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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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새해가 되면 우리나라 성도들은 신년 예배를 하나님께 드린다. 새해를 출발하며 그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 새해의 희망과 계획을 하나님 앞에 알리고, 다짐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이때에 많은 설교자들은 시편 1편을 낭독하고 축복에 대한 말씀은 전한다.
아마도 전통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새해를 맞아 서로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말하며 서로 복을 빌기 때문에 설교자도 그러한 의미에서 축복에 대한 설교를 하리라 생각된다. 꼭 새해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주여 축복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원한다.
그런데 “축복”이라는 말은 “복을 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 축복하여 주시라는 말은 어법에 맞지 않다. 이 말은 마치 하나님께서 하나님 위의 또 다른 신적 존재에게 복을 달라고 부탁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지, 우리를 위하여 다른 어떤 하나님보다 위에 있는 존재에게 복을 요청하는 분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여! 우리에게 복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비는 복은 전통적으로 오복이나 칠복이다. 대개의 경우 물질적인 복이나 육신적인 복을 간구한다. 그러나 시편 1편은 그러한 복을 말하지 않는다. 시편 1편은 우리 인생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가치가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시이다. 시편 1편의 문예적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시편 1편의 구조
(The Structure of Psalm 1, S. S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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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표를 보면 시 1편은 d-d’를 중심점으로 a-b-c 와 a’-b’-c’ 가 서로 대칭을 이루는 X형의 구조이다. 그런데 d-d’ 가 맨 마지막 절이기 때문에 전형적인 X자 형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바로 이 점이 이 시편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어렵게 한다. 그러나 시편 저자는 고전적인 정형을 탈피하여 파격적인 구조를 만든 것이다. 이 시편이 정형적인 X자형의 구조를 가지려면 6절은 3절 다음에 와야 한다. 그러나 저자는 d-d’를 5절 다음, 맨 마지막 절에 배열하였다. 이는 이 시의 형식에 변화를 줌으로 X 정형의 틀로부터 일탈의 미를 돋보이게 함과 동시에 독자들이 이 시의 결론을 분명하게 알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는 의인과 악인,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 어떤 것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복”이나 “행복”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단순하게 이해될 수 있는 시가 아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박고,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고 했다. 말씀의 시내에 뿌리를 내림으로 풍성한 생명의 말씀, 영혼의 양식을 섭취함으로 항상 모든 일에 부요한 사람이다. 특히 말씀에 근거한 인생철학을 확립하고 사는 사람이라 바람에 흩날리는 겨처럼 세상 풍조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다. 시류를 따라 우왕좌왕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고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다. 말씀을 즐거워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연구하는 사람이다. 말씀을 깊이 아는 사람이다. 말씀이신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의인은 하나님이 그를 알고 그가 하나님을 아는 관계, 곧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이다.
6절에 개역성경에서 “인정하다”고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어 “야다”()라는 말은 “알다”라는 의미를 갖는 관계어이다. 보통 부부사이의 육체적 관계를 기술하는 어휘이다.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선택이나 언약 관계에 사용되는 말이다. 따라서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과 바르고 인격적인 관계, 마치 부부처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어떤 시련이 다가와도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악인은 뿌리가 없는 사람이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세상 풍조를 따라 사는 사람, 그래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사람으로 비유하고 있다. 속에 든 것이 없는 빈 깡통과 같은 사람이다. 죄인은 도적질하고 간음하고 살인하는 사람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말씀을 제쳐놓고, 세상 풍조대로 사는 사람이 악인이고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이 세상 풍조를 따라 그렇게 자유롭게 살아도 괜찮은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악인들은 심판 때에 견디지 못하고, 결국은 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은 세상 풍조대로. 시류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멀리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말씀을 가까이 하며,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말씀이신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연합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포도나무의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생명이 있고 열매가 있듯이 우리가 말씀이신 예수님과의 심오하고 신비한 이 연합 관계를 잘 유지해야 열매 맺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시는 교훈적인 시이다.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시이다. 세상 사람들이 사는 대로 사는 것이 어떻게 보면 지혜롭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망하는 길이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사람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대로 살아야 지혜롭고 복 있는 사람이다. 인간이 느끼는 모든 행복은 자기의 수고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야 인간은 행복한 것이다. 인간의 행복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누구와 관계를 맺고 사느냐는 문제가 바로 행복과 불행을 좌우한다. 우리 신자들은 예수님의 그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자들이다. 아담의 나라, 사단의 나라에서 그리스도의 나라, 성령이 역사는 하는 나라에 사는 자들이 복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은 예수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이다.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는 삶이 바로 지혜의 길이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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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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