와는 달리 유방이 “들을 귀”를 가진 영웅이었기 때문. 경청(傾聽)이란 “남의 말을 공경하는 태도로 듣는 것”. 들을 청(聽)자의 자원(字源)을 보면, “聽”의 오른쪽 부분이 덕(德)의 생략형으로 되어 있다. “德”의 원래 글자는 덕(悳). “곧은 직(直)” “마음(心)”이 곧 덕이라는 뜻이란다. 그러니까 “聽”은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곧은 마음과 귀로 듣는 자세이다. 또 “聽”의 다른 쪽 하단을 보면, 한 일“一”과 마음 심“心” 으로 읽을 수 있는데, “마음을 하나로 모으다.” 는 뜻인즉, 들을 마음이 없으면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정신을 집중해서 들어야 제대로 들을 수 있다는 것. 당시 중국은 의협(義俠)을 중시하는 풍조였다. 유방이 많은 신하를 통솔할 수 있었던 것은 “들을 귀”를 가진 “의협”의 사나이였기 때문. 유방이 존경하는 인물 중에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이 있었다. 이웃 조(趙)나라가 진(秦)의 공격을 받아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신릉군의 형은 진의 보복이 두려워 동맹국인 조나라에 명목상의 원군만을 보내면서도, 부하 장군에게는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도록 당부한다. 신릉군은 의협심을 배신하는 형의 태도에 화가 나서, 원군을 이끄는 장군을 죽이고 스스로 장군이 되어 진나라와 싸워 대승한다. 그의 의협심과 군사적 재능이 세인의 신뢰를 얻게 했던 것이다. 유방은 그러한 신릉군을 이상적인 지도자로 마음에 두었다. 자신은 신릉군과 같은 명문출신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힘없는 자들을 도와, 힘 있는 자들을 누르는” 인간이 되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유방은 패공(沛公)이라는 지방관원으로 있다가 거병하여 반란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되는데, 의협심은 그의 일생을 같이 한다. “패공은 이해득실로 군을 움직이지 않는 의협의 사람”이라는 평판이 늘 그를 따라주었다. 인재가 모여들면 용인술이 요구된다. 유방의 인재등용 법은 남달랐다. 소개도 없이 불쑥 나타난 인물이라 할지라도 쓸 만하다 싶으면 당장에 큰 자리를 주곤 했다. 장량(張良)과 한신(韓信)의 경우가 그랬다. 그러한 “유방 표” 용인술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한 역사 소설가는, 이미 자리 잡기 시작한 유교적 가치관에 사로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라 풀이한다. 조직을 정리하고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유교적 예법이나 사상이 편리한 도구가 될 수 있는 반면, 노장사상과 같이 무위자연(無爲自然)하는 이념은 조직을 흐트러지게 한다는 풍조 속에서, 유교적 이념이 조직을 경직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단점을 직시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가. 경서를 깡그리 암기하고 있는 수재만이 요직을 차지하는 조직은 보신과 선례주의가 판을 치게 마련인 것을. 장량이나 한신이 발탁되는 것을 지켜보는 거병 초기부터 그를 따른 중신들이 불만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터. 그러나 그들이 불평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은 근본적으로는 자신들이 주군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으리라. 어찌 주군의 뜻을 속속들이 알 수 있으랴만, 거의 언제나 바람직한 결과로 이어져왔었다는 신뢰가 있었기에, 맡기고 기다릴 수 있었으리라. 경영학이 되었거나, 용인술이 되었거나, 밑바닥을 흐르는 것은 소통과 신뢰이고, 그 둘은 별개의 것이 아닌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5-10-02
  • (정신재)나의 왕께 바치는 노래
    나의 왕께 바치는 노래 예 은 목나의 숨쉬는 호흡마다주님을 찬양하게 하소서나의 몸의 모든 세포들도주님을 찬양하게 하소서언제나 나와 함께 하사주님만으로 나를 채우소서 강물이 바다로 흘러간 후엔강물이 바닷물이 되듯이나 주님 속에 녹아져서나는 없고 주님만 있게 하소서나는 없어도 주님 안에서 숨쉬는나는 주님의 순결한 신부, 주님의 사랑오, 내가 영원히 흠모하고 사모하는나의 주, 나의 왕 예은목은 1994년 목사 안수를 받고 스웨덴 선교사로 나간 이후 해외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시인입니다. “1984년 12월 마지막 수요일 저녁 늦게 기도하다가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모든 재능은 모두가 주님의 것이라고… 그러므로 주님께서 필요하니 글을 쓰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후 4년이 흐른 뒤에 처녀 시집 『그대의 뜨락』을 내었습니다. 이렇게 시를 좋아하도록 저를 지으신 하나님의 은혜로 저는 자연스럽게 삶이 시로 연결되었지요. 지금은 교회의 심장 소리인 전도의 소리를 내는 전도 시집을 만들어서 문서 선교에 열정을 쏟고 있습니다”(『한국 기독 시인 총람』,331쪽). 시인의 고백입니다.위 시에서도 시인은 자신의 전부가 “주님 속에 녹아져서/ 나는 없고 주님만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가 주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살며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증거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과 친밀하여 지는 것이 행복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주님께 따뜻하고 올바른 마음을 가지는 것이 충성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각기 그 재능대로 최선을 다하여 주님께 충성할 때 하나님의 칭찬을 받습니다. 그 성품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바뀝니다. 사탄이 주는 시험이나 유혹을 피하여 영적인 근육을 키울 수가 있습니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언 25:13). 아멘.
    • 칼럼
    • 기독시선
    2015-09-18
  • 제자화의 기쁨
    신약 성경 디모데 후서 1장을 보면 사도 바울께서 사랑하는 제자인 디모데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녹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장 3-4절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했다. 바울께서 제자인 디모데를 보면서 자신이 행했던 복음증거의 열매를 디모데를 통해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을 한마디로 표현한 성구라고도 볼 수 있다. 사실 디모데는 바울이 제 2 차 전도여행 가운데 만난 사랑하는 제자 이다. 이후 디모데가 바울의 제자가 되어 에베소 교회에 부임하였지만 어린 나이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격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은 디모데 에게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없신여기지 못하게 하고...”(딤전 4:12)라고 쓰고 있다. 사실 디모데에게 바울은 격려가 필요 했다. 사실 격려란 우리 인간이 주고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가운데 하나라고 볼수 있다. 필자는 사도 바울과 디모데와의 관계 속에서 사역의 열매가 무엇인가를 많이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선생의 참다운 역할이 무엇인가를 거울을 보는 것 같이 비춰보곤 한다. 이미 교회연합신문에서 다루었듯이 한세대학에서의 교수사역은 정년식을 가졌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서 학생들을 계속 보기를 원하는 나에게 초빙교수라는 타이틀을 주어서 지속적으로 선교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시간들 속에서 과연 나는 바울처럼 디모데를 사랑하고, 그처럼 순순한 제자를 두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곤 한다. 바울은 다방면에서 제자인 디모데를 가르치고 있다. 디모데 전서 6장을 보면 몇 가지 교훈을 제자에게 주고 있다. 11절을 보면,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라고 기록 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것들”이라는 말씀에 주목해 보아야할 필요가 있다. “이것들”이란 6장 3절부터 10절에 나와 있는 교회생활과 신앙성장에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통칭해서 말한 것처럼 보인다. 이를 통칭해 보면 교만과 탐욕 이다. 교만한자는,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해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6:4-5)”라고 말씀 하시고 계신다. 다음으로는 탐욕 이다. 욕심이란 끝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잉태한즉 사망에 이르느니라”라고 욕심이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분명히 주장하고 있다. 인간은 타락한 이후 인간의 본성이 악하여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가져보고자 하는 욕망 이 생겼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인간들이 탐욕을 물리쳐야 할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6:7)”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제자인 디모데를 향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6:12)”라고 말하고 있다. 운동 경기하는 자도 금메달을 얻기 위해서는 싸움이 필요 하다. 자신과의 싸움, 상대 선수와의 싸움, 환경과의 싸움이다. 천국 가는 길 가운데 싸움이 없을 수는 없다. 오늘 바울은 이러한 싸움을 “선한 싸움”이라고 말씀 하시고 계신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물리치시는 싸움을 싸워 승리 하셨다.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이란 사실 아무것도 없다.마지막으로 바울의 교훈은 “영생을 취하라(6:12).”라고 말하고 있다. 영생은 예수 안에 있는 복음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사역과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하겠다. 기독교는 타종교와 다른 절대성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십자가를 믿으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사실 이다. 사실 타종교와 기독교를 비교해 보면, 윤리성 부분에서는 타종교 에도 얼마나 많은 사회적인 일들을 많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인간의 이성을 억제하여 자기완성에 이르는 극기 같은 훈련도 우리 보다는 훨씬 강할 수가 있다. 또한 삼강오륜이든지 장위유서 같은 삶의 질서를 근본으로 하는 종교가 사회적으로 훨씬 강하게 어필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들 종교 속에는 영생이 없다. 영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기 때문 이다. 이 복음의 진수를 디모데에게 전수 하였기에 바울은 로마의 참수터 에서 눈을 감으면서도 기쁨으로 지산에서의 사역을 마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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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18
  • 임이라 부르리까. 당신이라...
    1960년대, 경향의 레코드 가게를 달구었던 이미자의 노래 <임이라 부르리까. 당신이라 부르리까>의 노랫말의 대강은 이렇다. “...사랑을 하면서도/마음으로만 그리워/그 무슨 잘못이라도 있는 것처럼/울어야만 됩니까” 거의 비슷한 시기, 극장가에서는 이성구 감독, 신영균, 윤정희 주연의 <당신>이 ‘고무신부대’의 발길을 사로잡았는데, “여자 고등학교 수학 교사 영재(신영균 분)와 새로 부임한 젊은 여교사 수진(윤정희 분)이 서로 사랑하게 되지만, 영재에게는 이미 가정이 있는지라, 두 사람은 고민하다 헤어진다는 멜로드라마. 거기에 <당신>이란 제목이 붙여진 것은 수진이 영재에게 마음 놓고 ‘당신’이라 불러보고 싶어 했던 사연을 클로즈업한 것이다.” 그럴 즈음, 바다건너 일본에서는 남극 관측소에 가있는 남편에게 써 보낸 여인의 편지 한 통이 세인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데, 편지지를 채운 글자는 단지 “아나타(=당신)”하는 세 글자였다는 것.그러니까 “당신”은 알뜰한 사랑의 심정을 담은 부부간의 호칭으로 쓰여 온 단어이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남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쓸 수 있는 호칭은 아니었다. 그래서 “자기”라든가 “이녁”이란 말로 대신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렇게 어법이 비슷한 우리나라와 일본사람들은 “당신”이라는 호칭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왔다. 이런 경우, “당신”이나 “아나타”는 영어로는 “you”가 아니라, “darling”으로 번역된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우리나라나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호칭(呼稱)으로 “당신” “너” “그대”와 같은 인칭대명사를 쓰지 않는다. 집안 어른들에게 “당신”과 같은 대명사를 쓰는 사람은 없다. “형”, “누나” 대신으로도 쓰지 않는다. 학교 선생님이나 직장 상급자와의 대화에서도 “선생님”이라거나 “과장님” 이라 부르지 “당신”이나 “그대”라는 인칭대명사로는 부르지 않는다. 그러니까 “당신”이란 말은 “너” “그대”와 비교해서 경어에 가까운 호칭이지만, 실제로는 손위에게 쓰기가 불편한 말이다. “당신”에다 “님”을 덧붙여보아도 비꼬거나 장난스러운 말은 될지언정 경어는 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윗사람에게 사용할 만한 인칭대명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가정을 벗어나서도 “아저씨, 아주머니”로 부를지언정 “당신”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시비가 붙었을 때가 아니면 “당신”이라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직장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너”하고 부른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도전이라 간주해도 좋을 것이고, “너” 대신 “당신”이라 한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혹 현장에 있지 않는 제3자를 아주 높여 “당신”이란 대명사를 사용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 자리에 계시지 않는, 이를테면 돌아가신 부모를 지칭하여 “당신께서 평소 아끼시던 물건 …” 등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삼인칭인 경우에 지극히 한정적으로 쓰일 뿐이다. 그런데도, 공중기도에서 하나님에 대한 호칭으로 “당신”을 쓰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 교회들의 현실이다. 우리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던 선교사들의 말버릇을 받아들인 탓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지만, 대체로 선구자의식이 강한 지도자들이 즐겨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나름대로의 성찰과정은 거쳤으리라 믿어본다. 아이가 엄마에게 화를 낼 때, 영어로서는 “I hate you”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나는 당신이 미워” 할 수는 없지 않을까. 기껏 “엄마 미워” 정도로나 번역할 수 있을 터. 인칭대명사의 발달과정이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유럽언어를 우리말로 번역할 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는 대목이 인칭대명사, 중에서도 호격(Vocative)이라는 사실은 번역작업에 손을 대본 사람이라면 경험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왕 우월한 문화권에서 들어온 종교이니 되도록 그쪽 언어에 동화하는 편이 여러 가지로 편리하지 않겠는가 하는 의미로 “하나님” 호칭을 “당신”으로 고집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또 다른 각도에서 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거추장스럽게 “하나님의 이름을 망연되이...”운운하면서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쓰고 있는 평균적인 우리말과 교회용어 사이의 골을 메꾸기 위해 애써보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닐 지도 모른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5-09-18
  • 원수를 선대하는 밀러 목사님(Peter Miller)
    언젠가 Bible School Journal 지에 소개된 이야기이다. 미국 독립 전쟁 시절 펜실베니아에 사는 ‘피터 밀러’ 목사님은 각계각층에서 모두 존경받았지만 유독 인근에 사는 단 한 사람만은 그를 몹시 증오했다. 어찌나 미워하고 욕했던지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명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나라에 대한 반역을 꾸미기도 했다. 이 사실이 드러나자 그는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밀러 목사님은 이 소식을 듣기가 무섭게 워싱톤 장군에게 달려가 그의 목숨을 살려 줄 것을 애원했다. 그러나 워싱톤은 말했다. ‘미안하지만 친구를 위한 당신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친구라고요?’ 밀러 목사님이 외쳤다.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내가 만난 최악의 적입니다’. ‘적이라고요?’ 워싱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신은 원수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97km나 되는 먼 길을 걸어왔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좀 별 문제군요? 당신을 봐서 그를 용서 하리다’ 워싱톤은 특사 통지서에 서명을 해주었고 밀러 목사는 즉시 사형 집행이 열리는 장소로 달려갔다. 그곳은 밀러 목사가 출발한 지점으로부터 80km나 떨어져 있는 곳 이었다. 그가 도착했을 때는 죄수가 막 사형대에 올라서려던 참 이었다. 사형수는 밀러 목사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것을 보고 말했다. ‘저기 늙은 피터가 오는군! 오로지 내 목이 달리는 것을 보면서 복수의 기쁨을 즐기려고 에프라타(Ephrata)에서부터 여기까지 달려온 거야’ 하지만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밀러 목사는 군중들을 밀치고 나아가 워싱톤 장군의 사면 통지서를 그에게 내밀었다. 실로 악을 선으로 갚는 다는 것은 어렵다. 말로는 쉬울지 모르나 막상 자기에게 그런 일이 닥쳤을 때는 참 실천하기가 힘들다.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고 도움을 주는 사람에게는 웃는 얼굴로 대하고 피해를 주는 사람에게는 화난 얼굴로 대하는 것은 그 누구나 할 수 있는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원수를 사랑하고 나와 핏줄과 사상과 가치관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허나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밀러 목사님을 보자. 그가 악으로 선을 갚는 행동을 보며 느끼게 되는 것은 참 그리스도인 이라면 남다른 행동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원수까지도 사랑하신 주님을 본받아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도 사랑하고 용서하며 그를 위해 기도하는 구체적인 행동의 결단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참으로 어렵지만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기도하라고 하셨으니 어찌 해야 하겠는가? 주께서 왜 원수를 대적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라 하셨을까? 이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사실 폭력으로 원수를 거꾸러뜨려 복수하는 일은 한편으로는 시원하고 통쾌한 일일 수도 있다. 허나 그로인해 내가 상대편의 원수가 되고 그의 친구들과 가족들이 보복을 가해올 것이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더욱 큰 문제들을 발생 시킨다. 또 원수를 해하려 하는 이는 우선 자기 자신이 더러워 진다. 세상 죄와 불의에 오염되고 타협하기 쉽다. 그리고 그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대신 사단의 증오와 미움으로 가득차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랑을 논하거나 그것을 주제로 이야기만 해서는 안 된다. 사랑은 이념이나 구호가 아닌 어떠한 형태로든 구체적인 실천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사랑을 단지 주제로 삼고 논하는 것으로 사랑의 실체를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행동으로 반영된 때에야 사랑은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한다. 그렇다 기독교는 분명 사랑의 종교이다. 즉 사랑을 원리로 하는 종교이다. 하지만 요즈음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로 부를 때는 그것을 인정하기 보다는 조롱하는 의미로 그렇게 부른 것 같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가 분명하고 사랑을 가르치는 것이 확실하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말로만 사랑을 외침으로 사랑이 구호로만 그치고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자. 혹시 형제의 사소한 잘못이나 공격에 못 이겨 복수심의 칼을 갈고 있지는 않을까? 그것을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리지는 않을 까? 헌데 이러한 것은 우리의 인격의 문제가 아니다. 다만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무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묵상하고 이 사랑을 바로알고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주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또 하나님의 구속의 원리대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진정한 주님의 완전한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원수 대신 친구를 얻게 될 것이고 만일 그가 회개치 않으면 하나님께서 치실 것이다.
    • 칼럼
    • 목회자
    2015-09-18
  • (정신재)쪽빛 바다
    쪽빛 바다 임 인 진그 사람 홀로 떠나보낸 뒤로쪽빛 물결 하얗게 부서지는 그 바다눈에 밟혀 잠 못 이룬다고 했지솔빛 청청한 봄날그대 가솔들 데리고 청간정淸澗亭 앞 바다거기 하늘 맞닿은 곳 바라보며분홍빛 카네이션 띄워 보내면그 사람 좋아하며 활짝 웃을 거라고 했지은파銀波에 실린 꽃잎하얀 포말泡沫로 부서져그리움의 선율旋律 눈부시게 떠오르는 날그 바다 교향곡交響曲 장엄하게 울리리니그대는 쪽빛 바다 향하여회오리바람처럼 스쳐간 시간을 되돌리며새하얀 오선지에 분홍빛 음표를 찍듯그리움의 선율을 가슴에 새기리한 줄 한 줄씩 곱게 새기리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후 디베랴 호수로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베드로와 도마와 나다나엘과 세배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물고기를 잡으러 호수에 나갔으나 밤이 새도록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물가에 서서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던지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 옆에 있던 제자가 “주님이시라” 하니 베드로는 벗고 있다가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왔습니다. 주님은 숯불 위에 생선과 떡을 준비하여 놓으시고 그들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떡과 생선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시고는 “내 양을 먹이라”하셨습니다(요 21장).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통치권이 사탄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다스림과 사탄의 다스림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빼앗으려는 사탄과 영적 전쟁을 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야 합니다.
    • 칼럼
    • 기독시선
    2015-09-03
  • 은퇴식 소회
    은퇴식을 흔히 retire라는 영어 표현을 쓴다. 사전적 의미로는 ‘맡은 바 직책에서 손을 떼고 물러나서 한가로이 지냄’으로 정의된다. 은퇴와 함께 다양한 면에서 압박과 심적 고통을 밀려 온 것도 사실이다. 특히 주변 사람들이 더욱 걱정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 같다. 어느 포털 사전에 찾아보았더니 남편은퇴증후군이라는 나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은퇴남편증후군(RHS: Retired Husband Syndrome)은 ‘남편의 은퇴와 함께 아내의 스트레스 강도가 높아지면서 몸이 자주 아프고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증상을 의미하는 신조어이다. 이들은 이 시기에 잦은 싸움으로 인해 황혼이혼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라고 나와 있다. 필자의 은퇴식도 공식적으로 2015년8월18일에 있었다. 그동안 학교에 몸담고 있어서 세상물정을 모르고 살았기에 둥지를 떠난다는 것이 새가 어미의 둥지를 떠나서 허허 벌판으로 날아가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참으로 귀한 직장에서 몸담았던 것 같다. 나에게 주어진 은퇴사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03년부터 오늘까지 한세 공동체와 함께 할 수 있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이 시간들은 저에게는 참으로 과분한 은혜의 시간이었습니다. 먼저는 위로는 어머니 같은 총장님의 사랑과 배려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집에는 각종 주방기구들이 식탁위에 있어서 날마다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제 밤에 잠잘 때에 사용한 배게도 총장님께서 건강을 위해서 챙겨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이러한 살림살이들을 보면서 어쩌면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 같은 포근함을 느꼈습니다. 또한 형제 같은 우의 속에 근무 할 수 있었음을 감사드립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에 기도를 모아 주시고, 기쁜 일이 있을 때 함께 즐거워 해 주셨던 모습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사랑을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자식 같은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부자간의 관계란 부모가 부족해도 자식은 부모를 존경과 사랑으로 섬겨 줍니다. 많이 부족했지만 제자들은 저에게 아버지를 대하듯이 깊은 마음을 주셨습니다.결국 위로는 어머니와 같은 총장님의 보살핌, 수평적으로는 형제 같은 동료 교수님과 교직원 선생님, 그리고 아래로는 자식 같은 제자들과 함께 한 시간은 저의 인생 최대의 시간이었음을 고백하면서 퇴임사를 마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퇴임식을 마치고 점심시간 식탁에 둘러 않아서 들으니 한결 같이 멋있는 퇴임사를 했다고들 한다. 어떻게 그렇게 멋있는 말을 할 수 있느냐고 질문들도 들어왔다. 이는 평소에 생각했던 내용들이라고 말했다. 이래저래 은퇴는 색다른 의미가 있는 경우라고 생각되어진다. 하루 앞서 여의도 국민일보 빌딩 12층에서는 제자들이 마련한 은퇴식이 있었다. 평소에 학교에서 관심을 갖고 함께 선교를 이야기 했던 제자들 70여명이 모였다. 이 모임을 주선해 주신 분은 필자를 통해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의 베데스다대학교의 총장으로 취임한 정인욱 박사였다. 이 분은 비즈니스를 통해 재력을 쌓았고, 쉽지 않는 시간을 내어서 한세대학교 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M.Div), 심학석사(Th.M), 철학박사(Ph.D)를 취득하고 미국 대학의 총장으로 취임하신 분이다. 애초에는 학교의 강의실에 모여서 간단한 다과와 함께 석별의 정을 나누고자 했던 의도와는 달리 규모와 장소가 한층 높아지게 되었다.은퇴란 retire라고 했다. 이는 타이어를 다시 갈아 끼우고 새롭게 길을 달리게 된다는 의미를 갖게 된다. 인생을 새롭게 개척할 기회가 주어진 것 같다. 한세대학에서는 총장님의 배려로 초빙교수로 다신 교단에 서게 되었다. 그 길이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학생들과 매일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이 될 것 같다. 그리고 그동안 준비했던 세계다문화진흥원 사역이 기다리고 있다. 이미 다문화 교육이 46차에 걸쳐서 800여명을 훈련 시켰다. 세계로평생교육원과 세계로원격평생교육원을 통해서 한국어교원 양성(3급)을 만들어 해외 선교에 필요한 수료증을 만들어 놓았다. 세계로미디어를 통해서 선교학관련 책들이 출간 되었고, 다문화선교론 출간을 예정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세계로선교학교 운영이 기다리고 있다. 차근 차근 그동안 활동하지 못했던 분야를 찾아서 은퇴 이후의 삶을 설계하고 추진하고 싶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5-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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