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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종교의 역사적 과제
- 해방 이후 종교인구가 증가하던 분위기에 익숙했던 한국 종교계는 비 종교인구가 종교인구를 초과한 2015년 종교인구 통계 결과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바야흐로 한국 사회가 비 종교인구가 많은 다원적 종교지형으로 변모해 가는 새로운 징조를 보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근에 한국 종교의 양대 산맥인 불교의 조계종 사태 및 기독교의 대형 교회세습과 사회법 위반 행위는 자본신앙과 건물종교에 함몰된 종교의 세속화된 모습에 대중은 종교에 등을 돌리는 암울한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종교의 위기는 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종교 내부의 문제라면 종교혁신을 통하여 극복하면 되지만, 지금의 종교위기는 종교가 사회에 왜 필요한가를 근본적으로 묻고 있다. 그럼 한국 종교는 역사적 지평에서 어떤 종교의 모습으로 변화하여 생존하고 종교의 순기능을 보존하면서 사회와 같이 발전해 나갈 수 있을까? 한국 종교는 위기의 상황에서 안이한 호교론적인 입장에서 교세를 확장하려는 전술에 치중하기보다는 종교혁신을 통해 패러다임 자체를 변화시키는 대개혁을 단행하여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새해 한국 종교가 가야 할 길을 간단하게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한국 종교는 교세 확장의 종교정책보다는 창교 이념을 바르게 실천하는 종교인을 육성하여야 한다. 종교는 아직도 축 시대의 마지막 남아있는 권위의 원천이다. 자본신앙과 기복신앙을 밑바탕으로 종교인 숫자 늘리기에 주력하는 양적 성장 정책은 이미 낡은 패러다임이다. 깨달음과 믿음은 공유되어야 하고, 이는 일상생활에서 실천되고 역사적 공동체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 종교는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에 뿌리박은 종교인을 육성하여야 한다. 필자는 이런 종교인을 ‘영성생활인(靈聖生活人)’이라고 칭한다. 신령스러운 종교적 신앙의 뿌리에 바탕을 두고 일상생활에서 종교적 황금율을 실천하는 일상인을 말한다. 위대한 종교인은 소수의 엘리트 종교인을 말함이 아니다. 민중과 더불어 열린 가슴으로 다양한 종교의 언어를 회통하고, 과학적 유토피아에 함몰되지 않는 인간의 존엄성을 내뿜는 새로운 종교인이다. 한국 종교는 종교인구를 양적으로 늘리는 정책을 과감히 포기하고 참 종교인을 길러내는 본연의 목표를 회복하여야 한다. 종교인은 비종교인보다 인격적으로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둘째, 한국 종교는 호교론적인 종교정책을 탈피하여 한국의 종교문화에 바탕을 둔 주체적인 한국의 종교로 거듭나야 한다. 한국 종교는 원효의 통불교 정신과 최치원의 풍류의 얼, 성리학의 퇴계와 율곡, 실학의 다산과 같은 한민족의 위대한 종교혼의 창조적 정신을 발휘하여 종교 종주국의 종교 담론을 뛰어넘어야 한다. 이는 한국의 종교적 심성과 한국 종교문화에 뿌리를 내림으로써만 가능하다. 근·현대에 한국의 유교, 불교, 그리스도교 등에서 세계 종교계에 실천적인 담론으로 자랑한 만한 종교인과 종교사상이 무엇이 있나 곰곰이 성찰해 보자. 외래종교는 한국의 종교적 심성을 아우르는 종교로 재탄생되어야 하고, 신종교는 세계인의 종교적 심성에 뿌리내릴 수 있는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는 열린 종교로 거듭나야 한다. 셋째, 한국 종교는 인격신앙과 인격공동체에 바탕을 둔 신명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모든 종교의 텍스트는 종교적 인간의 궁극적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새롭게 탄생한 종교적 인격은 종교적 인격과 종교적 인격이 서로 연대하여 인격공동체를 형성하여야 한다. 이런 성숙한 공동체 문화는 역사적 지평에서 ‘신명나는’ 신명공동체로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 유교의 대동세계, 불교의 용화세계, 그리스도교의 공동체 문화, 신종교의 개벽세계 등 각 종교가 지향하는 이상세계를 이 땅에 구현하여야 한다. 더불어 사는 공동체 문화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전통이다. 공동체 문화는 민족의 영속성, 한국인의 종교적 역량을 세계에 선보일 수 있는 보편적 종교문화이다. 한국 종교는 종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민족사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구도자의 심정으로 민중과 함께 역사의 험로를 개척하여야 한다. 한국 종교와 한국 종교인은 위기의 상황에서 종교적 창조성을 발산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 위기의 한국 종교는 참 종교인을 육성하고, 주체적인 종교 담론을 창출하고, 인격 신앙에 바탕을 둔 신명공동체를 만들어 새 활로를 개척하여야 한다. 이런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서만이 한국 종교는 한국인과 더불어 한국역사의 미래를 같이 고민하는 종교로서 역사에 자리매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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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종교의 역사적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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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스’ 사건을 다시 떠올리며
- 1월13일 검경수사권 조정안이 국회에서 표결되었다. 훌륭한 법도 중요하지만 그 법을 운용하는 사람이 누구며, 그 법을 또한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국민들의 희비(喜悲)가 엇갈리게 된다. 120여 년 전 프랑스에서, 잘못 운용된 법에 의해 무고한 한 사람이 종신형을 언도받은 것을 보고 이에 분격해 일어났던 작가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란 글을 공표해 프랑스 전역을 논란의 와중으로 몰아넣었던 그날이 1월13일이었다는 사실이 우연의 일치가 아닌 것 같다. 1894년 프랑스에서 소위 ‘드레퓌스 사건’이란 게 터졌다. 이 사건은 간략히 표현하자면, 당시 프랑스 군부 내에서 반국가적인 행위, 곧 프랑스 군대의 기밀을 적대관계에 있던 이웃나라에 돈을 받고 팔아넘긴 한 장교(육군 소령)의 간첩행위가 있었음이 밝혀졌는데도 군부는 그의 죄과를 처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죄를 아무 잘못도 없는 하급 장교(포병 대위)에게 덮어씌운 것이었다. 그 포병 대위가 알프레드 드레퓌스였다. 그가 이런 누명을 쓰게 된 것은 그의 혈통이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반유대적인 군중의 무비판적 절규 속에 집단 히스테리에 빠진, 광기 어린 오도된 여론은 무조건 군부 편만을 들고 사건의 진상을 알아보거나 시시비비를 가려 보려는 노력은 조금치도 기울일 수 없게 만들었다. 때문에 드레퓌스 대위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종신 유배형이란 중형을 언도받고 악명 높은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의 섬’으로 유배되어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때 이를 도저히 묵과하고만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작가 에밀 졸라가 1898년 1월13일 “나는 고발한다”란 제목의 탄핵문을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 형식으로 발표하면서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 군부의 음모 등을 만천하에 폭로했다. 이렇게 되자 프랑스 전역은 이 사건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게 되었다. 이때 드레퓌스 옹호파의 투쟁도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에밀 졸라는 군부를 비방하고 육군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유죄가 선고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양식 있는 문학인들이 좌시만 하고 있을 수 없게 되어 재심청구의 서명들을 하게 되었으니, 여기엔 졸라를 위시하여 앙드레 지드, 아나톨 프랑스, 마르셀 프루스트, 쥘 르나르… 등의 쟁쟁한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자연히 재심 반대파의 결속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해, 국수주의자와 군주주의자 및 반유대주의자는 물론 가톨릭교도 등 수구파들(군부·교회·우파들)이 한데 뭉치도록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재심을 반대하는 자들의 필사적인 노력과 음모에도 불구하고 드레퓌스 사건은 다시 심판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다. 1898년 6월, 드레퓌스는 마침내 재심을 받게 된 것이다. 이때쯤엔 드레퓌스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군부의 교활하고 집요한 음모와 압력 때문에 재심의 결과는 종신형에서 10년형으로 감형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이에 온 세계와 자국 국민들이 격분하자 정부는 다시 ‘특별사면’이란 절충식 타협으로 그를 석방하였다. 그러나 드레퓌스는 그 후로도 재심요구파의 끈질긴 노력 덕분에 1906년 또다시 재판을 받게 됨으로써 결국 완전한 무죄판결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복직의 영예도 얻을 수 있었다. 이리하여 한 유대인 장교의 의옥 사건에서 비롯되어 10년간이나 프랑스를 온통 파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던 정치적 열풍은 마침내 ‘진실’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투옥도 마다하지 않으며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바쳐왔던 위대한 프랑스인들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당대의 프랑스 정치가 클레망소가 드레퓌스 사건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가 에밀 졸라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했다. “가장 강력한 제왕에게 경배하기를 거부할 만큼 강했던 사람은 언제나 있었다. 그러나, 다수에 저항하면서 오도된 군중에 홀로 맞선 사람은 매우 드물다. 갈기갈기 찢긴 프랑스에서, 행동을 통한 평화적 저항에 첫 신호를 보낸 영광은 졸라에게 돌려져야 한다.” 에밀 졸라는 여리고 여행 도중에 강도 만난 자를 더러 목격했다. 제사장이 그를 그냥 보고 지나쳤고 레위인도 그대로 지나쳤다. 어려서부터 고아로 자라 고난의 삶을 살아온 사마리아인 졸라는 그러나 그를 거기 놔둔 채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가련한 자에게 다가가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맨 뒤, 제 나귀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주막집 주인과 함께 그를 극진히 돌봐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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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스’ 사건을 다시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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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희망을 노래하자-심 만 섭 목사
- 2020년이 밝았다. 뭔가 좋은 일들이 많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아니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지금 우리 사회를 살펴보면, 온통 부정(否定)과 낙심과 실망과 심지어는 분노로 가득차서, 네 편, 내 편으로 편을 갈라서 싸우는 형국이다. 지난 수년 동안 우리 사회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고, 새로운 정부는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을 한다고 해 놓고, 진짜 그런 일들을 벌이고 있다.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될 일이라면, 경험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 사람들의 생각에는, 특히, 지식층들이 생각하는 우리 사회 모습은 어떤 것이었나? 해마다 연말이면 교수들은 그들을 중심으로 사자성어(四子成語)를 통해, 우리 사회를 진단한 것을 발표한다. 10년 전인, 지난 2010년에는 ‘장두노미(藏頭露尾)’였다. 이는 진실을 숨기려고 하지만, 거짓의 실마리가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2011년에는 ‘엄이도종(掩耳盜鐘)’이었다. 나쁜 일을 하고 남의 비난을 듣기 싫어 귀를 막지만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2012년에는 ‘거세개탁(擧世皆濁)’이었다. 지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 모두 바르지 못하다는 의미이다. 또 2013년은 어떤가? ‘도행역시(倒行逆施)’이다. 잘못된 길을 고집하거나 시대착오적으로 나쁜 일을 꾀한다는 것이다. 2014년에는 ‘지록위마(指鹿爲馬)’로 선정하였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2015년은 다른 상황인가? ‘혼용무도(昏庸無道)’이다. 나라 상황이 암흑에 뒤덮인 것처럼 어지럽다는 뜻이다. 2016년은 ‘군주민수(君舟民水)’이다. 백성은 물이고, 군주는 배인데, 강물의 힘으로 배가 뜨지만, 강물이 화가 나면 배가 뒤집힌다는 것이다. 2017년은 어떤가? ‘파사현정(破邪縣正)’이다. 사악한 것을 부수고 사고방식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 해에는 탄핵정국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뭔가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그럼 2018년은 어떤가? ‘임중도원(任重道遠)’이다.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는 뜻이다. 과연 무거운 짐을 지고 제대로 가고 있는가? 지난 해 2019년은 어떠했나? ‘공명지조(共命之鳥)’이다. 한쪽이 없어지면 다른 쪽만 살 것 같지만 실은 같이 공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진영 논리로 나누어 심하게 다투는 심각함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한 해도 평안하거나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 위기 상황이었고, 실망의 순간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흥분하고 분노하고, 편을 갈라서 갈등하고 있는 모습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전국의 5,100명을 대상으로, ‘2019년 한국인의 의식 가치관 조사’를 했는데, 우리 국민들의 갈등이 얼마나 심각한 지를 알 수 있는 내용이 나왔다. 우선은 진보-보수의 갈등이 크다고 답한 것이 91.8%이다. 또 정규직-비정규직 간의 갈등이 크다는 응답이 85.3%이다. 그리고 대기업-중소기업 간 갈등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81.1%이다. 그런가 하면, 부유층-서민층 간의 갈등에 대한 응답도 78.9%를 차지한다. 그뿐인가? 기성세대-젊은 세대 간에 갈등이 있다는 것에도 68%가 찬성한다. 거기에다 수도권-지방 간 갈등이 있다는 의견도 61.7%를 점유한다. 그러니 우리 사회는 지금 ‘초갈등사회’라는 말이 크게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올해 2020년에는 크게 달라질까? 낙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가능하도록 하는 것은 국민들의 노력에 의해서이다. 우리 역사를 잠시 살펴보면, 우리는 저력과 좋은 잠재력이 있다.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세계 어떤 나라도 동시에 이루지 못한, 경제발전과 정치 민주화를 이룬 나라이다. 특히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 우리 기독교는 사람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본다. 우리 사회가 때로는 매우 실망스럽고, 온통 부정과 암울함으로 가득 찬 것 같아도,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희망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어두운 곳에 밝음을 허락하시고, 혼란의 와중에 길을 내시고, 우리를 인도해 주실 줄로 믿는다. 성경 창세기에 보면, 요셉은 형들에 의하여 노예로 애굽에 팔려갔으나,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먼저 애굽에 보내셨다(창45:5)고 고백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의 태도이다. 말씀에 의지하여 희망을 노래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의 판단처럼 부정적인 것과 혼돈만 보고 지레짐작으로 포기할 것인가? 혹여 세상에 희망이 없다고, 그 세상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께도 우리의 기준으로 적용하면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을 노래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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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희망을 노래하자-심 만 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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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의 한 신도 처단 사건/임 영 천 목사
- 18세기 중엽, 정확히 1761년 10월 13일 프랑스의 남부 도시 툴루즈에서 있었던 일이다. 생업이 직물(織物) 상인이었던 장 칼라스라는 사람의 큰아들이 아버지의 직물가게 문틀에 목을 매어 숨져 있는 것을 가족이 발견해 사법당국에 신고하였다. 그의 죽음은 엄연한 자살이었고 그 때문에 당국이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기만 했더라면 모든 것은 조용히 끝나버리고 말았을 일이었다. 그러나 일은 사실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고 모든 게 뒤틀려버리고 말았다. 그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고 타살이라는 방향으로 수사 결과가 발표되고 그 사건은 결국 재판으로까지 비화되어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큰아들이 타살되었다고 했을 때 그러면 그 범인이 누구냐 하는 것이었는데, 수사당국이 범인으로 지목한 이는 엉뚱하게도 사자(死者)의 친부 칼라스였다. 천인공노할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아버지가 진짜 범인이라고 한다면 상식적으로 보아 천인공노할 일이 아닐 수 없겠고, 그렇지 않다면 왜 이런 방향으로 수사가 진행되었는지 그 이유 규명이란 관점에서 볼 때 역시 천인공노할 일이 아닐 수 없겠다. 당국이 칼라스를 범인으로 지목해 발표한 내용이란 이러했다. 위그노(개신교도)인 부친 칼라스가 최근 가톨릭으로 개종하려고 작정한 큰아들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극단적 응징을 한 결과가 아들의 죽음으로 나타났다는 요지였다. 당국은 이런 수사 결과를 가지고 칼라스를 재판에 회부하였다. 아들의 죽음을 앞에 놓고 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아버지 칼라스는 친자 타살이란 엄청난 죄목을 뒤집어쓰고 재판을 받게 되었으니 정녕 하늘도 무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배경 설명이 다소 필요하리라. 유럽에서 종교개혁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독일, 영국, 프랑스…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피 흘림이 없이 그 개혁의 목표가 달성된 나라는 없었다. 개혁의 선구자들과 개혁에 동조한 일반 신도들 모두가 피를 흘림으로써(순교 당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개혁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른바 ‘칼라스 사건’이 벌어진 나라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톨릭이 강세였던 프랑스에 장 칼뱅의 개혁사상이 유입되면서 소수의 신교도(위그노)들이 다수의 구교도들로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아야 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1572년에 발생한 ‘성(聖) 바돌로매 축일 대학살 사건’이었다. 가톨릭 측의 계획된 음모에 의해 프랑스 내의 위그노들 수만 명이 학살당하였다. 성 바돌로매의 축일 행사에 위그노들이 모이도록 해 놓고 그들을 마치 가축 도살하듯 몰살시켜 버렸으니 참으로 천인공노할 일이었다. 그 결과는 10년 전(1562)부터 시작돼온 ‘위그노 전쟁’을 더욱 격화시킨 꼴이 되었다. 이 무서운 사건 이후로 신·구 양측 교도들 간에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져 감을 우려한 당시의 왕 앙리 4세가 1598년 위그노들의 신앙 자유를 보장하는 낭트칙령을 발표함으로써 양측의 긴장관계를 어느 정도 해소시킬 수 있었다. 다행히 그 ‘위그노 전쟁’(1562-1598)이란 내전도 여기서 끝이 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칙령은 절대군주(태양왕) 루이14세에 의해 1685년 철폐되고 말았다. 80여년 동안 어느 정도 숨을 쉴 수 있었던 위그노들은 다시 암흑적인 현실에 직면해야만 하였다. 왕은 위그노들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든지 아니면 국외로 이주하든지 양자택일하라고 강박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그 ‘칼라스 사건’이 또 발생한 것이었다. 칼라스 사건은 말하자면 가톨릭 측 인사들이 계획적으로 위그노 신자인 칼라스 집안의 청년 자살 사건을 타살 사건으로 날조해 놓은 것이었다. 거기에 친가톨릭 성향의 사법부 인사들도 합세해 위그노 신도인 칼라스 일가를 법망으로 얽어 사멸시킨 참극이었다. 위그노 집안의 아들이란 신분으로는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없다는 사실 앞에 절망한 큰아들이 자살을 택하고 만 사건을 완전히 침소봉대하여 아버지가 아들의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막기 위해 그를 살해해 버렸다는 식으로 덮어씌운 것이었다. 지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칼라스는 1762년 3월 9일 고법에서도 사형선고를 받고, 바로 다음날 공개적인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져 사지가 찢겨진 채 불살라졌다. 잔인하고도 참혹한 처단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무언가 조작된 데가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계몽철학자 볼테르가 끈질기게 달라붙어 재심을 청구했고,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어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으며, 또 칼라스의 원통함도 신원(伸寃)할 수 있었다. 사형판결을 받은 지 만3년 뒤인 1765년 3월 9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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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의 한 신도 처단 사건/임 영 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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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 이웃사랑, 장기부전 환자들 기대”
-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때,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풍성한 은혜에 감사하며 생명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그 사랑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교회들이 있다.광주 서구에 위치한 화정교회(담임 김성덕 목사)는 지난 11월 24일 주일,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이사장 박진탁 목사)를 초청해 생명나눔예배를 드렸다. 지난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며 하나님께 받은 사랑에 감사를 고백했다면, 이날 이웃을 향한 사랑을 실천하는 자리였다.김성덕 목사는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제목의 말씀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주변에 고통 받는 이웃을 바라보며 그 아픔에 공감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당부했다. 김 목사는 “어려움에 빠진 이웃을 외면하지 않았던 사마리아인처럼, 우리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의 곁에서 그들의 이웃이 되자”고 강조했다.이어 강단에 오른 본부 이사장 박진탁 목사는 “지금 이 시간에도 도움의 손길을 간절히 바라는 수많은 이웃들이 있다. 하루 8명에 가까운 이들이 장기 이식을 기다리다가 숨을 거두고 있다”는 현실을 전하며 “질병으로 고통 받는 장기부전 환자들의 진정한 이웃이 되어 달라”고 호소했다. 박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내어주셨듯이, 이웃을 위해 생명 나눔을 실천하자”고 독려했고, 그 결과 청년들을 비롯한 모두 152명의 성도들이 장기기증 희망등록에 참여했다.같은 시간 부산과 철원에서도 생명 나눔을 통한 이웃사랑의 실천이 이어졌다. 부산 사하구의 한울교회(담임 제인출 목사)는 ‘이웃사랑으로 축복의 선순환을 만드는 교회’라는 올해의 표어답게 지난 2009년에 이어 두 번째 생명나눔예배를 드려 눈길을 끌었고, 강원도 철원에 위치한 군인교회인 삼성교회(담임 임정인 목사)에서는 국가와 국민을 생각하며 장기기증을 다짐한 국군 장병들의 뜨거운 열정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이로써 24일 주일 하루 동안 전국에서 219명의 성도들이 생명 나눔을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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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 이웃사랑, 장기부전 환자들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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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동성애/심 만 섭 목사
- 최근 한국의 유명한 신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동성애를 지지하는 문제가 나왔고, 또 어느 다른 신학교에서는 교수들의 강의를 성희롱으로 학생들이 문제를 삼아 교계를 당혹케 한다. 당연히 거룩한 선지학교에서 이런 문제들이 불거져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세상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게 가고 있어 안타깝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이 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다. 현재 한국 사회를 달구고 있는 동성애와 페미니즘 때문이다. 이런 담론(談論)들은 동성애 보다는 페미니즘의 역사가 오래되었다. 먼저 페미니즘을 살펴보자. 페미니즘은 소위 ‘제1물결’ ‘제2물결’ ‘제3물결’이 있다. 제1물결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여성들의 법적, 사회적, 정치적 지위와 권리 획득을 위한 노력이었다. 사실 서구 사회에서 여성들의 참정권은 처음부터 남성들과 함께 동등하게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래서 대부분의 나라에서 20세기가 되면서, 남·녀에게 동등한 권리가 주어졌다. 그리고 제2물결은 196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68혁명’과 괘를 같이한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세력을 합해 이런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때의 슬로건은 ‘금지하는 모든 것을 금지 한다’는 것이었다. 즉 기존의 모든 질서와 가치와 체계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때 페미니즘 운동은 남녀의 지배관계가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에서 생긴다고 보고, 이것을 거부하는 운동이 격화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론을 제공한 사람으로는 시몬느 드 보부아르이다. 그녀는 <제2의 성>이라는 저서를 남겼는데, 그의 명제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성’을 생물학적인 성(sex)과 사회적인 성(gender)의 구분을 가능케 하였다. 또 케이트 밀렛은 <성의 정치학>에서 ‘여성억압의 뿌리는 가부장제의 성 및 성별 체계에 깊이 박혀 있다’는 주장으로, 사적인 영역에 속하던 ‘성’의 문제를 정치적이고,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낸 것이다. 또 한 사람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여성이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는 임신과 출산을 거부해야 한다는 급진적 페미니즘의 주장을 하게 된다. 이런 운동은 1970년대를 넘어서면서 시들해졌다. 그런데 1990년대 언어학자이며, 페미니스트이고, 레즈비언이었던 쥬디스 버틀러가 <젠더 트러블-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에서 충격적인 주장을 한다. ‘생물학적인 성과 사회적인 성은 분리되는 개념이 아니며, 성은 사회 속에서 반복적인 수행을 통해 구성하는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수자 섹슈얼리티를 확장시켜, 퀴어 이론을 제공한 것이다. 이런 영향으로, 한국에서도 동성애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다. 그 근거를 제공하기로는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동성애를 차별하지 말라는 내용을 담고 있고, 소위 ‘차별금지법’ 제정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고, 각 교육청에서는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비롯하여, 각 지자체에서는 각종 ‘인권조례’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서울시청 앞에서의 퀴어축제가 벌어지고, 이것을 전국으로 확산하려는 시도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또 정부에서는 엄청난 금액을 책정하여 ‘성인지’교육이란 명목으로 사회 각계에 걸쳐 교육하고 지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가 하면 일선 초·중·고교에서는 총체적인 성(사회적인 성·문화적인 성·생물학적인 성)을 도덕교과서, 보건교과서에서 가르치고 있다. 최근에 서울의 모 고등학교에서 ‘성평화동아리’를 학교에서 강제로 해체하여 벌어진 사건도 페미니즘, 동성애와 무관하지 않다. 지난 2일 국회의원 회관에서 <바른인권여성연합>이 개최된 포럼에 참석한 그 학교의 한 학생은 ‘페미니즘은 가정을 해체하고 우리 사회의 안녕과 질서의 체계를 무너뜨리며, 인간들이 살아오면서 세워온 원칙들을 해체하며, 인류의 문명과 발전에 퇴행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금 한국은 서구 사회가 1970년대 겪었던 제2의 페미니즘 물결과 1990년대 나타난 제3의 물결이 동시에 몰려와서 기승을 부린다. 그런 운동은 이미 상당히 알려진 대로, 반사회적, 반국가적, 반종교적, 반가정적이며, 남녀의 관계를 혐오와 폭력과 일방적 강요로 인해, 평화와 화합을 깨는 무서운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분명한 노선을 정해야 한다. 세속적이고 비성경적인 페미니즘과 동성애 사상과 이데올로기에 동조하여, 그들에 의한 물결에 떠내려가든지, 아니면 진리 말씀과 창조 질서를 중시하여, 우리 사회 마지노선을 지킬 것인가를 말이다. ‘동성애가 대세라느니’ ‘성소수자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느니’ ‘차별금지법을 만들어야 한다느니’하는 말은,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 모두에게 혼란·혼선을 주는 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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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 토요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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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동성애/심 만 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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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권과 국권 간의 긴장과 갈등/임 영 천 목사
- 거칠고 성급한 장군 출신인 테오도시우스가 4세기말(379년)에 동(東)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수년 뒤인 387년에 황제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한 폭동 사건이 터졌다. 이는 제국이 세금을 너무 무겁게 올린 데 대한 시민들의 불만에서 터진 것이었다. 중과세에 항거해 일어난 안디옥(안티오크)의 폭도들은 테오도시우스 황제와 황후의 동상을 넘어뜨리고 그것들을 시내 거리로 끌고 다니면서 격렬한 항의 시위를 벌였다. 황제의 보복이 예상되는 가운데, 안디옥의 감독이 진사단(陳謝團)을 구성하여 직접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황궁으로 찾아가 황제의 분노를 달래기에 최선을 다했다. 이때 1년 전(386)부터 안디옥의 장로로 안수를 받고 열심히 설교를 하고 있었던 크리소스토무스가 나서서 유창한 설교를 하였으니,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던 시민들로 하여금 사람(황제)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라고 갈파해 시민들과 황제 측 모두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한 몫을 담당하였다. 결국 황제는 안디옥의 장로 크리소스토무스의 간절하고도 강렬한 설복 때문에 폭도들에 대한 보복을 멈추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1년 뒤(388)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서(西)로마의 찬탈자 막시무스를 아퀼레이아 전투에서 패퇴시키고 이어서 그를 처형함으로써 동서 통일 로마제국의 통합 황제가 되었다. 경사라면 경사였다. 그러나 바로 그해(388)에 다른 한 종교적 충돌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황제의 처지를 다시 난처하게 만들었다. 제국의 동쪽 끝,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 강변의 한 도시 칼리니쿰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열성이 극심했던 그곳의 감독이 열광적인 신도들과 함께 어느 이단자들의 집회소와 유대인의 회당을 부수고 불살라 버린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지방의 평화를 교란시킨 죄를 응징하는 의미로 그 감독을 문책하고 또 가해자의 부담으로 그 파괴, 소실된 곳을 재건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374년부터 밀라노의 감독으로 재직해온 암브로시우스가 황제에게 그 명령을 거두어들일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다. 그는 교회 측이 유대인의 회당을 재건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적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일이 되므로 그 명령을 철회하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큰 영향력을 의식한 황제는 이번에도 앞서 내렸던 그 명령을 철회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뒤(390)에 또 하나의 큰 사건이 터졌다. 마케도니아의 도시 데살로니가에서 유혈 폭동이 일어나 황제의 측근(주둔군 사령관)인 장교 한 사람이 살해된 사건이었다. 그 내막은 이러했다. 데살로니가에 유명한 전차 경주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황제의 장교에게 체포당할 만한 위법의 범죄를 저질렀다. 그런데 경기 날짜가 다가오자 사람들은 그 전차 경주자의 출전 모습을 보기 위하여, 성급하게도 결국 그 장교를 살해해 버렸다. 이에 화가 난 황제는 “좋아. 어디 너희들끼리 실컷 경기를 해 보라지.”라고 심술궂게 응수하였다. 감추어진 속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원형경기장 안으로 황제의 무서운 음모를 모르는 7천여 명의 관중들이 모여들었다. 군인들도 따라 들어갔다. 그 경기장이 관중들로 꽉 차자 군인들은 문을 걸어 잠근 뒤 무려 세 시간 동안 그 경기장 안의 모든 사람들을 남김없이 학살하였다. 7천여 명의 관객들이 모두 시체로 변해 버렸다. 지난번 안디옥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자기(황제)의 동상을 파괴했던 불쾌한 기억을 지니고 있었던 황제는 이번 자기의 측근 장교를 살해한 일에 대해서는 본때를 보여주기로 작심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암브로시우스 감독은 황제의 이 만행을 도저히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황제를 파문시킨다는 결의를 하고 그에게 회개를 촉구해 보았다. 그러나 별 반응이 없자 감독은 참회의 증거를 보일 때까지 교회에 결코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황제에게 분명히 일러두었다. 결국 견딜 수 없게 된 황제는 홧김에 일을 처리하는 일이 없도록 누가 범죄를 저질렀을 때 40일이 경과하기 전에는 절대로 사형 선고를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해야만 하였다. 또한 황제는 모든 공중이 보는 앞에서 교회 바닥에 누워 손발을 하늘로 뻗고서 하나님과 교인들에게 죄의 용서를 호소했다. 이런 통회자복이 있은 후 황제는 교회예배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암브로시우스 감독은 교회의, 국가로부터의 독립을 주창하고, 교회의 교권을 국가의 국권으로부터 독립시키는 데 굳건한 토대를 세운 성직자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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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권과 국권 간의 긴장과 갈등/임 영 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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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시각이 왜 이다지도 다른가?-심 만 섭 목사
- 지난 세 달여 동안 우리 사회는 한 장관 후보자와 그의 장관 임명을 놓고, 엄청난 국력 낭비와 국민들을 피곤하고, 절망케 하였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마치 서로가 적을 앞에 두고 으르렁거리는 형국이었다. ‘개혁’이 목표라고 하지만, 그것 때문에 ‘블랙홀’에 빠져 들었다. 우리는 어떤 특정인의 의지나 소신만으로 우리 사회를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즉, 그가 그 일에 여러 면에서 적임자가 되느냐, 못되느냐의 판단이 우선이다. 만약 이를 충족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좋은 목표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이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하면, 그것은 허공을 때리는 헛손질에 불과하다. 이제는 국민들의 저항에 한풀 꺾인 모습이다. 양식 있는 국민들이 호응하지 않는 정책은 한낱 고집과 독선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이 사건에 대하여 각 언론들은 제각각 “사설”을 통해, 그 의중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어쩌면 그 시각이 첨예하게 이렇게 다른지 모르겠다. 그 표현들을 통하여, 우리 사회 갈등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디에서부터 그런 생각들이 대립하는 근원인지 살펴보자. 먼저 진보 언론의 대표적인 한겨레는 ‘그 동안 00 장관과 그의 가족에게 쏟아진 무책임한 의혹 제기와 언론 보도, 여기에 국민 동의도 없이 ‘정치적 판관’을 자처하고 나선 검찰의 수사가 지나치고 가혹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한다. 또 ‘검찰은 대통령 인사권과 국회의 장관 인준 절차에 무리하게 개입한 행태가 ‘00 논란’을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키웠음을 엄중하게 돌아봐야 한다’고 검찰을 비판하고 있다. 또 다른 진보지인 경향신문은 ‘검찰 개혁의 본령은 비대해진 검찰 권력의 남용을 견제하는 것이다. 이번 0 장관 일가 수사만 하더라도 검찰은 주어진 권한을 넘어 대통령 인사권과 국회의 인준 절차를 무력화하고 장관 임명을 좌지우지하려 했다’ ‘검찰 개혁 못지않게 언론 개혁도 시급한 과제임을 일깨워줬다. 시민들은 의혹 부풀리기, 인권 침해, 검증되지 않은 피의 사실 유포 등 무책임한 보도를 쏟아낸 언론에 대해 실망과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검찰과 언론에게 상당한 책임이 있음을 강조한다. 반면에 다른 언론들은 어떤가? 국민일보는 ‘00 법무부장관이 사퇴했다.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지게 하고, 불공정과 불법을 비호하는 수많은 궤변과 요설을 낳게 하고 많은 국민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사퇴했다. 하지만 진작 물러나야 했다’ ‘결국 0 장관은 자진 사퇴한 것이 아니라, 국민들에 의해 끌어내려졌다고 봐야 한다’고 00 장관 자신에게 문제점이 있었음을 강조한다. 문화일보는 ‘00 사태로 법치주의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크게 훼손됐다. 000 검찰총장을 임명하면서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해서도 성역 없이 수사하라고 했던 문 대통령은 0 전 장관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되자 ‘절제된 검찰권’을 주문하여 검찰을 압박했다’ ‘겉으로 공정과 정의를 표방한 집권 세력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난 계기도 됐다’고 주장한다. 즉 대통령과 여당의 문제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동아일보는 ‘검찰에 대한 감독권과 인사권을 행사하는 법무부장관에 일가족이 검찰 수사 대상인 사람을 앉힌 것도 민주주의와 법치의 정신에 반하는 비정상을 초래했다’ ‘청와대와 여당이 하나가 돼 검찰의 0 장관 수사를 공격하면서 형사사법제도에 대한 신뢰에 흠집을 낸 것도 문제다. 00사태는 국민의 상식과 순리에 저항하는 아집의 정치는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가에 큰 상처를 남긴다는 교훈을 남겼다’고 보도하고 있다. 중앙일보는 ‘사필귀정이자 만시지탄이다. 그 동안 온 나라가 ‘00 블랙홀’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대한민국은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두 동강이 나 국론분열의 민낯을 드러냈다’ ‘0 장관의 사퇴로 검찰 수사가 용두사미로 끝나선 안 될 일이다. 그 동안 0 장관 가족을 둘러싸고 제기된 의혹이 우리 사회의 공정과 정의에 입힌 상처는 너무 크다’고 하여 앞으로 이 사건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요구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민의와 상식을 거스른 대통령의 0 씨 임명은 나라를 내전 상태로 몰아갔다’ ‘00 사태가 남긴 상처는 0 씨 사퇴만으로 치유되지 않는다. 대통령은 반칙과 특혜로 살아온 사람에게 법무부장관 임명장을 줬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던 대통령의 취임 전 약속은 이제 희극적 대사가 됐다’고 비판한다.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지면, 다음 단계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자명하다.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반성하면 다음을 향해 바르게 나아갈 기회가 있게 된다. 그러나 잘못도 잘못으로 보지 못하거나, 그것을 제쳐두고 덧칠을 하게 된다면, 이는 거듭된 패착이 될 수 있다. 그 만큼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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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시각이 왜 이다지도 다른가?-심 만 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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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의 축제와 일제(日帝)의 몰락/임 영 천 목사
- 제74주년 8·15 광복절을 올해에 맞고 보내면서 고(故) 정종수 작가의 단편소설 <해방>이란 작품이 특별히 필자의 관심의 표적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매우 ‘흥미’ 있는 작품이면서, 또 더욱 ‘의미’ 있는 작품으로도 여겨졌기 때문이다. 정 작가의 <해방>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4반세기 전이라고 할 1996년에 계간 <농민문학> 가을호를 통해 발표되었다. 이 작품 속의 스토리가 매우 극적으로 전개되면서 독자의 흥미를 한껏 유발하는가 하면, 뒤에 가서는 독자들을 깨우치는 강한 힘을 발휘함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할 정도이기도 하다. 어떤 작품이기에 그럴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은 1945년 8월 ‘13일’부터 ‘15일’까지 단 사흘 동안에 걸쳐 일어난, 어느 농촌 마을에서 벌어진 기이한 사건들을 이야기의 축으로 전개한 농촌소설이다. 얼마 전 일제의 강제징용에 끌려간 주인공 박만수의 아들 정구가 이날(13일) 귀향했다는 낭보가 전해지면서 마을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들끓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청년들이 모두 다 죽어서 백골(白骨)로나 귀향하거나, 아니면 아예 종무소식(終無消息)인 채 돌아오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었는데, 어떻게 그의 아들 정구가 이렇게 두 눈이 시퍼렇게 살아 가지고 돌아올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축제의 분위기는 너무도 당연하고 또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고작 하루가 지나고 난 바로 다음날(14일) 더 놀라운 일이 새로 벌어졌다. 긴 칼을 찬 검은 양복의 일본 장정이 느닷없이 박만수의 집으로 들이닥쳐서 “박정구 있느냐?” 하고 잠시 호통을 쳤는가 싶었는데, 이에 지레 놀랐던지 아들 정구가 스스로 출두해 순순히 일본 순사 무리에게 끌려가고 말았으니, 정구는 이를테면 도망병 신세였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아버지 박만수가 이 사태에 대해 너무도 놀랐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날 밤 정신이 완전히 나간 채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한 박만수는 그러나 다음날(15일) 아침 일찍 어제 모 심었던 논으로 향했다. 이날은 이야기 속의 제3일, 바로 1945년 8월15일 정오(正午)경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을회관 쪽에서 “대한민국 만세! 독립 만세!”라고 외치는 소리들이 들리는가 하면 “해방이다, 해방!” 하는 톤이 높은 부르짖음도 들려 왔다. 이때 박만수는 갑자기 마을회관 쪽을 향해 달려가면서 외쳐대기 시작했다. “해방이다아. 정구야아, 해방이다아!” 이러는 그에게 해방이란 사건은 곧 자기 아들의 석방이었다. 그에게 있어 해방은 무엇보다도 아들의 무사 귀환이란 보다 구체적인 사실과 관련되는 일이었다. 어제 아들이 자기 면전에서 일본 순사들에게 연행됨으로써 먹구름 상태였던 박만수의 얼굴은 바로 하루 뒤인 오늘(15일), 활짝 웃는 해(태양)의 얼굴로 뒤바뀌어진 것이었다.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작품 속에는 몇 가지의 축제 행위들이 나타나는데, 이런 카니발적인 성격의 축제는 러시아의 문예이론가 미하일 바흐친이 규정한 이른바 ‘뒤집혀진 삶’, 또는 ‘거꾸로 된 세상’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농민들은 자기들의 축제를 통하여 일제에 대한 평소의 저항의식을 그런 집단유희를 통해 분출하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셈이다. 그 축제를 통하여 농민들은 일시적이나마 일제의 압제와 질곡으로부터 해방감을 만끽하는 것이다.실제로는 도망병 신세에 불과했던 아들이 귀향했다고 하여 아버지가 온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는 일은 확실히 일제 패망의 예조를 보여주는, 일종의 ‘뒤집혀진 삶’의 예행연습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8·15 해방의 축제를 온 마을 사람들이 마음껏 즐기는 행위 역시 그 집단 연행자들이 이전과는 달리 ‘거꾸로 된 세상’에서 살게 되었음을 실제로 확인하는 행위라고 보겠다. 이 축제 행위는 사회·정치적 장벽이 갑자기 허물어지면서, 지금껏 한국인들을 억압해오던 일본 순사들이나 억압받던 한국 백성들이나 양쪽 모두가 서로 평등한 위치에 놓이게 된 사실을 자축하고 그 기쁨을 만끽하는 향연이라 하겠으며, 이 집단적인 축제 행위가 진행되는 동안 일상적인 삶을 지배해 오던 사회 질서나 법률, 또는 제도나 관습 등이 모두 중지(종식)되어 그 효력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천황 제도에 기초한 일본 군국주의를 뒤늦게나마 거역하는 한국 농민들의 오만스러운 축제 행위가 천조대신 숭배에 항거하고 동시에 동방요배나 신사참배도 송두리째 거부함으로써 결국 태양신에 대한 신성모독적인 경지에 이르기까지 그 열기를 더해 갈 수 있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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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의 축제와 일제(日帝)의 몰락/임 영 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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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세상에 무엇을 줄 것인가?/이 효 상 목사
- 동성애와 차별금지법 반대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교회가 최근에는 자유주의 가치에 확고한 중심을 두고 대한민국이 당면한 과제들을 해결하는 분명한 정책 방향과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뛰어 넘어 정치적 참여를 위해 행보가 읽힌다.한국교회가 뜨겁다. 뜨거운 세상 복판 중심에 교회가 나섰기 때문이다. 찬반양론으로 뜨거워진 머리로는 해답이 없다. 분열된 감정의 표출과 정치적 행보로도 답이 없다. 특히 한기총의 전 대표회장의 정치발언은 일부 공감하는 측면도 있지만 한기총의 정체성과 추구하는 방향이 정치적인가를 묻게 한다. 이성보단 감성에 치중한 선동정치의 전행을 본 느낌이다. 기독정당을 위한 표를 가져오기 위한 전략인가?교회는 시대의 방관자인가? 적극적 참여자인가? 하는 문제를 넘어 북한과 미국과의 문제, 한·일간의 문제, 문재인 정부와 조국 장관에 대한 문제 등 현안이 교회가 목소리를 내며 적극 나서게 하는 이유다. 포퓰리즘의 극치를 넘어 선심정책이 날마다 발표되고 나라 돈이 거덜나고 빚은 쌓여만 간다. 결국 청구서는 국민들의 몫이다. 대한민국은 이념과 과거에 매몰된 무능한 운동권에 의해 한계를 경험하며,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 운영되어서는 안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극우는 적폐가 되고 과거는 친일, 친북은 종북, 한미는 영원한 동맹이라는 관념의 고착화는 불행하다. 탄핵과 과거에 매몰된 정치적 갈등을 미래의 희망으로 치환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차분함과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려는 진중함이 요청되어 진다. 교회가 길거리로 나섰다. 길거리 기도회는 자유 민주주의체제, 한미동맹, 경제회복을 위하여, 위정자들이 정녕 국민을 위한 봉사자가 되도록 순수 기도집회를 하자는데 동의하면서도, 정치적이진 말아야 한다는 전제를 생각하게 된다. 분열된 지금의 교회가 세상에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줄 것이 없기에 목소리 높여 피켓들고 거리로 나가는 것이 교회의 역할과 사명이 맞기는 한 것인가? 교회는 이런 골목대장식 앞장서는 행동이 아니라 우선 할 일은 한국교회 연합기관들이 하나로 합치는 것이다. 더 이상 여러 말로 분열과 갈등을 정당화하면 안된다. 그리고 과거의 민족주의 대신 미래와 글로벌 시민으로 시선을 돌려 국제적으로 당당하고 자부심 넘치는 나라가 되도록 하는 캠페인을 주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3.1운동의 중심이었던 민족교회로, 민족이 사는 길은 100주년을 보내면서 그 정신을 계승하고 민족의 자립을 모색하는 것이다.그러려면, 지금과 같은 중국이나 일본, 북한 그리고 심지어 미국에까지 의존하는 방식을 뛰어 넘어서야 한다. 중국의 저가 상품과 값싼 노동력, 일본의 기술이전, 미국의 동맹으로서 경제적 지원 과 맞물려 이 민족의 근면 성실함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가져오는데 일익을 감당했다. 전쟁 폐허국에서 이렇게 세계 경제대국으로 우뚝 선 경우가 없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축복이다. 그 중심에 교회가 있었다. 묵묵히 일하며 시대와 나라를 지킨 신앙인들이 있었다. 집안에 여러 자녀가 있는 것처럼 교회에도 마찬가지이다. 보수와 진보라는 두 자녀가 있다. 하물며 나라에도 다양한 세력이 존재한다. 혹시나 친중, 친일, 친미, 친북일지라도 어느 한 쪽을 무조건 비판할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 목표는 그것을 딛고 넘어서야 자주 독립국가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 길이 민족이 다시 사는 십자가의 길이자 제2의 안창호, 유관순의 길이다.교회는 교회의 길을 가야 한다. 지금 교회가 할 일이 있다. 교회가 다시 사는 길은 가슴을 넓혀 갈등과 분열의 시대에 보수든 진보든 품고 한강의 기적을 만든 국민적 역량을 다음세대와 함께 미래세대가 희망을 갖는 나라를 만들어 가는데 시간이 걸리더라도 관심과 역량을 쏟아야 한다. 교회여! 선동 정치에 발을 담구고 온 몸에 진흙탕 물로 뒤범벅되므로 교회의 사명을 잃어버리지 말자. 양극단의 길에서 정신 차리고 이성을 찾자. 시류에 영합하여 너무 흥분하다 교회의 본질을 벗어나진 않았는가? 한국교회가 그만 표류하고 갈 길을 찾게 되길 손 모아 기도하며, 교회는 교회이다. 교회가 이 시대의 마지막 희망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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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세상에 무엇을 줄 것인가?/이 효 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