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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이홍정 목사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2018년이라는 새로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새해에는 우리가 이 땅의 사람들과 자연의 얼굴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치유와 화해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2018년이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새 역사가 시작되는 전환점이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분단의 고통에 개입하시므로 평화에 도전하는 탐욕의 세력들은 물러나고, 작지만 사랑하는 힘을 가진 사람들의 생명·정의·평화의 망이 세상을 감쌀 수 있기 바랍니다. 특별히 세계인의 평화축제인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한반도와 그 주변에 모든 군사행동들이 중단되고, 평화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 싹트며,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시민들의 연대가 확산되기 바랍니다.날로 더해가는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해 고통당하며 벼랑 끝으로 몰리는 사람들이 늘어갑니다. 경쟁사회의 요구에 휘둘리는 청년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평등의 가치가 이끄는 민주주주의의 성숙이 시급한 이유입니다. 새해에는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불평등으로 인하여 국민들의 행복이 유보되거나 포기되는 일이 없는 세상이 만들어지기 바랍니다. 나아가 양심에 새겨진 진리를 붙들고 옥에 갇힌 채 고통당하는 양심수들에게 조건 없는 해방이, 혐오와 차별과 배제에 시달리는 소수자들의 삶에 평등한 인권이 선포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엄기호 목사2018년 새로운 소망의 한해를 맞이하면서 한국교회 성도와 대한민국 국민과 온 세계 위에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지난 2017년은 우리 사회에 정치적으로 혼란과 혼동의 정국이었고, 극명한 대립과 갈등이 여과 없이 표출되었습니다. 문제를 넘어 변화의 시작이 되어야 할 시점에 적폐청산이라는 또 하나의 정쟁은 여전히 우리 사회를 과거에 머물게 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또 다른 갈등을 야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이라 여겨집니다. 이제는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고 새소망의 미래를 열어나가야 할 시점입니다.지난 한 해 동안 교계는 종교개혁 500주년이라는 기치 아래 온전히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개혁 운동을 펼쳤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그 어떤 인위적인 노력을 부정하며 복음의 순수함을 회복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새소망의 2018년, 우리가 세상을 향해 외칠 것은 자유와 회복입니다. 은혜를 경험한 자들이 말할 수 있는 것 또한 오직 은혜 밖에 없습니다. 억눌리고 갇힌 자들을 자유케 하는 것과 상처받고 병든 자들을 회복시키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교회와 사회, 성도와 국민, 대한민국 곳곳에서 은혜로 말미암은 자유와 회복의 물결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품으시고 용서하신 사랑을 기억하며, 그 사랑의 증거자들로서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 되기를 기도합니다.한국기독교연합 대표회장 이동석 목사2018년 희망에 찬 새해 아침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온누리에 넘쳐나기를 기원합니다. 새해 새 아침에 우리는 무엇보다 스스로를 돌이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회복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지나간 구태의 낡은 옷을 벗고 새로운 각오와 다짐으로 새 날을 시작해야 하겠습니다.종교개혁 500주년이었던 지난해 한국교회는 분열과 갈등의 낡은 옷을 벗고 새롭게 하나되려고 노력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는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한국교회의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스스로 발로 차버린 행위요, 교회지도자들이 스스로 경건한 체 하며 자기 마음을 속인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의 결과입니다.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는 나도, 교회도 변화될 수 없습니다. 하물며 말뿐인 죽은 믿음으로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겠습니까.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더 늦기 전에 주님 앞에 돌아와 정결함으로 경건을 회복하는 일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이 세상에 화평을 심어 그 의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난 2018년 새해는 말이 아닌 행함으로 믿음을 보여줘야 하는 원년입니다. 철저한 회개와 영적·도덕적 각성과 갱신으로 새롭게 되어 지난 선교 1세기에 하나님이 한국교회에 부어주신 성장과 부흥의 남은 열매를 이웃과 세상과 나누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하나님의 공의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실천하면서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한국교회가 이 땅에 존재해야 할 이유입니다.한국장로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유중현 목사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전쟁의 위험이 고조되고 있는 위험한 나라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과거의 재래식 무기를 사용하는 전쟁과는 차원이 다른 현대전의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게 된 인간의 가장 비열한 싸움이 될 수 있는 그 위험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탐욕의 결과 이기주의, 개인주의, 물질주의, 세속주의의 거대한 물결이 인간성, 가정, 심지어 국가에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인구감소에 더하여 인구절벽이라고 하는 위험은 국가의 미래를 약화시키는 무서운 일입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영성 약화, 성장의 둔화와 반기독교, 이단사이비의 도전 등으로 어려운 현실에 직면하여 있습니다. 이와 같은 숙제를 가지고 한 해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새해를 시작하며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서 결의를 다진 출발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가장 근본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잠1:7)입니다. 특별히, 우리 장로교회는 ‘하나님 주권’, ‘오직 성경’을 절대적으로 믿고,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강조하는 교리를 갖고 있습니다.그리고 하나 되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눈 성도들은 형제요 자매입니다. 본질적인 것을 공유하는 교회가 비본질적인 다른 부분에 대하여 서로를 인정하고 용납하는 넓은 마음 양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세계한국인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황의춘 목사지금 새 정부는 이데올로기와 안보가 시험대에 올라있고 이는 우리나라 명운이 달려있는 중대 현안을 양손에 들고 있습니다.6.25동란 이후 우리나라에 크고 작은 일이 있었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그때마다 국가의 운명은 연착륙 하였습니다. 이는 훌륭한 국민의식과 우국 열사들의 희생과 헌신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의 공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더 크다고 믿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국민들이 이승만 대통령부터 이전 정부까지 한 사람도 잘한 대통령은 없다는데 우리나라는 오바마 대통령의 말처럼 아프리카 수준에서 경제, 교육, 조선 등 여러 면에서 세계 10위권의 나라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과거뿐 아니라 미래도 우리나라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을 때 희망이 있습니다.하나님이 함께하는 나라가 되려면 정의가 강 같이, 진실이 냇물처럼 막힘없이 우리의 심령과 한국 강산에 흐르게 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는 교회가 진리와 정직으로 돌아서야 하겠고, 성도는 눈물로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겠고, 진리의 빛이 어둠의 세상을 비춰야 합니다.구습은 뒤로하고 2018년은 교회갱신, 나라갱신의 한 해가 되는 송구영신을 주님께 기도합니다.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 대표회장 강무영 장로대망의 2018년 새해를 맞아 하나님의 은총이 섬기시는 교회와 가정과 일터위에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지난해는 참으로 어려운 한 해였습니다. 연일연야 계속되는 촛불 집회와 태극기 집회로 사회가 불안했고, 경제는 침체되었으며, 마침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과 새로운 정부으 탄생으로 대한민국 정체성에 커다란 변화가 예견된 가운데 ‘적폐청산’으로 여야는 극한 대립으로 투쟁을 일삼아 왔습니다.새해에는 용서와 화합으로 이 모든 갈등을 해소하고 정치는 당리당략을 버리고 국리민복을 위한 생산적인 국회가 되고 국민 모두가 하나 되어 나라 발전에 이바지 하는 복된 새해가 되기를 바랍니다.기독교계에서도 교계가 사분오열된 가운데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기는커녕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음에 실로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이제 새해에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기득권과 아집과 교만을 내려놓고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연합기관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그 힘으로 교계를 정화시키고 나아가 세상을 향해 복음을 선포하고 우리에게 맡겨진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는 먼저 평신도로서 우리가 개교회와 교단과 교계에서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음을 자각하고 회개하면서 교계 연합기관의 분열을 규탄하고 하나의 연합기관 설립에 적극적으로 헌신할 것을 다짐합니다.
    • 해설/기획
    • 특집
    2018-01-04
  • 해설/ 2017년 한국교회 무엇을 남겼나?
    루터의 개혁정신 상실한 채, 이벤트와 상술에 몰두온갖 욕심과 부정으로 얼룩진 한국교회의 새로운 기회로 다가왔던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의 해가 저물었다. 우리는 정확히 1년 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면 한국교회의 개혁에 대한 기대로 한껏 들떴었다. 지난 500년 전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내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에서 촉발된 종교개혁의 역사가 오늘날 위기에 빠진 한국교회에 그대로 재현되기를 기대했다. 지난 1년 간 한국교회의 각 교단과 단체들은 경쟁적으로 종교개혁을 부르짖었다. 개혁과 갱신을 앞세워, 한국교회의 변화는 결코 선택이 아닌 필수임을 강조했고,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2017년이 한국교회 개혁을 위한 마지막 기회임을 자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1년이 지난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는 과연 어떠한 변화를 이뤘고, 어떠한 미래를 준비했는가? 한국교회에 있어 종교개혁 500주년은 단지 허울 좋은 이벤트였다. 1년 내내 수십번을 되새겨봤을 루터의 개혁정신은 그저 500년 전에 존재했던 과거의 역사였고, 탐욕과 분쟁이 가득한 오늘날 한국교회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생소할 뿐이었다. ‘면죄부’ 상기 시킨 ‘기념 메달’ 판매한국교회는 먼저 종교개혁을 돈벌이에 이용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2017년 초 등장해 큰 논란을 불러온 것 중 하나가 바로 종교개혁 ‘기념 메달’이다. CBS가 한국조폐공사와 손 잡고 제작한 본 메달은 마르틴 루터의 얼굴과 비텐베르크 성교회가 앞면과 뒷면에 각각 디자인 되어, 99.9퍼센트 순금 31.1그람(1온스)으로 제작된 금메달(250만원)과 순은 31.1그람으로 제작되는 은메달(11만원), 그리고 금은메달 세트(256만원) 등 총 세 종류로 나뉘어 판매됐다. 하지만 CBS의 기념메달은 지난날 종교개혁을 촉발시킨 로마 가톨릭의 면죄부와 매우 닮아 교계를 경악케 했다. 500년 전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교회가 물질적으로 너무 타락했다는데 있었다. 그리고 이를 가장 잘 보여준 예가 우리가 익히 아는 바로 ‘면죄부’ 사건이다.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죄를 면해야 하는데, 그 수단이 바로 ‘면죄부’라며, 민중들을 대상으로 면죄부 판매에 나섰다. 이는 종교의 타락이 극대화된 단면으로 루터는 교회가 자신들의 욕심과 권력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물질을 끌어모으는데 혈안이 된 모습에 심히 분노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CBS가 종교개혁 500주년이라는 기독교인의 중요한 기념일을 빌미로, 메달 판매에 나선 것과 매우 닮은 모습이다. 과거 로마 가톨릭에서는 면죄부를 양피지와 종이 두 개의 종류로 나누어 판매를 했다. 고급스런 양피지와 일반 종이에 쓰여진 두 면죄부 간의 가격 차이는 10배 이상 났으며, 이에 양피지를 구매한 이들은 대부분 부유층이었고, 반대로 양피지를 사고 싶어도 돈이 없는 서민들은 어쩔 수 없이 종이 면죄부를 사야 했다. CBS 역시 이번에 250만원에 이르는 금메달과 11만원의 은메달을 나누어 판매한다. 한 마디로 돈이 있으면 금메달을 사고, 돈이 없으면 은메달이라도 사라는 것이다. 종교개혁이라는 기독교인의 영광스러운 날을 장사 속에 이용하는 것도 비난받을 일인데, 금메달과 은메달이라는 물질의 가치 기준을 이에 적용하는 것은 더욱 기가 막힌 일이다. 실질적 대안 없이 문제 지적에만 몰두지난 2017년 한 해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종교개혁 500주년과 관련한 각종 세미나와 포럼 등 다양한 학술행사다. 일일이 손에 꼽기도 어려울 정도로, 각 연합단체와 기관, 교단 및 연구소 등에서 시행한 500주년 학술행사는 하나 같이 한국교회의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하며, 이에 대한 각성과 개혁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들이 지적한 한국교회의 문제는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의 추락이 시작된 수년 전부터 이미 반복적으로 지적된 문제들이었다. 목회자들의 도덕적 타락과 탐욕, 교회의 대형화와 세습, 신학적 부재 등 사실상 한국교회의 오늘날의 처참한 현실을 있게 한 대표적 문제들로 쉽게 말하면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풀어내지 못한 것’ 들이다. 그렇기에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곳곳에서 학술행사가 기획됐을 때 한국교회를 향한 근본적이고 실질적인 대안이 제시될 것으로 심히 기대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귀를 번쩍 뜨일만한 참신한 대안은 제시되지 못했다. 이러한 결과는 남을 지적하고,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그릇된 엘리트 의식에서 기인한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고질적 문제 중에 하나인 엘리트 의식이 이번 종교개혁 500주년에도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이것은 자신은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 혹은 집단이라는 위치에서, 스스로를 개혁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반대로 온갖 악행 탐욕을 저지른 ‘개혁의 대상’을 자기가 언급함으로 그 책임을 제3자들에게 떠넘기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의 마무리, ‘한교총’ 분열 종교개혁 500주년의 개혁에 대한 기대가 처참히 무너진 대표적인 사건은 바로 한국교회 9월 총회다. 한국교회의 일년 중 최대 행사로 한국교회의 미래 행보를 결정짓는 9월 총회는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일정이다. 특히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각 교단의 변화와 개혁의 결과물이 나올 이번 9월 총회에 대한 기대와 바램은 예년과 사뭇 남달랐다. 특히 지난 수년간 제2의 종교개혁을 부르짖으며, 루터와 칼빈을 되새겼던 한국교회였기에,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올해 총회에서는 분명한 전환점을 마련할 것이라는 기대가 교계와 사회 전반에 걸쳐 형성됐다. 하지만 9월 총회가 끝난 시점에 이런 기대는 처참히 무너져 버렸다. 한국교회 제2의 종교개혁을 위한 건설적인 다짐은 고사하고, 그동안 그렇게 목소리 높여 부르짖던 ‘회개’와 ‘각성’은 완전히 실종됐다. 여전히 주요 교단들의 총회는 각종 정치적 다툼과 싸움, 그리고 비난과 정죄로 얼룩졌다. 마치 종교개혁의 거룩한 정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각 교단의 총대들은 이전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이전투구를 이어 나갔다. 여기에 한국교회는 그나마 지켜오던 연합운동마저 ‘한교총’의 분열이라는 씁쓸한 사건으로 종교개혁 500주년을 처참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장로교 300개 시대를 야기한 한국교회의 무분별한 분열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해에도 어김없이 재현된 것이다. ‘한교총’을 주도한 대형교단들은 이를 “한국교회 하나됨”이라고 표현하며,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한국교회의 축복이라고 포장하지만, 실상은 대교단 이기주의와 온갖 정치적 이해관계가 중첩된 ‘분열’ 그 자체라는데 이견이 없다. 한국교회가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던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의 해에 개혁에 실패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교회는 개혁하지 못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앞으로 올 절망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에도 풀어내지 못한 개혁의 숙제를 과연 앞으로 풀 수 있을까?하는 막막함이 이제 한국교회를 덮쳐올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2018년 한국교회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 종교개혁 500주년이 끝났다고 개혁의 사명마저 끝난 것은 아니다. 한국교회 개혁을 위한 진지한 고민을 이제라도 시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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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2-29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75
    이사야 9:1-7은 하나님께서 7장에 처녀가 잉태하여 낳게 될 아들, 임마누엘에 대한 약속에 이어 그리스도 탄생에 대한 예고이다. 하나님께서 한 아기, 한 아들을 주셨다는 예고는 8장 마지막 부분에 율법과 증거를 따라 말하지 않는 선지자들 때문에 임하게 될 재난을 그 서막으로 그리고 있다. 이들에게는 새벽이 없고, 역경과 굶주림과 분노 가운데서 그들의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며 “위를 쳐다보거나 땅을 보아도 오직 고난과 흑암과 고통의 어두움 뿐일 것이다. 그들은 흑암 속으로 내 몰릴 것이다.”(사 8:22). 본문은 온 땅이 흑암으로 뒤 덮여 있는 가운데 마치 태양이 어둠을 헤치고 그의 얼굴을 내밀려고 꿈틀거리는 새벽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배경으로부터 한 아기 탄생에 대한 예언이 시작된다. 전에 멸시 당하고 고통 가운데 있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해변길과 요단 건너 이방의 갈릴리를 지명하여 이 땅들은 어두움이 없을 것이며, 하나님꼐서이 땅들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했다. 이 땅들은 아람과의 국경 지역으로 주전 734-733년에 아시리아가 아람과 에브라임을 정복하고, 이곳 주민을 아시리아 땅으로 소개시키고 아시리아 사람을 이곳으로 이주 시킨 곳이다. 수 백 년 동안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에서 살던 자들이, 전쟁에 패배하여 나라가 망하고, 정권이 바뀌어 모든 것을 빼앗기고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았으며, 일부는 이방 땅에 노예로 끌려가 죽지 못해 사는 학대를 받았다. 그래서 이 백성을 가리켜 어둠 속을 거닌 백성,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이 땅에 빛이 비쳤다. 어둠 속을 걷든 이 백성들에게 큰 빛이 비쳤다. 여호와께서 보응하심으로 이 백성들에게 즐거운 날이 왔다는 것이다. 주께서 민족을 번창케 하시고, 추수하는 날의 기쁨, 승전의 날에 전리품을 나누는 날의 즐거움과 같은 큰 즐거움을 주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날은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위하여 보응하는 날이며, 그날은 주께서 한 아기, 한 아들을 큰 빛으로 보내시는 날이기 때문이다.여호와께서 큰 빛으로 보내신 한 아이는 보통 우리가 낳고 기르는 아이가 아니다. 그의 어깨에는 통치권이 있고, “그 이름은 위대한 상담자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불릴 것이라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는 이미 이 아이에 대해서 언급하시고, 그에게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주셨다. 이사야서 7장에서 유다왕 아하스가 북왕국의 베가와 아람왕 르신이 군사 동맹을 맺고 남왕국, 유다를 공격하여 다윗의 후손, 아하스를 그의 왕좌에서 끌어내고, 다브엘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한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 떨고 있는 때에,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어 아하스를 안심시키며 이러한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징표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아들 이름을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아들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이사야서 8:7-8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북왕국의 베가와 아람 왕 르신을 대적할 아시리아를 일으켜 마치 홍수가 온 땅을 휩쓸어 버리듯이, 이들을 쓸어버릴 것이며, 심지어 유다 땅에도 그 홍수가 목에 까지 차오르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브라임과 아람의 대 아하스를 향한 군사동맹 작전은 실패하고 오히려 그들이 망할 것이라고 여호와께서는 말씀하신다. 반면에 주께서는 아하스 왕과 유다의 구원을 약속하시는 말씀을 주신다. “임마누엘아, 그것이 펼친 날개로 네 온 땅을 뒤덮을 것이다”(사 8:8) … 함께 모의해 보아라. 실패할 것이다. 말을 해보아라.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세상이 물로 뒤덮여도 임마누엘이 그의 팔로 안고 있는 그 땅은 물이 삼키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처녀가 잉태하여 낳게 될 아들, 임마누엘은 이 심판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땅의 백성을 삼키지 못하게 지키시는 방패요 구주가 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아들이기 때문이다.그런데 9장에서는 그의 아들의 이름을 “위대한 상담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그리고 평강의 왕”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아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그는 분명 우리와 같은 사람의 아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모두가 하나님을 묘사하는 이름이다. 그 아들은 신적 존재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위대한 상담자”라는 이름에 대하여 한글 역본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서양의 역본들도 달리 번역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 개역 성경은 KJV 을 따라 “기묘자와 모사”라는 두 이름으로 나누어 번역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그 아이의 이름은 다섯 개가 된 셈이다. 여기서 하나님, 아버지, 왕 등은 모두 앞에 “전능하신”, “영존하시는”, 그리고 “평강의”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 그러나 “기묘자”와 “모사”를 나눈다면 본문의 병행어구로서 운율이 맞지 않는다. 따라서 이 둘을 붙여서 쓰는 것이 옳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모사”라고 쓰는 것이 본문의 문맥이나 어휘의 용법에 비춰볼 때 옳지 않다. 따라서 최근의 한글 역본들은 “위대한 상담자”라고 번역하고 있는 데 이것도 적절한 표현이라고 볼 수 없다. “페레 요에츠”()라는 히브리 말 가운데 “페레”라는 말은 “놀랍다” “기이하다”(wonderful)는 의미이다. 문제는 “요에츠”라는 어휘의 의미이다. 히브리어 동사, “야아츠”라는 어휘는 할러데이의 “간추린 히브리어-아람어 사전”(W. Holladay저, 손석태 역)에 의하면 1차적 의미로 “충고하다”(advice), “조언하다”(counsel)는 의미로, 2차적인 의미로 “계획하다” (Plan)는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 칠십인 역(LXX)에서는 이 어휘를 “부래”(βουλη、)로 번역하고 있는 데 이 말은 역시 “기획하다”(plan)는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 신약성경 5:38에도 이“부래”(βουλη、)를 사용하고 있는 데, 한글 성경은 “사상”으로 번역하고 있어서 본문과는 너무 빛나간 것 같다. 서양 역본, ESV, TEV, NAS 등은 “plan”으로, KJV 은 “cousel” (상담), NIV “purpose”(목적)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을 고려해보면 “요에츠”라는 어휘를 “상담자”라는 의미보다는“기획하는자” 혹은 “계획을 세우는 자”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특히 본문에 “옛적에는”어둠과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살던 자들에게, 후에는 이들을 영화롭게 하고, 큰 빛을 보게 하여 기쁘고, 즐거워하게 하시는 분, 또한 그의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을 이제 사사 시대의 기드온을 통하여 미디안을 치던 날 같이 치시는 하나님을 염두에 둔다면,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에브라임과 아람과 아시리아를 손 안에 두고, 마치 장기를 두듯이 이들의 흥망성쇠를 기획하고 작전을 수행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을 기묘자요 모사라고 번역하는 것은 다음에 이어지는 아기의 이름,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등과 어울리지 않다. 따라서 기묘자와 모사라는 두 이름으로 나누고, 그 하나를 “모사”라고 표현하는 것은 한국적인 표현으로는 불경스럽다. TEV는 “비범한 전략가” (Extraordinary Strategist)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이러한 군대 용어로 표현하는 것 보다는 교회에서 사용하는 보다 다듬어진 어휘가 있다. 하나님은 그의 기이한 지혜로 세상 만물을 기획하시고,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다스리시고, 경영하는 분이시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섭리”라는 말로 쓴다. 따라서 하나님은 “놀라운 섭리자” 혹은 “기인한 섭리자”이시다. 큰 빛으로 오셔서 그를 신뢰하고 따르는 백성들과 함께 하시기 위하여 한 아들로 오시는 임마누엘은 “놀라운 섭리자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이시다.” 큰 빛, 한 아기, 한 아들로 오시는 임마누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세상을 섭리하시며, 아버지처럼 죄인 된 자식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피조물 사이에 평화의 중보자로서 평화의 왕, 그가 바로 오실 그 분이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12-23
  • 해설 / 2017년 사회 문화 주요 이슈 및 내년 전망
    문선연, 올 한해 이슈 정리 및 내년 문화선교 트렌드 발표 올 한해 사회문화 주요 담론 ‘문재인 정부’문화선교연구원(원장 백광훈 목사, 이하 문선연)은 올 한해 사회문화 분야의 10가지 주요 이슈를 선정했다. 문선연은 올 한해 주요 담론으로 ‘문재인 정부의 출범’, ‘점점 대두되는 4차 산업혁명’, ‘갑질 논란’을 꼽았다. 문재인 정부의 출범은 2017년을 돌아보는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정부의 출범은 최순실 국정농단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라는 격량을 헤치고 새롭게 시작하는 대한민국 사회의 전환점이 되었다. “촛불혁명”이라고도 일컬어지는 평화적 국민참여과정을 통해 조기출범한 문제인 정부는 제1과제로 적폐청산을 내세웠고 한국사회에 오랜 동안 쌓여온 낡고 부패한 폐단들을 일소함으로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겠다고 하였다. 이 정책이 추진되는 가운데 여·야간의 적지 않은 논란과 갈등이 지속되고 있기도 하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실 주체들 간의 갈등을 뛰어넘어 한국사회의 통합을 이루어내는 정치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남북문제와 급변하는 세계 경제의 파고를 넘어 자유, 평화, 인권, 생명, 공동선의 가치를 실현하는 대한민국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할 과제가 문재인 정부 앞에 놓여있다. 갑질 논란은 지속적으로 회자된 한국 사회의 현실이기도 하다. 유명 프랜차이즈 피자 본사의 갑질 행태, 육군 대장과 부인의 공관병 갑질, 유명 제약회사의 회장이 보여준 기사에 대한 폭언과 인신모독은 사회의 공분을 일으켰다. 이러한 갑질 형태는 직장 내 여성에 대한 성폭력 문제로 드러나기도 하였다. 유명 가구 회사 내에 벌어진 상사에 의한 성폭력 사건 논란과 한 종합병원이 재단 장기자랑행사에 간호사들에게 선정적인 의상과 춤을 추게 한 것은 직장 안에 있는 갑질의식이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의식과 맞물려 일어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들이 지속적으로 사회 이슈가 되고 있음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감수성과 기본권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분명 말해주고 있다. 복잡하고 팍팍한 우리 사회였지만, 대중들은 그 속에서도 행복을 찾아 나섰다. 예능과 여가, 경제생활의 키워드이기도 했던 욜로(Yolo) 열풍이 바로 그것이었다. 욜로는 불안한 미래 속에서, 지금 여기서 행복을 누리야 한다는 것이었고 경쟁위주의 우리 사회 삶의 방식에 대한 대중의 반성이기도 하였다. 저성장시대 속에서 행복을 찾아 나선 대중들은 앞으로 어떠한 모습으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드러내려 할 것인가. 어쩌면 욜로는 삶의 의미는 찾는 이들에게 또 다른 이름으로 변주되며 우리 일상 속에 계속 등장할지도 모른다. ‘4차 산업혁명’ 역시 우리사회의 뜨거운 주제어였다. 모든 사물이 인터넷으로 연결되고 인공지능이 인간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는 4차 산업혁명은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지는 않지만 곳곳에서 이를 준비하자는 이야기가 흘러넘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이 수많은 일자리를 앗아갈 것인가, 아니면 인간으로 하여금 노동의 해방을 가져올 것인가라는 논쟁 속에서 이러한 변화가 두려움이지 않기 위해선 클라우스 슈밥의 말처럼 “혁명의 미래에는 우리 모두의 공동된 목표와 가치를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이 “인간의 본성의 정수인 창의성, 공감 헌신을 보완하는 보완재”가 될 수 있도록 책임적 윤리가 더욱 절실하다. 교회 공동체는 4차 혁명의 도전이 인간에게 부여된 능력이 탐욕적으로 사용되지 않도록 공동의 선(common good)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할 것이며, 사회적 안전망 구축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그 외에도 문화선교연구원은 2017년의 중요한 사회문화계 이슈로 현 정부의 ‘에너지 전환 로드맵’의 공론화 모델 시도, 미세먼지부터 ‘살충제 계란’ 파동 및 ‘생리대 유해논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위협받고 있는 국민의 일상, 이른바 ‘존엄사법’으로 불리는 ‘연명의료결정법’의 시범사업 시행, 문화콘텐츠 플랫폼의 변화를 직면하게 한 영화 <옥자> 상영 논란, 마지막으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종교개혁을 소재로 한 기독문화콘텐츠의 약진을 꼽았다.‘워라밸’ 교계·사회 트렌드 될 것문화선교연구원(원장 백광훈 목사, 이하 문선연)은 지난 12월 19일, ‘2018년 사회문화 전망 및 문화선교트렌드’를 발표했다. 문화선교연구원의 사회문화 전망 및 문화선교트렌드는 다가오는 한 해의 사회문화적 동향을 살피고 교계의 흐름을 전망하는 작업으로 매년 계속되고 있다. 다음은 문선연이 꼽은 2018년 사회문화 전망 및 문화선교트렌드이다.△사회문화 전망: 행복하고 싶은 사람들, 의미의 투쟁 시대, 워라밸(Work & Life Balance), 잡학의 권위, AI스피커, 음성인식기술과 홈스피커의 결합△교계 전망: 꺼지지 않는 교계 갈등,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서, 교회도 워라밸(Worship & Life Balance), 나에게 교회란?, 작은 교회에서 좋은 교회로문선연은 2018년 사회와 교계를 아우르는 핵심 트렌드를 ‘지금, 여기서 행복 찾기’로 꼽았다. 다양한 사회적 불안과 불투명한 미래 속에서 많은 이들이 지금, 여기의 삶에 가치를 두는 경향성이 나타나고 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찾기의 모색이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지만, 이러한 현재의 삶과 일상의 회복을 강조하는 경향은 2017년 한국사회의 문화적 흐름을 주도한 ‘욜로’ 현상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개인들의 지금, 여기서 행복 찾기는 공동체의 의미 찾기로 진전되어 한국 사회와 교회 공동체의 내적 성찰과 나아가야 할 방향 모색이 시도될 것이다. 문선연은 2018년을 전망하며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쫓는 개인들, 그리고 공동체의 본질을 추구하는 이면에 우리 사회의 문제가 자리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이러한 시대에 한국교회가 신앙의 의미와 교회의 책임에 대하여 더욱 깊이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차진태 부장>
    • 해설/기획
    • 해설
    2017-12-23
  • 성탄메세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이홍정 목사성탄의 기쁜 소식은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소망의 증표요, 인류공동체와 창조세계의 희망의 근거입니다. 성탄의 계절에 빈곤이 세계화되고 절대빈곤이 구조화된 1 대 99의 세상 속에서 자본의 권력에 밀려 벼랑 끝에 선 사람들에게 평등한 삶에 대한 희망이 회복되기 바랍니다. 양심에 새겨진 진리를 붙들고 옥에 갇힌 채 고통 당하는 양심수들에게 조건 없는 해방이 선언되기 바랍니다. 경쟁사회가 요구하는 쉼이 없는 교육시스템에 고통 당하며 미래를 포기한 청년세대에게 쉼이 있는 교육을 통해 미래의 희망이 되돌려지기 바랍니다. 냉전의 사슬에 묶인 채 분단 폭력에 시달리는 한반도 민족공동체에 치유와 화해와 평화통일의 길이 열리는 기쁜 소식이 전해지기 바랍니다. 자신들의 땅에서 유배당한 채 제국의 야만에 고통 당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십자가 아래에서 선포되는 평화의 소식이 전해지기 바랍니다.성탄의 기쁜 소식은 교회로 하여금 돈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맘몬의 길에서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걸으라는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그 길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수난 당하는 사랑의 힘으로 행하는 자기 비움의 길이요, 이 땅에서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회적 연대의 길입니다. 작지만 사랑하는 힘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혐오와 차별과 배제를 넘어 사랑의 나눔과 돌봄을 실천하라는 하늘의 명령입니다. 이 땅의 교회들이 우리와 함께 계신 배고픈 예수님, 헐벗은 예수님, 병들어 아픈 예수님, 옥에 갇힌 예수님을 모시는 사랑의 사건을 일으키므로 성탄의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파할 수 있기 바랍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엄기호 목사“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거룩하고 복된 성탄을 맞이하여 스스로 낮고 낮은 곳으로 임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교회와 성도, 대한민국과 북한 뿐 아니라 온 세계 위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비움이며 희생입니다. 말구유에서 나신 아기 예수는 가난하고 소외받는 자들과 함께 하시고, 억압받고 고통 받는 자들을 위로하시며 병들고 상처받은 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하늘 보좌를 버리고 죄인의 친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의 죄의 짐을 지시고 물과 피를 흘리셨고, 그 대속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진정 자유 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자유케 된 우리가 나아갈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고, 추위와 고통 속에 있는 자들을 돌보는 일일 것입니다.성탄의 참된 의미를 마음 깊이 되새기며, 높아지기 보다는 낮아지기를, 가지기 보다는 비우기를, 섬김 받기 보다는 섬기기를 택하는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합시다. 또한 우리의 자리에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예수님의 탄생을 전한 목자와 같이 기쁘고 복된 소식을 만방에 전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한국기독교연합 대표회장 이동석 목사예수님의 오심은 우리 모두에게 겸손과 비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에 아주 작은 것도 이웃과 나누는 삶을 실천했습니다. 나라와 민족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는 촛불처럼 자기를 태우는 희생으로 희망의 등불을 온 누리에 밝혔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는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에 밟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가장 많은 신자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장 신뢰를 받지 못하는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한국교회가 지난 선교 1세기에 이룩한 부흥 성장은 분명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피선교 국가가 세계 2위의 선교국가로 발돋움하게 된 것은 뜨거운 복음의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교회가 커질수록 복음의 본질에서 멀어지고 선교의 열정이 식어버린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큰 것과 많은 것이 주님 앞에 선이 아닙니다. 무조건 대형화를 ㅤㅉㅗㅈ는 속된 욕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기는 죄악을 피할 수 없습니다.하나님이 교단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부어주신 축복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리고 축적하면서 남에게 베풀기는 인색하며 크고 많이 가졌다고 작고 적게 가진 자를 업신여기면 그 축복이 오히려 화가 될 것입니다.주님이 이 땅 오셔서 칼을 쳐 보습을 만들고(미4:3) 전쟁과 대립을 평화와 화해로 바꿔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한국교회언론회 대표 유만석 목사성탄은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소외되고, 연약하고, 희망의 불빛이 꺼져가는, 어둠과 그늘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에게, 참된 희망과 생명의 빛으로 비춰지기를 소망한다. 또 하나님을 신앙하는 모든 기독교인들은 자신을 위한 욕심과 욕망을 떨쳐버리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인하여, 낮고 천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 세상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또한 성탄의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며, 또 성탄절은 모든 인류가 하나님께 ‘예배드림’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산타 문화’는 예수의 ‘생명주심’을 희석하며, 방해하는 것이므로 경계해야 한다. 산타는 결코 ‘예수님 오신 날’의 진리가 아니다. 한국교회가 어수선하다. 어찌할까? 이제는 내려놓자, 더 많이 내려놓자. ‘절대 구원’을 위하여, 짐 되는 것들은 십자가 앞에 내려놓자. 지나친 기득권은 포기하고, 너무 가진 것은 비우자.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이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을 기억하자. 예수의 이름으로 족한, 한국교회의 건강성을 찾는 모습이 되자. 종교개혁 500주년에 맞이하는 2017년 성탄절, 그것은 말 구유간의 영성을 회복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낮고 낮아지는 겸손의 모습을 가져야 한다. 이번 성탄절은 소란하고 떠들썩한 소음(騷音)이 아닌, 회개와 나눔을 실천하고, 기쁨과 소망을 세상 가운데 전하는, 거룩의 영성으로 맞아야 한다. 한국장로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유중현 목사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하여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탄절을 맞게 됩니다. 이 성탄절을 맞이하여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고 모두가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는 성탄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우리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국가적으로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의 안보 위기로 국민들이 불안해하고 있고, 종교인과세, 동성애 합법화 우려 등으로 교계에도 한 해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성탄절을 의미를 생각하는 자세로 성탄절을 맞이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번 성탄절을 통하여 지금도 그늘진 곳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소외 계층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실제적으로 돕는, 그들과 함께 하는 성탄절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 예수님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 되라’고 하신 그 뜻을 이루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이 어려운 때에 좌절이나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나타내고 온 교회와 성도들이 이 나라의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모두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는 즐거운 성탄절을 맞이하기를 다시 한 번 간곡한 뜻을 전합니다. 한국교회건강연구원 원장 이효상 목사가장 낮은곳으로 우리 곁에 오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이번 크리스마스도 주님의 은총이 가득한 따뜻한 크리스마스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낮고 그늘진 곳에 임하신 주님처럼 우리도 낮고 그늘진 이들 곁에 함께 했으면 합니다. 그래서 성탄과 더불어 한 해가 저물어가는 여러분의 가슴속에도 훈훈해지고 따뜻해지는 이야기들이 더 많이 생겨났으면 합니다.부끄럽고 아쉬웠던 것은 ‘거룩한 공교회를 믿사오며’라고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사교회’화를 막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참회하게 됩니다. 주님이 당부하신 연합을 이야기 하면서도 분열하고, 겸손을 말하면서도 높은 자리를 좋아하며, 사회와 소통하기 보다는 우물안 개구리로 만족해하는 그러면서도 세상적인 것들은 너무나 사랑하는 어리석은 우리의 자화상을 보며 깊이 참회합니다.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고, 목회생태계를 복원하는 것은 한국교회가 당면한 과제입니다. 세상에 부끄럽지 않은 교회, 세상에 ‘교회는 이런 곳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런 교회들이 많이 나왔으면 합니다. ‘교회가 그래도 이 시대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교회, 그런 성도들이 많이 나타났으면 합니다. 마치 아기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듯 한국교회에도 말입니다. 루터처럼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윤동주 시인처럼 어두운 시대에 자기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가는 크리스천들이 많이 생겨난다면 2018년 새해에는 그래도 희망의 빛은 꺼지지 않고 계속 될 것입니다.그런 2018년 새해를 소망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아름답고 건강한 한 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해설/기획
    • 특집
    2017-12-22
  • 학술/ 종교개혁과 기독교의 정치참여
    본고는 한국기독교연합과 한국정치외교사학회가 지난 12월 1일 서울 연지동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개최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특별 심포지엄 ‘해방 후 한국정치와 기독교인’ 중 박창훈 교수의 원고 ‘종교개혁과 기독교의 정치참여’ 중 ‘종교개혁과 국가’ 부분을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종교개혁과 국가루터의 종교개혁이 독일인들의 국가의식을 고취했다는 평가는 다분히 현대적인 국가개 념을 거꾸로 덮어씌운 반역사적인 주장이 될 수 있다. 루터는 단지 작센지방의 수도사였기 때문이 다. 물론 루터에게서 현대 “독일”에 대한 의식을 찾는 것은 어려울지 모르나, 그가 사용하는 언어 를 통해 구별되는 통치지역에 대한 의식은 분명했고, 그런 의미에서 루터의 독일어 성경번역은 국 가개념의 형성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종교개혁은 그 발전과정에서 민족국가의 형성에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고, 그만큼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1. 법치주의 중세가 허물어지고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교황의 정치적 위상과 의미는 축소되는 과정을 겪었다. 아울러 교황과 함께 그를 옹호하려는 전통적 권위였던 황제에 대항하게 된 개신교(프로테 스탄트)는 이제 근대국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종교개혁가들 사이에 제기된 세 속권력에 대한 다양한 논의는 그만큼 세속권력의 상대적인 성격을 드러냈으며, 이는 교회가 하나 님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서 세속권력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루터는 독일인이었다”는 명제는 너무나 당연하면서도 항상 흥미로운 논란을 불러일으키지만, 그의 독일어 성경번역에서 보듯이, 황제 한 사람의 통치를 대신할,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정치체제에 대한 기대와 염원은 종교개혁 과정에서 분명하게 표출되었다. 민족이나 국가의 개념은 아직 성숙되지 않았으나, 적어도 지역 통치자에 대한 기대로 인해, 교황의 역할 만큼이나 황제의 역할은 줄어들었다. 그리고 교황의 타락에 대해서, 중세부터 계속되던 “공의회주의”(conciliarism) 가 루터에 의해 더 강화된 것과 같이, 황제에 대항하여 “슈말칼덴 동맹”(Schmalkaldischer Bund)이라는 정치적·군사적 동맹이 나타났다. 이 과정을 통해 종교개혁가들은 국가가 근거해야 할 법치주의의 근거를 제시했는데, 1530년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16조는 “공무(세속권력)에 관하여”(Of Civil Affairs)를 다 음과 같이 정의하였다.세속권력들에 관하여, 그것들은 시민의 사역이 하나님의 선한 일처럼 정의롭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인들은 공무를 담당하고, 재판에 참석하여, 제국의 법과 현재 적용되는 법들에 따라 사무를 결정 하며, 올바른 벌을 내리고, 정당한 전쟁을 수행하여, 병사로서 행동하며, 합법적인 거래와 계약을 하고, 재산을 유지하며, 공무원이 요구할 경우 맹세를 하고, 아내와 결혼을 하거나 혼인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공무를 금하는 재세례파를 정죄한다. 그것들은 또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나 믿음이 아니라, 공무를 저버리는 것을 복음의 완전함이라 여기는 자들도 정죄한다. 이는 복음이 마음의 영원한 의로움을 가르치기에 그렇다. 반면에 그것은 국가 (commonwealths)의 명령이나 통치를 불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계명 즉 우리가 사랑 해야 하는 것과 같은 계명처럼, 그러한 것들을 보호하고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어떤 죄를 짓도록 명령하는 때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기에(행 5:29), 이러한 경우를 제외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권세자와 법에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여기서 “제국의 법과 현재 적용되는 법들에 따라”는 분명히 세속 권력에 대한 의무와 공무의 근거가 법이어야 한다는 법치주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루터가 염려하는 또 다른 종교개혁의 줄기가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이들은 재세례파들인데, 정부에서의 공무직 자체를 금지하던 자들이다. 루터는 이들의 지나친 이분법적인 세계관과 그에 따른 과격한 분리주의를 부정하고 있다. 즉 두 세계 또는 두 왕국을 구별할 수는 없고 두 세계에 함께 속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이해가 루터의 생각에 드러난다. 이제까지 루터는 1524년부터 1526년 사이에 있었던 독일농민전쟁을 지지하지 않았기에, “군주들의 시녀”였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위의 신앙고백에서 보듯, 루터는 정부에 대하여 맹목적인 복종을 의도하지는 않는다. 만약에 정부가 죄를 짓도록 한다면, 예를 들어 신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거나 부당한 전쟁을 일으킬 경우에, 따르지 않을 근거도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 고 있다. 세속 정부는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한 기구일 뿐, 그렇지 않을 경우는 그에 저항할 수 있다. 실제로 루터는 “작센 군주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교황의 군사적 지지자인 브라 운슈바이크 공작을 체포했을 때, 그를 석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는 자신의 판단을 전 하면서, 정치적인 타협을 시도하려는 독일 군주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하였다. 단순히 농민을 지지했기에 더 급진적이었고(Thomas M tzer), 군주들을 지지했기에 더 보수적이었으며(Martin Luther) 그래서 결국 루터가 독일 제 3제국의 형성에 기여하는 신학을 제공했다는 해석은 극복되어야 한다. 카터 린드버그가 반론하듯이, 토마스 뮌처는 신정통치라는 중세시대의 세계관으로 돌아가서 선택된 이들로 통치되는 국가를 생각한 만큼 반동적이었지만, 오히려 루터에게는 개인의 이성과 믿음으로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는 급진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루터는 로마서 13장에 대한 해석을 통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권력, 타락한 권력에 대하여,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늘 상기시켰으며,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칼을 받은 이들에게 책임을 물었다. 율법과 은혜를 대조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교리를 강조할 때도, 루터는 율법의 3가지 기능, 즉 첫째 죄악된 행동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징벌을 강조하고, 둘째,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도록 하며, 마지막 셋째, 하 나님을 기쁘시게 할 행동들을 교육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특히 첫째 기능에 따라 루터는 형사적 처벌을 위한 법의 기능을 강조했다. 2. 민주적 대의제도루터의 두 왕국론 이후에, 교회와 세속 권력은 항상 두 기관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논의 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교회와 세속 권력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양측에서, 적어도 교회내부에서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논의와 실험을 촉진시켰으며, 결국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 및 대의제도가 교회 안에 정착하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기본적으로 봉건적인 형태의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감독제 교회 형태 를 따른다. 감독제는 개신교 가운데 잉글랜드 국교회와 미국의 감리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체제 (polity)이다. 이는 감독을 중심으로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구조이다. 그러나 칼빈을 통해서 제네바 에서 추진된 교회체제는 감독이 없고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는 목사, 교사, 장로, 집사로 구성된 평신도들의 기능적인 참여로 이루어지는 구조였다. 목사는 설교를 담당하며, 시내 목사회에서 선정하여 시의회에 천거하고 개교회의 동의를 얻어 확정되었다. 장로는 교회의 정치와 치리를 맡았 으며, 교사는 가르치는 일을, 집사는 교회의 회계와 구제를 담당하였다. 제네바의 모든 시민이 교인이었으니, 이 체제는 교회만의 체제가 아니라, 도시국가 자체의 정치구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특히 제네바의 윤리적인 지침을 주기위하여, 평의회(당회, consistory)를 구성했는데, 목사 5인과 장로 12인으로 이루어졌다. 장로는 시의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었으며, 1주일에 한 번 씩 모여 교회의 규율과 시민의 도덕을 관장하였다. 평의회의 결정은 지도 감독만이 아니라 처벌을 위한 법정에 영향을 주었다. 신정정치를 표방한 칼빈의 교회제도는 실제로는 제네바를 대의제도를 통해 운영하는 것이었다.20) 칼빈의 장로제는 이후 잉글랜드 국교회로부터 분리된 청교도들에게서 더욱 민주적인 발전과정을 겪었다. 목회자가 일반 신도들에 의해서 선택받았으며, 특히 은혜를 입은 신도들은 교회 에서 권력을 행사하고, 목회를 하며, 교회의 생활과 예배를 결정하였다. 영국에서 이 청교도들은 1640년대에 의회의 다수를 이루게 되었으며, 장로제를 통하여 영국 교회를 보다 철저히 개혁하려 고 하였다. 이후 청교도 혁명은 영국의 왕 찰스 1세를 처형하는 결정을 가져온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으며, 그만큼 절대군주를 거부하고 공화정을 이루는 정신적인 근거를 청교도들은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청교도들의 장로제는 올리버 크롬웰의 집권 이후에 회중제로 바뀌기 시작했다. 국가종교 를 부정하면서, 종교의 자유를 통해 자발적으로 모인 성도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교회체제였으며, 이는 장로제보다도 민주화된 형태의 교회체제였다. 즉 신자들의 교회로 이루어진 자발적인 공동체였다.종교개혁 이후에 교회체제를 매개로 구현된 정치형태는 민주적인 발전을 겪었고, 이는 국가적인 민주주의의 성숙과 병행하는 과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은 민주주의의 확장에 일 정 정도 기여하였다. 개혁주의에서 두드러지듯, 종교개혁은 대의제도를 통한 평신도들의 참여를 확대하였으며, 장로제의 의사결정 과정을 통하여 평신도들의 참여의 기회는 그만큼 늘어났다. 그 리고 민주화 과정은 시민의식의 성장을 통해 구체화 하였으며, 근대 민주주의 국가의 등장으로 꽃 을 피웠다. 아울러 이제까지 전통적으로 성례에 의하여 진정한 신자를 구별하던 방식은,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개인의 체험과 양심의 판단으로 맡겨지는 만큼 민주화하였으며, 이제는 개인적인 신앙체험, 즉 “확신”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 해설/기획
    • 학술
    2017-12-1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74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 물 속의 물고기들, 땅 위의 모든 생물들, 그가 이 가운데 배열해 놓은 조직과 질서, 특히 그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어 이 모든 만물의 왕으로 세우신 사람들, 모두 아주 보시기에 좋았고, 흡족해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안식하셨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반역하였다. 그의 창조주와 종주로서의 권위와 존엄성을 감히 짓밟아 버렸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명하심으로 창조주로서의 하나님, 그리고 언약적 체계 안에서의 종주로서의 권위를 선포하심으로 하나님과 사람과 만물 사이의 위계질서를 세우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 따먹어 버렸다.하나님의 존엄하심과 거룩하심은 인간의 이 반역과 범죄를 묵과하실 수 없어 이들을 문초하시고 말씀하신대로 이들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죽음을 선고하셨다(창 3:19). 그러나 사람의 범죄와 그에 따르는 형벌은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는 아담의 언약적 대표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아담과 함께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형벌을 받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드시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분봉왕으로 세우실 때, 우리 사람과 피조물은 하나님 안에서 언약적 연대성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아담의 죄가 인간의 죄가 되고, 아담에게 내려진 형벌이 사람에게 내려지는 형벌이 된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 인간은 아담과 함께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고, 죄의 삯인 죽음, 곧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롬 5:12). 그리고 사는 날 동안 이마에 땀을 흘리고 수고하여야 먹고 살수 있는 고달픈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언약적 원리 속에서 우리 인간에게는 원죄가 있는 것이고, 결국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언약적 연대성을 부인하고, 원죄를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죽음을 맞아야 하는 인간은 죄인일 수 밖에 없다.하나님은 아담에게만 징벌을 내리신 것은 아니다. 하와를 유혹했던 뱀과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을 반역한 여자에게도 따로 징벌을 내리셨다. “내가 너와 그 여자 사이, 그리고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대감을 둘 것이다. 그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고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창 3:15). 여자와 뱀 사이, 그리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적대감을 두고, 서로 머리와 발을 물고 물리어 상처를 입히게 한다는 것입니다. 뱀과 뱀의 후손은 머리를 상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 생명이 오래 가지는 못 할 것이고, 여자와 여자의 후손도 발꿈치를 상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적잖은 부상을 입게 될 것이다. 여기서 뱀이라는 존재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뱀은 아니고, 뱀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앞잡이라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도 함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이 뱀, 곧 사단의 머리를 짓밟고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나뭇잎으로 벌거벗음을 가리고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히셨다. 이 가죽옷은 분명 하나님을 불순종한 반역자, 사형수에게 입히는 죄수복임에 틀림없다.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갈 3:27)고 가르친다. 우리가 물세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예식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를 성령으로 인치신다. 성령세례를 주시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는 예식이다. 이같은 점을 염두에 둔다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입혔던 사형수의 죄수복은 언젠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새 옷에 대한 모형이고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하나님께서는 장차 사탄의 머리를 짓밟고, 아담 부부에게 입히셨던 그 가죽 옷을 대신한 자유와 생명의 옷을 입히실 구원자에 대한 약속을 주신 것이며, 이는 또한 새로운 세상에, 새로운 형상과 모양을 가진 새 아담을 주셔서,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뜻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것인가? 이 점에 대하여 바울은 “아담은 오실 분의 모형이었다.”(Αδ‵αμ ο‛、Vε’στιν τυ、ποVτου˜ με’λλοντοV, 롬 5:14)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아담을 모형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사망에 이르는 언약적 연대성의 원리와 같은 원리로 “오실 분”(새 아담) 한 사람의 순종과 한 의로운 행동으로 모든 사람을 죄로부터 해방하고, 생명을 얻게 하는 언약적 연대성의 원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을 대신할 “여자의 후손,” 곧 새 아담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첫째는 그는 분명 여자의 후손이여야 한다. 말하자면 여자의 몸에서 나아야 할 사람이다. 둘째로 그는 단순한 뱀의 머리를 짓밟을 자가 아니라 뱀을 그의 앞잡이로 사용하고 있는 사단을 짓밟을 수 있는 영적 존재여야 한다. 따라서 새 아담은 인성과 신성을 가지 존재여야 할 것이다. 셋째로 새 아담은 아담의 죄 값을 대신 치러야 할 속죄적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새 아담은 아담의 죄를 대신 지고 죽어야 한다. 왜냐하면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담의 죄를 대속할 자격을 가진 자가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모두가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때문에 모두가 죄인들이다. 죄인이 다른 사람을 속죄할 수 없다. 새 아담은 죄가 없어야 한다. 따라서 아담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들어있는 존재는 그 자격이 없다. 그러한 존재는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새 아담을 창조하시든지 아니면 하나님이 오시든지 해야 한다. 넷째는 새 아담은 아담의 죄를 대신 지고 죽는다면 그는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죽음으로 죄 값을 치뤘기 때문에 더 이상 죄와 죽음이 그를 얽매고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에 그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그의 속죄가 온전하지 못하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무능한 거짓말 쟁이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다섯째, 새 아담이 온전한 속죄를 이루어 그 자신이 다시 살아난다면 당연히 새 아담과 언약적 연대성을 가진 자들도 새 아담과 함께 살아 나야 한다. 이제는 더 이상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세상이 아니다. 따라서 새 아담의 부활은 필수적이다. 여섯째로새아담은아담과마찬가지로하나님께서새롭게창조하신피조물세계의왕이되어야한다. 그래서 새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가진 존재여야 한다.이상을 살펴볼 때에 아담을 대신할 새 아담, 곧 여자의 후손은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 이외는 다른 존재가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예수님 만이 이러한 전제를 충족시킬 수 있는 새 언약의 대표자 이자, 새 언약의 주이시오, 왕 중의 왕, 유일하신 하나님일 수 있다. 성경은 구약으로부터 시작하여 신약에 이르기까지 곳곳마다 새 아담의 자격과 전제 대한 대답이고, 설명이다. 특히 사도 바울의 모든 신학은 이 언약적 연대성의 원리의 틀 속에서 새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와 사역을 전개하고 있다 (개신대학원대학교의 교수 논문집 <개신논집> 제 17호에 게재된 본인의 글, “여자의 후손” 을 참조하기 바람).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12-14
  • 해설 / 종교인 과세 일부 개정안의 쟁점과 대비
    장헌일 목사, 개정안 분석 및 실제적인 대비책 제시 한국공공정책개발연구원 원장 장헌일 목사(생명나무숲교회 담임)가 최근 발표된 종교인 과세 일부 개정안에 대해 주요 쟁점과 문제점을 지적했다. 정부는 지난 11월 30일 7개의 소득세법 시행령에 대해 일부 개정안을 입법 예고한 바 있다. 당초 종교인 과세와 관련해 기독교계는 정부의 과세 기준이 매우 졸속하다고 비난해 왔다. 기독교계는 과세 기준의 범위에 대한 경계나 기준이 명확하지 않으며, 이로 인한 엄청난 혼란이 예상된다며, 2년간의 재유예를 요청해 왔다. 하지만 “유예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 온 정부는 기독교계의 의견을 반영해 일부 미비점을 개선한 ‘종교인 소득 과세제도 보안 방안’을 발표했다. 그동안 기재부는 차질 없는 시행을 진행하기 위하여 종교지도자 간담회 (7대 종교계 9개 종단), 종교계 방문 면담, 수시 실무협의, 납세지원 체계 구축(종교인 신고 안내 페이지 개설) 등 종교계와 지속적으로 소통한 내용을 금번 개정안에 담았다. 장 목사는 이번 개정안 중 먼저 종교인 소득 범위를 조정한 점을 주목했다. 기재부는 비과세 되는 종교인 소득 범위를 늘려, 종교 관련 종사자가 종교 활동에 사용할 목적으로 지급받은 금액 및 물품을 비과세 되는 종교인 소득에 추가했다. 여기 종교 활동비라 함은 기독교의 목회 활동비, 천주교 성무 활동비, 불교의 승려 수행 지원비 등이 해당한다. 이는 기독교 입장에서 볼 때 상당히 환영할만한 부분이다. 중대형교회에서는 목회자에 대한 기본적인 사례비 외에 목회 활동비를 책정하는데, 일부 교회에서는 목회 활동비가 사례비를 훨씬 웃돌기도 한다. 문제는 목회 활동비에 대한 정확한 기준과 집행이 있어야 된다는 점이다. 기재부는 종교활동비의 결정 지급 기준에 대해 소속 단체의 규약 또는 소속 종교단체의 의결 기구의 의결, 승인 등에 의해 결정된 사항만 해당되며, 규약에 의거해 종교 활동 목적으로 사용하는 항목을 비과세로 분류한다고 밝혔다. 장 목사는 이 부분을 세무당국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로 해석했다. 장 목사는 “개정 예고된 222조 2항을 기준으로 볼 때 ‘종교단체가 종교 관련 종사자에게 지급한 금품’은 여전히 세무당국이 질문·조사를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종교 단체가 종교 활동비를 종교인에게 근거자료 없이 지급하는 경우, 문제가 될 수 있기에 과세당국이 과세할 수 있는 종교인 소득 과세대상범위가 축소되었다고만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즉, 관례에 따라, 혹은 그때그때 필요에 의해 주먹구구식으로 목회활동비를 지급할 경우, 아무리 비과세 항목이라도 세무당국의 추궁을 받을 가능성이 있기에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또한 개정 소득세법 제222조 ‘질문·조사시에는 종교 활동 관련해서 지출한 비용을 구분하여 기록·관리한 장부 또는 서류에 대하여 조사하거나 그 제출을 명할 수 없다’고 한 것에 대해서도 무조건 안심할 수 없는 조항이라고 지적햇다. 장 목사는 “이 항목은 종교 활동과 관련된 지출 비용을 구분해서 기록·관리한 장부 외의 사안에 대하여는 질문·조사권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다”면서 “이는 증빙이나 근거자료가 없이 종교 활동비를 종교인에게 지급한 때에는 세무당국이 종교단체 혹은 종교인을 상대로 질문·조사권을 발휘할 여지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번 개정안에 따라 종교단체의 범위 규정이 확대되어 이에 따른 사회적 혼란을 우려했다. 장 목사는 “종교단체 규정에는 ‘국세기본법’ 제13조 제4항에 따른 법인으로 보는 단체와 제49조 제1항 제3호에 따라 등록번호를 부여받은 법인 아닌 사단&#8226;재단 형태의 종교단체도 포함된다”면서 “문제는 현재 종교인 범위 DB 구축 과정에는 종교단체에 대한 별도의 검증 절차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혹여 본인 스스로 종교인이라 주장하면서 종교인 소득세를 부담할 경우에 반사회적인 종교단체의 난립이 생겨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개정안은 14일까지 온라인 등으로 의견을 제출받아, 21일 차관회의, 26일 국무회의를 거쳐 12월 29일 최종 확정안이 공포될 예정이다. 한편, 공공과세정책연구소는 오는 14일과 18일 종교인 과세 관련 공개강좌를 진행한다. 본 연구소는 “내년 1월 1일 시행될 종교인 과세 문제에 대한 각 교회의 이해 부족과 준비 부족속에서 종교인 과세와 관련한 법적 근거를 위한 정관과 재무회계에 따른 이해를 돕고자 공개강좌를 진행하게 됐다”고 밝혔다. 공개 세미나는 1부와 2부 구성되며 1부 강좌는 교회의 공공정책전문가인 행정학 박사 장헌일 목사가 ‘교회 정관 개정의 필요성(담임목사 사례비와 목회활동비를 중심으로)’, 2부 강좌는 종교인과세 전문가 행정학 박사 김두수 회계사의 ‘교회 재무회계 매뉴얼화’라는 주제의 강연이 진행된다. 본 연구소는 “종교인 과세 시행 이후 중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기에 특별히 중형 교회 이상에서 교회 정관과 재무회계 세칙을 통하여 목회자 사례비와 목회 활동비를 잘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번 공개강좌는 기독교 목회자를 대상으로 20명 선착순 접수를 받으며, 접수는 공공과세정책연구소(https://ptpl. modoo.at) 홈페이지를 통해 가능하다.(문의 010-8629-9044)
    • 해설/기획
    • 해설
    2017-12-1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73
    창세기 1-2장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우리는 아주 정교한 구성이 있고, 문학적 기교가 있는 창조 기사임을 알 수 있다. 창세기 1:1은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를 선언한다. 그리고 바로 창세기는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계를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 세계에 어떠한 조직과 질서가 있는 가를 보여준다. 본문의 구조를 살펴보면 1:1은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를 선언하는 독립구절이자 본문의 시작이며, 1:2-2:4a 는 1:1을 부연 설명하는 삽입구이다. 따라서 1:1은 2:4b로 이어지고 이어서 2:25까지는 인간 창조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가운데2:9-14의 에덴동산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도 역시 삽입구이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의 천지창조 선언에 이어 인간 창조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담의 창조에 이어 여자와 가정 창조가 본문의 주요 관심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가운데 인간의 위치와 사명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에 어떠한 질서와 조직이 있는가를 보여 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를 위하여 저자는 1:2a-2:3을 삽입구로 처리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하다. 이상과 같은 점을 염두에 두고 본문의 구조를 분석해보고, 이를 그림으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은 모습이 될 것이다.1:1 하나님의 천지 창조 선언1:2-2:4a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 (삽입구 1:2a-2:4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1:2-13 영역의 창조 1: 3-5 빛 1: 6-10 궁창 1:11-13 땅 1:14-2:3 영역의 주관자를 세움 1:14-18 해, 달, 별 1:19-23 새, 물고기 1:24-31 짐승, 가축, 사람 2:1-3 하나님의 안식2:4-15 아담의 창조와 사명 삽입구(2:9-14 에덴동산) 2:16-17 선악과에 대한 명령2:18-25 여자와 가정의 창조 이 그림을 통해서 보면 분명 사람의 위치는 특별하다. 사람은 6일째 되는 날 동물과 함께 창조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들어 그가 지으신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그의 대리 통치자로 세우셨다. 시편 8:6에서 해석하고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관”을 쓴 존재, 다시 말하면 왕관을 쓴 왕으로 세우신 것이다. 사람이 왕이라면 사람에게 왕관을 씌우신 하나님은 대왕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과 피조물 사이에는 언약관계가 있고, 특히 사람과 피조물 사이에는 하나님 앞에서 언약적 연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태도 여하에 따라 피조물은 사람과 더불어 그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것이다.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어진 존재라는 것은 비록 그가 다른 동물과 같이 제6일에 창조되었고, 그래서 동물적인 속성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동물과 엄격하게 구별되는 점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특별하게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통이 가능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돌보고 관리할 수 있는 지능과 능력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사람을 자연으로부터 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라고 말하거나 자연의 일부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사람은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로부터 구별된 존재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피조물을 다스리는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왕이지만 대왕이신 하나님 위에 설 수는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명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 대왕 되심, 언약적 종주가 되심을 선포하시며, 인간에게 항상 그가 피조물임을 잊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지으신 이 세상에 하나님-사람- 만물의 위계 질서를 세우신 것이다.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들어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것을 경작하며 살도록 하셨다. 사람은 창조시부터 일하며 살도록 지어진 존재이다. 에덴이라고 해서 일하지 않고 입만 벌리고 있으면 살 수 있도록 만드시지 않았다. 또한 사람은 혼자 살도록 지어진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다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지만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사람이란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우는 말씀이다. 사람은 서로 관계를 맺고 서로 교통하며 사는 존재이다.하나님과 사람과 피조물 사이에 바르고 적절한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혼자 사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 가장 특별하게 지어진 존재가 있다면 여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지으실 때 남자를 돕는 배필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두고 지으셨다. 이는 분명 생육과 번성에 관계되는 말이다. 그런데 다른 모든 피조물은 무에서 창조하셨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를 취하여 만드셨다. 유일하게 기존의 물질로부터 창조하신 것이다. 특별한 존재이다. 그리고 여자의 창조는 하나님의 창조 가운데 마지막이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의 크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들어 아담의 아내로 주시고 그들이 한 가정을 이루도록 하시는 곳에서 창조의 기사가 끝맺고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여자와 가정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점이다. 사람은 마땅히 가정을 이루어 자식들을 낳고, 양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상을 살펴볼 때, 창세기 1-2장의 주요 관심사는 결코 6일 동안의 만물 창조에 있다기 보다는 사람의 창조와 가정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물의 창조는 1:1에 이미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1:2-2:4 에서는 이것을 삽입구로 취급함으로 저자가 의도하는 본문의 흐름은 사람의 창조로 넘어가고 있다. 따라서 이 창조 기사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과 그의 가정이다. 그런데 그동안 창세기 연구는 물질의 기원과 연대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답을 추구해왔지만 해답을 얻지 못하고 성경에 대한 불신만 불러왔다. 창조 기사에 대한 바른 연구가 성경 전체의 바른 이해에 대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12-08
  •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 번역자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
    성경을 한글로 번역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게 해준 분들은 우리들이 영원히 감사해야 할 ‘민족의 은인’들이다. 신약성경은 스코틀랜드의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 목사가 1880년대 중국 심양에서 최초로 번역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교회는 ‘로스 기념관’을 건립해서 그의 공적을 기리고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구약성경의 경우는 어떤가? 누가 언제 구약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했는가? 이에 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지 않다. 그의 업적을 감사하는 기념사업은 고사하고, 그의 이름조차 기억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구약성경을 최초로 우리말로 번역해 준 ‘은인’은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1871~1958) 목사이다. 한국명으로는 ‘피득’이라고 부른다. 그가 1895년 한국에 와서 3년간 한국말을 배운 후 1898년 시편의 일부를 우리말로 번역해서 ‘시편촬요’를 출간한 것이 역사상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 번역이 된다.알렉산더 피터스는 1871년 러시아의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히브리어를 배웠고, 히브리어로 된 기도문과 시편을 낭송하며 성장했다. 그가 자라났던 19세기말, 제정 러시아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밝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극심해서 유대인들은 이중고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러시아를 떠난 24세의 청년 피터스는 우여곡절 끝에 멀고 먼 일본 나가사키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미국이나 다른 나라로 가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곳에서 그를 붙잡으셨다. 기독교로 개종한 그 청년은 유대인 본명을 버리고, 그에게 세례를 준 미국 선교사의 이름을 따라 ‘피터스’(Pieters)라고 개명했다. 그때부터 그는 ‘피터스’로서 하나님이 인도하는 새로운 삶의 길을 걸었다. 그는 미국성서공회가 파송한 권서(勸書, Colporteur)의 자격으로 한국으로 와서, 최초의 구약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해 준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다.피터스는 어학에 특출한 재능을 타고 났다. 히브리어는 말할 것도 없고 라틴어와 희랍어와 같은 고전어도 학습했다. 뿐만 아니라 독어, 불어, 영어, 이디쉬어(Yiddish, 독일어와 히브리어의 합성어)까지 구사하는 어학의 귀재였다. 여기에는 한국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었다. 피터스 청년이 1895년 한국에 오기 전까지 이 땅에는 한국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이 없었다. 당시 한국에는 구약성경을 번역할 인물이 절실하게 필요했고, 피터스는 그 일을 감당하는데 최적의 인물이었다.그가 서울에 온 후 3년만에 구약성경 중에서 번역하기가 가장 어려운 책으로 알려진 ‘시편’을 번역했다. 그가 한국어 운율에 맞는 유려한 우리말로 시편을 번역했다는 것은 그의 천부적인 어학적 재능을 잘 말해준다. 1900년 피터스는 미국으로 가서 신학수업을 받은 후 목사안수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당시 구성된 구약성경 번역위원회의 위원으로 뛰어난 히브리어 실력을 발휘해서 구약성경 번역에 중추적 역할을 했고, 1910년 마침내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 번역을 완료했다.그러나 이것으로 한글성경 번역사역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출간된 한글성경을 가다듬어 손질하고 오류가 있는 곳은 수정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피터스 목사는 구약성경 개역위원회의 평생위원으로 위촉되어 한글성경 개역작업에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다. 개역작업은 1938년에 끝이 났고, 그 해에 ‘개역성경전서’가 출판되었다. 1938년에 완선된 개역성경과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구약성경을 비교하면, 맞춤법이나 고어체(古語體)만 조금 다를 뿐, 그 내용은 놀랄 정도로 차이가 없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1910년에 번역되고 1938년에 개정된 구약성경은 대단히 잘된 훌륭한 번역이라는 것을 말한다. 특히 소리내어 읽으면 우리말의 운율에 잘 들어맞아 감탄이 나올 정도이다.알렉산더 피터스 목사는 구약성경을 한글로 번역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게 해 준 가장 큰 공로자이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만큼, 피터스 목사를 이 땅에 보내주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그러나 그의 결혼생활은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1900년부터 3년 동안 피터스는 미국의 신학교에 유학해서 신학교육을 받은 후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때 신학교에서 같이 신학수업을 받던 엘리자베스 캠벨(Elizabeth Campbell)을 만나게 되었고, 두 사람은 결혼했다. 신혼의 부부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피터스는 구약성경 번역사역에 전념했다. 그런데 서울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엘리자베스는 폐결핵에 걸렸고, 결혼생활을 4년도 넘기지 못하고 33세의 젊은 나이에 서울에서 별세했다. 한국에 왔던 초기 선교사들이나 가족들 중에는 폐결핵이나 풍토병으로 사망한 분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 한국의 역악한 환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캠벨 여사는 서울 양화진의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는 먼저 떠난 아내 엘리자베스를 추모해서 후일 세브란스 병원에 결핵환자 진료소를 마련했고, 크리스마스 실 운동도 전개했다.그 후 피터스 목사는 세브란스 병원에 의료선교사로 와 있던 여의사 에바 필드(Eva Field)와 재혼했다. 필드 여사는 두 아들을 낳았으나, 불치의 암으로 그가 환자를 돌보던 세브란스 병원에서 별세했다(1932년). 그도 엘리자베스와 마찬가지로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었다.1941년 피터스 목사는 70세가 되어 성경번역자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46년 동안 봉사했던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캘리포니아주 LA근교 패서디나(Pasadena)시에 있는 은퇴선교사 주거시설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58년 87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필자는 최근 몇 년 동안 패서디나에 소재한 플러신학대에서 연구교수로 있었다. 구약학으로 학위를 받고, 평생토록 구약을 공부하고 가르쳐 온 필자로서는 구약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해 준 피터스 목사가 마지막 여생을 보냈던 패서디나에서 연구와 강의를 할 수 있게 되어 뜻있게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이 컸다. 피터스 목사가 패서디나에서 별세했다면 그의 묘소도 틀림없이 그곳 근처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구약학도로서 그의 묘소를 찾아가 추모와 감사의 마음을 표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주변의 여러 사람들에게 그의 묘소의 위치를 물어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묘소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놀라운 사실은 피터스 목사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 조차 별로 없었다. 피터스 목사는 잊혀진 존재였다.묘지 사무실 누구도 피터스 목사가 누구였는지, 또 그의 묘소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수천 구 이상이 묻혀있는 넓은 묘역에서 60년 전에 돌아간 분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그곳에서도 피터스 목사는 무명의 잊혀진 인물이었다. 결국 사무실의 컴퓨터 조회를 통해서 그가 묻혀있는 대략적 위치를 알아냈다. 이 공용묘지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묘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넓은 구역에는 묘지마다 크고 작은 여러가지 모양의 묘석들이 세워져 있어 묘석들로 숲을 이룬 듯이 보인다. 이렇게 묘석들이 즐비하게 세워진 넓은 구역 한 편에 작은 묘석조차 보이지 않는 초라한 묘역이 있다. 멀리서 얼핏 보면 잔디와 잡초로 덮여있어 묘역같이 보이지도 않는 곳이다. 돌보는 사람이 없어 잊혀진 듯한, 마치 무연고자 묘역같은 느낌이 드는 구역이다. 바로 이 구역 안에 피터스 목사의 묘지가 있다.
    • 해설/기획
    • 학술
    2017-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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