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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성인신’의 신앙 배성산목사
    “도성인신(道成人身)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 구원의 아버지 하나님으로 계시하신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 증거하고 고백하는 땅의 몸으로 실행하는데 신앙의 자리가 있음을 알게 한다. 성서가 증거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결코 하나님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고 결단하고, 그 결단 안에서 신앙의 삶을 사는 것이다.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특정한 교리나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원칙을 전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어떻게 하면 축복을 받는가 하는 기복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시를 있는 그대로 진술(description)하는 것을 일생의 과제로 삼은 신학자 칼 바르트가 주는 교훈은 대단히 진지하고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바르트 신학이 가진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대를 인도하는 예언자적 신학이란 점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는 확신 속에서 그 시대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것처럼, 바르트 역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대를 분별하고 인도하여 갔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열려 있었기 때문에 200년 자유주의 신학의 무거운 전통을 돌파할 수 있었고, 독일 전체가 히틀러를 추종할 때 ‘아니요’라고 외칠 수 있었고, 또한 일생 동안 그 어떤 신학적 틀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 신앙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삶을 살아간 사람으로서 이제 그는 신앙의 삶과 신학 전체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시대를 분별하는 예언자적인 믿음을 가지고 믿음의 경주를 아름답게 달려갈 것을 촉구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4-09-26
  • 심령과 마음이 가난한 복 - 배성산목사
    예수께서는 당시 자신이 살던 유대 사회의 수많은 고정관념을 버리게 함에 주목한다. 부자가 되려는 속성을 가진 자들을 향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장차 부자가 될 것이다”라 말씀하지 않으시고, 가난하기 때문에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라” 했다. 마태복음에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5:8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심령’이라는 말과 ‘마음’이라는 말은 같으나 어떤 차이가 있는가? 먼저 영역 성경(NIV, NKJV, NASB, TEV)에는 모두 이 둘이 각각 ‘spirit’(심령)과 ‘heart’(마음)로 번역되어 있다.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에는 모두 ‘마음’으로 번역한다. 성서의 영역본에 나오는 심령은 ‘spirit,’이나 ‘마음’을 ‘heart’나 ‘mind’로서 가슴에서 나오는 마음을 ‘heart’로 말하고, ‘mind’는 머리에서 나오는 마음으로 구별한다. 예를 들면 시편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여기에 절규는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 심령으로 통회하는 것은 밧세바와의 간음을 그 마음에 두었기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하는 단계에서 구원의 즐거움이 자기 심령에서 사라지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가 마음이 가난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4-09-19
  • 스스로 있는 자 - 배성산목사
    "스스로 있는 자"는 우리 아버지 되신 하나님으로 만물의 배후에 스스로 계시며 존재하는 힘의 원리이다. 만물의 배후에 있는 그 원리는 전지전능하여 우주 속에 들어있는 거룩한 영(靈)으로 하나님은 모든 선한 것들을 인도하시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유일심(唯一心)이며 사람이 살면서 겪는 모든 것들의 근원이며 모든 것들을 하나로 결합하는 진정한 사랑의 근원이다. 하나님은 결코 죽는 일이 없는 생명 자체이며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자연의 창조주이며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자존(自存)하는 신으로서, 그의 본질은 한마디로 말하여 사랑(agape)`이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존재와 떨어져 있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로서의 관계하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써 세상의 창조와 구원 사업을 이룩하는데, 그 사업은 바로 인류의 삶속에서 구현된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이 존재하여야 한다. 또한 하나님이 존재하려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계절에 시절을 따라 생사화복의 과정에 삶의 도리와 자연의 이치가 생명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성장의 과정이 있어야 하고 만사가 인과의 법칙을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이치적인 장치가 마련되어 무슨 일에든지 그 결과가 그 원인에 정비례한다.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는데 팥나는 것이 심는 대로 거두는 이치를 알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의 시공간은 어느 것에도 속박 받지 않는다. 삶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어떤 이유나 원인이 있고 그 생성과정을 따라 살도록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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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성산
    2014-09-05
  • 가자(GAZA)지구 평화는 있는가? - 배성산목사
    가자(GAZA)지구의 분쟁을 보며 전쟁 준비와 힘의 논리에 의해 평화가 성취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 ‘평화’라는 이해를 가지며 이곳의 분쟁에서 성서의 구약은 '정의와 평화'를 어떻게 지켜왔는가를 재점검하게 한다. 지금 가자(GAZA)지구는 구약의 역사와 함께 지녀 온 주변의 영역은 참다운 평화를 주지 못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강자와 약자,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간에 그 간격을 넓히고 상대적 빈곤을 느끼게 하며 인간을 기계화하고 자연계 전체를 공해문제와 핵전쟁의 위기에로 몰아가고 있음을 세계는 보고 있다. 성서는 하나님을 참 평화의 근원으로 고백하고 이 세상 안에서의 참 평화실현을 하나님의 선물로 약속하고 있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4-08-29
  • 영화 “명량”을 보며 - 배성산목사
    1597년 임진왜란 6년, 오랜 전쟁으로 인해 혼란이 극에 달한 조선. 무서운 속도로 한양으로 북상하는 왜군에 의해 국가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누명을 쓰고 파면 당했던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건, 전의(戰意)를 상실한 병사와 두려움에 가득 찬 백성, 그리고 12척의 배 뿐. 반면에 일본의 잔혹한 성격과 뛰어난 지략을 지닌 용병 ‘구루지마’가 왜군 수장으로 나서자 조선은 더욱 술렁인다. 330척에 달하는 왜군의 군선이 속속 집결하고 압도적인 수의 열세에 모두가 패배를 직감하는 순간, 이순신 장군은 단 12척의 배를 이끌고 명량 바다를 향해 나서는데… 12척의 조선과 330척의 왜군 역사를 바꾼 위대한 전쟁이 시작되는 눈앞의 현실에서 전투 하루 전날 이순신은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필생즉사, 필사즉생(必生卽死 必死卽生)” 휘호로서 마음에 결정을 표명한다. 그러나 한편 이순신은 조선 곳곳에 퍼져 있는 두려움으로 인해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사람마저 나라와 민족을 포기해 버리는 모습에 책임을 통감하고 이순신이 타고 있는 대장선에의 그 고뇌는 그 현장이 쓸쓸하기 그지없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4-08-21
  • 구원의 세월 2 - 배성산목사
    나의 삶에서 겪은 즐거움과 행복이, 어려움과 과오가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나무의 나이테처럼 켜켜이 쌓여가는 것이라면 나이들어 늙어가며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질 것이다. 노인의 삶에는 그리고 그가 살아 온 삶의 흔적에는 그들의 세월이 쌓여있다. 나이를 먹으면 세월이 쌓이고 그 쌓인 세월은 지나온 삶에서 회한(悔恨)을 느낀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하루 24시간이 주어졌지만 미래를 준비하는 자에게는 긴 시간이고 허비하는 자에게는 짧기만 한 것이 시간이다. 시간에 따라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길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한다. 때문에 시간의 양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시간의 질이다. 게으름을 피우다 중요한 순간에 시간이 없다고 불평하기보다 매일 주어지는 시간에 성실하여 누구보다 세월을 자기만이 갖는 때로(기회) 소유로 삼는 것이 좋다.(엡5:16)고 한다. 우리는 항상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사는가? 성서에서 ‘세월(헬:기회를 사라)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말을 알게 한다. 시간의 최초에 대한 묘사는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이 우주의 시간적 시작이 시간 안에서인지 혹은 시간과 함께인지의 여부에 대한 관심은 불문하고라도 그리스도교는 그동안 인간이 모든 피조계를 지배할 수 있는 지위를 지니고 있고 그 피조물들의 존재 이유는 삶의 목적에 따라 시간에 '때'를 따라 봉사하기 위함이요 인간이 그 나름대로의 목적을 위해 자연을 이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쳐 왔으나 오늘의 지구가 생태기에 위기를 초래하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것에 인간의 죄와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왜곡에 연유함을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4-08-14
  • 구원의 세월 1 - 배성산목사
    흔히 사람들은 죽을 이유를 찾지 못해 시간을 무서워한다. 가는 세월에 한탄을 한다. 늙음에 부족함을 느낀다. 그래서 늙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오는 시간을 막을자 없고 받아 들여야 한다. 몸은 시간이 가면 노화가 생겨 늙는다. 그리하여 신앙하는 자는 영원 앞에서 저 세상을 찾고 하나님을 찾는다. 여기에 시간 이해를 세월로 바꾸어 인생의 삶을 엮는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여려 면을 갖고 있다. 흘러 가버리는 물을 가두어 다목적으로 활용하듯 흘러가는 시간을 자기 시간 곧 자기와 관련된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예를 들면, 예수의 죽음은 이 천년 팔레스틴에서 있었던 일이지만, 그 사건이 갖는 특별한 의미와 뜻이 분명하게 밝혀졌고 또 나에게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사건은 흘러가 버린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흘러가고 있는 사건이 된다. 이제 그 사건은 나의 결단을 통해서 나의 시간 속에서 나의 삶 속에서 재현되어질 귀중한 사건으로 “구원의 세월”을 갖게 한다. 따라서 예수의 삶과 죽음은 먼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나의 삶과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사건이 되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4-07-25
  • 삶에서 예수의 관심 - 배성산목사
    세월호로 제주도 수학여행에 나선 안산 단원고 2학년 고교생 등 325명을 포함해서 승객 전원이 탄 여객선이 2014년 4월16일 오전 전남 진도 해상에서 침몰했다. 세월호 침몰 사고가 지난 6. 4 지방선거의 판도를 흔들고 있음은 그동안 우리 사회의 안전 불감증에 대한 참상이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 주었다. 세월호 참상사고(慘狀事故) 수습 및 대응과 관련한 정부 책임론이 확산되면서 지방선거 쟁점은 세월호를 중심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선거 후보자들은 세월호 사고, 초기 입장을 최대한 자제했지만 정부 대응 부실이 연이어 드러나면서 ‘안전 대한민국’을 모토로 선거운동에 적극 나서는 모습이다가 선거도 이제는 끝이 났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현실은 너무 잔혹하다. 이렇게 전 국민이 함께 아픔을 겪어본 대참사도 드물것이다. 이전에도 수많은 참사와 사고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이번 사건은 대한민국 사회 전체를 흔들어 놓은 총체적 부실의 희생이었기에 더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희생자의 상당수가 부모의 희망이었고 사회의 미래였던 젊은 청소년들이라는 사실이 더 고통스럽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무관심과 무책임한 제도들. 관행처럼 살아왔던 우리의 삶은 사회적 부실이 예고된 인재임을 말해줄 때마다 국민들의 분노와 고통은 더 커져만 갔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4-07-17
  • 걸핏하면 “하나님의 뜻” 2 - 배성산목사
    "불법한 악한 세력들이 더 이상 이 나라를 더럽히기 전에 속히 이 나라와 이 땅을 구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을 살아가는 선량한 주님의 백성들과 무죄한 이 땅의 선량한 백성들을 악하고 불법한 자들의 권세에서 속히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또한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아버지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게 하시옵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속히 이 땅에 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하는 것이다. 이렇게 구하는 자의 그 대상이 누구이며 그 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 분의 뜻도 모르고 자기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좌지우지해서는 아니 된다. 한 예를 들면 미국 국민의 정서에는 깊이 뿌리박힌 신화가 있다. 그것은 미국의 건국이념이다. 미국은 하나님이 계획하고 택한 하나님의 나라라는 건국신념이다. 그런데 2001년9월11일 뉴욕세계무역센타에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 조직인 알 카에다 등 이슬람 테러조직에 의한 911 사태는 미국의 특수주의 건국신화를 무참히 깬 사건을 본다. 당시 미국 대통령 부시는 그 때에 미국의 건국신화로 국민의 관심을 전향시키려 하나님의 선택으로 세워진 미국에 도전하는 세력은 '악'이라고 규정한다. 이제 미국 대중은 저항할 줄 모르게 되었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4-07-10
  • 삶이냐 물질이냐 - 배성산목사
    그동안 우리 경제는 초고속으로 성장해 왔고 사람이 삶을 영위하는 의식주문제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로워졌다. 1963년에 1백 달러에 불과하던 소득이 1977년에 1천 달러를 돌파하고 1995년에 거의 1만 달러를 달성했으니, 비록 지금은 주춤한 상태지만 한국경제는 성장가도를 질주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려웠던 그 시절과 비교해서 오늘 우리는 그만큼 더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더 잘 살게 되었지만 낮은 생활의 어려움에 처한 서민경제와 부를 소유한 부유층과 빈부격차가 심해 상대적 박탈감도 더욱 증폭되고 있다. 근대화의 초기에는 절대빈곤의 해결이 중심과제였다. 70년대까지의 우리 경제가 그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경제가 성장하고 절대빈곤문제가 해결되어 감에 따라 사람들의 욕구는 끼니를 때우려는 생존욕구에서 또 다른 욕구로 변화하게 되어 경제성장률이 낮다든지, 생활수준의 향상이 느리다든가 하는 데는 무관심하고 공평욕구가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사회현상을 보게 된 것이다. 갈수록 사람들은 과거의 생활과 현재의 생활을 종적으로 비교하여 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 나와 남, 그리고 우리나라와 남의 나라를 횡적으로 비교하게 되었다. 여기에 상대적 박탈감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효율만 따지고 공평에 대한 사회적 욕구를 가볍게 생각하는 데서 기인하는 데서 이러한 경제가치관의 경직성 때문에 경제의 소외지대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중소기업인들이 가지는 불만, 노사관계에서 노동자들이 가지는 불만, 빈부격차에서 국민의 소외감은 우리사회의 욕구불만과 상대적 박탈감에 일어나는 '경제정의'를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4-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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