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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활의 첫 열매
    각급 학교의 금년 1학기는 온라인 수업으로 끝날 것 같다. 우리 손주들이 한창 활동량이 많을 때에 집안에만 있게 하니 갑갑증이 심한가 보다. 손자가 진지하게 질문한다. “할아버지 공부를 쉽고 빠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나는 대답대신 어릴 때 들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할아버지 고향에는 참외농사를 많이 하는 곳인데 참외를 저녁에 심어서 아침에 따먹을 수 없단다. 씨를 심고 싹이 나고 덩굴이 뻗어나고 눈보라와 추위를 견딘 후, 꽃이 피고 나서 참외는 콩알만하게 열리지만 또 밤낮을 보내고 시간이 흘러 비로소 노란 참외, 맛있는 과일이 열리게 된단다. 이런 어려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참외를 얻을 수 없단다. 인내와 수고, 땀 흘리지 않고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듯이 공부도 그렇게 해야 된다고 말했다.우리는 강한 결과주의 병에 걸려 있다. 움직이지 않고 노력하지 않고 수고의 땀을 쏟아 붙는 과정이 생략된 영광의 결실만 얻으려고 하는 사고와 행동양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한 계단 한 계단 모진 비바람을 이기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붙잡고 굵은 줄을 붙잡고 한탕을 잘해서 성공을 노리는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병이 만연해 있다. 이 병이 우리사회의 약점이다.십자가 없는 부활의 영광, 고난이 없는 행복, 눈물이 없는 성취, 땀 흘림이 없는 성공을 얻으려고 하면서 과정이 생략된 영광을 사모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독생자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고난을 통한 구원도 기복신앙이 되었고, 세속적인 가치와 축복이 전도의 도구가 되기도 하였다. 이것을 신앙의 유일한 열매로 삼고 있다.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있다. 우리는 다시 부활절을 맞았다. 신앙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이라는 것을 새롭게 깨달아야 한다. 행복과 기쁨, 영광됨에 앞서 내가 누구냐? 왜 하나님의 독생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나? 하는 그 의미와 가치가 아니라 사실에 관한 것을 인정해야 한다.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은 하나님이 누구시며 나는 누구냐 하는 것을 가장 잘 드러낸 계시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 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라고 고백을 하는 것이다. 그 말씀은 요한복음 1장이 선언하는대로 곧 하나님 자신이시고, 세상의 창조자시며, 우주의 섭리자이시다. 그가 나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시고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여기에 우리의 신앙의 초점이 있는 것이다.내가 얼마나 복 받았느냐? 영광스러우냐? 성공의 자리에 섰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약속하셨고 명령하신 것 속에 내가 있지 아니하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복이고 영광이고 성공이라는 것이 위태로운 것일 뿐이다. 죄와 허물로 죽은 내가 나의 부활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 때문에 우리의 전파하는 것과 믿음이 헛되지 않는 것이다.성경은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16-20)라고 했다. 기독교의 부활신앙은 우리가 믿는 도리의 근본이다. 인간은 죄로인해 누구나 죽지만 유독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으로 부활 하셨다. 성경의 기자들은 확실히 고난과 영광을 동시에 보았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함임을 확신했던 것이다.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삶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신앙 안에서 이 열매를 얻기까지 십자가를 지고 기쁨으로 나아가자. 이 과정을 한 단계 한 단계 지나서 부활의 첫 열매에 동참자가 되자.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계 20:6). 
    • 연지골
    • 토요시평
    2020-04-10
  • 한국교회 첫 단추는 잘 꿰었는가?
    우리는 위험한 시대를 어렵게 살고 있다. 지난 1월 20일에 한국에서 중국 우한발 폐렴 즉, 코로나바이러스 첫 확진자가 나왔을 때만 해도 지금처럼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 역병(疫病)은 이미 지난 해 12월부터 중국에서부터 퍼지기 시작한 것인데(그래서 ‘코로나19’로 명명됨) 우리나라는 한 달이 지나서야 첫 확진자가 나온 것이고, 그 후로도 2월 18일 신천지 신도에 의한 31번째 확진자가 나올 때까지도 크게 염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3월 23일 현재, 8,961명의 확진자가 나왔고(사망 118명), 세계적으로는 34만 8,449명의 확진자와 15,302명의 사망자가 나온 상태이다. 물론 완치자도 99,078명이나 나왔다. 특히 이탈리아 같은 경우는 확진자 59,138명 가운데 5,476명이 사망하여 9%대가 넘는 가장 높은 치명률을 보이고 있다. 이 코로나바이러스는 세계에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본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은 당분간 계속 될 것이고, 이로 인한 각종 손실과 고통은 이루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야말로 지금은 ‘팬데믹 패닉’(전염병의 세계적 유행)인데, 인간의 삶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고 피해를 주는 것이 경제 분야이다. 그 경제가 심상치 않다. 세계 경제를 떠받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미국의 경제가 2020년 2분기 성장이 최대 마이너스 50%까지 갈 것으로 전망한다고 하니, 우리나라 경제는 어떻게 되겠는가? 미국은 과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루고, 경제 대공항과 금융 위기 등을 여러 번 겪었는데,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문제는 이런 충격들을 훨씬 뛰어넘을 것이란 예상을 하고 있어, 무겁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우리나라도 올해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성장을 보일 것이란 예측이 나오고 있어, 불안한 현실이다. 그런데 중국 우한발 코로나바이러스 문제는 이런 경제적이고, 육신의 삶에 대한 심각한 현상과 어려움도 있지만, 기독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영적인 삶의 예배와 신앙생활에도 심대한 타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이 나타나자, 국회와 정부와 정치권에서는 재빨리 교회의 예배 중단 문제를 들고 나왔다. 지난 7일 국회에서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종교집회 자제 촉구 결의안’을 의결하였다. 또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같은 날 페이스북을 통해,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을 고려중이라고 하더니, 급기야 3월 19일에 실행에 들어간다고 하였고, 박원순 서울시장도 같은 내용을 발표하였으며, 20일에는 대통령도 이를 적극 지지한다고 하였다. 정치권과 정부가 사실상 코로나바이러스 문제를 빌미로, 교회에서의 예배 중단을 공권력으로 막겠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발 빠르게 2월부터 문제가 발생한 교회에서 ‘온라인 예배’로 드리기 시작하였고, 2월말부터는 여러 교회들이 자발적으로 ‘영상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협력은 왜 저평가되고 있는가?정부나 지자체가 질병확산을 막겠다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신천지를 뺀 정통교회에서의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 지금까지 ‘교회’로 거명된 곳이 13군데 되지만, 2군데는 이단이고, 1군데는 천주교 교인들이고, 1군데는 교회가 아닌 경로당이고, 1군데는 초기 마스크 착용이 일반화되기 전의 사례였고, 3군데는 모두 음성판정이 났고, 2군데는 교회에서 예배를 통해서가 아니라 청년 수련회를 통해서였고, 3군데는 신천지의 활동과 관련되거나 된다는 의혹을 받는 곳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 전체를 잠재적 질병 확산지로 단정하여 전면적으로 예배를 제한하며, 또 수칙을 위반할 시, 구상권(求償權)까지 발동한다는 것은 아주 지나치다. 문제는 한국교회가 이런 위중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급하게 오프라인 예배를 중단하고, 온라인으로 전환했으며, 그렇지 못한 교회들은 일방적으로 예배를 중단당한 것이다. 벌써 한 달 정도를 그렇게 하고 있는데, 이런 모습이 언제까지 갈 것인가? 한국교회 선교 135년 동안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일제 강점기, 6·25전쟁 중에도 예배는 쉬지 않았다. 그런데 너무나도 쉽게 예배당을 비운 것은, 권력 앞에 예속되었다는 역사적 판단의 단초(端初)가 되지는 않을까? 한국교회, 역사상 초유의 사태에서 과연 첫 단추를 잘 꿴 것인가? 이런 상황들에 대하여 전문가들은 ‘영적 공동체의 역동성을 상실할 것’이라고 염려한다. 또 성도들에게 은연중에 ‘신무교회주의’를 심어주지 않을까 우려한다. 앞으로도 이와 비슷한 바이러스에 의한 인간 공격은 자주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럼 그때마다 교회는 문을 걸어 잠그고, 외부의 요구대로 할 것인가?
    • 연지골
    • 토요시평
    2020-03-27
  • 국회의 ‘종교집회 자제 촉구 결의안’을 접하고
    코로나 19사태가 한창 진행되던 지난 2월 말 나는 고심 끝에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을 대상으로 <동석교회입장문>을 발표하고 개인톡에 발송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 19사태가 대단히 엄중한 상황임을 인식하고 이런 상황에서 일부 개신교 대형교회와 가톨릭교회가&#160;대중 예배와 집회를 일시적으로 폐하는 이유가 코로나19에 의해 사람이 상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이고,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이며, 나아가 일반 시민과 공공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이해한다. 우리는 또한 대중 예배를 ‘모여서’ 드리는 것을 피하면서, 가정에서 혹은 영상을 통해 예배를 드리는 것도 현 상황에서 차선의 방안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대중 예배의 폐쇄를 일괄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한국 개신교 교회는 숫자가 많고, 처해 있는 상황이 다르며 대중예배를 유보할지, 최소화해서 드릴지는 교회의 구성원들이 교회의 상황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 좋다고 보며, 이 경우 회집인원의 수가 얼마인지, 도시 지역인지, 이동 인구가 많은 곳인지. 노약자가 많은 곳인지 등을 고려할 수 있다. 우리 동석교회는 이런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금주 한 주간 주일 오전 예배만 드리고 여타의 집회를 갖지 않기로 한다. 우리 동석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교회지침을 따르면서 대중 예배를 드리게 되던 유보하게 되던, 이웃 교회에 대해서는 사랑과 배려의 마음으로 그 결정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지금처럼 혼란하고 힘든 시기에는 비판보다 서로에 대한 배려가 중요하다고 본다. 우리 동석교회 성도들은 개인위생과 건강관리에 있어서 정부와 방역당국의 지도지침에 적극 동참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의 사태에 대하여 몸 된 교회일원으로서 하나님께 회개하며 코로나 사태가 신속히 진정되고 회복되기를 위하여 기도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민주시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한다.>그리고 3월 1일주일부터 두 주간 째 <교회입장문>에 발표한대로 이를 시행 중이다. &#160; 그런데 지난 3월 7일 대한민국 국회는 ‘종교집회 자제 촉구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 가능성을 자신의 SNS에 올리고 그 실행여부를 고심 중에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국회나 이재명 지사가 코로나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교회집회문제를 거론한 배경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 방식은 사태를 진정시키기보다 오히려 우리사회에 불필요한 대립과 논쟁을 야기 시킬 수 있는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종교나 그러하지만 특히 우리 기독교는 교회조직이라는 공동체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교회는 성경에 명시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매주일 정기적인 집회를 갖는 특성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일예배 외에도 주중에도 다양한 모임과 예배가 진행된다.기독교에 있어서 주일예배는 기독교의 본질과 가치, 그 존재이유를 밝히는 상징적인행위로서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종교의 자유,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행정당국이 사태의 엄중함을 따라 부득이한 조처로 교회에 종교집회 자제를 요청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당국의 요청에 비교적 감염위험지수가 높을 수밖에 없는 대형교회들이 자체판단과 결정으로 모임을 자제하는 것은 앞서 <교회입장문>에서 밝힌 것처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국회가 이 사안과 관련하여 ‘종교집회 자제 촉구 결의안’을 채택한 일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라고 보기 어렵다. 비록 그것이 강제명령은 아닐지라도 국가의 행정력으로도 얼마든지 조율할 수 있는 일을 입법부가 결의안을 채택하여 교회, 혹은 여타 종교단체에 심리적 억압을 가하는 일은 종교의 사회적 기능이나 그 구성원들의 심리적 안정의 가치를 너무 가볍게 보는 관점에 문제가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더욱이 이지사가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 가능성을 내비친 것은 그 실행 여부를 떠나서 그 발상자체가 대단히 위험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이미 한국교회는 정부와 방역당국의 지침을 따라 자발적으로 방역을 위해 노력하였고, 많은 모임들을 최소화하여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다. 주일예배를 어떤 형식으로 드리느냐 하는 문제는 교회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영상예배를 드리든지 가정예배를 드리든지 잠정적으로 교회 예배공간을 폐쇄하든지 그 결정을 교회가 하는 것이지, 교회가 아닌 권력 기관이 좌지우지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특히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장이 행정권발동이라는 카드로 이 문제에 개입하려 하는 것은 헌법에 위배됨은 물론이요, 교회와 국가 간에 불필요한 긴장을 조성하는 악수(惡手)가 되는 것이다. 만약 이런 일이 실제적으로 일어난다면 그동안 정부당국에 협력해 온 교회들이 등을 돌리게 될 것이고 정부는 난처한 정국에 처하게 될 것이다. 우리사회가 좌파, 우파의 이념대립이 첨예한데 만일 이지사의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이 그대로 시행된다면 일부 극우파기독교의 광장집회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결과가 될 것이요, 문재인 대통령과 현 정권을 향해 사회주의자니 공산주의자니 하는 프레임으로 공격하는 극우파 기독교지도자들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한다. 경기도기독교총연합회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이재명지사가 모임을 갖고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고 교회는 당국이 요청한 방역에 최선을 다하고 이 지사는 자신의 그러한 발언이 사태의 엄중함에 따른 도정 최고책임자로서의 고뇌에서 나온 방안이었으나 적절치 못한 것임을 인정하고 상호 협력하기로 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이번 코로나19사태로 인해 우리 국민 모두와 함께 정통 기독교회는 이단 집단인 신천지교로 말미암아 유형 무형의 많은 피해를 입고 있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의연한 자세로 사태의 진정과 회복을 위해 정부와 방역당국에 적극 협력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국회의 ‘종교집회 자제 촉구 결의안’이나 이지사의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발상은 한국교회와 성도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것으로 마땅히 철회되어야 할 결의안과 발상이라고 본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0-03-16
  • 총잡이와 칼잡이 커크 더글러스
    미국 서부영화의 전설적 명배우 커크 더글러스가 지난 2월5일 103세의 장수를 누리고 영면하였다. 그의 장남으로서 부친 못지않게 영화계에서 맹활약을 해온, 오스카(아카데미)상 수상자이기도 한 마이클 더글러스를 뒤에 남겨두고 표표히 현세를 떠나갔다. 이 기회에 배우 커크 더글러스에 대하여 좀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인들(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들에 대한 대박해, 소위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그보다 더 이른(앞선) 시기에 러시아인들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들에 대한 대박해, 소위 포그람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홀로코스트만큼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러시아에서의 포그람도 유대인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큰 박해였고, 그것을 참아내기 힘들었던 그들 중의 일부는 고향을 찾아 떠나는 연어처럼 옛 고향(고국) 땅으로 되돌아갔으며, 또 일부는 미국 땅으로 이민을 떠나버린 사람들도 상당수였다. 영화 <OK 목장의 결투>로 잘 알려진 미국 서부극의 명배우 커크 더글러스는 러시아인들의 포그람(유대인 박해)에 견디다 못해 미국 땅으로 이민을 떠나버린, 러시아계 유대인의 아들로 뉴욕(인근 작은 마을)에서 1916년 태어났다. 청소년 시절 그는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그리고 학비 조달을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신문배달은 기본이고 노점상, 정원사, 경비원… 등 닥치는 대로 이일 저일, 여러 일터들을 전전했던 것이다. 그는 레슬링 선수 생활로 몸을 단련했고, 그 스포츠를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이용해 생활비 또는 학비를 조달하는 데 일정액 보태어 쓰기도 했다. 어떻든 그는 “젊어 고생은 돈 주고도 못 산다”는 청년 때부터의 그 고난의 삶을 자연적으로 터득하게 되었고, 거기에다 신체적 단련까지 곁들여 탄탄한 몸매와 강인한 정신력을 함께 구비한 채 자신의 앞날(은막생활)에 대비해 왔다고 보겠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스파르타쿠스>란 영화의 주인공인 노예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야무지고도 강인한 모습은 벌써 청소년 때부터 자기단련을 통해 그가 이미 습득해 지녔던 그다운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어느 영화학교에 들어가 배우로서의 기본훈련을 마친 뒤 30세란 늦은 나이에 영화계에 투신하게 된다. 일생 동안 무려 90여 편에 가까운 영화에 출연했다고 하는데, 그것들 중에서 특히 그의 대표작들로 일컬어지는 <OK 목장의 결투>와 <스파르타쿠스>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케빈 코스트너의 서부극 <늑대와 춤을>이 나오게 되면서 할리우드 웨스턴에도 일대변화가 오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 영화는 1990년에야 나온 작품이었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때나 되어서야 썩 참신한 미국의 서부극, 곧 인디언을 진멸(盡滅)의 대상이 아닌 화해(和解)의 대상으로 삼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1957년)에 이미 커크 더글러스 주연의 <OK 목장의 결투>가 나왔으며, 그 작품 속에 인디언들은 아예 출몰하지도 않았던 것은 매우 이색적인 일이었다고 하겠다. 지금껏 존 포드 감독의 서부극 같은 데서 ‘인디언 악당’이란 공식이 널리 통용되고 있었음을 상기해 본다면 충분히 이해될 만한 일이다. 커크 더글러스는 그 영화 속에서 포악한 인디언이 아닌 탐욕가인 백인 악당들을 무찌르는 최고의 속사포 총잡이로 그 위력을 발휘한다. 커크 더글러스는 그보다 몇 년 뒤에 나온 영화 <스파르타쿠스>(1960)의 주연을 맡아, 이번엔 불세출의 검투사가 되어 위력적인 칼잡이로서의 힘을 발휘한다. 로마 의 절대권에 대항해 노예항쟁을 이끌었던 노예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영웅적인 삶을 연기함으로써 배우로서도 완전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배우로서의 그는 이처럼 총잡이와 칼잡이로서 세상의 악(惡)과 절대권에 맞싸워 승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영화 속이 아닌 일반 현실 속에서도 총잡이나 칼잡이로 행세할 수는 없었지 않았겠는가.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도 그는 훌륭한 면을 보여준 생활인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950년대 미국 사회에 소위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쳤을 때 영화계라고 해서 그 거센 바람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때 소위 블랙리스트에 오른 동료 배우들을 위해 사실상 블랙리스트 철폐운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함으로써 총잡이나 칼잡이 이상의 위력을 발휘했다는 것은 미국 영화사의 엄연한 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그렇다고 그가 투사로서만 위대했던 것만은 아니다. 한편, 사회의 약자들을 위해 자선사업을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가 이번(생의 말년)에 자신의 사유재산 거의 전액(한화 600억원 이상)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는 엄연한 사실에서도 튼튼하게 뒷받침돼 있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0-03-12
  • 중국 우한 폐렴과 중국몽
    지금 전 세계는 중국 허베이성의 우한시에서 발병한 우한 폐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그야말로 큰 몸살을 앓고 있다. 중국에서만 2월 11일 현재, 4만 2천명이 넘는 확진자가 발생하였고,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 한국에서도 28명째 확진자가 발생하였고, 공공장소가 수백 군데 문을 닫고, 학교에서는 졸업식을 취소하거나 영상으로 진행하고 있고,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도 중단한 곳이 생겨났다. 중국은 세계에서 미국과 겨루어 G2를 표방하고 있고, 화평굴기(和平屈起-중국의 평화적 구상 전략)와 대국굴기(大國屈起-대국이 일어선다)를 주창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이 2013년 주석이 되면서 ‘중국몽’(中國夢)으로 패권 중국의 극대화를 꾀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자신의 영향력을 오랫동안 발휘하기 위하여, 지난 2018년 2월에는 전국인민대표대회를 통하여 ‘주석직임기제한’ 헌법을 삭제함으로 사실상 자신이 주석직을 종신으로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이에 호응하여 한국 정치가들도 너도 나도, ‘중국몽’에 함께한다고 하고 있고,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제안한 일대일로(一帶一路-중국의 새로운 실크로드를 말하는 것으로, 중국 주변 국가들과 경제/무역 합작 확대하는 것을 말하며, 내륙 3개, 해상 2개 등 5개의 노선으로 추진되고 있음)를 통하여 세계가 중국이 중심이 되는 야심작을 펼치고 있다. 그런데 이번 우한 폐렴 신종 바이러스의 공격으로 시진핑 주석에 대한 중국 국내에서 책임에 대한 반발이 생기고 있다고 하니, 그 결과가 주목된다. 중국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만만치 않다. 중국은 전 세계 GDP의 16.9%를 차지하고 있고, 전 세계 수출입 금액은 11.7%, 전 세계의 중국 대외금융자산이 3.1%, 전 세계 시가총액이 9.2%, 전 세계 여행지출도 17.8%를 차지할 만큼 경제적 규모와 비중이 크다. 그런데 이번 우한 폐렴 사태로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1분기에 작년의 6%에서 2%로 떨어질 전망이다. 2002~2003년에 발생했던 사스 때의 충격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이다. 이번 중국에서의 신종 바이러스에 의한 공격은 중국 경제의 취약성까지 드러내고 있어 중국의 미래에도 관심이 쏠린다. 한국은 어떤가? 한국이 전체 교역량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23.3%로 전체의 1/4을 차지한다. 그래서 중국의 GDP가 1% 포인트 하락할 때, 한국은 0.35% 포인트가 떨어질 것으로 추정하여, 전 세계에서 중국 다음으로 가장 피해가 클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우한에서 발생한 우한폐렴 역병은 여러 가지로 중국과 주변 나라에 피해를 줄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이들은 중국은 대국굴기를 할 것이 아니라, 도광양회(韜光養晦-칼날을 칼집에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미 중국은 ‘동북공정’(東北工程-동북지역인 고구려/발해 등 한반도와 관련된 역사를 중국역사로 편입하려는 계획) ‘서북공정’(西北工程-서북지역인 위구르(돌궐)의 분리 독립운동을 차단하려는 계획) ‘서남공정’(西南工程-서남지역인 티베트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프로젝트)등으로 역사를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만들면서, 시진핑 주석 취임 이후 더더욱 자신들이 세계의 패권을 거머쥐고 호령할 야심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이번 우한 폐렴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정치와 경제, 역사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다. 중국은 이미 수년 전부터 기독교 박해에 박차를 가하면서, 사실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열심을 내게 되었다. 중국은 시진핑 주석 이후, ‘기독교의 중국화’라는 이상한 슬로건을 내 걸고, 교회를 부수고, 십자가를 철거시키고, 기독교 지도자들을 구금하고 있다. 지난 2018년에는 산시성 린펀시에 있는 금빛등대교회를 강제로 폭파/철거하여 세계를 놀라게 한 바 있다. 이 교회는 당시 5만 명의 성도가 있던 것으로 알려진다.이번에 중국 우한시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이곳에서도 교회를 강제로 철거하고, 선교사들을 강제로 추방하고, 성경책을 불태우고, 교회에 중국기와 시진핑 주석의 사진을 걸게 하며, CCTV를 설치하여 교회를 감시하고, 지도자들을 구금하고, 교회에서 정부를 홍보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등 다양한 기독교 말살과 핍박행위를 해 온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에 공산당 정부가 들어선 지 71년이 되었다. 중국의 역대정권의 평균수명은 70년이라고 한다. 기독교를 박해하는 정부나 정권, 지도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묵과(默過)하지 않으신다. 초대교회 헤롯왕은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지 않다가 충이 먹어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고(행12:23)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은 왕궁에서 쫓겨나 들판에서 짐승처럼 7년을 지내기도 하였다(단4:32~33).
    • 연지골
    • 토요시평
    2020-02-14
  • 한국 종교의 역사적 과제
    해방 이후 종교인구가 증가하던 분위기에 익숙했던 한국 종교계는 비 종교인구가 종교인구를 초과한 2015년 종교인구 통계 결과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바야흐로 한국 사회가 비 종교인구가 많은 다원적 종교지형으로 변모해 가는 새로운 징조를 보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근에 한국 종교의 양대 산맥인 불교의 조계종 사태 및 기독교의 대형 교회세습과 사회법 위반 행위는 자본신앙과 건물종교에 함몰된 종교의 세속화된 모습에 대중은 종교에 등을 돌리는 암울한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종교의 위기는 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종교 내부의 문제라면 종교혁신을 통하여 극복하면 되지만, 지금의 종교위기는 종교가 사회에 왜 필요한가를 근본적으로 묻고 있다. 그럼 한국 종교는 역사적 지평에서 어떤 종교의 모습으로 변화하여 생존하고 종교의 순기능을 보존하면서 사회와 같이 발전해 나갈 수 있을까? 한국 종교는 위기의 상황에서 안이한 호교론적인 입장에서 교세를 확장하려는 전술에 치중하기보다는 종교혁신을 통해 패러다임 자체를 변화시키는 대개혁을 단행하여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새해 한국 종교가 가야 할 길을 간단하게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한국 종교는 교세 확장의 종교정책보다는 창교 이념을 바르게 실천하는 종교인을 육성하여야 한다. 종교는 아직도 축 시대의 마지막 남아있는 권위의 원천이다. 자본신앙과 기복신앙을 밑바탕으로 종교인 숫자 늘리기에 주력하는 양적 성장 정책은 이미 낡은 패러다임이다. 깨달음과 믿음은 공유되어야 하고, 이는 일상생활에서 실천되고 역사적 공동체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 종교는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에 뿌리박은 종교인을 육성하여야 한다. 필자는 이런 종교인을 ‘영성생활인(靈聖生活人)’이라고 칭한다. 신령스러운 종교적 신앙의 뿌리에 바탕을 두고 일상생활에서 종교적 황금율을 실천하는 일상인을 말한다. 위대한 종교인은 소수의 엘리트 종교인을 말함이 아니다. 민중과 더불어 열린 가슴으로 다양한 종교의 언어를 회통하고, 과학적 유토피아에 함몰되지 않는 인간의 존엄성을 내뿜는 새로운 종교인이다. 한국 종교는 종교인구를 양적으로 늘리는 정책을 과감히 포기하고 참 종교인을 길러내는 본연의 목표를 회복하여야 한다. 종교인은 비종교인보다 인격적으로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둘째, 한국 종교는 호교론적인 종교정책을 탈피하여 한국의 종교문화에 바탕을 둔 주체적인 한국의 종교로 거듭나야 한다. 한국 종교는 원효의 통불교 정신과 최치원의 풍류의 얼, 성리학의 퇴계와 율곡, 실학의 다산과 같은 한민족의 위대한 종교혼의 창조적 정신을 발휘하여 종교 종주국의 종교 담론을 뛰어넘어야 한다. 이는 한국의 종교적 심성과 한국 종교문화에 뿌리를 내림으로써만 가능하다. 근·현대에 한국의 유교, 불교, 그리스도교 등에서 세계 종교계에 실천적인 담론으로 자랑한 만한 종교인과 종교사상이 무엇이 있나 곰곰이 성찰해 보자. 외래종교는 한국의 종교적 심성을 아우르는 종교로 재탄생되어야 하고, 신종교는 세계인의 종교적 심성에 뿌리내릴 수 있는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는 열린 종교로 거듭나야 한다. 셋째, 한국 종교는 인격신앙과 인격공동체에 바탕을 둔 신명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모든 종교의 텍스트는 종교적 인간의 궁극적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새롭게 탄생한 종교적 인격은 종교적 인격과 종교적 인격이 서로 연대하여 인격공동체를 형성하여야 한다. 이런 성숙한 공동체 문화는 역사적 지평에서 ‘신명나는’ 신명공동체로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 유교의 대동세계, 불교의 용화세계, 그리스도교의 공동체 문화, 신종교의 개벽세계 등 각 종교가 지향하는 이상세계를 이 땅에 구현하여야 한다. 더불어 사는 공동체 문화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전통이다. 공동체 문화는 민족의 영속성, 한국인의 종교적 역량을 세계에 선보일 수 있는 보편적 종교문화이다. 한국 종교는 종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민족사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구도자의 심정으로 민중과 함께 역사의 험로를 개척하여야 한다. 한국 종교와 한국 종교인은 위기의 상황에서 종교적 창조성을 발산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 위기의 한국 종교는 참 종교인을 육성하고, 주체적인 종교 담론을 창출하고, 인격 신앙에 바탕을 둔 신명공동체를 만들어 새 활로를 개척하여야 한다. 이런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서만이 한국 종교는 한국인과 더불어 한국역사의 미래를 같이 고민하는 종교로서 역사에 자리매김할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0-01-31
  • ‘드레퓌스’ 사건을 다시 떠올리며
    1월13일 검경수사권 조정안이 국회에서 표결되었다. 훌륭한 법도 중요하지만 그 법을 운용하는 사람이 누구며, 그 법을 또한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국민들의 희비(喜悲)가 엇갈리게 된다. 120여 년 전 프랑스에서, 잘못 운용된 법에 의해 무고한 한 사람이 종신형을 언도받은 것을 보고 이에 분격해 일어났던 작가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란 글을 공표해 프랑스 전역을 논란의 와중으로 몰아넣었던 그날이 1월13일이었다는 사실이 우연의 일치가 아닌 것 같다. 1894년 프랑스에서 소위 ‘드레퓌스 사건’이란 게 터졌다. 이 사건은 간략히 표현하자면, 당시 프랑스 군부 내에서 반국가적인 행위, 곧 프랑스 군대의 기밀을 적대관계에 있던 이웃나라에 돈을 받고 팔아넘긴 한 장교(육군 소령)의 간첩행위가 있었음이 밝혀졌는데도 군부는 그의 죄과를 처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죄를 아무 잘못도 없는 하급 장교(포병 대위)에게 덮어씌운 것이었다. 그 포병 대위가 알프레드 드레퓌스였다. 그가 이런 누명을 쓰게 된 것은 그의 혈통이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반유대적인 군중의 무비판적 절규 속에 집단 히스테리에 빠진, 광기 어린 오도된 여론은 무조건 군부 편만을 들고 사건의 진상을 알아보거나 시시비비를 가려 보려는 노력은 조금치도 기울일 수 없게 만들었다. 때문에 드레퓌스 대위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종신 유배형이란 중형을 언도받고 악명 높은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의 섬’으로 유배되어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때 이를 도저히 묵과하고만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작가 에밀 졸라가 1898년 1월13일 “나는 고발한다”란 제목의 탄핵문을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 형식으로 발표하면서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 군부의 음모 등을 만천하에 폭로했다. 이렇게 되자 프랑스 전역은 이 사건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게 되었다. 이때 드레퓌스 옹호파의 투쟁도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에밀 졸라는 군부를 비방하고 육군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유죄가 선고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양식 있는 문학인들이 좌시만 하고 있을 수 없게 되어 재심청구의 서명들을 하게 되었으니, 여기엔 졸라를 위시하여 앙드레 지드, 아나톨 프랑스, 마르셀 프루스트, 쥘 르나르… 등의 쟁쟁한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자연히 재심 반대파의 결속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해, 국수주의자와 군주주의자 및 반유대주의자는 물론 가톨릭교도 등 수구파들(군부·교회·우파들)이 한데 뭉치도록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재심을 반대하는 자들의 필사적인 노력과 음모에도 불구하고 드레퓌스 사건은 다시 심판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다. 1898년 6월, 드레퓌스는 마침내 재심을 받게 된 것이다. 이때쯤엔 드레퓌스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군부의 교활하고 집요한 음모와 압력 때문에 재심의 결과는 종신형에서 10년형으로 감형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이에 온 세계와 자국 국민들이 격분하자 정부는 다시 ‘특별사면’이란 절충식 타협으로 그를 석방하였다. 그러나 드레퓌스는 그 후로도 재심요구파의 끈질긴 노력 덕분에 1906년 또다시 재판을 받게 됨으로써 결국 완전한 무죄판결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복직의 영예도 얻을 수 있었다. 이리하여 한 유대인 장교의 의옥 사건에서 비롯되어 10년간이나 프랑스를 온통 파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던 정치적 열풍은 마침내 ‘진실’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투옥도 마다하지 않으며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바쳐왔던 위대한 프랑스인들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당대의 프랑스 정치가 클레망소가 드레퓌스 사건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가 에밀 졸라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했다. “가장 강력한 제왕에게 경배하기를 거부할 만큼 강했던 사람은 언제나 있었다. 그러나, 다수에 저항하면서 오도된 군중에 홀로 맞선 사람은 매우 드물다. 갈기갈기 찢긴 프랑스에서, 행동을 통한 평화적 저항에 첫 신호를 보낸 영광은 졸라에게 돌려져야 한다.” 에밀 졸라는 여리고 여행 도중에 강도 만난 자를 더러 목격했다. 제사장이 그를 그냥 보고 지나쳤고 레위인도 그대로 지나쳤다. 어려서부터 고아로 자라 고난의 삶을 살아온 사마리아인 졸라는 그러나 그를 거기 놔둔 채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가련한 자에게 다가가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맨 뒤, 제 나귀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주막집 주인과 함께 그를 극진히 돌봐준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0-01-17
  • 올해는 희망을 노래하자-심 만 섭 목사
    2020년이 밝았다. 뭔가 좋은 일들이 많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아니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지금 우리 사회를 살펴보면, 온통 부정(否定)과 낙심과 실망과 심지어는 분노로 가득차서, 네 편, 내 편으로 편을 갈라서 싸우는 형국이다. 지난 수년 동안 우리 사회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고, 새로운 정부는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을 한다고 해 놓고, 진짜 그런 일들을 벌이고 있다.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될 일이라면, 경험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 사람들의 생각에는, 특히, 지식층들이 생각하는 우리 사회 모습은 어떤 것이었나? 해마다 연말이면 교수들은 그들을 중심으로 사자성어(四子成語)를 통해, 우리 사회를 진단한 것을 발표한다. 10년 전인, 지난 2010년에는 ‘장두노미(藏頭露尾)’였다. 이는 진실을 숨기려고 하지만, 거짓의 실마리가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2011년에는 ‘엄이도종(掩耳盜鐘)’이었다. 나쁜 일을 하고 남의 비난을 듣기 싫어 귀를 막지만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2012년에는 ‘거세개탁(擧世皆濁)’이었다. 지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 모두 바르지 못하다는 의미이다. 또 2013년은 어떤가? ‘도행역시(倒行逆施)’이다. 잘못된 길을 고집하거나 시대착오적으로 나쁜 일을 꾀한다는 것이다. 2014년에는 ‘지록위마(指鹿爲馬)’로 선정하였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2015년은 다른 상황인가? ‘혼용무도(昏庸無道)’이다. 나라 상황이 암흑에 뒤덮인 것처럼 어지럽다는 뜻이다. 2016년은 ‘군주민수(君舟民水)’이다. 백성은 물이고, 군주는 배인데, 강물의 힘으로 배가 뜨지만, 강물이 화가 나면 배가 뒤집힌다는 것이다. 2017년은 어떤가? ‘파사현정(破邪縣正)’이다. 사악한 것을 부수고 사고방식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 해에는 탄핵정국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뭔가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그럼 2018년은 어떤가? ‘임중도원(任重道遠)’이다.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는 뜻이다. 과연 무거운 짐을 지고 제대로 가고 있는가? 지난 해 2019년은 어떠했나? ‘공명지조(共命之鳥)’이다. 한쪽이 없어지면 다른 쪽만 살 것 같지만 실은 같이 공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진영 논리로 나누어 심하게 다투는 심각함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한 해도 평안하거나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 위기 상황이었고, 실망의 순간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흥분하고 분노하고, 편을 갈라서 갈등하고 있는 모습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전국의 5,100명을 대상으로, ‘2019년 한국인의 의식 가치관 조사’를 했는데, 우리 국민들의 갈등이 얼마나 심각한 지를 알 수 있는 내용이 나왔다. 우선은 진보-보수의 갈등이 크다고 답한 것이 91.8%이다. 또 정규직-비정규직 간의 갈등이 크다는 응답이 85.3%이다. 그리고 대기업-중소기업 간 갈등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81.1%이다. 그런가 하면, 부유층-서민층 간의 갈등에 대한 응답도 78.9%를 차지한다. 그뿐인가? 기성세대-젊은 세대 간에 갈등이 있다는 것에도 68%가 찬성한다. 거기에다 수도권-지방 간 갈등이 있다는 의견도 61.7%를 점유한다. 그러니 우리 사회는 지금 ‘초갈등사회’라는 말이 크게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올해 2020년에는 크게 달라질까? 낙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가능하도록 하는 것은 국민들의 노력에 의해서이다. 우리 역사를 잠시 살펴보면, 우리는 저력과 좋은 잠재력이 있다.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세계 어떤 나라도 동시에 이루지 못한, 경제발전과 정치 민주화를 이룬 나라이다. 특히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 우리 기독교는 사람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본다. 우리 사회가 때로는 매우 실망스럽고, 온통 부정과 암울함으로 가득 찬 것 같아도,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희망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어두운 곳에 밝음을 허락하시고, 혼란의 와중에 길을 내시고, 우리를 인도해 주실 줄로 믿는다. 성경 창세기에 보면, 요셉은 형들에 의하여 노예로 애굽에 팔려갔으나,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먼저 애굽에 보내셨다(창45:5)고 고백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의 태도이다. 말씀에 의지하여 희망을 노래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의 판단처럼 부정적인 것과 혼돈만 보고 지레짐작으로 포기할 것인가? 혹여 세상에 희망이 없다고, 그 세상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께도 우리의 기준으로 적용하면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을 노래해야 하는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0-01-06
  • 교회사 속의 한 신도 처단 사건/임 영 천 목사
    18세기 중엽, 정확히 1761년 10월 13일 프랑스의 남부 도시 툴루즈에서 있었던 일이다. 생업이 직물(織物) 상인이었던 장 칼라스라는 사람의 큰아들이 아버지의 직물가게 문틀에 목을 매어 숨져 있는 것을 가족이 발견해 사법당국에 신고하였다. 그의 죽음은 엄연한 자살이었고 그 때문에 당국이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기만 했더라면 모든 것은 조용히 끝나버리고 말았을 일이었다. 그러나 일은 사실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고 모든 게 뒤틀려버리고 말았다. 그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고 타살이라는 방향으로 수사 결과가 발표되고 그 사건은 결국 재판으로까지 비화되어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큰아들이 타살되었다고 했을 때 그러면 그 범인이 누구냐 하는 것이었는데, 수사당국이 범인으로 지목한 이는 엉뚱하게도 사자(死者)의 친부 칼라스였다. 천인공노할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아버지가 진짜 범인이라고 한다면 상식적으로 보아 천인공노할 일이 아닐 수 없겠고, 그렇지 않다면 왜 이런 방향으로 수사가 진행되었는지 그 이유 규명이란 관점에서 볼 때 역시 천인공노할 일이 아닐 수 없겠다. 당국이 칼라스를 범인으로 지목해 발표한 내용이란 이러했다. 위그노(개신교도)인 부친 칼라스가 최근 가톨릭으로 개종하려고 작정한 큰아들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극단적 응징을 한 결과가 아들의 죽음으로 나타났다는 요지였다. 당국은 이런 수사 결과를 가지고 칼라스를 재판에 회부하였다. 아들의 죽음을 앞에 놓고 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아버지 칼라스는 친자 타살이란 엄청난 죄목을 뒤집어쓰고 재판을 받게 되었으니 정녕 하늘도 무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배경 설명이 다소 필요하리라. 유럽에서 종교개혁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독일, 영국, 프랑스…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피 흘림이 없이 그 개혁의 목표가 달성된 나라는 없었다. 개혁의 선구자들과 개혁에 동조한 일반 신도들 모두가 피를 흘림으로써(순교 당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개혁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른바 ‘칼라스 사건’이 벌어진 나라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톨릭이 강세였던 프랑스에 장 칼뱅의 개혁사상이 유입되면서 소수의 신교도(위그노)들이 다수의 구교도들로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아야 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1572년에 발생한 ‘성(聖) 바돌로매 축일 대학살 사건’이었다. 가톨릭 측의 계획된 음모에 의해 프랑스 내의 위그노들 수만 명이 학살당하였다. 성 바돌로매의 축일 행사에 위그노들이 모이도록 해 놓고 그들을 마치 가축 도살하듯 몰살시켜 버렸으니 참으로 천인공노할 일이었다. 그 결과는 10년 전(1562)부터 시작돼온 ‘위그노 전쟁’을 더욱 격화시킨 꼴이 되었다. 이 무서운 사건 이후로 신·구 양측 교도들 간에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져 감을 우려한 당시의 왕 앙리 4세가 1598년 위그노들의 신앙 자유를 보장하는 낭트칙령을 발표함으로써 양측의 긴장관계를 어느 정도 해소시킬 수 있었다. 다행히 그 ‘위그노 전쟁’(1562-1598)이란 내전도 여기서 끝이 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칙령은 절대군주(태양왕) 루이14세에 의해 1685년 철폐되고 말았다. 80여년 동안 어느 정도 숨을 쉴 수 있었던 위그노들은 다시 암흑적인 현실에 직면해야만 하였다. 왕은 위그노들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든지 아니면 국외로 이주하든지 양자택일하라고 강박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그 ‘칼라스 사건’이 또 발생한 것이었다. 칼라스 사건은 말하자면 가톨릭 측 인사들이 계획적으로 위그노 신자인 칼라스 집안의 청년 자살 사건을 타살 사건으로 날조해 놓은 것이었다. 거기에 친가톨릭 성향의 사법부 인사들도 합세해 위그노 신도인 칼라스 일가를 법망으로 얽어 사멸시킨 참극이었다. 위그노 집안의 아들이란 신분으로는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없다는 사실 앞에 절망한 큰아들이 자살을 택하고 만 사건을 완전히 침소봉대하여 아버지가 아들의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막기 위해 그를 살해해 버렸다는 식으로 덮어씌운 것이었다. 지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칼라스는 1762년 3월 9일 고법에서도 사형선고를 받고, 바로 다음날 공개적인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져 사지가 찢겨진 채 불살라졌다. 잔인하고도 참혹한 처단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무언가 조작된 데가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계몽철학자 볼테르가 끈질기게 달라붙어 재심을 청구했고,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어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으며, 또 칼라스의 원통함도 신원(伸寃)할 수 있었다. 사형판결을 받은 지 만3년 뒤인 1765년 3월 9일이었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9-12-23
  • “그리스도인들 이웃사랑, 장기부전 환자들 기대”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때,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풍성한 은혜에 감사하며 생명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그 사랑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교회들이 있다.광주 서구에 위치한 화정교회(담임 김성덕 목사)는 지난 11월 24일 주일,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이사장 박진탁 목사)를 초청해 생명나눔예배를 드렸다. 지난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며 하나님께 받은 사랑에 감사를 고백했다면, 이날 이웃을 향한 사랑을 실천하는 자리였다.김성덕 목사는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제목의 말씀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주변에 고통 받는 이웃을 바라보며 그 아픔에 공감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당부했다. 김 목사는 “어려움에 빠진 이웃을 외면하지 않았던 사마리아인처럼, 우리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의 곁에서 그들의 이웃이 되자”고 강조했다.이어 강단에 오른 본부 이사장 박진탁 목사는 “지금 이 시간에도 도움의 손길을 간절히 바라는 수많은 이웃들이 있다. 하루 8명에 가까운 이들이 장기 이식을 기다리다가 숨을 거두고 있다”는 현실을 전하며 “질병으로 고통 받는 장기부전 환자들의 진정한 이웃이 되어 달라”고 호소했다. 박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내어주셨듯이, 이웃을 위해 생명 나눔을 실천하자”고 독려했고, 그 결과 청년들을 비롯한 모두 152명의 성도들이 장기기증 희망등록에 참여했다.같은 시간 부산과 철원에서도 생명 나눔을 통한 이웃사랑의 실천이 이어졌다. 부산 사하구의 한울교회(담임 제인출 목사)는 ‘이웃사랑으로 축복의 선순환을 만드는 교회’라는 올해의 표어답게 지난 2009년에 이어 두 번째 생명나눔예배를 드려 눈길을 끌었고, 강원도 철원에 위치한 군인교회인 삼성교회(담임 임정인 목사)에서는 국가와 국민을 생각하며 장기기증을 다짐한 국군 장병들의 뜨거운 열정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이로써 24일 주일 하루 동안 전국에서 219명의 성도들이 생명 나눔을 약속했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9-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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