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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47
    야곱은 그의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의 형과 싸워 그의 어머니를 힘들게 하였다(창 25:22). 그의 투쟁적인 삶은 출생시에는 말할 것도 없고, 소년 시절, 그리고 장년의 때 까지 계속된다. 그의 투쟁의 대상은 그의 형 에서였다. 야곱은 태어날 때 그의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있었으므로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고 불렀다. “야곱”이라는 말은 “발꿈치를 잡다” 혹은 “속이다”(창 27:36; 렘 9:3; 호 12:4)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동사 “아카브”로부터 명사형 “속이는 자”(deceiver)와 “발꿈치”라는 의미가 파생한 것이다. 뒤에서 발꿈치를 잡는 것은 분명 사람을 속이는 행동이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 에서의 복을 가로챈 야곱을 향하여 “네 동생이 속임수로 와서 네 복을 빼앗았구나.”(창 27:35)라고 말하자 에서는 “그래서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고 부른 것이 아닙니까?”라고 대답한다. 에서는 야곱의 이름을 “속이는 자”로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출생시에 발꿈치를 잡았다는 사실을 가지고 어린 아이 이름을 “속이는 자”의 의미를 가진 “야곱”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지나치다. 오히려 뱃속에서부터 싸우던 이들이 먼저 이 세상에 나오기 위하여 겨루던 야곱의 투쟁적인 모습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해야 맞다. 이후 야곱은 죽을 끓여서 장자권을 사고, 아버지를 속여서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다. 그리고 그는 그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서 피신하여 라헬을 만나 그 여자를 얻기 위하여 20년이나 머슴살이를 한다. 야곱의 20년 머슴살이는 한 여자를 얻으려는 집념으로 그의 장인 라반과의 속고 속이는 투쟁의 세월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집을 나온 지 20년 후 야곱은 그의 네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으로부터 도망쳐 나와 고향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가는 길이 평안하지 않았다. 뒤에서는 라반이 그를 해고자 추격해오고, 앞에서는 일찍이 그를 죽이려 했던 형 에서가 그를 대면하고자 다가오는 형세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야곱을 도우신다. 먼저 라반의 꿈에 나타나셔서 야곱을 해하지 못하게 하신다(창 31:29), 라반은 야곱이 말없이 도망간 사실에 대하여 섭섭함을 토로하고 서로 언약을 맺고 야곱을 보낸다. 그러나 야곱은 에서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두려워하고 걱정하였다(창 32:7). 그리하여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도 하지만 또한 “내가 내 앞서 가는 선물로 그의 감정을 풀고 그 후에 그의 얼굴을 보면 그가 아마도 나를 받아줄 것이다.”(창 32:20)라고 말하며 많은 선물을 여러 개로 나누어 따로 따로 보낸다. 그래도 그는 불안하여 밤이 되자 가족들을 얍복강 건너로 보내고, 자기는 홀로 강을 건너지 않고 있다가 동이 트기까지 하나님과 씨름하던 중 엉덩이뼈가 탈골이 된다. 그리고 동이 틀 무렵 그 사람이 자기를 보내라고 하자, 야곱은 그가 자기를 축복해주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겠다고 그를 붙잡는다. 이때 그 사람은 야곱을 묻는다. 야곱이 그의 이름을 말하자 그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창 32:28, 개역성경)라고 말한다. 그의 이름을 고쳐주시는 것이다. 여기서 만난 사람을 야곱은 30절에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28절에 있다. 개역성경의 번역대로 보면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다.”고 할 때 이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사람”이 단수형으로 번역된 만큼 어떤 한 개인을 지칭하는 것일 것이고, 본문의 전후 문맥을 고려해 볼 때 분명 그는 야곱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해야 옳다.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것이다. 따라서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을 보면 “키-살리타 임-엘로힘 브임-아나쉼 바투칼”이라고 말한다. 이를 직역하면 “네가 하나님과 (겨루고) 또한 사람들과 겨루어 이기었기 때문에 ...”라고 할 수 있다. 야곱은 먼저 하나님과 싸우고, 또한 사람들과 싸워서 이기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하라는 것이다. 개역성경은 야곱이 사람들과 싸워서 이긴 사실을 빼놓고 있다. 개역개정에는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개역성경의 번역보다는 원문의 의미를 살려 번역해보려는 의도가 엿보이지만 여전히 어색하다. 야곱은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을 상대로 싸운 사람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승리했다. 이제 밤새도록 하나님과 씨름을 하고 나서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존되었다.”(창 32:30)고 말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얍복강 나루터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한 후 야곱이라는 이름이 바뀔 뿐 아니라 사람도 변화되었다는 점이다. 20년 동안 형 에서에 대한 두려움을 마음에 품고 살아오던 야곱은 막상 에서를 만났을 때 “제가 형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창 33:10)라고 말한다. 그의 형 에서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처럼 변한 것이 아니고, 야곱의 마음이 변한 것이다. 야곱은 이제 그의 마음에 있는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떨쳐 내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에서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인간들과 얽히고 설킨 가운데 다투고 싸우며 살던 야곱이 이제 밤을 세워 하나님과 겨룬 후에 그는 모든 인간들과의 갈등과 문제를 다 날려 보내버린 것을 볼 수 있다. 야곱이 변화되어 이스라엘이 되었듯이 우리도 사람들과 부딛끼며 사는 삶에서 하나님과 겨루며 사는 삶을 살아야 우리는 우리를 억누르는 모든 불안을 떨쳐버릴 수 있다.야곱은 하나님과만 더불어 싸운 것이 아니다. 사람들과도 겨루어 싸워 이긴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바꾸어 주신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02-03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46
    성경에는 적나라한 성적 표현들이 많다. 그렇다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에 경박하고 야한 표현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다. 따라서 성경의 저자나 역자들은 이 경우 할 수 있으면 완곡한(euphemistic) 표현을 사용한다. 아브라함은 그의 며느리, 곧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하여 자기의 늙은 종을 보내며그에게 자기의 환도뼈 밑에 손을 넣고 이방 여자를 데려오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게 한다. 이때 “환도뼈”는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가? 개역성경에서 “환도뼈”라고 번역하지만 바른성경에서는 대부분의 영역본을 따라 “넓적다리”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넓적다리의 어느 부분에 손을 넣으라고 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히브리어 “야렉”()이라는 말은 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야렉”은 대부분의 영역본에서는 “넓적다리”(thigh)로 번역하고 있다. 영어로 허리와 다리 사이, 곧 생식력의 원천이 되는 아랫배를 가리킨다. 영어로 “로인”(loin)이라고도 번역되는 이 말은 뼈가 없는 부드러운 부분, 말하자면 남자의 성기(penis)를 의미한다. 언약의 표인 할례 받은 남자의 성기에 손을 대고 맹세를 하게 하는 것은 이 맹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시고, 하나님께서 이 맹세를 보장해주시도록 기원하는 행위로 이해된다. 특히 남자의 성기는 생식력의 원천이기 때문에 이 중요한 부분에 손을 대고 맹세를 하는 것은 후손과도 관련이 있을뿐더러 이를 어기는 자는 불임을 초래하거나 그의 후손이 멸절되는 저주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맹세는 할례 받은 자들 사이에 유효하다. 설령 “야렉”()이라는 말이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하드라도 성경에 드러내놓고 이 어휘를 사용하지 않고 완곡한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하고 있다. 이 “야렉”()의 어원을 정학히 알 수 없으나 일부 사전에서는 “부드러운 살”이라고 제안하는 경우가 있는 데 이를 염두에 둔다면 같은 어의를 가진 “바살”()이라는 말을 남성의 성기로 표현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네가 하체가 큰 네 이웃, 이집트 자손들과 음행을 하였고 나를 격노케 하려고 음행을 더하였다.”(겔 17:26)에서 “큰 하체”라고 번역하는 히브리어는 “기드레이 바살”()이다. 여기서 이집트를 가리켜 하체가 큰 나라라고 일컫는 것은 물론 이집트 사람들의 성기가 크다는 의미가 아니고, 강대국을 성기에 빗대어 일컫는 말이다. 그의 남편이신 여호와를 외면하고, 당시의 군사 대국 이집트를 따르는 이스라엘을 음녀로 비유하고 그가 의지하는 반역적이고, 배신적인 행위를 하체가 큰 이집트와 음행을 하였다고 표현하고 있는 데 완곡한 어법을 사용하지만 아주 상스러운 표현임에 틀림없다. “손”(hand)으로 번역하는 히브리어 “야드”()는 단지 손뿐만 아니라 성기를 일컫는 말이다. 이사야 57:8, “네가 문과 문설주 뒤에 네 기념물을 두고, 나를 떠나 벗고 올라가서 네 침상을 넓히며, 너를 위해 그들과 언약하고, 네가 그들의 침상을 사랑하며, 그 벌거벗은 것을 보았고” 라는 구절에서 “벌거벗은 것”이라는 말이 바로 “야드”()를 번역한 것이다. 또한 비슷한 표현으로 “발”이라는 히브리어 “레겔”()이라는 말도 성기에 대한 완곡어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왕상 18:27에는 아시리아왕 산헤립의 장군 랍사게가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예루살렘 주민들을 향하여 그가 여호와의 명을 받들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고 히스기야의 백성에게 자신들의 소변과 대변을 먹게 하려고 쳐들어왔다고 외친다. 여기서 소변이라는 말을 쿰란 사본에서는 “메이메이 라그레헴”()이라고 읽고 있다. 이 말의 문자적인 번역은 “발의 물”이라는 뜻이다. 발이 남자의 성기를 가르키는 말이기 때문에 소변이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번역하고 있다. 또한 신명기28:57에도 먹을 것이 없는 여자들이 “자기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를 먹는다는 말이 있는 데 이 경우는 물론 여자의 음부를 완곡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이사야 7:20에서는 아시리아의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면도칼로 머리털과 “다리털”을 민다는 말을 쓰고 있는 데 여기서 다리털도 단순한 다리털보다는 음부의 털을 완곡하게 말하는 표현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또한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남녀의 성기에 대한 히브리어는 “에르바” ()라는 어휘이다.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잠이 들었을 때 그의 아들 함이 들어가서 노아가 본 “벌거벗음”이라는 것이 다름 아닌 “에르바”()이다. 삼상 20:30에 사울이 요나단에게 “패역무도한 계집의 자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이며 벌거벗은 네 어미의 수치임을 어찌 알지 못하겠느냐?”라고 말할 때, “벌거벗은”이라는 말도 “에르바”()가 사용되고 있다. 레위기 18장에서 “...의 하체를 범하지 마라”고 명하는 말씀은 분명 성관계를 금하는 말이다. 이에 대한 히브리어 표현은 “로 티가레 에르바타”()인데 이는 “~의 ‘에르바’()를 열지 마라 (혹은 들어내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에르바”()라는 말은 분명 여성의 성기를 의미하는 말이며, 가까운 친족들과는 성관계를 갖지 말라는 명령이다. 그런데 한글 성경에서는 이 “에르바”()를 “하체”라고 번역하고 있다.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성경에서는 성적인 표현들은 대개의 경우 완곡한 표현을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글 역본에서도 직역이나 적나라한 표현을 피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01-2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45
    우리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읽을 때마다 본문에 소개되는 이 청지기가 과연 슬기롭게 행하였는가? 또한 예수께서 가르치신 이 비유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성경에 적힌대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도 이 부정직한 청지기처럼 주인으로부터 착복한 재물로 더불어 친구 삼는 일이 맞는 것인가? 친구 삼는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하는 생각을 하다보면 성경의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다. 본문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이 비유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어떤 부자에게 한 청지기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비난이 주인의 귀에 들렸다. 그래서 그 주인은 그 청지기를 불러 해고 통지를 했다. 갑자기 일자리를 잃은 이 청지기는 앞으로 먹고 살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했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체면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궁리 끝에 하나의 좋은 묘수를 짜냈다.그는 자기 주인에게 빚을 진 채무자들을 일일이 불러 채무를 자기 멋대로 탕감해 주는 것이었다. 그는 채무자에게 “당신은 얼마 빚졌습니까?” 하고 물어서 그의 대답이 “기름 백말입니다” 하면 그 청지기는 채무 문서를 가지고 와서 “빨리 오십이라고 쓰십시오.”라고 말하며 오십 말을 탕감해 주었다. 이런 식으로 밀 일백 석을 빚진 자에게는 팔십이라고 적으라고 하여 밀 이십 석을 탕감해 주었다. 주인이 이 소식을 듣고 이 불의한 청지기가 슬기롭게 행하였기 때문에 칭찬했다는 것이다.그래서 예수께서는 “이 세상의 아들들이 자신들의 세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슬기롭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삼으라, 작은 일에 충성하라, 불의한 재물에 신실하라, 남의 것에 충성하라,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을 이어서 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이 어디에서 끝나는지에 대해서도 논쟁거리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학자들에 따라서 7절, 8절 상반, 8절 하반, 그리고 9절에서 예수님의 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가 끝난다고 주장한다. 8절 상반절은 여전히 불의한 청지기에 대해서 예수께서 언급하고 있고, 8절 하반절은 이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적용의 말씀이기 때문에 8절 상반절에서 끝나고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 적절하다.그런데 주인의 재산을 횡령한 이 청지기의 하는 짓이 과연 슬기로운가 하는 점이다. 물론 예수께서는 이 청지기를 가르켜 “정직하지 못하다”고 이미 판정하셨다. 헬라어 “아디키아”(α’δικι、α)는 말은 주로 “불의하다”(unjust)라는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볼 때 “불의하다”는 말보다는 “정직하지 못하다”는 의미가 더 적절하다. 그래서 이 부정직한 청지기의 하는 짓이 그 파면당한 청지기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슬기롭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 말은 분명 상식적으로 옳지 않다. 부정직한 자가 아무리 슬기롭게 한다고 한들 그는 부정직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부정직한 자가 자기가 살기 위해 짜낸 짓은 분명 교활한 꾀이다. 사실 대부분의 한국어 성경이 KJV을 따라 “슬기롭다”라고 번역하고 있는 헬라어 “프로니모스”(φρονι、μοV)라는 말은 “교활하다”(shrewd)는 의미이다. “약삭빠르다” 혹은 “영악하다”는 말도 같은 의미로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활하다” 혹은 “영악하다”는 말보다는 “약삭빠르다”는 의미가 본문의 문맥상 더 적절하다고 여겨진다. 이 부정직한 청지기는 슬기로운 것이 아니라 자기 살기 위해 약삭빠른 짓을 한 것이다. 현대의 영역본들, ESV, NET, NIV, NAS, RSV 등은 “교활하다”는 의미의 “shrewd”라는 어휘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께서 이 비유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에게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사귀어라. 그러면 그것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영접할 것이다.”(눅 16:9)라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에크 투 마모나 테스 아디키오스”(ε’κ του~ μαμωνα~ τη~V α、δι、αV )를 여러 역본에서 “불의한 재물”로 번역하고 있는 데, 이곳의 “아디키아”(α’δικι、α)를 역본들이 여기서는 “부정직하다”가 아니라 “불의하다”로 번역하고 있다. 재물 자체가 불의하거나 부정직한 것은 아니고 그것을 정의롭거나 정직하게 사용하지 못한 때문에 불의하게 불리고 있을 것이다. NIV, NET는 “세속적인 부”(worldly wealth)라고 번역하고 있다. “맘모나스”(μαμ〔μ〕ωνα~V)는 아람어로 소유(possession) 혹은 부, 재산 (wealth)을 의미한다. 여기서 “맘몬”이라는 말은 마치 사람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의인화 되어 사용되고 있다. 또한 “친구 삼다”라고 번역하고 있는 헬라어 “포이에사태 피루스”(ποιη、σατε φι、λουV)라는 말은 “친근하게 대하라”는 의미가 더 가깝다.그렇다면 예수께서 “불의한 재물”로 친구 삼으로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도 이 청지기처럼 약삭빠르게 살라는 말씀인가? 이 청지기가 채무자들의 빚을 자기 뜻대로 탕감해 주는 일을 할 때는 이미 그는 주인으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는 채무자들을 부정하게 도와주고 자기의 앞날을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청지기를 칭찬하신 점은 바로 자신의 미래를 위하여 준비하는 이 모습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 상황을 그대로 방치하고 계속 죽음의 낭떠러지로 밀려 갈 수는 없다. 살 길을 찾아야 한다. 마치 이 부정직한 청지기가 살 길을 찾기 위해서 발버둥 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약삭빠른 일을 무엇인가 해야 한다. 재물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 인간은 잠간 동안의 청지기일 뿐이다. 이미 해임 통보를 받은 부정직한 청지기들이다. 지금이라도 곤고한 날들, 자기 영혼을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한다. 하나님의 재물을 자기의 영혼을 위하여 약삭빠르지만 지혜롭게 써야 되지 않을까?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01-13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44
    매년 새해가 되면 우리나라 성도들은 신년 예배를 하나님께 드린다. 새해를 출발하며 그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 새해의 희망과 계획을 하나님 앞에 알리고, 다짐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이때에 많은 설교자들은 시편 1편을 낭독하고 축복에 대한 말씀은 전한다. 아마도 전통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새해를 맞아 서로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말하며 서로 복을 빌기 때문에 설교자도 그러한 의미에서 축복에 대한 설교를 하리라 생각된다. 꼭 새해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주여 축복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원한다. 그런데 “축복”이라는 말은 “복을 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 축복하여 주시라는 말은 어법에 맞지 않다. 이 말은 마치 하나님께서 하나님 위의 또 다른 신적 존재에게 복을 달라고 부탁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지, 우리를 위하여 다른 어떤 하나님보다 위에 있는 존재에게 복을 요청하는 분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여! 우리에게 복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비는 복은 전통적으로 오복이나 칠복이다. 대개의 경우 물질적인 복이나 육신적인 복을 간구한다. 그러나 시편 1편은 그러한 복을 말하지 않는다. 시편 1편은 우리 인생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가치가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시이다. 시편 1편의 문예적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시편 1편의 구조(The Structure of Psalm 1, S. Sohn) 이 도표를 보면 시 1편은 d-d’를 중심점으로 a-b-c 와 a’-b’-c’ 가 서로 대칭을 이루는 X형의 구조이다. 그런데 d-d’ 가 맨 마지막 절이기 때문에 전형적인 X자 형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바로 이 점이 이 시편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어렵게 한다. 그러나 시편 저자는 고전적인 정형을 탈피하여 파격적인 구조를 만든 것이다. 이 시편이 정형적인 X자형의 구조를 가지려면 6절은 3절 다음에 와야 한다. 그러나 저자는 d-d’를 5절 다음, 맨 마지막 절에 배열하였다. 이는 이 시의 형식에 변화를 줌으로 X 정형의 틀로부터 일탈의 미를 돋보이게 함과 동시에 독자들이 이 시의 결론을 분명하게 알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는 의인과 악인,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 어떤 것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복”이나 “행복”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단순하게 이해될 수 있는 시가 아니다.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박고,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고 했다. 말씀의 시내에 뿌리를 내림으로 풍성한 생명의 말씀, 영혼의 양식을 섭취함으로 항상 모든 일에 부요한 사람이다. 특히 말씀에 근거한 인생철학을 확립하고 사는 사람이라 바람에 흩날리는 겨처럼 세상 풍조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다. 시류를 따라 우왕좌왕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고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다. 말씀을 즐거워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연구하는 사람이다. 말씀을 깊이 아는 사람이다. 말씀이신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의인은 하나님이 그를 알고 그가 하나님을 아는 관계, 곧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이다. 6절에 개역성경에서 “인정하다”고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어 “야다”()라는 말은 “알다”라는 의미를 갖는 관계어이다. 보통 부부사이의 육체적 관계를 기술하는 어휘이다.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선택이나 언약 관계에 사용되는 말이다. 따라서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과 바르고 인격적인 관계, 마치 부부처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어떤 시련이 다가와도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악인은 뿌리가 없는 사람이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세상 풍조를 따라 사는 사람, 그래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사람으로 비유하고 있다. 속에 든 것이 없는 빈 깡통과 같은 사람이다. 죄인은 도적질하고 간음하고 살인하는 사람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말씀을 제쳐놓고, 세상 풍조대로 사는 사람이 악인이고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이 세상 풍조를 따라 그렇게 자유롭게 살아도 괜찮은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악인들은 심판 때에 견디지 못하고, 결국은 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은 세상 풍조대로. 시류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멀리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말씀을 가까이 하며,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말씀이신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연합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포도나무의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생명이 있고 열매가 있듯이 우리가 말씀이신 예수님과의 심오하고 신비한 이 연합 관계를 잘 유지해야 열매 맺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이 시는 교훈적인 시이다.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시이다. 세상 사람들이 사는 대로 사는 것이 어떻게 보면 지혜롭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망하는 길이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사람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대로 살아야 지혜롭고 복 있는 사람이다. 인간이 느끼는 모든 행복은 자기의 수고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야 인간은 행복한 것이다. 인간의 행복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누구와 관계를 맺고 사느냐는 문제가 바로 행복과 불행을 좌우한다. 우리 신자들은 예수님의 그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자들이다. 아담의 나라, 사단의 나라에서 그리스도의 나라, 성령이 역사는 하는 나라에 사는 자들이 복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은 예수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이다.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는 삶이 바로 지혜의 길이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사람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01-06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42
    우리 한국어 성경에는 “귀신”이라는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쓰고 있다. 우리 말 국어사전에 보면 “귀신”은 죽은 사람의 넋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미신에서 사람에게 복과 저주를 준다는 신령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더러운 귀신” 혹은 “악한 귀신”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고 있는 데, 바로 귀신들이 구천을 떠도는 죽은 사람의 넋이나 혹은 신령을 의미하는 것인가?신약성경에서 “귀신”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헬라어 “프뉴마”(πνευ⌒μα) 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바람,” “내품는 숨”(the breathing out of air), 혹은 “몸에 생명을 주는 영, 혹은 영혼”(spirit or soul that which gives life to body)이다. 구약성경에서 “프뉴마”에 상응하는 히브리어는“루아흐”이다. “루아흐”라는 말은 동사 “코로 세차게 숨을 내쉬다”(to breathe out through the nose with violence)에서 나온 말로 “생명의 중심”이라는 의미로 많이 쓰이고 있으며, “네패쉬”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네패쉬”가 생명체(living being)를 일컫는 말이라면, “루아흐”라는 말은 생기를 주고 살아 움직이게 하는 원리나 존재를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 한국말로는 “프뉴마”나 “루아흐”라는 말은 “영” 혹은 “영혼”이라고 번역하고 이해해야 한다. 우리 한국적인 문화 배경에서 “귀신”이라고 하면 대개의 경우 원한을 품고 죽은 사람의 넋이 생시의 모습으로 소복을 입고, 머리를 풀고, 스산한 바람 소리와 더불어 자기를 죽이거나 해친 사람 앞에 홀연히 나타나 복수극을 벌이는 존재를 연상케 한다. 따라서 이러한 이미지를 머리 속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성경에서 말하는 영적 존재를 귀신이라고 번역하면 성경의 영적 존재를 다 귀신과 동일시 할 수 밖에 없고, 성경의 원 뜻과 전혀 다른 해석을 할 수 밖에 없다. 특히 성령론을 크게 오도하게 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은 귀신이 아니다. 따라서 개역성경에서 마 12:43, 막 1:23, 5:2, 7:25, 9:25, 눅 4:33, 8:29, 9:42, 13:11 행, 19:15-16 등에서 “귀신”으로 번역하는 것은 옳지 않다. “더러운 귀신”은 “더러운 영”으로, “악한 귀신”은 “악한 영”으로 번역해야 옳다. 누가 13:11은 한글 역본마다 각각 다른 번역을 하고 있다.개역판에서는 “십 팔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개역개정판은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표준새번역은 “그런데 거기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허리가 굽어 있어서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바른성경은 “마침 열여덟 해 동안 병마에 눌려 허리가 굽어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자가 있었는데.”그러나 원문은 “보라, 십 팔년 동안 불구의 영을 가진 한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구부러져 온전히 펼 수가 없었다.”이다. 여기서 헬라어구 “구네 프뉴마 엑수사 아스데네이아스”(γυνη` πνευ⌒μα ε’′ξουσα α’σθενει´αV) 는 “불구의 영을 가진 여자”라고 번역해야 한다. 한글 개역판과 개역 개정판은 “귀신들려 앓다”고 번역하고 있는 데 사람이 귀신들렸다는 의미로 전혀 성경적인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알고 있는 귀신, 곧 죽은 사람의 넋이라는 개념이 없고, 그러한 넋이 세상을 떠돌아다니다가 원수 갚는 일을 하거나 후한 제사를 드린 후손에게는 복을 주고, 홀대한 후손에게는 저주를 퍼붓는 존재도 없다. 만일의 경우 그러한 신적 존재, 말하자면 귀신이 있다면 그는 당연히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통제하에서 활동해야 옳다. 따라서 우리는 “귀신”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된다. 죽은 사람의 넋이 산 사람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만든 피조물이나 사람들이 나무나 돌로 만든 우상이나 이단사설이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세우신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할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표준새번역과 바른성경은 “병마에 시달리다” “병마에 눌리다”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때의 “병마”란 “마귀,” 곧 “귀신”의 개념이 들어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국어사전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병을 악마로 비유한 말이다. 따라서 이 두 성경의 번역은 귀신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도 있고, 전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병마”라는 번역에 귀신의 존재를 염두에 둔 번역이라면 그것은 개역이나 개역개정과 같은 것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아예 헬라어 “프뉴마”(πνευ⌒μα)를 배제해버린 번역이 될 것이다.이상을 살펴볼 때 “프뉴마”(πνευ⌒μα)를 “귀신”이라고 번역함으로 성경 지식이 깊지 못하고 기독교에 대한 기초적인 교육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성경에 언급된 “영”에 대하여 소설이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귀신의 이미지를 갖게 하여 그릇된 신앙으로 빠지게 한다. 따라서 성경에서 “귀신”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된다. 우리 기독교 신자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겠다(요한 15:4) 고 약속하시고, 제자들을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며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모두 하나가 되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소서“(요 17:21)라고 기도하시는 것을 보면 우리 신자들은 모두 하나님 안에서 서로 하나된 사람들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마귀나 귀신들이 들어 올 틈이 없다. 우리 인생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통치권 안에 있고,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돌보시고, 이끌어 주신다.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에 이끌리어 살아야 한다. 하나님 한 분 외에 우리의 생사화복을 좌지우지할 다른 어떤 영적 존재나 원리 혹은 세력도 없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6-12-16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41
    우리들은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확실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성도들은 성령이 충만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령충만할 수 있는가? 말씀이 충만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그를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가르치시고, 계속하여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3)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디도에게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되었다고 했다(디도 3:5). 중생이란 씻음의 요소가 있으며, 요한 15:3에 의하면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셨다”(엡 5:26)는 구절에서 “물과 말씀”, “씻는다는 말과 거룩하게 한다”는 말이 서로 병행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물”은 말씀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말씀과 성령으로 새롭게 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칼빈과 같은 개혁자들은 말씀과 성령은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말씀과 성령은 마치 동전의 앞뒤와 같아서 말씀이 전파되는 곳에 성령이 역사하고,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일하시는 것이다.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이 우리를 거듭나게 한다. 그러나 말씀과 성령이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인만큼 거듭남의 역사는 또한 말씀의 역사라고도 말한다. 베드로는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곧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 것이다.”(벧전 1:23)라고 가르친다. 베드로는 일찍이 성령의 체험을 많이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말씀을 순종하는 가운데 말씀의 체험을 많이 했다(눅 5:1-11; 요한 6:68-69)). 그러한 베드로가 거듭남의 역사를 성령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라고 말한다. 말씀이 사람을 거듭나게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말씀은 우리 성도들의 성화를 관장하는 일을 한다. 거듭난 사람은 마치 모태에서 갓 태어난 어린 아이와 같아서 어머니의 젖을 먹고 성장해야 한다. 성령은 바로 이 일을 주관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화는 성령 뿐만아니라 말씀도 한다고 가르친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주는 고별사 가운데 “이제 나는 너희를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니, 그 말씀이 너희를 굳게 세우고 거룩함을 입은 모든 이들 가운데 너희에게 유업을 줄 것이다.”(행 20:32) 라고 말한다. 말씀이 성도들을 굳게 세우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디모데에게 쓰는 편지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한다.”(딤후 3:15-16)고 쓰고 있다. 이 같은 말씀의 중생과 성화의 사역은 시편 19:7-11에도 잘 나타나 있다.“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생시키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어리석은 사람을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당하여 마음을 즐겁게 하며, 여호와의 명령은 순수하여 눈을 밝게 한다.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토록 지속되고, 여호와의 법도는 진실하며 한결같이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 곧 송이 꿀보다 더 달다. 또 주님의 종이 이로 인하여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다.”말씀의 완전성, 확실성, 정당성, 순수성, 정결성, 진실성이 사람의 영혼을 소생시키고, 사람을 지혜롭게 하며,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사람의 눈을 밝게 한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도 성령의 성화 사역을 말씀 사역으로 가르치고 있다. 물론 말씀에 대한 성경의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 인간들의 구원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전제한 것이다. 성령은 성령대로 자유롭게 일하시는 분이기도 하다.이상에서 우리는 말씀과 성령의 관계와 그 역할을 살펴 보았다. 우리 성도들의 신앙생활이란 성령이 충만한 생활이다. 우리는 어떻게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성령을 부릴 수 없다. 우리는 성령을 오게 할 수도 없고, 가게 할 수도 없다. 설령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서 우리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성령은 예수님 말씀대로 그의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요한 3:8).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일하시게 하는 한 가지 길이 있다. 말씀을 내 안에 충만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말씀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성령께서는 내 안에 임하시고, 내 안에 거하시고, 내 안에서 일하시어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친다면 말씀과 성령은 마치 바늘과 실의 관계와 같아서 성령은 말씀을 받는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시고, 사람을 성숙하게 하며, 많은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풍성하게 차고 넘쳐야 한다. 바울을 빌립보 성도들에게 “너희가 생명의 말씀을 붙들어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하게 하라.”(빌 2:16)고 권고한다. 우리가 성도로서 그리스도 앞에 서는 날까지 해야 할 일이 바로 생명의 말씀을 붙잡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며(시 1:2), 말씀을 내 뱃속에 가득 채워야 한다(겔 3:3).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말씀이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미국의 유명한 개혁주의 신학자 로벗 레이몬드 교수는 이렇게 가르친다.“성령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 거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 거한다는 것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다. 성령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부터 분리하거나 그리스도의 말씀을 성령으로부터 분리해서도 안된다.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한 말씀과 함께 한 사역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성령에 성령과 함께 하신다.” (Robert I. Reymond, A New Systematic Theology of the Christain Faith, 766. quoted in 손석태 『성령세례 다시 해석한다』 서울: CLC, 2016) 135-36.)바울은 에베소서 5:18에서 “너희는 술에 취하지 마라. 그것은 방탕한 것이니 도리어 너희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라.” 고 명한다. “성령으로 충만하여라"라는 말은 능동형이 아니라 수동형이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은 나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충만한 가운데 성령께서 임하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충만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말씀으로 충만해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6-12-07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40
    혹자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 가운데 십일조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십일조를 드린 사람들의 신앙과 정신은 무엇인가를 안다면 이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성경에서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린 사람은 가인과 아벨이다. 이들은 각자 땀 흘려 일하고 얻은 열매를 하나님께 드렸다. 우리는 그것이 첫 열매인지 십일조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빈손으로 나오지 않고 제물을 가지고 나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나와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앞에 제물을 가지고 나오는 것은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친 것도 그 본질적은 의미는 같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자기 고향과 친족들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땅으로 갔다. 세겜 지역 모레의 상수리나무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 땅을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그곳에 단을 쌓았다. 그리고 그곳을 중심으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얼마 못가 그 땅에 기근이 닥쳤다. 아브라함은 이집트로 내려갔다. 하나님께 이집트로 내려가도 되는지 그의 갈 길을 묻지 않았다. 이집트에서 아브라함은 그가 예상했던 대로 이집트 왕 바로에게 아내를 빼앗겼다. 대신 그는 많은 물질을 얻었다. 흉년에 먹을 것이 없어서 이집트까지 내려와 그가 원하는 물질은 풍부하게 얻었지만 정작 있어야 할 아내를 잃은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일에 개입하셔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내를 구출하여 주셨다. 아브라함은 이집트를 떠나 그가 처음 단을 쌓았던 곳으로 돌아왔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정착하여 살도록 처음 정하여 준 땅이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신 곳이 제일 안전하고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고 고향 땅을 떠난 사람이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곳을 떠났다가 큰 봉변을 당하고 회개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경제적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야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았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곳에서 많은 신앙적 교훈을 얻은 것 같다.이집트에서 돌아온 후 그는 그의 조카, 롯과 헤어졌다. 그들이 사는 곳이 너무 좁아 계속 같이 살다가는 형제간에 큰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아 아브라함은 롯에게 땅을 차지할 수 있는 선택권을 양보하며 그의 곁을 떠나라고 한다. 롯은 소돔 땅을 택하여 나갔다. 그러나 롯은 얼마 못가 그곳의 전쟁에 휘말리어 포로가 되고 만다. 아브라함은 롯이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서 기른 318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가서 롯을 구출하여 돌아온다. 여기서 318명이란 지금의 대대병력과 같은 병력의 단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가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이라는 살렘 왕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그를 맞았다. 신약성경 히브리서 7:2-3을 보면 멜기세덱은 “그의 이름을 해석하면, 첫째로 의의 왕이고, 다음으로 살렘 왕, 즉 평강의 왕이다.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으며 하나님의 아들을 닮아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말하자면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을 닮은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멜기세덱은 분명 신적 존재임에 틀림없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의 전승을 축하해주기 위하여 선물을 가지고 나왔고, 아브라함은 그에게 그의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바쳤다. 아브라함이 그의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바친 신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닮은 분이라면 그는 분명, 그리스도 예수님을 예표하는 분이라 할 것이다.아브라함은 여기서 자기의 소득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바치고 있는 데 아마도 이것이 십일조를 드린 대표적인 성도의 모습이다. 누가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드리라고 말하거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십일조를 드리라고 명한 적도 없지만 아브라함은 자발적으로 바쳤다. 따라서 십일조를 바친 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전쟁에서의 승리와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 그는 이 가나안 왕들과의 전쟁에서 자기의 힘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린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린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둘째는 하나님께서 모든 소유와 재산의 주인이시다는 것을 믿는 믿음의 표현이 십일조이다. 아브라함은 흉년이 들어 이집트로 피난갔다 온 후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야 물질적인 부요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다. 이 전쟁에서 그는 전리품을 많이 얻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다 차지하라는 소돔 왕의 말을 듣고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시며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여호와께 내 손을 들어 맹세합니다. 당신의 말이 ‘내가 아브라함을 부자로 만들었다.’고 할까 하여 당신에게 속한 것은 실오라기나 신발끈이라도 내가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아브라함은 소돔 왕이 자기를 부자로 만들어 주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돔 왕의 것이라면 신발끈이라도 갖지 않겠다고 말한다. 오로지 하나님을 통해서만 부자가 되겠다는 당찬 선언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는데 하나님을 가리켜 “하늘과 땅의 주인”이라고 말한다. 비록 자기가 전쟁에서 얻은 물건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그를 이기게 하셨기 때문에 자기 것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소득의 십분의 일을 먼저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바친 것이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께 돌려드립니다는 표현이다. 셋째로 십분의 일을 드렸다는 것도 의미가 있다. 십이라는 숫자는 완전함, 모든 것의 합이라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그가 얻은 것의 총 합계 중에서 십분의 일을 드렸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일부 어느 것은 남기고, 어느 것은 바치고 한 것이 아니다. 말라기 3:10에는 “온전한 십일조”를 바치라는 말씀이 있고, 율법서에는 소나 양이나 곡식에 따라 각각의 십일조를 내라는 말씀이 있다. 따라서 십일조는 나의 소득의 모든 것, 나의 소유의 모든 것의 의미를 지닌 말이라고 할 수 있다.이상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낸 사실을 살펴볼 때, 그것은 만유의 주 되신 하나님 앞에서 한 신앙인으로서의 자기의 신앙 고백적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내 모든 소유의 주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바른 신앙 생활을 할 수 없다. 그리고 그가 그러한 신앙을 가졌다면 그것은 구체적인 행위로 표현되어야 한다. 신약 성경에는 십일조를 바치라는 명시적안 규정이 없기 때문에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십일조의 원래적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다.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소유의 주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십일조 이상, 십이, 십삼 조라도 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하신다.“너희는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로 가져와서, 내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 문을 열고 쌓을 곳이 없도록 너희에게 쏟 아 붓지 않나 보아라”(말 3:10).
    • 해설/기획
    • 손석태
    2016-11-2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39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관계성, 연대성, 대표성 등의 용어처럼 중요하고 자주 사용되는 말이 많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실때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의 피조물을 돌보고 다스리고 살도록 질서를 세우셨다. 이들 간에 언약을 세우신 것이다. 따라서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그의 피조물과 더불어 언약적 연대성을 형성하고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 앞에서 대표성을 가진다. 말하자면 아담이 하나님께 잘 복종하고 질서를 지키면 그는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또한 그와 연대성을 가진 모든 피조물들도 그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존재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언약적 대표성을 가진 아담이 그의 창조주이자 종주이신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그와 연약적 연대성을 가진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적 저주와 심판과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아담과 그의 통치권 아래에 있는 모든 피조물은 아담과 함께한 운명 공동체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구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기 위하여 아담을 대신하여 그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의 제자들과 죄사함을 얻게하는 새언약을 맺으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다. 그리하여 그는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아 아담을 대신한 새 언약의 대표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그의 언약적 대표성 안에 들어온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고 예수님과 연대성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아담과 연대성을 끊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새로운 관계, 새로운 연대성을 형성하는 것이다.성경에는 이러한 언약적 연대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옷”이라는 어휘를 은유로 사용한다. 갈라디아서 3:27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세례를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세례란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고백함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예식이다(롬 6:3-4), 이때에 우리는 가시적으로 물로 세례를 받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으로 인을 치는 성령세례를 주신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마라.”(롬 13:14)고 권면한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음으로 그리스도와 연대성을 맺는 사람은 이제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실천 윤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골 3:10은 같은 맥락에서 “새 사람을 입어라.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되는 자이다.”라고 권면한다. 여기서 말하는 새사람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사람을 지칭한다. 아울러 골 3:14 에는 새 사람들에게 인애, 친절, 겸손과 오래 참음과 같은 덕목을 옷으로 비유하며 이것들을 옷 입으라고 말한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를 새사람이라고 한다면 성경 곳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옛 사람은 누구이며, 그리스도로 옷 입기 전에 우리 신자들은 누구의 옷을 입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옷, 마치 교복이나 군복과 같은 단체복을 입은 자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의 옷이나 그들의 행동을 보면 바로 그들의 신분이나 정체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례 받기 전에 우리는 누구와 연대성을 맺고 있었으며, 누구를 상징하는 옷을 입고 있었는가?우리가 그리스도와 언약적 연대성을 맺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기 이전에는 우리는 아담과 연대성을 맺고 아담의 옷을 입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무화과 나무 잎으로 벗은 몸을 가린 후 하나님 앞을 떠나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찾아오셔서 그의 불순종을 심문하신 후 그의 불순종에 상응하는 저주를 내리셨다. 그리고 여자의 후손을 통한 유혹자에 대한 궁극적인 심판과 형벌을 선언하셨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그 아내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다.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의 모습을 보게 된다.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지어 입히신 이 가죽 옷에 대한 해석이 그동안 다양했다. 많은 주석가나 설교자들은 이를 제사 제도의 모형으로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죄를 짓고 벌거벗은 채 서 있는 이 사람들과 더 이상의 격이 없는 교제를 나누시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들의 모습을 보시기에 민망하신 하나님께서 이들의 취부를 가리기 위하여 가죽을 옷을 지어 입히고자 짐승을 잡아 그 피를 흘리게 하셨다. 이러한 예를 따라 우리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짐승의 피를 가지고 나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제사 제도의 원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피를 가지고 나가지 않았고, 아벨은 피를 흘려 양을 잡아 그 기름과 함께 바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다고 주장한다.그러나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본문에서나 창세기 3장의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짐승의 피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아담 부부에게 무화과 잎을 대신하여 가죽 옷을 입히셨다는 것이다. 이 옷은 결코 영광스러운 옷이 아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반역자, 죄수에게 입히신 옷이다. 죄수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지으시고 그와 더불어 언약을 맺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대신하여 그가 만드신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대리 통치자로 그를 세우셨다. 따라서 우리가 고대 근동의 봉건제도의 대왕과 분봉왕 사이의 통치 계약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는 대왕과 왕 사이의 언약 관계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아담의 발아래 두시고 아담에게 그를 통치하고 관리하는 모든 권한을 넘기셨다(시 8:3-9).. 그리고 대왕으로서의 하나님은 그의 대리 통치자 아담에게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는 단 하나의 조건 명령을 주셨다. 그러나 아담은 그의 명령을 복종하지 않아 반역자가 되었으며, 언약을 배반한 반역자, 죄인에게 가해지는 저주와 심판과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입혀주신 이 옷은 물론 그들의 벌거벗음을 가려주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와 긍휼의 옷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반역자에게 입히는 죄수복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반역자의 죄수복을 입히신 것은 그와 언약적 연대성을 맺고 있는 모든 피조물이 무기한 집행이 유보된 사형수로서 살도록 내리신 조치는 아니다. 창 3:15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짓밟게 하시겠다는 구원을 예시하는 복음을 주신다. 따라서 이 아담이 입은 죄수복은 언젠가는 새 옷으로 바뀌어 질 것이다. 여자의 후손이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약속이라면 아담의 가죽옷은 그리스도의 옷에 대한 모형이 될 것이다. 우리 아담의 후예들은 결국 아담과 함께 죄수복을 입은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들이다.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은 옛사람 아담의 옷을 벗고, 새 사람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으니 그리스도인답게 우리의 속 사람이 새로워져야 하고, 행동이 덕스러워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6-11-11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38
    입다는 사사 시대의 사람으로 기생이 길르앗 사람에게 낳은 아들이었으나 길르앗 사람은 본처가 있으므로 그 본처의 자식들이 입다를 쫓아내자 돕 땅에 거하게 되었는데 그를 추종하는 무리가 많아 세력이 커지게 되었다. 그는 큰 용사가 된 것이다.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함으로 이스라엘 장로들은 입다에게 찾아가 그를 설득하여 그들의 머리와 지도자로 삼았다. 입다는 암몬을 설득하여 전쟁을 피하려 하였지만 암몬은 거절하였다. 입다는 전쟁에 나가게 되었다. 이때 입다는 출전하며 하나님 앞에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삿 11:30-31)라고 서원한다. 여기서 입다가 “그를” 번제로 드린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자기 딸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입다는 대승을 거두고 개선했다. 그런데 그때에 자기 집에서 나와서 소고를 잡고 춤추며 그를 영접하는 자는 그의 무남독녀였다. 입다는 옷을 찢으며 슬퍼하고 괴로워하였지만 한번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것인 만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 사정을 알게 된 입다의 딸은 자기 아버지에게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위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라고 말하며 다만 두 달만 여유를 주어 자기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게 해달라고 청한다. 그래서 입다는 딸의 청을 받아주었다. 개역성경은 “가라하고 두 달을 위한하고 보내니 그가 그 동무들과 함께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두 달 만에 그 아비에게로 돌아온지라 아비가 그 서원한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삿 11:38-39)고 번역하고 있다. 개역성경의 번역은 입다가 그의 서원대로 그의 딸을 번제로 드린 것으로 되어 있다.번제는 제물을 불에 태워드리는 제사를 말한다. 성경에서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것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것으로 그의 분노를 격발하게 하는 것이다. 유다 왕 아하스(왕 16:3)와 므낫세(왕하 21:6)가 그의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했다고 했다. 여기서 “(불 가운데로)로 지나가게 했다”는 말을 히브리어로 “아바르”의 사역형을 쓰고 있는데 그 문자적인 의미가 “지나가게 하다” 혹은 “넘어가게 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하게 불 위를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번제로 드리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ESV는 “번제로 드렸다”(burned)로, NIV는 “(그의 아들을) 희생제물로 드렸다”(sacrificed his own son in the fire)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아바르”의 사역형은 “번제로 드린다”는 뜻이다. 입다는 분명히 삿 11:31에 그가 전쟁을 마치고 돌아올 때에 그를 맞으러 나오는 사람이 누구든지 그는 여호와의 소유가 될 것이며, 그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다고 했다. 이때에 히브리어는 “오라”라는 말을 쓴다.“오라”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번제”라는 뜻이다. 그런데 문제는 본문에 입다가 그의 딸을 번제로 드렸다는 명시적인 말이 없다는 것이다. 11절에는 “아비가 그 서원한대로 딸에게 행하니”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어서 개역성경은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히브리어 원문은 어디에도 “죽으니라”는 말이 없다. 단지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알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다”를 쓰고 있는데 이는 부부간의 성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우리 한글 성경에서는 흔히 “동침하다”로 번역하고 있다(창 3:1). 이를 반영하듯이 NASB 는 “그 여자는 남자와 관계를 갖지 않았다”(She had no relations with a man.), NET 에서는 “그 여자가 처녀로 죽었다”(She died a virgin.), 그리고 NIV 는 “그리고 그 여자는 처녀였다”(And she was a virgin)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따라서 우리는 본문을 읽을 때, 입다가 그의 딸을 불에 태워 제사로 드렸는지 아니면 그의 딸을 하나님께 바쳐 일생을 결혼하지 않고 처녀로 살게 했다는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입다의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한 처녀로 그의 생애를 마쳤다는 것이다. 만일에 입다가 그의 딸을 번제로 드렸다면 과연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았으며, 딸을 제물로 바친 입다를 과연 성경은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히 11:32).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번제로 드린 아하스와 므낫세에게 진노하신 분이시다. 또한 겔 16:38에는 자녀의 피를 우상에게 드린 이스라엘 백성을 정죄하고 계신다.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입다의 딸이 슬퍼한 것은 그의 죽음이 아니다. 개역 성경은 37절에 입다의 딸이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고 번역하여 “죽음”을 삽입하고 있으나 마소라 사본은 “나의 처녀성”(virginity)을 인하여 애곡하겠다고 기록하고 있다. 히브리어 “베투림”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처녀성”(virginity), 혹은 "처녀인 상태"(the state of virginity)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입다의 딸이 당장 번제로 여호와께 바쳐져서 죽었다는 의미보다는 입다의 딸이 나실인처럼 하나님께 바쳐져서 일생을 처녀로 하나님을 봉사하다 죽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6-11-03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37
    일부 부흥사들의 말라기 4장 2절의 설교는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선을 통한 진료나 암 같은 불치의 병을 치료하는 특별한 광선, X-Ray와 같은 것을 예비하신다는 말과 같이 들린다. 이 같은 해석과 설교는 히브리어 성경의 본문을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것이니...” 라고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본문의 문맥을 살펴보면 그 같은 번역과 해석은 본문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라기는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에 주고 받은 6개의 논쟁으로 구성된 책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온갖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지만 이스라엘은 오히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1:2),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이름을 멸시했습니까?”(1:6), “우리가 어떻게 괴롭혔습니까?” “공평한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2:17), “우리가 어떻게 돌아갑니까?”(3:4), “우리가 주님의 무엇을 도적질하였습니까?”(3:8), “우리가 무슨 말로 주님을 거역하였습니까?”(3:13) 등의 질문으로 여호와와 논쟁을 벌인다. 이 논쟁의 마지막 부분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선포되고 있다.여호와께서 날을 정하실 것이다. 그 날은 특히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헛되며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며 경건한 생활을 하는 것이 헛되다고 말하는 불경한 자들, 스스로 여호와를 거역하지 않았다고 자기 의를 주장하는 자들과는 달리 진정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그의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되게 하였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말하는 기념책이란 아마도 하나님 앞에 있는 생명책과 같은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은 나의 소유가 되겠고,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끼듯이 나도 그들을 아낄 것이다.”(3:17)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베푸시겠다는 것이다. 사람을 가리켜 “소유”라고 말하는 경우는 노예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쓰는 말이다. 혹 자녀에 대해서도 명시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는 자녀들에 대하여 주인으로서의 권위를 행사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아내에 대하여는 명시적으로 소유라고 말한다. 아내는 남편의 소유이다. 소유이지만 물건이나 남녀의 종과 같은 소유가 아니라 특별한 소유이다. 물건이나 남녀의 종들은 팔고 살 수가 있고, 심지어는 마음에 맞지 않을 때는 죽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내는 팔아서도 안되고 죽여서도 안되는 특별한 존재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정한 날에 그들이 그의 소유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정한 날에 그의 아내와 같은 소중한 존재로 삼을 것이라는 말씀이라고 이해해도 된다.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들처럼 소중하게 아끼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경외하는 자들을 그의 가장 가까운 친족, 곧 아내나 자식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이다. 가장 가깝고 신뢰할 수 있는 가족과 같은 관계를 갖겠다는 것이다.그러나 “그날”은 용광로처럼 불이 타오르는 날이 될 것이다(4:1). 교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른 자들은 이 날에 지푸라기처럼 불에 타서 뿌리와 가지가 남지 않게 될 것이다. 무서운 심판의 날이다. 이와 달리 그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이 될 것이다. “의로운 태양”이 그들 위에 떠오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의 번역에 이견이 많다. 이를 문자적으로 번역한다면 다음과 같다.“의로운 해가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 떠오를 것이며, 치료가 그의 날개 안에 있을 것이다.”그러나 한국의 여러 역본들은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것이니...”라고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치료하는 광선”이다. 히브리어 “우마르폐 비크나폐이하”()는 명사문장으로 동사가 없다. 따라서 “그리고 의의 해가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에게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그의 날개 안에 치료(가 있을 것이다.)”가 문자적인 번역이다. 이 경우 “그의 날개 안에 치료가 있을 것이다”라고 영어의 be 동사가 생략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예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은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기가 어렵다는 점이다.여기서 말하는 “의의 태양”이란 신적 존재임이 분명하다. 시편 84:11은 “여호와는 태양이시고”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의로운 해를 직접 하나님이라고 지칭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의로운 해는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떠오를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로운 해”는 신적 존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삼하 233-4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를 태양이 떠올 때의 아침빛으로 묘사한다. 태양이라고 직접 말하지 않는다. 예레미야 23:5-6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손 가운데 의로운 왕을 일으키실 것인데 그는 땅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여호와는 우리의 의” (The Lord is our Righteousness)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분명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왕, 예수님을 예언하는 말씀임에 틀림없다.그렇다면 “치료가 그의 날개 안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날개 안에”라고 번역하고 있는 “비크나페이하”는 “안에”라는 뜻의 “벳”()과 날개라는 뜻을 가진 “카나프”()라고 하는 여성 명사 복수형에 삼인칭 여성 단수 어미가 붙어 있다. 따라서 “그의 날개 안에”라고 할 때 날개를 여성 복수로 쓰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 날개가 누구의 날개인지 분명치 않다. 어떤 번역자들이나 주석자들은 이를 태양의 날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대 근동 세계에서 태양은 항상 남성이며, 각 몸의 지체는 대개 여성이다. 따라서 앞의 태양과 뒤의 날개를 연관시키기는 어렵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태양의 날개”라는 식의 번역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태양으로부터 퍼져 나오는 햇빛을 테양의 날개로 생각하고 이를 광선, 곧 치료하는 광선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옳지 않다.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의의 태양”은 신적 존재, 다시 말하면 다윗의 줄기에서 나와서 세상을 공의와 정의로 다스릴 왕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날개의 이미지는 어떤 것인가? 성경에는 하나님의 날개에 두 가지의 이미지가 사용되고 있다. 하나는 독수리 날개이다. 예레미야 48:40, 49:22에는 여호와께서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모압을 심판하는 내용을 기술하며, 여호와 자신을 독수리에 비유하여 “보아라 그가 독수리처럼 날아와 모압 위에 자기 날개를 펼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날개를 편다는 말은 그 땅을 점령하고 그의 거처로 삼는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결국 심판에 대하여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시편 91:4에서는 다음과 같이 여호와의 날개를 피난처와 치유에 대하여 말한다.“참으로 너를 사냥꾼의 덮과 지독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이다. 주께서 너를 깃으로 덮으시고 네가 그 분의 날개 아래에 피할 것이니 그 분의 진실하심이 방패와 손방패가 될 것이다. 네가 밤의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어둠 가운데 퍼지는 전염병과 한 낮에 황폐하게 하는 파멸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여호와의 깃과 날개는 전염병으로부터 그의 백성을 지키는 피난처와 방패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여호와는 치료하는 하나님이다(출 15:26). 여호와께서는 모든 질병을 고치시며(시 103:3),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며, 그 상처를 싸매주시는 분이시다(147:3. 신 32:39). 따라서 하나님은 치료자이시고, 그의 날개는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치유의 도구이자 하나님 자신이다. 말하자면 본문은 의로운 태양의 치유 사역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방사선과 같은 치료하는 광선이 사람의 질병을 치유하게 하는 세상을 올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그러나 때가 되면 해가 더 이상 낮에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이 우리를 위하여 빛을 비추어 밝게 하지 아니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영원히 우리의 빛이 되시며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네 해가 다시는 지지 않고, 네 달이 다시는 기울지 아니 할 것이니, 이는 여호와가 영원히 네 빛이 되시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사 60:19-20). 이 예언의 말씀들은 그리스도께서 한 의로운 태양으로 오셔서 세상의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인생들,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을 치유해 주심으로 이루어졌다.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날개를 “치료하는 광선”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오실 때, 그 때는 사람들이 그에게 달려가 마치 병아리나 독수리처럼 그의 날개 안에서 치료를 받고, 슬픔을 거둘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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