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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포세대와 선교
    21세기가 되면서 가장 무섭게 변화된 사회상은 N세대의 등장이다. 서울신학대학 외래교수인 전석재 박사는 한국의 N세대(Net Generation)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N 세대란 1990년 후반에 등장한 용어로 컴퓨터 정보 통신의 발달과 함께 자라고, 네트워크(Network)를 자유롭게 다루며, 그 속에서 생활하는 세대를 일컫는 말이다. 한편 10대 후반과 20대 중반으로 진입하는 N세대(Net Generation)를 뜻하기도 한다. 이들은 힙합을 즐기고, 전자메일을 띄우며, 직접대화 보다는 온라인 안에서 네트워크를 즐긴다. 자기가 선호하는 일을 하고, 자신만의 전문분야를 갈고 닦으며, 좋아하는 일에 몰두한다. 스마트폰의 활용을 즐기며, 개성 있게 살면 성공한다고 믿는 다. 항상 색다른 것과 변화를 추구한다. 이러한 N세대는 상상력과 창의력, 예술성과 문화적 감성들을 과학 기술 세계와 접목시키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N세대는 포스트모던의 영향으로 다양한 가치와 감성을 중요시하며, 소비문화 속에서 그들의 삶의 방식과 가치를 결정하고, 변화와 개성을 중요시 하고, 새로운 디지털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특별히 스마트폰 문화 안에서 SNS 같은 커뮤니케이션을 이용하여 서로의 관계를 만들어 가고, 정보를 수집하며, 공동체를 형성함으로 그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또한 N세대들은 자기의 당면한 문제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데, 이성문제, 가족간의 관계, 술, 담배 문제보다 미래에 대한 계획, 직업의 선택, 그리고 입시문제가 그들에게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그러나 이러한 N 세대에게도 엄청난 문제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이른바 ‘오포’이다.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이른바 ‘삼포세대’는 옛말이 되었다. 지금은 이에 더 붙혀서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까지 포기하는 ‘오포세대’가 증가하고 있다. 경향신문 이호준 기자에 의하면 ‘2030세대’(20대와 30대를 아우르는 말) 2명 중 1명은 다섯 가지 중 하나 이상을 포기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한다. 취업포털 사람인(人)은 2030세대 2880명을 대상으로 ‘연애, 결혼, 출산, 대인관계, 내 집 마련 중 포기한 것이 있는가’라고 물은 결과 1660명(57.6%)이 ‘있다’는 답을 했다고 3일 밝혔다.N 세대는 바로 미래의 한국사회를 떠밭치는 세대이다. 어쩌면 기둥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집단이다. 이러한 집단이 ‘5포’를 통해서 활기찬 삶을 포기한다는 것은 매우 슬픈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정치권과 정부에서 수없이 다양한 대책을 내어 놓는 모습도 보인다. 대통령은 청년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 기금도 출연하였다. 사회 지도층들도 뒤질세라 이러한 기금 운동에 참여하는 모습도 보인다. 다만 이러한 운동이 일시적인 윈도우 정책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선교적인 차원에서 교회가 이러한 N 세대들에게 희망을 주는 역할을 서둘러야 하겠다. 한국교회는 다양한 측면에서 사회의 아픈 구석을 치유해 왔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랑의 공산운동을 가르쳐 주고 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초대교회가 성도들 간에 어떠한 일을 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위기 속에서 다섯가지를 포기하고 살겠다고 한 우리 N세대의 문화, 가치, 생활양식을 이해하며, 관계전도를 해야 하겠다. N세대의 문화, 가치, 문제, 갈등, 생활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의 고통을 방치하는 교회가 되지 않아야 하겠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삶의 문제, 스타일, 문화, 갈등, 그리고 진로를 인정받고 싶고, 이해해 주기를 원하며, 대화하기를 원한다. 우리 기독교인의 도전은 성경의 절대적 가치를 변화하는 사회와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비신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성육신적 사역을 하느냐? 바로 이것이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오늘날 N 세대들은 다섯가지를 포기하는 자포자기의 상태에 있다. 그들에게 찬송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게 하는 한국교회가 되었으면 한다.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5-10-17
  • 군주와 군자
    <춘추(春秋)>에는 “송공(宋公=양공(襄公)이 초(楚)나라 군사와 홍(泓)에서 싸워 송이 패했다.”는 아주 짧은 전쟁기록이 있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 기록을 두고 서로 엇갈리는 평가들을 남기고 있어 흥미롭다. <공양전(公羊傳)>에서는, 송과 초 두 나라가 홍수(泓水) 기슭에서 싸우기로 약속했던 모양으로, 송의 양공이 먼저 현장에 도착해서 상대를 기다리고 있는 참에, 초나라 군대가 허둥지둥 강을 건너는 장면을 목격한다. 양공의 측근이 “적군이 홍수를 건너버리기 전에 공격하자”하고 권했지만, 주군의 반응은 달랐다. “군자는 사람을 곤궁에 밀어 넣지 아니하는 법, 적군이 미쳐 대열도 가추기 전에 공격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면서 공격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초군이 강을 건너긴 했지만 미쳐 진영을 가다듬지 못하고 있는 틈을 노려, 이를 기회로 잡아야 한다는 측근의 귀띔도 거절한다. “군자는 상대 진영이 정돈되지 않았는데도 진격명령을 내리는 비겁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초군의 진영이 정돈된 것을 보고서야 전투개시의 북을 울린다. 그러나 양공이 이끄는 송의 군대는 대패하고 말았다. 훗날, <공양전>은 양공이 큰일을 앞두고도 “예”를 저버리지 않은 것은 훌륭한 처사였다고 평가했다. 송이 패한 것은 “훌륭한 군주는 있었으나 그에 걸 맞는 신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더해서 “문왕(文王)이라할지라도 그렇게 훌륭한 싸움은 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찬사를 덧붙였다. 고대에는 편전(偏戰)이라 해서, 미리 약속해둔 시기와 장소에서 양 진영이 전열을 가다듬은 후에, 북소리로 전투를 시작하고 징소리로 마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공양전>에서는, 양공이 기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못 본 채, 적군이 진영을 가다듬을 때를 기다려, 북과 징으로 시작하고 마치는 ‘편전’의 약속을 지켰기에, “‘군자’의 인의(仁義)를 귀히 여겨 대례(大禮)를 지켰다”고 칭찬한 것이다. 한편 <곡량전(穀梁傳)>은, 그 전투가 송의 양공이 지난 해 초나라에 사로잡힌 적이 있어서 그 수치를 설욕하기 위한 복수전이었다고 풀이하는가 하면, <좌씨전(左氏傳)>은 송의 양공이 맹주로서의 체면을 지키려고 초나라를 공격했고 이에 질세라 초나라의 성왕(成王)이 맞선 싸움이었다고 풀이한다. 그러한 상황해석으로 해서 <곡량전>과 <좌씨전>은 <공양전>의 것과 사뭇 다른 평가를 내린다. “적에 비해 우세하면 공격하고, 필적할 만하면 맞서 싸워야하지만, 불리하면 방위 전으로 대처해야 하는 것이 전장에서의 상식이거늘, 요행만을 의지해서 이겨보려는 싸움은 있을 수 없다. 매사에는 기회가 있게 마련이고, 이를 잘 이용해야 기세를 잡을 수 있는 법. 그럼에도 ‘도리’에만 매달려서 주어진 기회를 놓치고 기세를 잡지 못하면서, 도대체 무엇을 하려 하는가. ‘시(時)’와 ‘세(勢)’를 잡지 않고서는 ‘도(道)’를 성취할 수는 없는 법” <양곡전>은 제대로 시세를 판단할 줄도 모르는 무능한 군주 양공을 맹비난한다. <좌씨전>의 비난도 만만치 않다. “송나라 백성이 모두 양공을 비난하자, 양공은 ‘군자는 부상한 자를 따라 잡지 아니하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을 붙잡지 않는 법. 즉 사람을 곤궁으로 밀어 넣지 아니한다. 우리 송나라는 주(周)에게 멸망당한 은(殷)나라의 자손이 책봉된 나라이긴 하지만, 적군의 틈을 노려 공격할 정도로 나약하지는 않다.’하고 말했다. 이에 자어(子魚)가 대꾸했다. ‘군주께서는 전쟁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소. 강적 초나라가 어려움에 처해있는 시기는 바로 하늘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절호의 기회이거늘, 할 일없이 그 기회를 놓친다면 전쟁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이오. 전쟁이란 적을 죽이는 노릇일 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라오. 부상자나 노인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는 것만이 군자의 도리라면, 처음부터 전쟁은 하지 말고 굴복하는 것이 좋았지 않소.”훗날 사마천은 송공의 군자다움을 칭찬하면서도, 나란히 자어의 반론을 인용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또 송나라 군대가 대패해서 양공 자신도 부상을 입는 처참한 결과를 맞게 되자, 모든 국민이 양공을 원망했다는 <좌시전>의 서술도 인용했다. <한비자(韓非子)>의 평가는 아주 날카롭다. “양공은 백성을 사랑하지도 않았거니와 신하를 사랑하지도 않았다. 다만 들은 풍월에 놀아나 작은 의(義)에 사로잡혔을 뿐이었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5-10-17
  • 금식 기도의 의미
    링컨(Abraham Licoln, 1809~1865)은 남북 전쟁이 중반으로 접어들어 한창 치열했던 무렵인 1863년 4월30일 목요일을 ‘국가적인 금식 기도의 날’ 로 정하자는 연설문을 작성한바 있다. 링컨은 연설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것은 비단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우리 온 국민의 의무입니다. 죄와 허물을 겸손히 고백하고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는 나라들만이 축복받을 수 있었다는 숭고한 진리를 깨달아야 하며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를 황폐케 하는 이 남북 전쟁의 참화는 우리의 염치없는 죄에 대한 형벌이 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징조일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우리는 계속되는 성공에 도취되어 아무런 부족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오만해졌고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께 기도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교만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진노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들 자신을 낮추고 국가적인 죄를 고백하며 그분의 자비와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지 국난을 당하면 하나님께 금식기도를 해야 할 그 이유가 무엇일까? 금식기도는 대게의 경우 어떤 중대한 사건을 결정해야 되는 순간이나 절박한 위기에 직면하여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구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실제 성경 속에서 큰 위기와 환난 앞에서 중대한 일을 두고 금식해서 하나님의 기적 같은 능력과 도우심을 체험했던 실례들은 금식에 대한 중대한 기대와 확신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 요즈음 우리나라 지도자들과 국민들을 보자. 나라가 위기에 있는데 기도하지 않는 것 같다. 즉 지정학적인 위기, 가정, 정치, 사회, 경제, 종교, 문화 등의 위기를 보고도 안전 불감증에 빠져 기도하지 않고 안일과 나태에 빠져 있다. 혹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기도를 한다지만 주님 당시 유대교인들처럼 외식으로 기도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성경을 보면 유대교인들은 금식을 많이 하는 것을 신앙 수준의 증표로 삼았다(눅 18:11). 그래서 일주일에 두 번씩은 반드시 금식했으며 어떤 이들은 그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았다. 그리고 머리를 풀고 옷도 아무렇게나 입고 매우 피곤한 모습으로 길거리를 다녔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는 자기들처럼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따지기도 했다(마 9:14). 하지만 금식을 자주하거나 오래하는 것이 자랑이 될 수 없다. 음식을 먹지 않고 자기 몸을 괴롭히는 행동이 하나님이 원하신 금식이 아니기 때문이다(사 58:6, 7). 고로 우리는 금식의 의미를 알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신 참 금식기도를 할 수 있다. 금식기도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첫째 죄에 대한 고백의 표현이다. 금식에 해당하는 원어 히브리어는 ‘춤’이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자의로 일정 기간 먹고 마시는 것을 절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동의어로 종종 쓰이는 히브리어 ‘아나 네페쉬’는 문자적으로 ‘너희는 스스로 영혼을 괴롭게 하라’(레16:29)는 의미이다. 이 두 가지를 원어상의 의미로 볼 때 ‘금식’이라는 것은 음식 먹는 것을 자의로 절제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간절한 심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나는 더 이상 살만한 자격이 없는 자이므로 먹지 않겠다’는 죄에 대한 간절한 고백을 의미한다. 곧 자신의 정욕을 절제하고 하나님께 지은 죄를 회개하며 더욱 영적인 생활을 하고자 금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중요한 일을 위하여 간구할 때 가장 널리 취하는 믿음의 자세 중 하나가 금식기도이다.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먹지 않는 다는 사실은 실로 고통스럽고 심각한 일이다. 금식은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의 깊은 신앙과 결단을 보여 주는 것이기에 간구의 효과를 얻을 수 있고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된다. 둘째 하나님께 대한 절대 신앙의 표현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음식을 먹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이다. 사람은 먹어야 힘을 얻고 모든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식이란 아무 것도 먹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해보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의지하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해결해 주시기를 바라는 전적인 신뢰를 표현하는 것이다(삼하 12:22).셋째 하나님께 대한 절대 헌신의 표현이다. 사람은 음식을 먹어야 힘을 얻고 모든 활동을 할 수가 있다. 헌데 먹어야 할 사람이 금식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육체적인 생명이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 살아왔던 것을 포기하고 이제부터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겠다는 삶의 목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 칼럼
    • 목회자
    2015-10-17
  • (정신재) 화원 안의 큰 행복
    화원 안의 큰 행복 양 숙 정해맑은 미소로 아침 인사고마운 마음으로 기도하고감사가 넘치는 우리 가족오순도순 꽃들이 모여하하 호호 웃음꽃 피는기쁨이 넘치는 즐거운 화원늘 경배하고 위로하며정성을 다해 섬기는주님을 모시고 사는 행복한 터전찬송 소리가 울려 퍼지는화원 안의 큰 낙원 주님은 인간에게 행복을 주시러 오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고,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에게 체험하게 하셨으며,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어 하나님의 자녀가 빛과 소금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아직도 사탄의 세력이 점령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주신 영적 권위를 가지고 영적 전쟁을 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사탄에게 틈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먼저 우리 죄를 회개하고 사탄을 이길 수 있는 영적 권위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써야 합니다. 십일조 생활을 철저히 하며 청지기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합니다.얼마 전 선교사였던 형님이 소천하셨습니다. 그는 생전에 하나님이 부르시면 언제든지 달려가겠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혈액암 판정을 받고 항암제 주사를 맞으면서도, 형제들에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소천하기 며칠 전에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면서, 의사에게 당당히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천국에 갑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형님을 천국으로 데려 가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형제에게 남기고 간 말은 “사랑합니다”였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그가 이 땅에서 하늘 나라로 옮겨 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가족과 형제가 화목한 것은 주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생명과 건강을 주심은 주님의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행복한 일상을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남의 것을 탐내기보다는 청지기로서 나누는 생활을 하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 칼럼
    • 기독시선
    2015-10-10
  • 세계화속의 선교
    선교학자들이 모인 이과수 대회에서 알렉스 아라우조는 “세계화와 복음전도”라는 타이틀을 통해서 글을 발표 하였다. 대부분의 남미 신학자들이 그렇듯이 세계화에 대해서 부정적인 뉴앙스로 논리를 전개하였다. 그분이 써놓은 글을 가지고 최근에 박사과정 수업에서 논제로 삼기로 하였다. 세계화의 진행과정이 그렇듯이 긍정적인 마음들과 부정적인 말들이 동시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세계화에 대한 다양한 글들이 있지만 국내의 한 포털 사이트에 소개된 글이 간편하면서도 잘 다듬어진 이론이라고 판단되어 인용하고자 한다. 세계화라는 개념은 1970년대 이후에 활발히 쓰이기 시작했다. ‘역사적 현상’으로서의 세계화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존재한다. 역사적으로 세계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정치, 문화 세 수준에서 동시적으로 그리고 상호연관을 이루면서 진행되어 왔다.세계화의 중심에는 경제적인 논리가 작용하고 있다. 경제적 수준에서 세계화는 교역·투자·통신 등이 확대되어 국가 간 상호의존이 증대하고 지구적으로 다자간의 협의·조정·협력 등이 강화되는 현상을 뜻한다. 경제의 세계화는 오늘날 세계화를 추동하는 기본 동력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제의 세계화 경향은 최근 더욱 두드러졌는데, 세계무역의 완전자유화를 주장하는 세계무역기구(WTO)의 출범과 초국적기업(MNCs)의 활동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여기서 전후 세계화를 주도한 주체로서 초국적기업의 활동은 생산부문을 지구적으로 재배치하는 신국제분업을 통해 기존 국경의 의미를 축소시켜 왔다.세계화의 또 다른 요소는 문화적 괌계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뉴스뿐만 아니라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대중음악, 전신 및 통신 프로그램 역시 이제는 전 세계 국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세계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러한 문화의 생산, 분배, 소비의 지구적 체제는 현대적인 문화 및 생활양식을 지구적으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수행하는 동시에, 선진국에의 문화적 종속을 심화시키는 부정적 결과를 낳고 있다.이러한 문화의 세계화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미국화(Americanization) 경향이다. 오늘날 어느 나라이건 헐리우드(Hollywood) 영화와 팝 음악, 그리고 디즈니랜드(Disney land)로 대표되는 미국식 대중문화와 생활양식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져 왔다. 지구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이러한 문화적 재구조화는 그 어떤 서구의 정책 및 기술보다도 일상적·문화적 삶과 의식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화 경향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한국사회에서 세계화는 경제와 문화, 그리고 정치 영역에서 다각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먼저 경제 영역에서의 세계화는 1990년대부터 무한경쟁과 국가경쟁력을 부각시킴으로써 한국경제의 탈국가화를 가져 왔으며, 특히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미국식 기업운영으로 대표되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강조해 왔다. 이러한 경제적 세계화는 외환위기를 단시간 내에 극복하는 데 나름대로 기여했지만, 동시에 고용, 소득, 소비에서의 사회 양극화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아 왔다.문화 영역에서의 세계화는 미국화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물질문화에서 정신문화에 이르기까지 미국식 가치와 생활양식의 영향이 증가해 왔으며, 특히 1990년대 이후 이러한 경향은 크게 강화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미국식 생활양식에 맞서 민족주의 내지 민족문화의 중요성이 강조되기도 했지만, 미국문화로 대표되는 서구 문화는 여전히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이러한 세계화의 추세에 대해서 교회는 어떻게 대항을 해야 하는가? 알렉스 아라우조는 “교회가 어떻게 세계화를 대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잘못된 것을 언급하였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교회에 대항하는 것이 세계화 이다. 결국 우리는 이세상의 패턴을 판단해야 하며, 세상의 패턴에 관한 선한 것과 선하지 않는 것을 성령의 권고 아래서 결정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라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세계화를 보면서 긍정적인 요소도 물론 내재되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세속적이고 상실된 인간성을 만들어 나가기 때문에 세계화 속에서 유혹 당하고 협박 하는 압력을 거부 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5-10-10
  •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 이상범목사
    - 오리버 색스 -책가게에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The Man Who Mistook His Wife for a Hat, 1985)라는 아주 별난 제목의 책이 있어 집어 들고 읽기 시작한 것이 그 자리에서 24 꼭지 중 첫째꼭지 <아내를...>를 모두 읽었다. 그리고 책의 저자가 오리버 색스(Oliver Sacks)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 작가를 처음 만나게 된 계기였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나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책을 사들고 집에 와서다. 책상에는 한 저널리스트가 그를 인터뷰해서 쓴 책이 펼쳐져 있었고, 그 책에는 이미 여기저기 밑줄이 그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아내를 모자로 착각”할 정도는 아닐지는 몰라도, 나에게서 이미 진행되고 있는 기억상실증(?)이 한몫을 했던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정이 거들어서 신경증환자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관찰하고 있는 저자의 기록에 특별한 흥미를 느끼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동병상련이라 했던가.그의 글에는 지성과 교양미,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애를 감지할 수 있게 하는 무엇이 있다. 절제에 절제를 더하여 과장과 허식을 용납하지 않는 필치가 오히려 독자를 끌어들이고 있는 것일까. 며칠 전, 외신에서 그의 부음을 접하게 되었을 때는 마침내 올 것이 왔구나 했는데, 그때에야 그가 나와 동갑내기란 것도 알게 되었다. 2015년 2월, 색스는 한 신문에, “눈에 생긴 멜라노마(melanoma)가 간으로 전이되어 말기 암 후기단계에 접어들었다”면서 쓴 그의 소감을 읽었기 때문이다. “남아있는 세월을 어떻게 살 것인지는 자신에게 달려 있다. 두려움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내가 가장 크게 느끼고 있는 것은 감사의 마음이다. 나는 사랑하고, 사랑받았다. 많은 것을 받았기에 뭔가를 돌려주었다고도 생각한다. 독서하고, 여행하고, 사색하고, 그리고 책을 썼다. 작가들과 독자 여러분과 깊이 사귀었다.” 영국출신의 유대인 오리버 색스(1933-2015)는 지난 40년 동안 앨버트 아인슈타인 의과대학에서 신경과의사로 환자를 대하면서, 많은 글을 썼다. 거의가 그가 다룬 환자의 ‘병력’들이지만, 그의 것은 한 마디로 차원이 다르다. “병력은 개인에 대해 그리고 그 개인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질병에 걸렸지만 그것을 이기려고 싸우는 당사자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는 경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전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좁은 의미의 ‘병력’ 속에는 주체가 없다...인간이라는 주체 즉 고뇌하고 고통 받고 병과 맞서 싸우는 주체를 중심에 놓기 위해서는 병력을 한 단계 파고들어 하나의 서사,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 필요가 있다.” “환자에게 생리학적으로도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야하지만, 동시에 한 ‘사람’을 안다는 것도 중요하다...우리는 세포조직 레벨에서는 거의 다를 것이 없지만, 뇌는 일란성 쌍둥이라 할지라도 태어날 때부터 이미 다르기 때문이다.”<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주인공 P는 음악학교의 교사. 상대방의 얼굴은 식별하지 못하지만 말을 듣고 누구인지를 안다. 색스는 이런 증상과 더불어 구체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환자의 고충을 군소리 없이 그러나 소상하게 묘사한다. P는 소화전이나 파킹미터를 보면, 어린 아이의 머리로 착각하고 쓰다듬어 주는가하면, 가구 손잡이의 조각상을 향해서 정답게 말을 걸어주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모자를 아내로 착각할까. 그러나 음악적 재능에서 P는 여전히 뛰어난 예술성을 들어낼 줄 알았다. 색스는 자신을 상실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알뜰하게 말해줌으로 오히려 인간의 뇌 그 자체의 보편적인 가소성, 유연성, 가능성을 부각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포함하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뇌장애를 가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절실한 이야기가 되게 한다. 역자가 쓴 후기에서 몇 구절을 옮겨본다. “‘영혼’은 과학적인 용어가 아니기 때문에...그러나 이 단어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현상이 있음을 그는 믿고 있다. 우리는 24편의 이야기 가운데 어느 것을 읽어도 그의 환자에 대한 애정이 가슴 찡하게 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이것도 ‘영혼’ 이라는 개념을 굳게 신뢰하는 그의 신념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그는 병보다는 인간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인간적인 의사이기 때문이다.”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5-10-10
  • 금식 기도의 의미
    링컨(Abraham Licoln, 1809~1865)은 남북 전쟁이 중반으로 접어들어 한창 치열했던 무렵인 1863년 4월30일 목요일을 ‘국가적인 금식 기도의 날’ 로 정하자는 연설문을 작성한바 있다. 링컨은 연설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것은 비단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우리 온 국민의 의무입니다. 죄와 허물을 겸손히 고백하고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는 나라들만이 축복받을 수 있었다는 숭고한 진리를 깨달아야 하며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를 황폐케 하는 이 남북 전쟁의 참화는 우리의 염치없는 죄에 대한 형벌이 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징조일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우리는 계속되는 성공에 도취되어 아무런 부족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오만해졌고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께 기도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교만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진노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들 자신을 낮추고 국가적인 죄를 고백하며 그분의 자비와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그들에게 남북 전쟁의 승리가 돌아갔음은 물론이다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지 국난을 당하면 하나님께 금식기도를 해야 할 그 이유가 무엇일까? 금식기도는 대게의 경우 어떤 중대한 사건을 결정해야 되는 순간이나 절박한 위기에 직면하여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구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실제 성경 속에서 큰 위기와 환난 앞에서 중대한 일을 두고 금식해서 하나님의 기적 같은 능력과 도우심을 체험했던 실례들은 금식에 대한 중대한 기대와 확신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 요즈음 우리나라 지도자들과 국민들을 보자. 나라가 위기에 있는데 기도하지 않는 것 같다. 즉 지정학적인 위기, 가정, 정치, 사회, 경제, 종교, 문화 등의 위기를 보고도 안전 불감증에 빠져 기도하지 않고 안일과 나태에 빠져 있다. 혹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기도를 한다지만 주님 당시 유대교인들처럼 외식으로 기도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성경을 보면 유대교인들은 금식을 많이 하는 것을 신앙 수준의 증표로 삼았다(눅 18:11). 그래서 일주일에 두 번씩은 반드시 금식했으며 어떤 이들은 그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았다. 그리고 머리를 풀고 옷도 아무렇게나 입고 매우 피곤한 모습으로 길거리를 다녔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는 자기들처럼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따지기도 했다(마 9:14). 하지만 금식을 자주하거나 오래하는 것이 자랑이 될 수 없다. 음식을 먹지 않고 자기 몸을 괴롭히는 행동이 하나님이 원하신 금식이 아니기 때문이다(사 58:6, 7). 금식기도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첫째 죄에 대한 고백의 표현이다. 금식에 해당하는 원어 히브리어는 ‘춤’이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자의로 일정 기간 먹고 마시는 것을 절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동의어로 종종 쓰이는 히브리어 ‘아나 네페쉬’는 문자적으로 ‘너희는 스스로 영혼을 괴롭게 하라’(레 16:29)는 의미이다. 이 두 가지를 원어상의 의미로 볼 때 ‘금식’이라는 것은 음식 먹는 것을 자의로 절제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간절한 심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나는 더 이상 살만한 자격이 없는 자이므로 먹지 않겠다’는 죄에 대한 간절한 고백을 의미한다. 곧 자신의 정욕을 절제하고 하나님께 지은 죄를 회개하며 더욱 영적인 생활을 하고자 금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중요한 일을 위하여 간구할 때 가장 널리 취하는 믿음의 자세 중 하나가 금식기도이다. 금식은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의 깊은 신앙과 결단을 보여 주는 것이기에 간구의 효과를 얻을 수 있고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된다. 둘째 하나님께 대한 절대 신앙의 표현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음식을 먹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이다. 사람은 먹어야 힘을 얻고 모든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식이란 아무 것도 먹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해보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의지하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해결해 주시기를 바라는 전적인 신뢰를 표현하는 것이다(삼하 12:22). 셋째 하나님께 대한 절대 헌신의 표현이다. 사람은 음식을 먹어야 힘을 얻고 모든 활동을 할 수가 있다. 헌데 먹어야 할 사람이 금식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육체적인 생명이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 살아왔던 것을 포기 하고 이제부터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겠다는 삶의 목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 칼럼
    • 목회자
    2015-10-10
  • (정신재)수박을 쪼개며
    수박을 쪼개며-평화를 위한 기도시 안 혜 초수박 한 통을 반으로쪼개 그 반쪽을다시 또 반으로쪼개려다가 멈칫손놀림이 무거워진다.절로 또 하나님 소리가새어 나온다. 가슴에서머리에서 뼈마디 마디에서무슨 일이 일어나지않게 하소서 …(하 략)… 얼마 전 C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시던 필자의 형님이 소천하였습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어, 형님은 열악한 선교지에서 동료 선교사들과 하찮은 음식을 먹고, 황사 바람과 싸우면서, C국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다가,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니,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영적 전쟁을 한 형님이 애썼다고, 주님이 천국으로 데려가셨습니다. 이제 남아 있는 자가 형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웃과 형제와 가족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체현되는 삶이 될 줄 믿습니다.“수박을 쪼개”다 보면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 내가 이제껏 물질적 욕망과 명예를 위해서 살아오지 않았는지.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보입니다. 주님이 나를 살아 있게 하시고, 글로써 “아름다운 땅”(<신명기> 8:7)에 이르게 하시며, 가족? 형제? 이웃과 화목하는 축복 주셨음을.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몸소 십자가 보혈을 흘리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심정으로 우리를 친밀하게 대하여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려고 옆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주님의 계획대로 하나님 나라와 의가 확장될 줄 믿습니다. 주여! 주님 뜻대로 이루소서.이 땅에 남북간에 평화가 정착되게 하시고, 한일간에 진실과 신뢰가 서게 하시며, 세계 평화를 위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자들이 일어서게 하소서. 주님 뜻대로 새벽마다 기도하는 이들의 소망을 이루어 주시고, 물질과 육신보다는 영적 권위를 가진 자들이 많이 나오게 하소서. 전지 전능하신 주님 뜻대로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 칼럼
    • 기독시선
    2015-10-02
  • 복음의 중심인 그리스도
    선교사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는 그리스도에 대한 소개이다. 사실 그리스도교 전파자의 과제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남에게 소개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일은 분명히 사도들이 지배적인 관심사였고, 이러한 관심은 사도행전 첫 머리에 기록되어 있는 설교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우리가 전파하도록 부르심을 입은 바로 그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유명한 학자인 위버는 이에 대해서 세가지 그리스도가 우리세계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즉 그리스도(Fale Christs), 왜곡된 그리스도(Distorted Christs), 그리고 성서적 그리스도(Biblical Christs)이다.첫째는 거짓된 그리스도(Fale Christs)이다. 그리스도에 관한 잘못된 견해는 그를 너무 인간화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신적인 예수를 가지지 못하게 하거나 그를 너무 신격화함으로써 더 이상 인간 예수를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예수를 “그냥 선한 사람”(Just a good man)이라고 보는 자유의적 견해는 분명히 전자의 범주에 빠지는 것이다. 이 견해는 19세기의 역사적 예수에 관한 탐구에서 유래되었다. 이 탐구는 예수의 복음(Gospel of Jesus)과 예수에 관한 복음(Gospel about Jesus)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가정 하에 행해진 것이었다. 예수에 관한 복음은 초기 자유주의자들이 말했듯이 제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복음이었다. 그들은 예수를 하나의 신으로, 형이상학적 피조물, 초자연적 실재로 만들었다. 두 번째는 왜곡된 그리스도(Distorted Christs)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문화의 수효만큼이나 많은 사고의 관점들이 있겠지만 그 중 세 가지를 언급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그것은 서양의 그리스도와 동양의 그리스도, 그리고 제3세계의 그리스도가 있다.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백인이고, 앵글로색슨족이며, 중산층에 속하는 그리스도는 논리적이고 교양 있고 세련되고 예의바른 누구나 좋아하는 대중 예수이다. 동방에서는 다소 신비적이고 사적인 이미지를 따라 빚어진 그리스도 상을 가지고 있다. 이 예수는 경험에서 다소 멀리 떨어져 있는 분으로서 그는 동정녀의 팔에 안긴 아기이거나 교회의 성상과 벽화에 그려져 있는 만물의 심판주이시다. 예수와 가까이 하려는 사람들은 특히 고행과 금욕적인 생활의 실천으로 예수님께 다가간다.제3세계의 그리스도는 혁명가로 나타난다. 그는 헤진 옷을 입고 있으며 가난한 자와 동일시된다. 그는 피킷을 들고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선동하거나 게릴라 단원을 지휘하기도 한다. 그가 어디 있든지 그는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과 모든 비참함에서 해방을 위해서 투쟁하는 한가운데 서 있다.세 번째는 성서적 그리스도(Biblical Christs)이다. 교회의 과제가 성서적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성서적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현재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간과되기 쉬운 두 가지 성서적 그리스도 상에 국한시키려 한다. 그것은 제2아담과 우주적 그리스도 이미지이다. 제 2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 이미지는 신약성서의 여러 구절들에서 발견되는데 가장 현저한 것을 로마서 5:12-21에 나타나 있다. 그는 그가 하나님과의 연합 안에서 그리고 창조질서 안에서 누리던 현실에서부터 분리되고 소외되어 땅 위에 있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에서서 멀어지게 된 것은 인간이 선택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구원은 또 하나의 인간 즉 하나님께로 향해 감으로써 삶과 창조질서를 재생시키려는 또 하나의 인간의 선택이라는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이 인간이 바로 그의 성육신과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제 1아담이 행한 것을 뒤엎고 인간과 피조물을 회복시키는 신인, 곧 그리스도이시다. 제 2아담인 그리스도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의 능력을 통해서 인간과 피조물을 그 두 번째 사다리로 끌어올려 만물을 새롭게 만든다. 제 2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 이미지는 바로 그가 고쳐서 행했다는 것이다. 우주적 그리스도는 제 2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 이미지와 그 안에서 모든 것을 다시 반복한다는 개념에 빠질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사도시대에 예수관의 명백한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창세기 1:26에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수인 제 2아담을 완전한 하나님의 이미지 즉 완벽하고 완성된 인간이다. 이 예수를 복음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 www.world.ac.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5-10-02
  • 유방(劉邦)의 경역학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영웅호걸들이 발호(跋扈)하는 법. 중국의 진 왕조(秦王朝) 말기가 그랬다. 이름이 알려진 영웅들에게는 자신의 꿈이나 앞날을 맡겨 보려는 인재들이 모여들었지만, 크고 작은 영웅들 가운데서 최종적으로 가장 많은 인망을 모아드린 영웅이 바로 유방(劉邦)이었던 셈이다.인망이 유방에게 쏠린 것은, 첫째로 그가 가진 “들을 귀” 때문이었다고들 말한다. 다른 영웅들이 자존심을 앞세워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하지 않는 반면, 유방은 아랫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그것이 가장 강력한 경쟁자 항우(項羽)에게는 없는 장점이었기에...항우가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자신의 탁월한 능력 때문이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아랫사람의 도움을 받아드릴 여지를 내줄 수 없었던 것이다. 명 참모로 알려진 진평(陳平)과 가장 뛰어난 무장 한신(韓信)도 원래 항우의 사람이었지만, 주공을 버리고 유방의 사람이 된 것은 항우와는 달리 유방이 “들을 귀”를 가진 영웅이었기 때문. 경청(傾聽)이란 “남의 말을 공경하는 태도로 듣는 것”. 들을 청(聽)자의 자원(字源)을 보면, “聽”의 오른쪽 부분이 덕(德)의 생략형으로 되어 있다. “德”의 원래 글자는 덕(悳). “곧은 직(直)” “마음(心)”이 곧 덕이라는 뜻이란다. 그러니까 “聽”은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곧은 마음과 귀로 듣는 자세이다. 또 “聽”의 다른 쪽 하단을 보면, 한 일“一”과 마음 심“心” 으로 읽을 수 있는데, “마음을 하나로 모으다.” 는 뜻인즉, 들을 마음이 없으면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정신을 집중해서 들어야 제대로 들을 수 있다는 것. 당시 중국은 의협(義俠)을 중시하는 풍조였다. 유방이 많은 신하를 통솔할 수 있었던 것은 “들을 귀”를 가진 “의협”의 사나이였기 때문. 유방이 존경하는 인물 중에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이 있었다. 이웃 조(趙)나라가 진(秦)의 공격을 받아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신릉군의 형은 진의 보복이 두려워 동맹국인 조나라에 명목상의 원군만을 보내면서도, 부하 장군에게는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도록 당부한다. 신릉군은 의협심을 배신하는 형의 태도에 화가 나서, 원군을 이끄는 장군을 죽이고 스스로 장군이 되어 진나라와 싸워 대승한다. 그의 의협심과 군사적 재능이 세인의 신뢰를 얻게 했던 것이다. 유방은 그러한 신릉군을 이상적인 지도자로 마음에 두었다. 자신은 신릉군과 같은 명문출신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힘없는 자들을 도와, 힘 있는 자들을 누르는” 인간이 되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유방은 패공(沛公)이라는 지방관원으로 있다가 거병하여 반란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되는데, 의협심은 그의 일생을 같이 한다. “패공은 이해득실로 군을 움직이지 않는 의협의 사람”이라는 평판이 늘 그를 따라주었다. 인재가 모여들면 용인술이 요구된다. 유방의 인재등용 법은 남달랐다. 소개도 없이 불쑥 나타난 인물이라 할지라도 쓸 만하다 싶으면 당장에 큰 자리를 주곤 했다. 장량(張良)과 한신(韓信)의 경우가 그랬다. 그러한 “유방 표” 용인술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한 역사 소설가는, 이미 자리 잡기 시작한 유교적 가치관에 사로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라 풀이한다. 조직을 정리하고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유교적 예법이나 사상이 편리한 도구가 될 수 있는 반면, 노장사상과 같이 무위자연(無爲自然)하는 이념은 조직을 흐트러지게 한다는 풍조 속에서, 유교적 이념이 조직을 경직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단점을 직시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가. 경서를 깡그리 암기하고 있는 수재만이 요직을 차지하는 조직은 보신과 선례주의가 판을 치게 마련인 것을. 장량이나 한신이 발탁되는 것을 지켜보는 거병 초기부터 그를 따른 중신들이 불만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터. 그러나 그들이 불평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은 근본적으로는 자신들이 주군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으리라. 어찌 주군의 뜻을 속속들이 알 수 있으랴만, 거의 언제나 바람직한 결과로 이어져왔었다는 신뢰가 있었기에, 맡기고 기다릴 수 있었으리라. 경영학이 되었거나, 용인술이 되었거나, 밑바닥을 흐르는 것은 소통과 신뢰이고, 그 둘은 별개의 것이 아닌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5-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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