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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로교 100회 총회 교단통합 원년되게 하자
    한국기독교는 장로교가 약 70%를 차지하는 장로교 중심의 교회이다. 전국의 6만여 개 교회 중에 약 4만 개가 장로교화란 뜻이다. 그런데 이 장로교회가 교단만 300개가 넘는다. 1912년 하나의 장로회 총회로 시작된 단일교단이 불과 100여년 만에 300개 교단을 만들어 낸 것이다.장로교 분열의 원인은 신사참배와 자유주의 신학 등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지도자들의 교회론이 잘못된 데 있다. 여기에다 소위 지도자들의 종교적 세속적 욕심이 개재되어 나타난 현상이 교단분열이다.그런데 금년 9월 총회가 장로교 100회 총회이다. 장로교로서는 대단히 의미가 있는 총회이다. 이번 100회 총회에서 교단분열의 시대를 마감하고 통합의 시대로 나아가자는 선언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번 9월 총회에서 교단통합 시대를 열자는 의지를 드러내는 결단이 요구된다.지난 9일 한국교회는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하나님께 ‘우리에게 통일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 일에 한국교회가 쓰임받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남북의 통일 이전에 우리가 먼저 선행해야 할 일이 있다. 장로교 통합 없이 남북통일이 되면 북한지역에도 300개 교단을 내걸 것인가.이번 9월 총회에서 통합하는 교단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대신과 백석의 통합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고신과 고려의 통합이다. 한국교회 교단통합은 둘이 통합하면 셋이 되고 넷이 되는 악순환을 겪어 왔다. 그렇더라도 통합은 중요하다. 장로교의 대통합은 쉽지 않다하더라도 교단간판을 하나라도 더 내리고 세를 늘릴 수 있다면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한국장로교는 신학과 신앙이 모두 같다. 개혁주의 신학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기초한다. 신학적 강조점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다만 상대의 신앙을 얕잡아 보고 의심하는 더러운 신앙적 오만이 통합을 방해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진리 파수를 내세우지만 실상은 한 줌도 안되는 세속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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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5-08-28
  • ‘가나안’교인
    ◇요즘 한국교회에는 ‘가나안’ 교인이란 말이 있다. 이는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면서도 교회에는 ‘안나가’는 노미날리티(Nominality)를 이르는 말이다. 노미날리티는 면목상 기독교인, 즉 이름뿐인 기독교인이란 뜻이다. 이런 한국교회의 ‘가나안’교인으로서 노미날리티는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세례도 받고, 주일학교 선생이나 성가대원으로 활동하거나 집사까지 지내다가, 어느날 어떤 게기로 교회와 멀어진 지식인 가운데 주로 많다. 대부분 목회자나 교인간의 갈등이 그 원인이다. 내가 기독교인으로서 가치관을 가지고 이웃을 위해 헌금도 하고, 주일날 혼자서라도 하나님께 예배하면 되었지, 굳이 교회에 나가 꼴보기 싫은 사람들과 갈등을 가질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에서 노미날리티로 전락한다.◇이같은 기독교의 노미날리즘(Nominalism)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먼저 전통적 기독교 국가인 유럽에서부터 시작되어 전 세계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유럽 인구의 60%는 기독교인이다. 그리고 아시아에는 이제 겨우 10%의 기독교인이 있다. 그러나 그 중 약 44%는 명목상 크리스챤이다. 약 17억 기독교인 중에서 44%에 해당하는 7억2천의 기독교인이 명목상의 기독교인인 셈이다. 이들은 유아세례, 장례식, 결혼식 등이 있을 때는교회에 나오지만, 평소에는 교회 예배나 기독교 활동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는다. 이들이 명목상 기독교인으로서 살아가는 모습 또한 다양하다.◇노미날리티라고 해서 기독교인이 아닌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의 의무로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야 한다는 ‘성수주일’(聖守主日)은 반드시 교회에 출석해야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미날리티들의 주장이 전혀 ‘틀린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노미날리티의 문제는 ‘성도의 교제’가 없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미날리티의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없다. 사도신경은 기독교인의 신앙 가운데 ‘거룩한 공회’와 ‘성도의 교제’를 고백하고 있다. 거룩한 공회는 예배를 위한 교회이고, 성도의 교제는 예배를 위한 모임이다. 이 교제는 이 땅에서 뿐 아니라, 죽음 이후 새예루살렘에까지 이르는 교제이다. 이는 기독교인의 특권이다.◇노미날리티의 형태는 다양하다. 인종적, 민족적 연대감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 부모의 신앙이 기독교임으로 자연히 그 자녀도 기독교인으로 간주되는 사람들, 장례식이나 결혼식 등 기독교 종교의식에는 참여하지만 내적으로는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 기독교에 대해여 기대를 버린 사람들, 교회 안에서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잘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 기독교 신앙과 일상생활과의 적절한 관련성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 기독교 신앙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기독교의 가치와 원리들은 지지하는 사람들 등등 이들 중에는 교회 명부에만 이름을 올리고 예배에는 참여하지 않는 기독교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믿음을 가지는 기독교인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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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27
  • 일본총리 아베 담화의 의미
    일본총리 아베는 지난 14일 전후 70주년 담화를 발표했다. 그 담화에는 식민지배와 침략 전쟁으로 “숨진 모든 사람들의 목숨 앞에, 깊이 머리를 숙이고, 통념의 념을 나타내는 것과 함께, 영겁의, 애통의 마음을 진심으로 올린다”면서, “여럿 죄도 없는 사람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손해와 고통을, 우리나라(일본)가 주었던 사실”을 인정하고 있으나, 오히려 태평양 전쟁으로 300만여의 일본인의 생명이 희생되었다는 점을 강조했을 뿐, 수많은 아시아인들에게 저지른 범죄를 사죄하지는 않았다.특히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중국, 동남아시아, 태평양의 섬들 등 전장이 되었던 지역에서는 전투뿐만 아니라 식량난 등으로 인해 많은 무고한 백성이 고통받고 희생됐다”고 했지만, 36년간의 식민지배로 나라의 국권과 말과 글까지 말살하려던 한국인의 고통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대한민국은 완전히 무시된 것이다.일본은 한국에 대한 침략과 식민지배 기간 얼마나 많은 애국지사들을 살해했는가. 얼마나 많은 조선의 여성들을 농락했는가. 얼마나 많은 조선의 청년들을 끌어다가 강제노역을 시켰는가. 그들은 그 강제노역을 견디다 못해 그곳에서 수없이 죽어갔다. 그러고도 아베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뻔뻔스럽게 당시의 식민지배를 정당화 할 뿐, 아예 한국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뿐만 아니라, 한반도 분단의 원인은 누구에게 있는가? 일본 제국주의에 있다. 20세기초 일본이 침략하여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지 않았다면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나누어 지배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두 말 할 필요 없이 한반도의 분단고통의 책임 또한 일본에 있다.일본은 독일과 달리 전쟁을 일으켜 수천만의 아시인의 인명을 살상하고, 300만의 자국민을 희생시킨 전쟁범죄자들을 심판하지 않았다. 오히려 1급 전범자들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해 놓고 국가적 예우를 하고 있다. 전쟁범죄자들을 영웅으로 받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평화헌법만 바뀌면 또다시 전쟁할 수 있는 국가가 되어 이웃 나라를 괴롭힐 것이다. 우리는 일본인의 친절에 만 현혹되지 말고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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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5-08-24
  • 가톨릭교회의 신비주의
    로마에 본부를 두고 있는 가톨릭교회는 그 교리에 성경이 지지하지 않는 여러 가지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성찬의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이다. 성찬식은 그리스도가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면서 빵과 잔을 나누어주며 빵은 내 몸이라 했고, 포도주는 내 피라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기념하라 하시고, 또 이것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한데서 유래된 세례와 함께 기독교의 대표적 성례이다.그런데 가톨릭교회는 이 성찬식을 서품받은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는 순간에 그 빵과 포도주가 신비롭게도 실제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믿고 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예배를 ‘미사’(그리스도의 몸을 보여주는 것)라고 부른다. 신도들은 사제의 축성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 빵과 포도주를 사제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보는 것’이 곧 예배인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교리서 1350조는 “성찬식에서 빵과 포도주는 그의 몸과 피가 된다.” 1375조는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함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성사에 현존하시게 된다.” 1413조는 “빵과 포도주는 축성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실체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고 있다.그러나 이 화체설은 초대 기독교는 몰랐던 교리이다. 이 교리가 기독교에 들어온 것은 가톨릭교회가 교황권을 절대화 한 시기인 9세기에 라두벌투스(Radbertus)란 사람이 가르치기 시작해서 1059년에 이르러 비로소 가톨릭교회의 신앙으로 선포되었고, 1215년 제4차 라테란회의에서 결의된 것이다.이 가톨릭의 화체설은 종교개혁자들로부터 부정되고 비판되었다. 개혁파는 가톨릭의 화체설도, 루터파의 실재적 임재설도, 쯔빙글리파의 상징설도 반대하고, 성찬식에서 그리스도는 영적으로 임재하는 것으로 믿을 뿐이다. 그리고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념하고, 다시 오실 것을 깨우치는 것이다.한국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화체설을 비롯한 비성경적 신비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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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5-08-14
  • 과연 십일조가 기독교인의 의무 규정인가
    한국교회 장로교단 가운데 가장 교세가 큰 예장합동측 총회 헌법개정위원회(위원장 권성수 목사)가 공청회를 열고 십일조를 내지 않는 교인의 권리를 제한하자는 교단헌법 개정안을 총회에 제안했다. 동 위원회는 “헌금은 성경이 가르치는 원리를 따라 십일조와 기타 헌금으로 구분하되 십일조는 당연한 의무이며 그외 기타헌금 등은 자유로운 헌납이 되어야 한다. 모든 입교인은 성경에 가르친 대로 소득의 십일조를 반드시 드려야 하며 이 십일조는 본 교회에 드려야 한다”(예배모범 제7장)고 규정하고 있다.또 교회정치 제2장 제8조 '교인의 의무'에는 “세례교인은 복음전파와 교회가 시행하는 사역을 위해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인이 이러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당회의 결의로 공동의회 결의권과 투표권을 제한할 수도 있다”(제2장 제10조 '교인의 권리 제한')고 밝히고 있다. 이는 십일조가 합동측 교인들의 의무 규정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그런데 합동측 신학부는 얼마전에 성경적 십일조에 대해, “십일조는 율법주의 신앙이 아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신앙고백이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드려야 한다”고 말했다. 신학부의 견해로는 십일조가 교인의 권리를 제한 받을 만한 의무규정은 아닌 셈이다. 그러나 헌법개정위원회는 십일조를 교인의 의무 규정으로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합동측은 지난 2013년에는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교인 자격을 정지시키겠다는 안을 총회에 내어 놓았다가 그 결의가 무산된 바 있어, 이번 헌법개정위원회의 헌법개정안이 오는 9월 총회에서 어떻게 처리될지는 지켜봐야 알겠지만, 역사적 기독교가 십일조를 교인의 의무 규정으로 정한 예가 있었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어 매우 의아하다. 이는 헌금을 확보하려는 율법주의적 발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기독교인의 의무 규정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외에는 없다.합동측은 한국기독교 최초로 ‘세례교인 의무금’을 정하여 이를 거두어 총회 운영에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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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5-08-14
  • 광복 70년과 분단 70년에 부쳐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이라는 국호를 결정하고 일제로부터의 광복이 이루어진지 분단 70년을 맞고 있다. 억압으로부터의 해방된 한반도를 둘러싸고 냉전에 의한 이념 분쟁으로 남북으로 갈라진 민족은 수 천 갈래로 찢어지고 갈라지는 분열의 전쟁터가 되었다.이러한 과정에서 북에는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거주하며 신탁과 반탁이 민족의 새로운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신탁 통치안을, 스탈린은 즉시 독립안을 제시하였다. 투루먼 등장 이후 미소 강대국은 상호 각축을 통하여 마침내 포츠담 선언에서는 38선 획정을 하고 소련의 참전과 함께 38선이 확정되었다. 북은 소련이 남은 미군이 주둔하게 되면서 그렇게도 원하던 통일 조국은 허리가 잘리는 분단으로 고착화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한에서의 하지 통치의 미군정 3년사는 일제 36년사의 식민지와는 다른 새로운 종속과 식민의 통치가 시작 되는 기간이었다. 미국의 한반도는 일제로부터 해방이 아니라 적국에 진주한 점령군으로서의 행태를 보였고 “남한 민중각위에게 고함” 이라는 하지의 포고문에서 그 의미가 잘 나타나고 있다. 미국은 40여 년의 굴욕과 치욕, 억압과 수탈로부터의 평화 유지보다는 한반도를 무참히 짓밟고 지배했던 일본을 보호하는 정책으로 일관하였다. 여기에는 친일과 매국으로 나라를 팔고 민족과 민중을 착취한 친일 족속과 민족 탈취의 세력들을 심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체제 유지를 위한 주춧돌로 세우는 역사의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따라서 한반도의 운명은 일제의 업적 통치의 40여년과 함께 분단국가의 성립과 민족상잔의 전쟁을 겪고 이승만과 같은 지도자를 세움으로 분단의 영구화는 물론 미국의 종속과 식민의 세상이 다시 시작 되게 된 것이다. 하나의 통일 국가를 위하여 독립운동에 몸 바치고 갖은 고초를 모두 겪은 진정한 민족 지도자는 모두 죽거나 이념 전재의 희생물이 되고 친일파들과 자기 출세와 부귀영화, 아부 아첨꾼들에 의하여 반쪽 나라가 세워진 것이다. 북의 해방군으로 온 소련군은 철수하고 반쪽 국가인 공산체제가 세워지고, 민주의 이름으로 미군정의 종속 하에 세워진 남한의 반쪽국가는 민족과 민중을 팔아먹은 친일파와 그 친일파를 앞세워 동북아의 이권과 세계 패권을 지속시키기 위한 미군정 통치자인 미국의 권력과 하지에 의하여 진정한 민주와 자주를 이룰 수 없는 통한의 오늘을 맞고 있는 것이다.우리는 남북이 같은 핏줄을 이어 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각각의 분단 70년의 길고도 지루한 갈등과 충돌,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의 세월을 살아 온 과정에서 다시 하나가 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수많은 민중의 피를 뿌려서 아직도 이루지 못한 민주와 자주의 거친 역사의 광야 한복판에서 통일의 길은 요원한 것만 같다. 남은 “북진통일” 북은 “적화 통일” 이라는 악한 통일교육의 틀을 벗고 서로가 함께 사는 민족통일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1953 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 4조 60 항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 보장을 위하여 3개월 내에 정치회의를 소집하고 한반도로부터 모든 외국 군대의 철수 및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 문제들을 협의할 것을 건의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100만이 넘는 병력과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남은 미국의 핵우산과 생화학 무기를 품은 채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 전쟁 상태로 살고 있다. 분단 55 년 만에 남북 정상 회담이 열리고 6.15 남북 공동선언이라는 평화협정의 단초가 마련되었지만, 여전히 남북은 평화의 길 보다는 죽음이 드리워진 전쟁의 기운이 왕성하다. 우리의 해방과 광복은 여전히 더 깊은 수렁과 웅덩이에 빠져서 헤어 나오기 힘든 억압과 신식민지에 살고 있다. 자주와 민주 평화와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한반도의 미래는 돌이킬 수 없는 전쟁과 암흑의 길로 파멸될 수 있다. 남북한 모두가 함께 사는 평화협정을 이루고 지속적인 남과 교류를 통하여 자유롭게 왕래하며 사는 남북의 통로가 활짝 열려야 한다. 친일과 매국의 길을 버리고, 어떤 친 외세들로부터 벗어나서 남북의 자주 민족 주체적 평화 통일로 나아 갈 때만 우리의 진정한 광복은 성취될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5-08-14
  • 고질병
    1984년 한국교회100주년선교대회 이후 최대 집회로 기록될 ‘광복 70년 한국교회 평화통일기도회’가 끝이 났다. 15만명(경찰 추산)이라는 어마어마한 인파가 서울 시청 광장부터 광화문까지 가득 메운 모습은 기독교가 위기라는 말이 무색하게, 한국교회가 여전히 건재함을 사회에 보여준 일대의 사건이었다. 이번 기도회는 향후 한국교회 역사에 한 획으로 남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인 기도회가 그동안 한국교회 대형집회의 고질병으로 지적됐던 재정 충당을 위한 순서자 남발, 순서자들 대형교회의 성도 동원 등 수많은 문제들이 총망라됐다는 비난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이번 기도회는 유난히 길었다. 순서만 해도 4부에 이르렀고, 설교자는 무려 4명이나 등장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순서자들의 숫자다. 이번 기도회에 순서를 맡은 인물들은 총 54명이다. 규모가 큰 기도회라 할지라도 54명이나 순서자로 등장한다는 것은 상식선을 한참이나 벗어난 부분이다. 도대체 왜 이런 기도회가 되어버린 것일까?일단 이번 기도회는 위에서 언급했듯 한국교회 주요 연합단체부터 교단까지 다수가 참여했다. 기도회에 많이 참여했다는 것은 그만큼 예산이 많이 걷혔다는 말이 되며 각 단체나 교단, 개교회는 주최 혹은 공동주최에 이름을 올리는데 각각의 후원금을 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순서로 직결이 된다. 물론 대형집회를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재정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이러한 후원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꼭 순서까지 맡을 필요가 있는가? 반대로 순서를 맡기 위해서는 꼭 돈을 내야만 하는 것인가?이번 기도회에 참여한 15여만명의 성도들은 54명에 이르는 엄청난 순서를 인내해야 했다. 만약 주최측이 성도들을 배려한 행사를 준비했다면 결코 이런 식의 순서는 짜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엄연한 한국교회 대형집회의 한계이자, 고질병이다. 이번 기도회를 보며 결코 담백하지 않은 이 찝찝함은 지난 1974년 엑스플로 74대회, 1984년 한국교회100주년선교대회 등 이전의 대형집회들과는 분명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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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14
  •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고 명한다. 그리고 또 성경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라고 말한다. 성경 어디에도 그 자식이 무슨 이유로든 그 부모를 잘 모시지 않고도 복음 받는다는 구절이 없다. 예수님이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7-38)라고 한 것이, 마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목회자는 그 부모를 외면해도 좋다고 한 것인양 해석되어서는 안된다.◇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에 이상한 풍조가 일고 있다. 교회가 목회자를 청빙함에 있어서 그 목회자가 부모 모시는 것을 꺼린다는 것이다. 목회자가 성경의 명령에 따라 부모를 공경하고 싶어도 교회가 이를 좋게 보지 않는 이상한 풍조가 한국교회에 널리 퍼져가고 있는 것이다. 목회자가 그 부모와 함께 살면 교회에 부담이 된다는 이유에서이다. 한국교회에 망조(亡兆)가 들려니 교회 안에 별 희안한 사조가 다 생겨나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목회자에게 자녀가 많아도 청빙에 지장이 있다고 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떻게 하면 자식을 더 많이 낳을 수 있게 할 것인가 고민하며 장려하고 있고, 교회는 주일학교에 아이들이 없어서 ‘다음세대’를 걱정하고 있는 마당에, 목회자가 자녀가 많다고 하여 청빙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이는 교회가 왜 이 땅에 존재하는가 하는 그 존재 이유와 교회의 미래는 생각하지 않은채, 순전히 돈 몇푼 아끼려는 개교회의 세속적 이기주의가 보여주는 사례이다. 목회자가 그 부모를 극진히 모시는 모습을 보인다면, 교인들에게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설교 10번 하는 것보다 더 큰 감동과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이는 사회적으로도 교회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매우 큰 교훈이 된다. 그런데도 어리석게 교회가 목회자를 청빙하면서 부모 모시는 것을 꺼리고, 자녀가 많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주는 풍조가 일고 있다니, 이런 교회가 어떻게 우리사회를 인도하고, 교회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리석은 짓이다.◇교회는 오히려 부모를 모시는 목회자에게 그 형편대로 ‘부모 수당’을 드리고, ‘다자녀’ 목회자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선교학에서는 가장 확실한 최상의 선교방법이 신자들이 자식을 많이 낳는 ‘생물학적 성장’이라고 한다. 한국교회도 이제까지 이 생물학적 성장에 기대온 바가 크다. 또한 이는 지금 전 세계 이슬람이 추구하고 있는 선교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데 성경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고 있는데, 한국교회는 사회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한국교회는 왜 이 좋은 교회성장 방안을 외면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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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14
  • 오늘날 우리 교회의 위치
    현대사회는 사회에 대한 종교의 영향력이 현저히 감소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사회적 가치관은 주류종교에서 나온다. 우리나라도 신라와 고려 시대에는 불교가, 조선 시대에는 유교가 사회적 가치관의 실체였다. 그러다 기독교가 전래되면서 우리 사회는 다종교 사회로 자리 잡고 있다.조선 시대의 사회 정치적 가치관이었던 유교가 해방공간에서 사회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퇴조하고, 지금은 불교(22%)와 기독교(21%)와 천주교(7%)가 우리 사회의 주요 종교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기독교나 천주교는 외래종교 취급을 받아 정부 정책에서는 철저히 소외돠고 있다. 정부의 종교문화정책 지원금의 약 90%가 불교에 지원되고 있다. 정부 정책에는 불교만이 존재하는 셈이다.그러나 우리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종교는 기독교이다. 교회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부터 어떤 사회를 이루어 갈 것인가를 끊임없이 설파한다. 그 가운데 때때로 일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교회는 신도들의 영혼과 생활을 돌보는 일뿐 아니라, 사회에 대한 봉사와 가난한 이웃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교회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우리 사회 전반에 기독교의 영향이 널리 퍼져 있는 것이다. 이를 부정할 수는 없다.그런데 왜 작금의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가? 그것은 두말할 필요없이 교회가 큰 덩치에 비해 그 행동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마치 무당 절간쯤으로 생각하고 교회를 통해 재화(財貨)를 얻으려는 세속적 욕심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한 비밀’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교회 지도자들이 만들어 내는 부작용이다.교회가 새롭게 되는 것은 결국 목회자로 부름받는 사람들의 소명의식이다. 먹고 살기 위한 직장을 구하려면 공무원에 지원하거나 쓸만한 회사에 들어가는 것이 옳다. 교회를 돌보는 것은 먼저 하나님이 맡긴 목양에 있고, 목양에 전념하는 자는 거기에서 나는 것으로 사는 것이다. 세속적 욕심을 내려 놓아야 한다.
    • 연지골
    • 사설
    2015-07-31
  • 기독교의 ‘정통성’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들과 함께 지낸 예수에 대해 세상을 보는 특이한 교훈을 가진 선생쯤으로 여기고 따랐다. 그런데 그가 가는 곳마다 병든 사람들이 치유를 받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나자 그에게 어떤 영적인 힘이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다가 유대인들의 정치적 선동에 휘말려 예수는 죽었다. 그때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예수가 사흘째 되는 날 부활하여 살아서 그들에게로 온 것이다.제자들은 그로부터 이 부활한 예수가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내셨다는 복음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갔다. 그래서 그를 처음에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메시야’ 혹은 희랍어로 번역된 ‘그리스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대인의 메시야 사상을 들어보지 못한 희랍과 로마 세계에서는 하나님이 세상 속에 오셔서 말씀하시고 행하셨으며, 하나님 자신이 인간들에게 자신의 본성을 나타내셨다는 신앙을 표현하는데는 적당치 않게 보였다.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주” “구세주” 혹은 “독생자”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술어들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특별한 계시를 인간에게 나타내셨다는 제자들의 신앙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으셨을 뿐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이셨고, 인생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였다는 것이다.예수의 생애와 교훈을 묘사하는 한마디 말은 ‘사랑’이었다. 하나님은 예수와 같으니, 하나님은 또한 사랑이시다(요일 4:8). 그래서 바울은 이 사랑 때문에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롬 5:8)고 말했고, 또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그 무엇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롬 8:38-39).이리하여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위대한 두 자유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하나는 두려움에서의 자유요, 또 하나는 죄로부터의 자유였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정통성을 수립하게 한 믿음의 핵심이다. 이러한 기독교 신학은 사람들이 조용한 연구실에서 만들어낸 어떤 철학적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성령의 조명으로 교회의 일선에서 세상과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 연지골
    • 사설
    2015-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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