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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13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명대로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막을 만들었다. 이스라엘이 만든 하나님의 성막 위에 여호와의 영광이 임했다. 시내 산에서 여호와와 이스라엘은 언약을 맺으므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어 함께 거하는 놀라운 관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바로의 노예였던 자들이 해방되어 하늘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하늘 하나님의 신부가 되고, 아들이 되고, 백성이 되었다. 얼마나 영광스럽고, 축복받은 자들인가! 이제 당장 죽어도 한이 없을 것 같은 것 같은 은혜와 특권을 받은 것이다. 꿈에도 그리던 자유와 새로운 신분과 새로운 땅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이제 내 땅에서, 내손으로 농사짓고, 내 밥을 내가 먹고 살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이스라엘은 드디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하여 그 첫 발걸음을 때였다.이스라엘은 출애굽한지 제 이년 이 월, 이십 일에, 성막에 구름이 떠올랐으므로 가나안 약속의 땅을 향하여 출발한다. 그들은 마치 전쟁을 앞둔 군대처럼 각 지파별로 사람 수를 점호하고, 편대를 짰다. 말만 들어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는 출발 나팔이 울렸다.이스라엘은 출애굽한지 2년이 흘렀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주시던 만나가 이제 싫증이 났고, 광야의 천막생활도 이제는 지쳤다. 그래서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행복했던 때로 기억하며, 값없이 먹던 생선과 각종과 과일과 양념식이 그리워했다. 이제는 그들의 쇠약해진 기력을 돋울 수 있는 고기와 보양식과 각종 양념식을 달라고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모세도 목자 생활을 못하겠다는 것이다. 자기가 난 자식도 아닌데 이들을 품고 기르며, 이제는 고기까지 내놓으라고 울고 앉아 있는 이들을 자기는 더 이상 이들을 혼자서 감당할 수 없다고 불평하며, 차라리 자기를 죽여 달라고 애원한다. 하나님의 이들에 대한 응답은 먼저 모세에게 동역자를 주시겠다는 것이었다.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장로들 칠십명을 택하여 회막에 따로 세우고, 여호와께서 자신이 직접 내려가서 모세와 말씀하시고, 모세에게 있는 영을 구별하여 그들 위에 두어 그들이 모세와 함께 짐을 지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기를 원 없이 주어 고기 냄새가 코에 넘쳐서 싫어할 때까지 한 달을 먹이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을 믿기가 힘들었다. 보행자만 60만 명이 되는 데 이들에게 소나 염소를 몇 마리를 잡은들 이들의 양이 차며, 얼마나 많은 물고기를 바다에서 잡아 모은들 이것으로 배부르게 하겠느냐고 반문한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하루 이틀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60만명을 두달이나 그것도 배불리 먹고 고기에 질려서 더 싫어할 때까지 먹인다는 것은 쉽게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나름대로 한계를 정해놓고 어디까지는 가능하나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이제 내 말이 네게 이루어지는지 아닌지 네가 보게 될 것이다.”(23)고 말씀하신다. 성경에서 “여호와의 손”이나 “여호와의 팔”은 다같이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하는 말이다.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라는 말은 수사적인 표현으로 “짧지 않다”는 반의적인 표현이다. 하나님은 천지창조의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다.모세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의 장로들 가운데 그가 아는 (야다, ), 곧 친분이 있는 자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이들을 불러 회막으로 불렀다. 이때 여호와께서 임하셔서 모세에게 임한 영을 구별하여 장로들에게도 주셨다. 모세에게 있는 영을 구별하여 장로들에게 주셨다는 말씀은 언뜻 이해가지 않는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아찰”() 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 말은 “남기다”(reserve), 혹은 사역형으로 “따로 떼어놓다”(set apart) 등의 의미를 가진 말이다. 대개의 영역본들은 “그 위에 있는 영을 조금 취하여”(take some of the Spirit that was on him, KJV, ESV, NET) 라고 번역하고 있고, NIV는 “그 위에 있는 성령의 능력을 조금 취하여”(He took some of the power of the Spirit that was on him)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까 여호와께서는 모세 위에 있는 성령을 조금 가져다가 장로들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자 영들이 그 위에 머물었다고 했다. 성령은 마치 성냥불을 하나 켜서 생일 케익 위에 세워놓은 여러 촛대에 불을 붙이는 것처럼 이리저리 옮겨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물질이 아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조금씩 떼어서 나눠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모세에게 주셨던 것과 똑같은 역할을 하는 성령을 70인 장로들에게도 주셨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이야기하심으로 백성들에게 그와 모세와 특별한 관계성을 과시하시며 모세를 그의 종으로 인치셨던 그와 똑같은 성령을 이들애게도 주심으로 이들이 모세와 똑 같은 영적 권위와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종이자 모세의 동역자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고 계신 것이다. 여호와의 영이 그들 위에 머물 때에 이들은 다같이 예언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이들이 어떻게 예언을 했는지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은 이들이 예언하는 것을 인지했고, 자신들도 자신들이 의도하지 않게 예언하고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명단에 오른 70명 가운데 엘닷과 메닷 두 사람은 회막에 나가지 않았는데도 예언을 했다. 여호수아는 이 사실을 알고, 이들이 예언하는 것을 금하라고 충언을 하지만 모세는 “여호와께서 그분의 영을 모든 백성에게 주셔서 모두 선지자 되게 하셨으면 좋겠다.”(29)고 말한다. 이 사실을 바꾸어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의 동역자로 선지자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 원망하는 백성들에게는 고기를 먹이는 조력자를 주셨다기 보다는 말씀을 가르치고, 말씀을 해석하고, 말씀을 순종하도록 훈련시키는 선지자를 주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400년 동안이나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한 사람들이다. 노예근성이 뼛속 깊이 박힌 자들이다. 종살이에서 해방 되어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신부가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신분이 변화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을 상황도 아닌데 만나는 못 먹겠고, 고기를 달라고 울고 원망하며(6), 이집트에서 각가지 보양식과 양념식을 먹고 뛰놀며 죄의 낙을 즐길 때(히 11:23-24)가 행복했다(18)고 말하는 이들을 볼 때, 이들은 자유의 가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땅에서 자유인으로서 자기 땅에서 자기 손으로 농사지어 자기 밥을 먹고 사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들에게는 노예근성을 뿌리 뽑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인생철학을 확립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법을 가르치고 훈련시킬 수 있는 선지자가 필요한 것이었다. 여기서 또한 주목되는 점은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입을 통하여 세상 만민이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가르쳐 세상을 구원할 선지자로 쓰시고자 하신 것이다(창 18:18-19). 그리하여 앞으로 광야에서 그의 백성을 가르치고 훈련시킬 선지자를 동역자로 주시는 것이다.둘째는 고기를 먹고 싶어 원망하고 울고 앉아 있는 백성들에게 메추라기를 고기로 주셨다. 바람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휘몰아와 이스라엘의 진영에 떨어트렸다. 지면 사방으로 하룻길 넓이, 그리고 두 규빗 높이로 쌓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메추라기를 잡아 온 사방에 널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불평하는 백성들을 치셨다. 33절에 “고기가 아직 그들의 잇새에 있어 씹히기도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 대하여 진노하시고, 그 백성을 매우 큰 재앙으로 치셨다.”고 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과 능력을 믿지 못하고 원망하는 백성들이었다. 먹을 것이 없는 것도 아닌데, 마치 굶어죽을 것처럼 하나님을 원망하니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항상 현재 내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에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한다. 왜 저 사람에게는 주시고, 나에게는 안 주십니까? 저 사람에게는 이것을 주시고 나에게는 저것을 왜 안 주십니까? 하고 대들면 우선 내 마음에 평안이 없다. 하나님의 진노만 자아내게 하는 짓이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원망하는 것은 재앙을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첫째도 감사, 둘쩨도 감사, 셋째도 감사해야 한다. 감사하지 못하면 망하는 길 밖에 없다. 아무리 감사할 수 없을지라도 감사해야 한다. 감사할 수 없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께 주신 만나 대신 고기를 달라고 울부짖고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망하게 된 이곳을 “기브롯 하타와”라고 명명했다. 앞에서는 “다베라” (여호와 불이 그들을 태웠다)라고 했는데 이곳에서는 기브롯 핫타와라고 불렀다. 히브리어 “기브롯 핫타와” ()라는 말은 장사지내다는 의미의 “카발”()과 “욕망하다, 바라다”는 의미의 “타아바”()에서 만든 합성어로 “사람들이 (이집트의 고기)를 그리워 하던 사람들의 묘지”(the place that people craved the meat, the longing for the meat of Egypt)라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되었다. 이제 거룩한 양식을 먹고 거룩한 백성답게 살아야 할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집트를 그리워하고, 이집트에서 값없이 먹고 마셨던 이집트의 음식이 그리워 울고 원망하고 있다. 이들의 종말은 멸망이었다. 기브롯 핫다와는 바로 이같이 배은망덕하게 과거의 죄를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타락한 인간들의 종말을 기억하게 하는 공동묘지이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고 탐욕에 사로잡혀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징벌을 받고 망한 자들의 무덤이라는 의미이다. 기브롯 핫타와는 “탐욕의 무덤” “욕망의 매장지”라는 뜻이다. 우리는 항상 스스로 탐욕의 무덤을 파고 있는지 자신을 살펴봐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3-22
  • 해설 / 한기총, 대체 무엇을 하고 있나?
    법·절차·원칙 무시된 채 극보수적 행태로 변질 절차와 원칙 무시, 허수아비 된 임원회 한기총은 전광훈 목사의 대표회장 취임 직후 회의체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모든 사업을 임원회가 계획하고, 추인하며, 이를 추진했던 것과 달리, 지금은 전 목사가 계획하고, 추진하며, 임원회에는 이를 요식행위로 보고할 뿐이다. 하지만 그 요식행위마저도 과정과 절차를 완전히 무시한 모습이다. 전광훈 목사는 한기총 대표회장 취임 이후, 한기총의 이름을 내걸고 벌써부터 다양한 사업과 행사들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중에 임원회의 제대로 된 허락을 거쳐 이뤄지는 경우가 많지가 않다. 대부분이 이미 추진을 해놓고, 임원회에 허락을 구할 뿐이다. 일례로, 이승만 대학 발기인대회 같은 경우는 임원회의 허락 없이 날짜와 시간을 다 정해놓고, 한기총 이름으로 일간지에 전면 광고까지 냈다. 임원회가 이를 허락한 것은 행사 시작 2시간 전이었다. 그야말로 요식행위 중의 요식행위였다. 얼마 전 개최한 ‘성령세례 심포지엄’ 같은 경우는 한기총의 이름으로 행사를 개최하면서, 후원은 한기총과 전혀 관련 없는 단체에서 거둬들였다. 후원계좌에 이름을 올린 조직은 ‘대한민국바로세우기국민운동본부’로, 한기총의 회원 단체가 아니다. 전광훈 목사가 총재로 있는 정치 사(私)단체일 뿐이다. 전광훈 목사는 한기총의 이름을 앞세워 한국교회 전체에 행사를 광고하고, 그 후원은 자신이 총재로 있는 단체로 거둬들였다. 자신이 아무리 대표회장이라 하더라도 사사로이 한기총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이는 불법 중의 불법이다. 하지만 이를 지적하는 임원이 단 한명도 없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정의가 온데간데 없는 것이다. 창립정신 망각하고, 본격 세속정치 개입 전광훈 목사의 한기총 입성을 두고, 나온 가장 먼저 나온 추측은 전 목사가 자신의 기독자유당을 위해 한기총을 내년 총선에 이용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이미 선거 과정에서 여러 정치적 발언을 통해 기독당의 필요성을 수차례나 강조해 온 전 목사는 한기총이 기독당의 산하기관이라는 발언까지 하며, 우려에 불을 지폈다. 대표회장에 당선이 된 후에는 더욱 거침없이 정치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다. 한기총을 자신의 정치색과 동일하게 극단적인 보수 단체로 몰아넣는가 하면, 지난 삼일절 집회는 교계 연합 기도회를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단독 보수 집회를 진행했다. 무려 ‘문재인 탄핵집회’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한기총은 정관 전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국교회에 주신 사명에 충실하기 위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면서 연합과 일치를 이루어 교회 본연의 사명을 다하는데 일체가 될 것을 다짐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한기총은 이런 정관의 창립 정신을 무시하고, 완전히 한쪽으로 기울었다. 반대로 자기 진영 밖을 향해서는 온갖 막말과 저주를 퍼붓고 있다. 그게 서로를 사랑하라고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한기총의 오늘날 현실이다. 여기에 기독자유당과의 MOU는 그야말로 정점을 찍은 사건이다. 한기총을 대놓고 내년 총선에서의 기독교 전초기지로 삼겠다는 의도가 명백히 보이는 부분이다. 한기총은 정치적으로 철저히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국민을 위해 협력하고, 함께 의논할 수 있는 중심 종교로서이 책임을 위한 당연한 조치다. 기독자유당과의 MOU는 한기총의 역사상 최대의 오점이 될 것이 분명하다. 이단 해제, 교계 인정 받기 어려워 변승우 목사(사랑하는교회)의 이단해제를 두고 교계가 시끄럽다. 변 목사의 이단성에 대한 논란이다. 하지만 이단성 못지않게 이단해제의 과정은 실로 심각했다. 이미 전광훈 목사가 변승우 목사가 이단이 아니라고 수차례 공언한 상황에서 이대위는 그저 정당성을 위한 의례적인 절차만 밟았다. 제대로 된 이단검증이 이뤄질 리 만무했다. 그 와중에 한기총에서 사이비로 규정한 인사를 이대위원으로 선임해 일을 진행키도 했다. 그야말로 경악에 가까운 일이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문제의 이대위원을 포함해 이대위원장, 서기가 이단 해제 과정에 문제를 제기하며, 사퇴를 선언한 이후다. 사실상 이대위가 변 목사에 대한 이단 해제를 거부하고 나서자, 전 목사는 문제의 이대위원에 대해 이단성이 있다며, 이를 한기총 차원에서 제대로 다룰 것이라고 말했다. 보복성이 다분한 이단정죄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후 새롭게 급조한 이대위를 통해 또다시 이틀만에 변 목사에 대한 이단성 없음을 발표했는데, 문제는 새롭게 들어선 이대위원장인 오재조 목사다. 오재조 목사는 과거 미국 유니온 대학 전 총장으로 근무하며, 학위 장사, 비자 사기 등의 혐의로 12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전력이 있는 인물이다. 또한 변 목사가 속한 예장 부흥총회에 대한 실사가 제대로 이뤄졌는지도 의문이다. 실사위에 부흥총회는 자신의 교단이 213개라고 밝힌 바 있다. 한기총의 가입 기준은 200개 교회 이상이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부흥총회는 총회 홈페이지의 교단현황을 124개 교회로 표기해 왔다. 이 수치는 한기총 가입이 통과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오다, 최근에야 그 숫자가 바뀌었다. 124개의 교회가 213개로 늘어난 것은 콩고와 브룬디를 추가하면서다. 홈페이지에는 콩고에 사랑하는교회 30개, 브룬디에 사랑하는교회 59개가 있다고 밝히며, 교회 번호는 취합중에 있다고 명시했다. 직접 실사가 원칙인 실사위원회가 교회 번호 조차 취합이 안된 해외 교회를 놓고, 어떠한 확인을 거쳤는지 반드시 검증이 필요해 보이는 부분이다. 한기총의 이단 검증은 교단이 아닌 연합단체라는 점에서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그간의 전력에 비췄을 때 한기총의 이단 해제가 교계에서 인정되기 매우 어려웠었다. 그런 상황에서 절차와 과정까지 완전히 무시된 채 사사로운 이단검증을 했다는 것은 교계에서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며, 인정도 받지 못한다. 애초에 논란꺼리를 만들어 놓고, 한국교회에 이를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우격다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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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22
  • 학술/ 3.1절과 한국교회의 과제
    본고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지난 3월 8일 상동감리교회에서 개최한 3월 월례회 중 민경배 교수가 발제한 ‘3.1운동과 한국기독교회’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민 경 배 교수(백석대학교 석좌교수)3.1독립운동과 한국교회 참여 정도3.1독립운동 당시 한국인은 총 1,700만명인데 기독교인 수는 26만명, 전체의 1.5%정도였다. 2016년 통계청에 의하면 현재는 기독교인구가 30%이다. 한데 당시 총독부 공식 발표에 따르면 시위 참여인원이 2백만명, 사상자가 23만4천명, 피살자 7천5백명, 불탄 교회 47동 민가 715채였다. 기소자는 전체에서 기독교인이 25%, 입감자는 기독교인이 1,967명 곧 전체의 15%인데 그중 여자가 176명으로 9%에 이르고 있었다. 기독교입감자 중 여자가 10/1에 이르고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여자 입감자가 3%에 이르고 있었다.지난 2019.02.21 [조선일보]에 따르면 국내외에 참가자 103만명이 시위에 참가했으며, 일제의 탄압으로 최다 934명이 숨진 것으로 집계됐다.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가 20일 공개한 '3·1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당시 시위 참가 인원은 최소 80만~최다 103만명, 사망자 최소 725~최다 934명에 이르렀다. 일제의 기존 자료에 기록된 시위 참여자 58만명, 사망자 553명보다 최고 1.7배 높은 수치다.3.1독립운동의 기독교성3.1독립운동 당시 전국에 격문이나 붙었다. <매일 3시 기도하고 주일엔 금식하고 한주 내내 성경을 계속 읽으라.> 그런데 성경은 월요일&#8211;토요일 매일 성경 어디를 읽으라는 글이 들어 있었다. 가령 월요일은 이사야 10장 화요일은 예레미아 12장이었다. 이 위대한 성경적 신앙이 3.1독립운동의 근원적 생명이요 그 동력이었다. 3.1독립선언서 작성자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는 기독교적 입장에서 씌워진 것이라고 천명한 바가 있다. <군국주의 통제>에 대한 대결로서의 민주주의적 이념은 복음과는 결코 떠날 수 없는 가치였다. 더구나 일제는 만세를 외치는 군중들이 <거의 종교적 열광으로 필사적 태도로 하였으며 그것은 기독교의 순교적 열광을 연상케> 한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3.1독립운동은 기독교 역사로 체계화되고 있었다. 당시 일본 신문을 보면 일제 진압자들은 어디가나 교회와 기독교인을 중점적으로 검거하고 교회를 불태우고 있었다.가령 <미야꼬신문> 3월 8일자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난다. 곧 불량 선인의 소굴이라 일컬어지는 평안남도에서 1일 오후 1시부터 평양 기독교, 교회당과 학교에 약 2천명이 집합하여 손에 구 한국기를 휘날리며 독립만세를 부르짖고, 진남포 안주에서도 수백의 기독교도 집합하여 독립선언서를 살포.> 대개 이런 기사다. 기독교가 3.1독립운동 중심에 서 있었다.3.1 운동의 세계사적 의미3.1독립운동은 세계 역사의 조류에 올라 선 거대 운동이었다. 세계 제1차대전의 회생으로 전취한 민주주의, 자유, 인권, 민족국가, 이런 가치들이 일제의 프러시아 군국주의에 의해 한국에서 다시 소생되고 있다는 의식이 한국이나 세계에 편만하고 있었다. 참담하였다.<독립선언서>의 핵심 주창도 세계사적이었다. 곧 정의, 인도, 인류적 양심의 발로, 세계개조의 대기운, 시대의 대세, 전인류 공존공생권, 인류 통성과 시대양심, 세계평화, 인류행복, 인류역사, 세계기운 이런 말들로 빽빽하다.한국기독교인의 세계의식한국교회는 그 태생기부터 세계성을 가지고 있었다. 1892년 <찬송가>에는 만왕, 만국, <끄릴난 어름산과 인도 산호섬과 아프릭 더운 내에 금모래 깔린 곳 강과 산과 넓은 들>, 이런 글들이 쌓여 있었다. 1906년 존 무어 선교사는 한국이 구원의 횃불을 드는 날 세계문제가 해결되되 제대로 해결되고 만국을 구원할 수 있다고 예언하고 있었다. 1907년 독노회(獨老會)가 조직되었을 때에는 그 해가 정미조약으로 나라가 망하고 있었는데도 만국기를 게양하고 있었다. 세계를 생각하고 있었다.3.1독립운동과 도덕적 개혁일제는 합병 하자마자 한국인의 정신과 신체를 체계적으로 해체할 악덕한 시책을 펴고 있었다. 한국 인종의 멸절정책이다. 그래서 주초(酒草)를 장려하여 주초세 수입이 전체 조세 수입의 48%까지 육박하던 때가 있었을 형편이었다, 길선주 목사는 주초 반대하는 설교를 하였다가 주초법에 걸려 징역을 산 적이 있다. 공창 유곽(遊廓)은 합병직후 부터 50만불의 국비로 건설하고 있었으며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던 선천에도 유곽이 들어서고 있섰다. 아편은 총독부가 예산 투입하여 재배하고 국가기관 전매청에서 팔고 있었다. 행상인도 팔았다. 필자의 초등학교 담임 중 한국인 두 분이 다 아편 중독자였다.3.1독립운동 이후 새로 부임한 사이또(齊藤實) 총독이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을 불러 독립운동 이후의 한국선정 방향을 물었을 때 가장 중요하게 개혁을 요구한 것이 도덕적 패악이었다. 역사의 미래에 대한 계시록조선총독부와 미국 NCC의 묘한 공통 인식이 하나 있었다. <지금 한국에 그 민족의 장래에 대하여 희망을 포기하고 있지 아니한 유일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기독교인들이다.> 만주의 포조 신한촌의 <독립선언서> 에도 그런 희망이 비취고 있었다. <지금 혹 힘들어도 우리의 자손들은 독립을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3.1독립선언서>에 나타난 희망의 가락은 역사의 미래에 대한 눈부신 불길 그 봉화대다. <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는구나 새 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 위에 던지기 시작하는 구나 새봄이 온 누리에 찾아 들어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는구나.>1920년 남궁억은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이란 찬송가를 부른다. 한데 그는 <기러기>란 노래를 짓는다. 짝 잃고 멀리 벽공(碧空)에 날아가는 기러기가 나라 잃은 우리 같았다. 한데 3절은 희망의 북소리 요란하다. <곡간 없이 나는 새도 기를 자 뉜가 하늘 위에 한분 계서 네길 인도하신다. 너 낙심치 말고 목적지 가라 엄동 후엔 난풍(暖風)이요 고생 후엔 낙이라!> 당시 새문안 교회의 홍난파와 김형준이 <봉선화>를 지어 온 겨레가 소리 높이 목쉬도록 불렀다. 가울 바람에 처량하게 시든 봉선화 같은 우리지만 그러나 3절에는 화산이 터지는 듯하다. <엄동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회생키를 바라노라!> 3.1독립운동에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었지만 삼천리강산 도처에 활화산처럼 미래 희망과 약속이 하늘가에 무지개치고 있었다. 교회가 민족 그 미래의 계시록이었다. 그런 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교회의 갑작스런 발전과 부흥이었다. 기독교 학교 학생수는 전년 비 90%가 증원하고 있었으며 교회교인은 3배가 늘어난 곳이 있었다. 3.1운동 역사 보존의 역학 출애굽기 10:2에는 역사를 보아야 우리가 여호와의 증거를 볼 수 있다는 글이 나온다. 모세 고별사에 <옛날을 기억하가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란 글이 새벽이슬 같이 맑게 빛나고 있다. 기록은 신앙이다. 일본 안의 언론도 통제를 받아 3.1독립운동에 관하여 3월 7일에 가서야 보도를 시작한다. 한국 안에는 일간지 자체가 없었고, 주간지는 선교사들 것까지도 일언반구 보도가 없었다. 박은식, 김병조, 신흥우, 정한경 등이 있었으나 좀 이후의 일이고 또 비분감개로 조리가 흩으려져 있다. 한데 가장 신뢰할 만한 대담한 보고가 문서화 한 곳이 있다. 1919년과 1920년 10월 소집된 장로교제 8회와 9회 총회록, 그리고 거기 부록으로 실린 노화상황보고서들이다. 더구나 1919.10.4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회 총회록은 골리앗 앞에 나선 다윗 같았다. <장로교총회는 개회벽두에 당시 총회장이던 김선두 목사가 본년 3월 1일에 조선독립운동 사건으로 경성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어 본회로 보낸 편지를 서기가 낭독함에 회중이 슬픈 마음으로 받고 회장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한 일>을 인쇄한다. 이는 교회가 공식적으로 3.1독립운동 사건을 공문화한 문서로 기념되어야할 자료이다. 그러고 나서 각 노회 상황보고인데 예언자적 품위와 용기가 거기 불 타 빛나고 있다. 전국 12개 노회가 전부 <조선독립만세사건>에 대한 피해 상황 통계를 자세하게 보고하고 있다. 더구나 <독립>이란 말을 못 쓰게 되어 있었는데도 교회는 오히려 보란 듯 그 말을 반복 단연 쓰고 있었다. 당시 3.1운동에 대한 보도나 피해상황에 대해 이처럼 대대적으로 공개한 곳은 교회가 유일하였다. 정의 진리의 봉화대가 여기 있었다. 그런 것이 세계사의 실록이 된 것이다.3.1독립운동에서의 한국교회 역할3.1독립운동은 한국교회와 떨어져 이해할 수 없는 교회 주도의 전 민족 궐기의 운동이었다. 전국적 조직이 있었기 때문인데 교회는 이런 사회적 역할에서 주도적 사명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국제관계의 네트워크때문에 세계사의 흐름과 세계와의 결속이 가능하여 독립운동의 세계사적 동력 동원이 가능하였고 그런 의미를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치나 사회에서의 도덕성은 아주 긴요한 중추적 가치이다. 한데 일제는 한국에서 주초나 유곽 아편을 국가가 운영 판매하고 있었다. 도덕적 범죄를 총독부가 나셔서 자행하는 무도패륜의 길을 짐짓 걸어갔다. 3.1독립운동은 교회가 이런 국가적 차원의 부패 배륜정책을 고발 개혁하는 운동이었다.
    • 해설/기획
    • 학술
    2019-03-21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12
    2018년 추수감사절이다. 농사짓고 열매를 거두어 하나님께 드리고 감사하는 날이다. 우리 인생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햇볕과 비를 주시고, 모든 농작물이 자라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농사 안 짓는 사람도 그가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감사해야 한다. 아무리 돈이 많고 금은보화를 쌓아 놓아도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내리지 않으시면 이런 보화는 다 무용지물이다. 한국 사람들은 매년 수 없이 많은 농산물을 외국에서 수입해 먹는다. 수입해서라도 먹고 살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며, 영혼의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많이 하지만 추수감사절에는 특별히 우리에게 이 몸을 주시고, 이 몸을 위한 육신의 양식을 주시며, 우리의 몸을 항상 돌보시고,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며 살게 하신 하나님께 특별히 감사하는 축제이다. 오늘 성경 본문은 “여호와께 감사하여라. 그 분은 선하시며 그분의 인애가 영원하시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말하며,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감사하라는 권면의 제창으로 이어진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 이스라엘의 구원, 그리고 모든 육체에게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이란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생명을 죽이는 것은 악이고, 생명을 살리는 것이 선이라는 것이 일관된 성경의 가르침이다. 또한 인자란 하나님의 변함없는 꾸준한 사랑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인간은 변하고, 배반하고, 뒤돌아서지만 하나님은 그의 사랑이 변함없으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목숨을 내놓고 맹세하고 언약을 맺어도 뒤 돌아서면 마음이 변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다. 중간에 그만 두는 것이 없다. 한번 사랑하면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굴곡이 없다. 사랑의 강도가 변함이 없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지고, 더 높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랑했다가 미워했다가 오락가락하는 사랑이 아니다. 꾸준히 변함없는 사랑을 의미한다. 상대방의 상태에 따라 그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좌우되는 사랑이 아니라 상대방이 나를 멀리 할수록 더 적극적이고 더 진실되게 다가가는 사랑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해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그들을 기다리시고, 더 가까이 다가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들은 “헤세드”라는 말로 표현했다. 잠시 후면 유다가 자신을 배반하여 팔 줄을 줄 뻔히 아시지만 예수께서는 그의 살을 떼어 그의 입에 넣어주시는 사랑,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바로 “헤세드”이다. 십자가를 지기 전 자기를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를 찾아가 생선을 구워 조반을 먹이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인애,” 곧 “헤세드”이다. 추수감사절이 우리의 영혼의 구원을 감사하는 절기라기보다는 우리 육신의 필요을 충만하게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보살핌과 사랑을 특별히 감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무엇보다 먼자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시고, 오늘도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통 죽음의 지뢰밭이다. 한번 헛발을 디뎠다가는 영원히 헤어 나올 수 없는 멸망의 구덩이가 여기저기 수없이 널려 있다. 시편 57:4에 보면 “이 생명이 사자들 가운데 있으며, 사람이 불사르는 자 중에 내가 누웠으니, 그들의 이는 창과 살이고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다.”고 말한다. 우리의 인생은 높이 달린 외줄을 타는 곡예사 같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눈먼 강아지와 같은 것이 인생이다. 날이면 날마다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비참하게 죽은 인생들을 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이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도 기적이지만 그가 희생자라는 것도 기적이다. 왜 하필이면 너였냐?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이 내 생명을 지켜 주시지 않으면 내가 존재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내가 언제 어디로 떨어질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의 주 되신 하나님께서 나의 발걸음을 지켜 주시고, 오늘도 생명을 누리고 살게 해주신 것을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직도 이 생명을 거두지 않으시고 붙여주셔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을 보고 즐기며 살고 있음을 감사해야 한다.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한 말처럼 우리를 그의 “생명 보자기”에 싸서 보호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삼상 25:29).둘째로 우리는 먹을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먹어야 산다. 히나님께서는 우리가 먹어야 살도록 만드셨다. 그래서 사람은 먹기 위해서 일하고 먹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사람은 영의 양식도 먹어야 하고, 육의 양식도 먹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분리할 수 없다. 분리하는 날에는 죽는 날이다. 그러나 추수 감사절은 우리에게 육신의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산상 수훈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면서 걱정하지 마라”고 가르치시고 어디에 누울 것인가 걱정하디 마라(마 6:25-31)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보다 더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고 공급해주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와 같으신 하나님의 이 사랑을 감사해야 한다. 나와 같은 쓸모없는 인간에게도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주시고, 잠자리를 주신 하나님을 우리는 매일 기본적으로 감사하고 살아야 한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할 것이 아니고 이미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계속 주실 것을 바라고 간구해야 한다.셋째는 유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유업은 자식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신을 만드시고 가정을 주셨다. 그래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복을 주셨다. 자식을 낳고 기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보통 자식을 육신의 열매라고 말한다. 사람은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많이 낳아야 한다. 그것이 인생을 사는 열매이다. 자식은 이 한 몸이 이 땅에서 살고 간 흔적이고 남길 유산이다. 그래서 자식을 얻는 것이 모든 인생이 이 땅에 와서 사는 도리이다. 자식을 갖더라도 많이 가지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시편 127편은 자식들을 전통의 화살에 비유하며, 전통에 화살이 가득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한다.자식들은 여호와의 주신 유업이라고 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물려주신 유산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자이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우리의 이 모든 육신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고, 우리는 이것을 자식들에게 대물림하는 것이다. 태의 열매는 하나님의 상급이라고 했는데, 상급이라고 번역하는 히브리어 “샤칼”이라는 말은 “상급” 이나 “보상”이라는 말도 있지만 “임금”(wage) 혹은 “삯”이라는 말도 있다. 자식은 다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생명이다. 하나님께서 어머니의 태속에 그의 생명의 씨를 심으시고, 그 생명을 자라게 하시며, 그 생명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낳고 기르라고 맡기셨다. 그래서 우리가 자식을 낳고 기르는 가운데 수고하고 땀 흘려 양육한 그 대가로 하나님께서 그 자식을 우리에게 보상, 상급, 혹은 임금으로 주셨다는 것이다. 그들은 장성했을 때 성문에서 힘있는 목소리를 낼 것이고, 전쟁에 나가서도 용사가 될 것이다. 그래서 자식을 용사의 화살통에 담긴 화살로 비유하고 있다. 그 화살은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추수 감사절은 특별히 우리에게 생명과 양식과 자식을 주신 하나님, 다시 말하면 영혼 보다는 육신의 필요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는 날이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햇볕과 비를 주시어 먹고 마실 것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가정을 세워 자식을 낳아 유업을 남길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이것을 기본적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가 없는 인간은 병든 인간이다. 할 수 있다면 뭐든지 감사합해야 한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부모님께 감사하고, 자식들에게 감사하고, 선생님이나 친구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래서 온통 감사가 넘치는 인생을 사는 것이다. 감사를 입에 달고 살아야 한다. 감사할 수 없는 것을 감사하고, 감사할 수 없을 때 감사하는 것이 감사이다. 우리에게는 감사할 대상이 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인애가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3-08
  • 학술/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한국교회의 입장 (2)
    본고는 지난 2월 7일 서울 영동교회에서 열린 한복협 2월 월례회에서 이상원 교수가 발제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한국교회의 입장 신학적 관점에서’ 중 일부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지난 호에 이어 2회차이다. -편집자 주 I. 윤리적 배경: 후현대주의적 상황윤리동성애자들은 성정체성과 관련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이성애적 성향을 타고난 사람들도 있지만 동성애적 성향을 타고난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동성애자들은 세 영역에서 연구를 수행 또는 위탁한 후에 결과물을 가지고 동성애는 유전자, 뇌의 구조, 호르몬에 의하여 선천적으로 결정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알려진 과학적 연구들은 모두 재현에 실패했든지, 통계조작임이 드러났든지, 아니면 해석을 잘못 했음이 다 드러나서 지금은 이런 주장을 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만일 유전자에 동성애적 성향이 내재해 있다면 일란성 쌍둥이의 경우에 한 쪽이 동성애자이면 다른 쪽도 100% 동성애자라야 하는데, 실제 일치율은 20% 이내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동성애를 유발한다고 알려진 유전자 X28은 실제로는 동성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유전자임이 밝혀졌습니다. 동성애자의 뇌의 시상하부와 이성애자의 뇌의 시상하부의 크기가 다르다는 점이 동성애의 선천성의 근거로 제시되었으나 시상하부는 동성애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남성 동성애자의 경우에 여성 호르몬이 많이 분비되고 여성 동성애자의 경우에 남성 호르몬이 많이 분비된다는 주장이 제시되었으나 호르몬은 성정체성의 결정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동성애자들은 또한 동성애가 죄라는 비판을 피해 가기 위하여 동성애를 비판하고 있는 성경구절들을 아전인수격으로 재해석하여 성경은 동성애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거나 동성애를 용인한다는 주장을 전개했습니다. 이들은 동성애를 금지하고 있는 레위기18장22절을 신약시대에는 문자적으로 적용되지 않는 의식법에 속한 규정이라고 해석하거나 일반적인 동성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전 안에서 행해지는 이방신숭배절차 가운데 하나를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의식법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 적용되는 도덕법으로 보아야 합니다. 구약시대에 의식법을 범한 경우에는 며칠 동안 격리하는 정도의 처벌을 받았으나 도덕법을 범한 죄에 대해서는 형사 처벌을 받았던 반면에 동성애를 범한 죄는 사형의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또한 동성애자들은 로마서1장26절과 27절에 있는 순리와 역리는 특정한 사회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인류 보편의 죄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로마서1장에서 3장의 문맥에서는 순리는 이성애를, 역리는 동성애를 가리키는 것이 자연스러운 해석입니다. 또한 동성애자들은 동성애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본문인 고린도전서6장9절에 있는 “남색하는 자”를 남성창부로, “탐색하는 자”를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로 해석하고 있으나, 전자는 남성 동성애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자, 후자는 수동적인 역할을 하는 자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바른 해석입니다. 성정체성을 인간의 주관적인 의식에 따라서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응하여 교회는 성정체성은 인간이 자의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질서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인간을 남자 아니면 여자로 결정했으며, 하나님이 정하신 이 질서는 인간이 자의적으로 바꿀 수 없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강조해야 합니다. 이 창조질서에 근거하여 성관계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그리고 결혼관계 안에서만 합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임을 지속적으로 강조함과 동시에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규범을 거스르는 심각한 죄임을 지속적으로 강조해야 합니다. 특히 소돔과 고모라 사건이 명확히 보여 주는 것처럼 동성애는 공동체의 존망을 결정하는 죄임을 강조해야 합니다. 동성애가 편만한 나라는 하나님의 분노를 사게 되고 망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함과 동시에 특히 동성애를 어정쩡하게 허용하는 교회는 해체된다는 점을 주지시켜야 합니다. II. 신학적 배경: 퀴어 신학 퀴어 신학은 신학방법론에 있어서 슐라이에르마허에게서 시작된 자유주의신학의 전통을 그대로 채용하고 있는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유주의신학의 한 분파가 퀴어 신학입니다. 퀴어 신학은 어떤 점에서 자유주의신학의 방법론을 채용했는가? 칸트의 비판철학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가 말하는 초월적인 주제들 – 영생, 하나님, 심판, 부활, 내세 –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난감한 청중을 맞이한 19세기 말의 신학자들은 두 가지 길 앞에 서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하나의 길은 초월적인 주제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청중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설득하여 초월적 주제들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길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이 방법은 너무나 힘들게 느껴졌고 낡은 방식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다른 하나의 길은 현대인의 논리와 감성에 맞추어 전통적인 교리들과 성경의 내용들을 재해석하고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초월”에 있었기 때문에 이 길은 결국 전통적 교리들과 성경의 내용들로부터 초월적인 것들을 모두 삭제하든지 세계내재적인 주제들도 다 바꾸어 버림으로써 현대인들이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 신학자들은 첫 번째 길을 버리고 두 번째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처럼 현대인의 기호에 맞추어서 자유롭게 교리와 성경을 바꾼다는 의미에서 이들의 신학을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부릅니다. 슐라이에르마허가 물꼬를 튼 이후에 슐라이에르마허를 포함하여 스트라우스, 리츨, 트로엘취 등의 구자유주의자들, 바르트, 불트만, 틸리히, 라인홀드 니버 등의 신정통주의자들, 본회퍼, 로빈슨, 하비 콕스, 몰트만, 해방신학, 여성신학 등의 신자유주의, 오그덴 등의 과정신학과 같은 다양한 학파들은 서로서로 특징의 차이는 있지만 슐라이에르마허가 채택한 방법론을 따른 학파들입니다. 퀴어 신학도 이 방법론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퀴어 신학은 신마르크스주의와 후현대주의적 상황윤리의 영향을 받아 동성애를 정당화하는 새로운 성윤리를 주장하는 새로운 시대사조에 아부하면서 이들의 기호를 신학적으로 맞추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퀴어라는 말은 낯설다는 뜻입니다. 퀴어 신학자들은 전통적인 신학적 주제들이 사람들이 보기에 낯선 면모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예컨대 성관계도 갖지 않았는데, 아기가 태어난다든지(동정녀 탄생), 여호수아가 명령하자 해가 중천에 머무른다든지,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다든지, 죽은 몸이 부활한다든지 – 하는 등등의 교리들이 모두 평범한 상식을 가진 일반인들의 눈에는 낯설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통신학자들의 눈에 낯설게 보이는 동성애도 “낯설음”이라는 공통된 특징이 있으므로 정통신학의 당당한 주제들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퀴어 신학에 대하여 교회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퀴어 신학은 교회가 용인할 수 있는 다양한 신학 분과들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퀴어 신학은 성경과 교리에 대하여 다른 어떤 이단보다도 더 파괴적인 해석을 자행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구속사건을 외설적으로 왜곡하여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사실상 성령 훼방죄를 범하는 신성모독적인 신학입니다. 교회는 퀴어 신학을 단호하게 비판해야 하며, 이에 대응하여 정통신학을 선명하게 천명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마리아가 남자와 성관계를 갖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기적적인 작용에 의하여 성관계를 가진 것과 똑같은 과정을 거쳐서 남자아기를 출산한 사건으로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상처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셨다는 죽음의 증거일 뿐, 여성의 성기가 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썩지 않는 새 몸이지만 성정체성이 반대의 성으로 변하는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신자가 세례 – 성령세례 - 를 받을 때 속사람이 거듭나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지 성정체성이 바뀌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성찬 시에 성정체성이 유동적인 된 예수님의 몸과 연합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떡을 떼고 잔을 마실 때 영으로 임재하시는 예수님과 연합되는 것입니다. 현재 문재인 정부의 주도 하에 진행되고 있는 동성애 합법화 운동은 특히 복음주의 전통의 교회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게 될 것입니다. 이미 이 운동은 자라나는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을 세뇌시키기 시작함으로써 전도와 바른 윤리교육에 심각한 장애가 되기 시작하고 있으며, 이 운동이 성공하는 경우 교회에서 동성애를 비판하는 설교를 할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며, 동성애자를 목사로 임직시키거나 직분자로 임명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때가 올 것입니다. 이미 한국 대학교나 중고등학교에서는 동성애비판을 사실상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운동이 성공을 거두면 그것으로 이 운동이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운동은 바로 타종교혐오금지법으로 연결되어 교회의 전도와 선교를 법으로 금지시키는 단계로 옮겨 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 단계에서 교회들이 연합하여 사력을 다하여 동성애 합법화 저지 운동에 나서야 하는 이유입니다.
    • 해설/기획
    • 학술
    2019-03-07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11
    광야에서의 천국잔치가 끝나고 예수께 더 이상 기대할 것을 없음을 알게 된 무리가 다 물러간 후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가려느냐?”고 물었을 때, 베드로는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주님은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는 주께서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알았습니다.”(요 6:68-69)라고 대답한다. 요한복음 6장의 71절이나 되는 긴 성경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한 말씀이 바로 베드로의 예수님께 대한 대답이자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 예수께서 주신 식사를 마친 이들은 이미 자리를 뜬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 예수께서는 힘들게 그를 찾아온 이 무리를 향하여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을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고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26)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이 무리들이 표적을 보고 왔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된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빵을 먹은 것이 무엇에 대한 표적인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천지 창조의 하나님이시오,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사람”, 곧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표적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온 목적이 육신의 빵보다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찾아 왔어야 옳다. 그러나 그들은 빵을 먹고 배가 불러서 온 것이다. 말하자면 빵을 기대하고 수고하여 찾아 온 것이다. 예수께서 이들에게 하신 말씀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는 것이었다. 본문은 바로 영생에 이르는 양식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다.본문에 나타난 예수님 말씀의 Key Word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살리신다는 것이고, 살려서 영원한 생명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40절에 보면 “내 아버지의 뜻이 과연 이것이니,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거꾸로 말하면 현재 모든 인간은 죽어 있고, 또한 영원히 살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33).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들을 살리고, 영생을 주어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겠다는 것이다 (44).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완전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56).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이 지금은 비록 그의 육신은 살아 있지만 영혼은 죽어 있어서 영원한 생명이 없는 존재이나 하나님께서 우리 죽은 인간들을 살려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신비하고 온전한 관계를 살리고 회복하고자 하시는 것이다(15:4-5; 21-22). 그래서 “생명” “영생‘이라는 말이 계속 거듭되고 있다.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이루시는가? 그의 아들을 하나님의 빵, 곧 생명의 빵으로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이것이니, 그분께서 내게 주신 자 가운데서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것이다.”(39)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육신과 영혼을 가진 존재로 만드셨다. 따라서 사람이 살려면 육신의 양식도 먹어야 하고, 영혼의 양식도 먹어야 한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죽음의 열매를 따먹었다. 그리하여 그 영혼이 생명을 잃고 하나님을 떠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사탄이 준 죽음의 열매를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빵” 곧 생명의 양식을 먹이시려고 그의 야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본문에 예수께서는 이 하나님의 빵을 다양한 언어로 지칭하신다.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는 양식”(27), “참 빵”(32), “하나님의 빵”(33, 48), “생명의 빵(36), ”하늘에서 내려온 빵“(41, 50, 58) 등으로 일컬으신다. 이 하나님의 양식은 사람이 영생에 이르도록 남게 할 것이다(27). 세상에 생명을 줄 것이다(33). 굶주리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게 할 것이다(35). 먹는 자는 죽지 않는다(40). 영원히 살 것이다(51, 58). 먹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 것이다(54) 등으로 칭한다.그렇다면 이 하늘의 빵을 어떻게 사람들은 구할 수 있을까? 유대인들의 생각은 간단하다. 그들은 출애굽 이후 광야 생활을 하던 때에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여주었던 모세를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만일에 예수께서 그들의 왕이 된다면 그들에게 유익되는 일에 대한 갖가지 상상을 했을 것이다. 우선 그들이 이미 체험한 바와 같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일하지 않고도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숨바꼭질을 하듯이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이다. 이러한 무리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여라.”(27)고 말씀하신다. 헬라어 성경에는 “썩는 양식”이라는 표현보다는 “την βρω~σιν τη`ν α’πολλυμε、νην”이라는 말은 다음에 이어지는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있는 양식”이라는 대구로서 “없어지다”(perish) 혹은 “사라지다”(disappear)는 의미로 “없어질 양식” 곧 영생하지 못하고 잠간 있다가 사라지게 하는 양식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말씀을 음미해보면 분명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양식이 있다. 썩어 없어질 육신의 양식이 있고, 영생하도록 남아 있을 영혼의 양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를 잡아 왕을 삼으려는 이 무리들은 분명 썩을 육신의 양식을 구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을 구하기 위하여 이렇게 머리를 쓰고 뛰어다니며 일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육신의 양식 이외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영생하게 하는 양식을 구하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40년 동안이나 만나를 먹이신 목적에 대하여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신 8:3)고 말씀하신다. 예수님도 그가 복음사역을 시작하실 때, 40일간을 금식하신 그에게 돌덩이로 빵을 만들라고 유혹했을 때, 바로 이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다(마 4:4). 성경은 육신의 양식을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영생의 양식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추구하며 일하는 목적이 오로지 육신의 양식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영생에 이르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유대인들의 대답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28)라고 묻는다. 영혼의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고 대답하셨다. 계속하여 무리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을 증거를 보여 달라는 것이다. 모세는 자기 조상들에게 빵을 주어 먹게 하였으니 예수님도 모세처럼 자기들에게 빵을 달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그의 조상들에게 빵을 주신 분이 모세가 아니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 빵을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이시다.”(32)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계속하여 “하나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다.”(33)라고 말씀하신다. 그의 조상들이 먹었던 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임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이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가 주시고자 하는 빵은 땅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며, 먹고 없어질 것이 아니고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무리들은 “주님, 이 빵을 항상 저희에게 주소서”라고 청하게 되었다.예수께서는 바로 이때에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사람은 결코 굶주리지 않을 것이며, 또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빵이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가? 또한 예수님이 자신이 하늘로부터 왔다고 밀하며 심지어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칭하여 마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은 무슨 일인가? 이 유대인들은 이해가 안 되는 어쩌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불경스러운 말이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내가 곧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니,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다.”(51)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는 데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이 없다”(53)고 선언하신다. 예수님은 그의 살이 참된 양식이며, 그의 피가 참된 음료라고 말씀하신다. 나아가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56)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다 떠나버렸다.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 정말 그의 살과 피를 먹으라는 말씀으로 생각한 것이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요한복음 1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엇고, 그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그가 하나님이시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하늘의 빵을 달라고 하는 자들에게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말씀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 예수님의 육신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먹으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며, 예수님을 믿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인해서 사는 것 같이 나를 믿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해서 살 것이다.”(57)고 말씀하신다. 결국 생명의 빵, 하나님의 빵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육신의 빵을 먹기 위해서 땀 흘려 일하는 것처럼, 영혼의 양식을 위하여 땀 흘리고 일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일에 땀을 흘려야 한다. 생명의 양식을 먹고, 마실 때 우리 신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고 영생하는 것이다. 말씀만이 썩지 않을 참 양식이요 사람을 살리는 영생의 양식이다. 예수께서는 다시 말씀하신다.“살리는 것은 영이고, 육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영이고 생명이다.”(63). 베드로는 예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의 무리를 먹이시는 일에 동참하여 예수님의 일을 같이 한 사람이다. 그러나 오병이어나 조상들이 먹었던 광야의 만나가 결코 영생의 양식이 아님을 알았다. 반면에 예수님의 말씀이 영생의 양식임을 알았으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알았다고 했다. 알고 믿은 것이 아니라 믿고 알았다고 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믿기에는 예수께서 너무 크고 깊고 높고 넓으신 분이라 우리 일생을 다 쏟아 부어도 예수님을 다 알 수 없다. 그러나 먼저 믿으면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면 예수께서 세상에서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양식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2-22
  • 학술/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한국교회의 입장 (1)
    본고는 지난 2월 7일 서울 영동교회에서 열린 한복협 2월 월례회에서 이상원 교수가 발제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한국교회의 입장 신학적 관점에서’ 중 일부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I.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실태지금 정치권은 동성애와 동성혼의 합법화를 시도하는 차별금지법안 제정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2007년 10월 노무현 정권 당시 법무부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에 따라서 차별금지법안을 입법예고했는데, 이것이 한국 사회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법안은 동성애를 이성애와 다름없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성적 지향으로 정의한 후에 동성애를 왜곡된 성행위로 비판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동성애자에 대한 고용상의 차별을 금지시킨 다음에 이와 같은 규정들을 어길 경우에는 법적 처벌을 받도록 했습니다. 이 법안은 기독교계의 거센 비판 때문에 폐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로써 차별금지법 제정시도가 종결된 것이 아닙니다. 2011년 12월에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 등 10명이 재차 차별금지법 제정을 시도하다가 무산되었고, 2012년 11월 통합진보당 김재연 의원 등 10명이 재차 차별금지법 제정을 시도하다가 무산되었고, 2013년 2월에 민주통합당 김한길 의원 등 51명이 재차 차별금지법 제정을 시도하다가 무산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몇 차례 차별금지법 제정 움직임이 있었으나 현실화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최영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은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겠다는 의지를 다시 천명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차별금지법 제정이 여의치 않자 아예 전통적인 성(sex) 평등 사회를 젠더(gender) 평등 사회로 개혁하겠다는 의지를 선거공약에 담아 발표하였고, 동성애와 동성혼을 헌법 차원에서 합법화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하고 바로 추진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계의 강력한 반발로 인하여 이 시도는 무산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동성애와 동성혼을 합법화하는 운동은 중단되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기독교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2017년에 만료된 국가인권계획(National Action Plan)을 대체하여 향후 5년간 국가의 정책을 지도할 새로운 국가인권계획안을 2018년 8월에 통과시켰습니다. 이 국가인권계획안에는 동성애와 동성혼과 관련하여 차별금지법에 담겨 있는 내용과 동일한 내용이 권고사항으로 담겨 있습니다. 내년부터는 정부의 모든 정책을 추진할 때 이 권고안을 반영해야 합니다. 또한 현 정부 산하 지방자치단체들은 지속적으로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해 나가고 있고 현재 전국의 지방자체단체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했는데,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면 사실상 차별금지법안이 발효된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학생인권조례는 매우 교활한 조례안입니다. 제가 어느 지방자치단체의 학생인권조례안을 검토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이 조례안은 조례안의 시(市)인권위원회를 두고 시인권위원회가 조례안을 집행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시인권위원회는 설립 되자마자 바로 국가인권위원회의 산하기관이 되고 국가인권위원회의 지시를 받게 됩니다. 둘째로, 시인권위원회는 시의 감독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도록 되어 있으며 시인권위원회에서 논의한 모든 내용들은 대외비로 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시인권위원회가 논의하고 결정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국가인권위원회를 제외하고는 어떤 시차원의 기관도 알 수도 없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습니다. 셋째로, 조례안에는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보호 한다”고만 되어 있을 뿐, 동성애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 조례안이 차별금지법이 되는가? 문제는 조례안에는 사회적 약자라고만 되어 있을 뿐 누가 사회적 약자인가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사회적 약자의 범주에 대해서는 다른 규정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기관의 도움을 받는가? 여기서 시인권위원회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산하 기관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조례안이 명시하지 않은 규정은 상위 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법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초중고등학교 성교육 현장은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현재 중학교에서는 세 가지 성교육 교안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학교 성교육표준안입니다. 이 표준안의 내용은 전통적인 성교육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표준안에 대하여 줄기차게 비판이 가해지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양성평등 기본법입니다. 이 기본법의 이름은 남녀평등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젠더 평등이 상당 부분 그 내용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성인지적 성교육입니다. 성인지 성교육은 100% 젠더 평등 교육안으로서 동성애와 이성애를 동등한 차원에서 가르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미 우리나라 초중고등학교에서 동성애 합법화교육이 실행되고 있으며, 이 교육을 받으면서 초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우리의 아이들에게는 동성애가 잘못된 성애라는 말이 낯설고 이상하게 인식되도록 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이 아이들이 자라서 성인이 되었을 때 우리나라 국민들의 성인식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II. 철학적 배경: 신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사회를 소수의 부르조아 계급이 다수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착취하는 사회로 분석한 후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자의식적인 혁명을 통하여 부르조아 계급을 축출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지배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추구한 이상적인 사회는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회는 처음부터 실패로 끝날 운명을 안고 탄생한 유토피아였습니다. 사람들은 능력을 다하여 일하면 가능한 한 많은 보상을 얻으려고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능력을 다하여 일하고 나서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기 위해서는 이타적이라야 하는데, 사람들은 그 정도로 이타적일 수가 없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이 가지지 않은 능력 위에 사회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이타적인 아닌 인간으로 하여금 능력만큼 일하게 한 다음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게 하기 위해서는 전무후무한 국가의 독재적인 강제력이 동원되어야 했고, 강제력이 동원되자 사람들은 능력만큼 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창의성은 죽었고 생산성은 하락하여 경제가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실험은 100년을 버티지 못하고 1992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는 상징적인 사건을 전후하여 실패로 끝났습니다.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는 데 실패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새로운 사회변혁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모든 행동의 추동력은 성적 충동에서 나오는 것이며, 성적 충동은 윤리적으로 통제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파악한 프로이드의 성 심리학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부르조아 계급에 이성애자들을 대입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동성애자들을 대입한 후에 현존하는 사회의 문제는 이성애자들이 동성애자들을 억압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사회는 이성애적 규범으로부터 해방되어 동성애자들이 자유롭게 성관계를 가지는 사회였습니다. 이것이 신마르크스주의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동성애는 성경이 말하는 규범뿐만 아니라 인류 보편의 도덕적 규범에 어긋나며, 생물학적으로 볼 때 생식기관과 배설기관의 만남이라는 생물학적 상식에 반하며, 의료 보건적으로 볼 때 각종 성기와 장기와 관련된 심각한 감염을 피해 갈 수 없는 위험한 성적 관행입니다. 동성애를 하면서 건설할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는 없습니다. 이처럼 적어도 서구사회 안에서 신마르크스주의적인 성해방운동이 하나의 시대사조로서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실현 불가능한 성해방사회를 이루고자 하는 강박증이 납득이 안 될 정도로 집요한 동성애 합법화운동의 배경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다수의 국민들의 정서가 반대하는 대도 불구하고 거듭하여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는 시도, 헌법에 동성애와 동성혼 허용조항을 집어넣으려는 시도, 인권위원회를 헌법기관으로 격상시켜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위에 두려는 비상식적인 시도, 학생인권조례의 차별금지법화, 초중고등학교의 젠더교육, 동성애에 대한 모든 비판을 차단하는 보도지침,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국가인권위원장을 모두 동성애친화적 인사로 의도적으로 배치한 조치 등과 같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동성애 합법화운동은 그 전략과 방법론에 있어서 마르크스주의적이고 혁명적인 해방운동이며, 일종의 강박증으로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성에 대한 이성애적 규범이 철폐된 유토피아적인 사회을 꿈꾸는 것은 진정한 이상사회를 향한 인류의 잠재된 욕망의 병적인 표현입니다. 교회는 이와 같은 병적인 욕구의 분출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교회는 이성애적 규범이 철폐된 사회는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분석하여 비판하면서 참된 이상사회는 성경이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임을 설득력 있게 선포할 필요가 있으며, 이것이 가장 강력하고 근원적인 대응책입니다. 특히 마르크스가 등장하여 활동을 시작한 본거지가 영국이었고, 당시 영국은 빈부의 격차가 극심한 사회로서 사실상 마르크스 혁명이 터질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존 웨슬리가 등장하여 성령의 힘과 강력한 복음을 들고 탄광과 노동자들 속으로 뚫고 들어가 복음의 소망으로 이들을 위로하고 끌어 들이는 일에 성공했기 때문에 영국이 폭력혁명의 마수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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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
    2019-02-22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10
    예수께서는 이 땅에 여자의 후손으로,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그리고 왕으로 오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우리 모든 피조물들의 왕으로 이 땅에 보내셨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을 돌보고 다스리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도록 지도하는 일을 맡기신 것이다. 특별히 아담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의 질서를 잘 지키고, 또한 피조물들이 창조의 질서를 잘 지키도록 감독해야 할 사명을 받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왕으로서의 사명에 충실하지 못했다. 오히려 대왕이신 하나님을 반역하고 자기와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반역자로 몰아넣었다. 아담은 타락한 왕이 되었다.아담의 타락의 원인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것이었다. 아담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분봉왕이다. 창조의 질서 가운데 아담 위에는 항상 하나님께서 대왕으로 계신다. 그 대왕이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따먹지 마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명령을 통하여 자신의 하나님 되심, 창조주 되심, 대왕이 되심, 그리고 언약의 주 되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권위와 능력을 동반한 그의 위대하심과 그의 존엄성을 선언하신 것이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아담이 절대 넘어서는 안 될 죽음의 선이었다.그러나 아담은 사단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하는 충동을 자제하지 못하고 그 실과를 따먹었다. 결과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의 권위와 존엄성을 짓밟아 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반역자의 죄목으로 죽음을 선고했다. 아담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와의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도 죽음을 선고하셨다. 아담의 교만이 그를 타락과 파멸의 낭떠러지로 내몰았다. 하나님께 대한 교만심이 그를 망하게 한 것이다. 우리 인간은 신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며 살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교만한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을 대왕으로 원치 않은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과 같이 동등하게 되기를 원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불복종하였지만 결국 반역자가 되고, 반역의 괴수가 되고 말았다. 인간의 비극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파괴하고 스스로 높아져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교만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것이다. 인간의 교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도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고, 의식하지 않은 체 사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모른 체하며, 의식적이고,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외면하며,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자기에게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돌아갈 모든 영광을 자기가 가로채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아담에게 심판과 죽음의 저주를 내리시고, 아담을 대신한 새로운 아담을 세울 계획을 세우신다.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을 세워, 새로운 그의 대리통치자, 새로운 왕이 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새 아담이 새로운 왕이 되려면 아담이 실패한 끝이 없는 겸손과 철저한 복종을 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겸손이라 함은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어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그의 낮아지심(humiliation)을 말하는 것이고, 복종이라 함은 아담의 속죄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까지도 내놓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의 겸손과 복종에 대하여 빌립보서 2:6-8에서 잘 가르쳐 준다.그의 가르침에 의하면 예수님의 겸손은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취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여기서 “형상”이라는 말은 “왕”이라는 의미이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는 왕을 신의 형상이라고 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왕이지만 왕의 형상을 취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도리어 그는 자기 자신을 비워 종의 형상을 입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 왕이 되기를 원하고, 자기를 높여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원하지만 예수께서는 오히려 자신을 비워 사람의 모양으로, 종의 형의 형상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었지만 종의 형상으로,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으로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종이란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이 아담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갚으라고 하시기 때문에 새 아담 예수께서는 “예”하고 순종하신 것이다. 물론 예수께 이 순종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시여, 원하신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눅 22:42) 라고 기도하셨으며, 그 기도하는 동안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지기까지 했다고 했다.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으면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질 만큼 되었을까? 아마도 온 몸을 다 쥐어짜서 기도를 하신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면 그대로 복종하겠다는 것이다. 새 아담으로서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은 아담에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달래기에 충분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이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킬 만큼 충분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아담과 그의 연대성 안에 있는 자들을 여전히 죄와 죽음의 사슬에 메어 두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살리시고 지극히 높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이나 땅이나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하셨다. 이 말은 예수님을 새로운 왕으로 높이 올려놓으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 대한 겸손과 복종이 그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새 아담, 곧 새로운 왕으로 높이 오르게 한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새 아담으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왕으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은 시편 2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선지서는 시편에서 말하고 있는 아들에 대하여 그가 다윗의 가문에서 낳게 될 것이고 신적 존재임을 고지하고 있다. 이사야 9:6-7에서는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게 될 한 아기는 “그 어깨 위에 통치권이 있으며, 그 이름은 위대한 섭리자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불릴 것이고, 다윗의 보좌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부터 영원까지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신다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위대한 섭리자, 영존하시는 아버지 등은 그가 하나님을 지칭하고, 그의 신적 속성을 의미하는 말이고, 평강의 왕이라는 말은 그의 인간적인 본성과 그의 사역의 성격을 의미하는 말이다. 여기서 그를 가리켜 “위대한 상담자”라고 하는 말은 사전적 번역이고, 문맥을 살펴보면 “위대한 섭리자” 혹은 “위대한 전략가”라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그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진 인간 왕들과는 구별된 특별한 왕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윗의 가문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사 11:1-5).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하고 반역한 아담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함을 즐거움으로 삼는 왕, 쉽게 말하면 즐겁게 하나님과 교제하는 왕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다윗의 후손으로부터 오게 될 새 아담은 여호와의 영이 함께 하시는 정의로운 재판장,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이 반역의 세상을 판결하는 심판의 주로 오신다는 것이다.때가 되어 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왕이 이 땅에 오셨다. 새 아담,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는 왕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그는 유대 땅 베들레헴의 축사에서 태어나셨다. 사람이 사는 집안의 방이나 모텔이 아니라 양들이 먹고 싸는 축사에서 태어나 요람 대신 구유, 여물통에 뉘었다. 유대인들은 몰랐지만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유대 땅에 새로운 왕이 태어난 것을 별의 징조로 깨닫고 찾아와서 경배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를 “그리스도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은 그를 왕으로 영접하였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그는 나귀를 타셨다.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셨으니,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이다.” 스가랴서 9:9의 말씀대로 자신이 왕이심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여기서 왕이라고 칭하고 있는 예수님은 당시의 왕들처럼 말을 타지 않고,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다. 왜냐하면 그는 겸손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비록 나귀를 타셨지만 백성들은 그들의 옷을 벗어 길에 깔아 양탄자를 대신했고, 나무 가지를 꺾어 길에 깔았다. 무리들은 나귀를 탄 예수님을 뒤 따르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 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시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마 21:9)하며 외쳤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웠더니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다. 그러나 새 아담, 예수님은 왕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겸손하여 나귀를 타셨다. 전쟁 영웅이나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왕처럼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셨고, 내일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백성들이지만 그에게 다윗의 자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연호했다. 그리고 빌라도는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머리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를 달았다. 예수님을 조롱하는 표지였지만 그것은 사실로 들어났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다고 선언하셨다(마 28:16). 그는 온 우주의 왕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신 분이었다.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세상 만물의 통치권을 위임받은 왕이었다. 그러나 그는 교만하여 대왕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말씀을 거역했다. 그리하여 타락한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은 겸손하여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온 우주의 왕, 곧 새 아담이 되셨다. 자기의 몸을 대속 제물로 내어 주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참된 왕도를 보여주셨다(막 10:45). 이방의 현자들, 동방박사들이 축사의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께 경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섬기는 왕이었다. 왕은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다. 섬기는 자이다. 하나님 앞에게 겸손과 순종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섬기는 것이 새 아담의 왕도이다. 높은 자리에 올라 갈수록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 예수님의 왕도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새로운 사람, 새로운 신분과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새 아담, 예수님과 같은 왕들이 된 것이다. 우리는 왕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하고 죽기까지 복종해야 할 왕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과 복종을 배우고, 왕도를 따라 섬기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나귀를 탄 왕들이 되어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2-15
  • 학술/ 2019년 한국사회를 향한 교회의 소명
    본고는 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 목사)이 지난 1월 4일 양재 온누리교회 화평홀에서 개최한 제73회 월례포럼에서 정일웅 교수가 발제한 ‘신년, 한국사회를 향한 한국교회의 소명’을 일부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첫째 소명은, 한국교회의 공동체성과 공공성을 회복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언론은 우리사회가 한국교회를 염려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풍자한다. 실천신학적으로는 복음의 사회적인 책임과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서 이며, 한국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망각하고, 오히려 어두움과 모래알이 뒤덮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지금 사회로부터 비난받는 한국교회의 모든 도덕성과 관련된 문제(대형교회의 목회세습, 목회자의 비윤리성)들은 깊이 생각하면, 한국교회지도자 된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한국교회 전체가 함께 숙고하여, 해결해야 할 한국교회의 지극히 내적인 문제들이라는 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본 강연자는 솔직히 지금까지 잘못 설정된 목회자들의 이기적이며, 경쟁지향의 목회철학(신학)과 실천방법론(교회성장론)을 포기하라고 일러주고 싶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먼저 이러한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실수와 과오(죄)의 책임을 누군가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죄를 저지른 당사자의 책임은 말할 것도 없고, 나아가서 한국교회 지도자 된 우리 모두가 이러한 죄(실수)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고, 한국교회의 허물과 실수들을 우리 하나님께 고백하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한국교회를 향하여 던져지는 모든 허물(죄)과 실수에 대한 비난을 한국교회의 지도자 된 우리들이 “내 탓이오”(고 김수환추기경)란 심정으로, 우리 하나님께 사죄의 은총을 구하는 죄책고백의 회개기도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마18:15-20). 그 일들이 남의 일, 타 교단, 타 교회, 타 목사의 일이 아니라, 바로 한국개신교회 전체의 실수와 과오임을 시인하고, 우리 하나님께 엎드려 그분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죄책고백의 회개기도운동”이 신년 새해에 시작되기를 바란다(요20:23,시23:5,시51,단9:5,요한1서1:9). 우리 모두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는 물질과 세상 권력을 더 의지하였고, 이기적으로 살아온 자기중심적인 삶의 태도를 우리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는 그러한 실수와 오류에 빠지지 않겠다는 새로운 다짐과 각오를 죄책 고백문으로 우리 국민들 앞에 나타내 보였으면 한다.두 번째 소명은, 한국교회는 모든 교단과 교파들이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인정하고, 연합하여 흔들리는 교회공동체를 결속하며,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의식을 새롭게 일깨울 뿐 아니라, 복음의 사회적 책임을 잘 감당하기 위한 교회연합운동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신년에 감당해야 할 우리사회를 향한 두 번째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이유는 현재 한국교회를 대표한다는 두 개의 연합기관들이 자기 사명과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거나,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한국교회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로 통일된 새롭고 참신한 한국교회연합기관이 새로 탄생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오래전부터 본 강연자는 하나로 연합된 한국교회의 새로운 대표기구의 필요성과 한목소리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의 필요성을 수차례 강조해 왔었다(독일교회를 통하여 배우는 통일노력). 다행스럽게도 최근에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이러한 필요성을 깨닫고 있는 것 같고,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새로운 연합기구인 “한국교회총연합회“(한교총)가 결성되어 곧 활동한다는 소식도 듣게 된다. 중요한 것은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한국교회의 통일된 하나의 협의기구의 탄생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바라기로는 지난 80년대 이후에 분파된 “대한예수교장로회”란 간판을 가진 100여개 이상의 그룹들은 기득권을 내려놓고, 원래 속했던 기존의 대한예수교장로회로 통합하기를 바라며, 신앙역사와 전통이 다른 교단들은 서로의 전통과 역사를 존중하며, 이 시대적으로 요구되는 더 큰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협력관계를 견지해가기를 바란다. 그러면 하나로 연합한 한국교회의 새로운 협의기구는 과연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한국교회전체를 대표하여, 복음전파의 사명수행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방책을 논의하며 간구하고, 지원하는 노력을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당면한 한국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에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특히 복음의 사회적인 역할에 언제나 한목소리로 한국교회의 입장을 사회적으로 대변하는 역할을 감당해 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역할을 감당하려면, 먼저 기독교정체성과 관련하여 진보와 보수는 하나님나라의 신학에서 신학적인 사고의 통일성을 견지해야 하며, 나아가 대한민국의 전 문화영역(정치,경제,사회,문화,과학,교육)에서 어떻게 그 나라가 실현되도록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하나님나라의 복음적인 가치실현을 힘써야 할 것이다. 방법적으로 각 전문영역에 속한 전문학자들을 동원하여 그 일에 협력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각 교단에 속한 신학교들에서 섬기는 유능한 신학자들은 필수적으로 참여시켜야 하며, 한국교회의 사회윤리적인 행동지침을 제시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대사회, 대국가, 대북한, 대 국제관계에서 요구되는 문제들에 대하여 한국교회의 통일된 대사회적인 입장들을 한목소리로 대변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복음의 가장 권위 있는 선포행위와 연관된 일이며, 그것이 한국사회의 안정에 크게 기여 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한국교회의 위상을 사회적으로 달라질 것이며, 그간 상실된 한국교회의 신뢰가 거기서 회복되리라 기대한다. 그리고 한국교회 내적으로는 공동체의 일체감과 결속을 위하여, 무엇보다도 서로 다른 교단, 교파 간의 역사와 전통과 교리적인 신앙차이를 극복하는 많은 신학적인 대화를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당면한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로서, 자립교회(20%)가 미자립교회(80%)를 지원하고 도우는 재정적인 선교협력운동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지금 흔들린 복음의 동역자의식을 회복시키며, 한국교회의 공동체가 하나로 결속되도록 하는 비결이라 생각한다. 지역에 교회를 개척할 때도, 이미 지역의 자립된 교회가 힘을 모아 인적. 물적 자원을 지원하여 교회의 분립개척이 이루어지게 해야 하며, 목회자 개인의 재정을 쏟아부어 사업처럼 벌리는 개척교회는 중단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매년 쏟아져 나오는 신학교들의 목사양성계획도 교단 간의 목회자양성계획을 세우고, 그 수가 조정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복음의 사회적 책임을 위해서도, 한국교회가 연합하여 우리사회의 어려운자들을 도울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어려운 자들을 돕는 섬김과 봉사를 적극적으로 힘써야 할 것이다(섬김과 봉사기관). 특히 한국교회는 북한선교를 위하여, 국가정책에 따라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에 협력하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요구되는 중요한 일은 기독교신앙의 가르침의 통일성을 찾기 위하여, 끊임없는 교단 간의 대화가 요구된다는 점이다. 한국교회는 현재, 보수와 진보의 사이의 신앙고백에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간 우리는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지금까지 서로가 ”다르다“는 말을 많이 해왔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소문으로만 자유주의라고 믿고 있었으며, 실제로 그러한지에 대하여 확인하는 대화의 노력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진보적인 교회들도 보수교회의 신앙에 대한 태도가 그러하였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본 강연자는 소문만 듣고, 그렇게 믿고 있는 선입관들을 자주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반대로 서로 유사하며, 공유하며, 공통된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노력을 해야 하며, 인내와 관용과 사랑으로 서로를 존중하는 인격적인 대화와 교제를 통하여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거기서 서로를 새롭게 이해하는 노력을 깊이 있게 기울이는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요망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모습은 이제 개 교회와 개교파와 개교단을 뛰어넘어, 진보와 보수 사이에 실현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연합하여 이러한 노력에 최선을 다할 때, 그것이 한국교회의 공동체를 견고하게 하며, 상실된 한국교회의 공공성을 회복하는 길이며, 거기서 한국사회도 한국교회를 새로운 신뢰로 다가올 수 있는 복음전파의 기회가 되리라 생각한다. 아무쪼록 신년 새해는 죄책고백운동과 한국교회의 새로운 연합운동으로, 흔들리고 상실된 한국교회의 공동체성과 공공성이 회복되는 복된 새해가 되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 해설/기획
    • 학술
    2019-02-1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09
    예수께서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 예수께서는 선지자로 오셨다. 그리고 새 아담, 예수님은 제사장과 왕으로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그를 대신하여 그가 지으신 만물을 돌보고 다스리는 일을 하게 할 뿐 아니라 그와 교제를 나누기 위하여 창조하셨다. 그러나 아담이 사탄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반역하여 하나님의 곁을 떠남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는 끊기고 아담은 그와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죄와 죽음의 저주를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창조하신 만물을 사랑하시고 끊어진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한번 끊긴 관계를 다시 회복하려면 아담은 죄 값을 치루고 그의 죄를 씻어 정결한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죄인이 죄 값을 치를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죄 값을 하나님 자신이 치르기 위하여 그의 외아들을 육신의 몸을 입고 인간 세상에 보내시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외아들이 해야 할 일은 첫째로 사람의 몸을 입고 찾아 와야 하는 것이고, 둘째는 아담의 범죄에 죄 값을 치르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죄 값으로 내놓아야 하는 것이고, 셋째는 그의 죄 값이 충분히 치러졌다는 표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살리시고, 아담과 그의 연대생 안에 있는 자들도 죄와 죽음의 사슬로부터 풀려나서 타락 이전에 하나님과 누렸던 관계성을 회복하고 하나님과 거룩한 교제를 나눌 수 있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니 인생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이땅에 오셔서 그의 목숨을 죄 값으로 바친다는 개념 자체가 400년 동안이나 타국에서 노예생활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시청각적인 모형을 통하여 미리서 가르치시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제사제도이다. 이 제사제도가 본격적으로 제도로서 정착한 것은 모세 때부터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식을 이 제도를 통하여 예습을 시키신 것이다. 제사에는 제단과 제물과 제사장이 필요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제사제도를 친히 게시하여 주시고, 법으로 정하여 엄격하게 시행하도록 하셨다.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열거한 내용이 바로 제사제도에 대한 것이다.첫째로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는 성소에서 이루어졌다. 성소, “믹다쉬”라는 말은 “카다쉬”, 곧 “거룩하다”라는 말에서 나온 말이다. 그래서 거룩한 곳, 성소로 번역하고 있다. 장막이라고도 한다. 제사는 아무 곳에서 드려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장소에서 드려야 했다. 성소는 놋받침 위에 세운 기둥을 세우고, 기둥을 따라 포장 울타리를 쳐서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출 38: 9-20). 성막 뜰에는 물두멍과 번제단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안쪽으로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 성막이 지어졌다. 성막은 은으로 만든 밑받침 위에 아카시아 나무로 널빤지를 만들어 밑바닥을 깔았다. 그리고 널빤지 위에 성소와 지성소를 만들었다. 성소에는 등대와 향단과 진설병을 올려놓은 상이 있었다.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는 휘장으로 막을 쳐서 서로 오갈 수 없게 만들었다.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두었는데 그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을 새긴 두 개의 돌판과 만나를 담은 항아리, 그리고 싹인 났던 아론의 지팡이를 넣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성소와 지성소를 휘장으로 분리시켜 놓았는데 이는 하늘과 땅,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과 죄인들이 거하는 곳이 죄로 말미암아 분리되고 막혀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지성소는 대제사장이 오로지 일년에 대 속죄일에 단 한 번 속죄 양의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다. 요한은 예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신다고 가르치고 있다( 요 1:14). “계신다”는 말은 “장막을 펴다”()는 의미이다. 예수께서는 가나 혼인 잔칫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첫 기적을 행하신 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성전을 청소하시며, 그 성전이 바로 자기의 몸이라고 선언하셨다.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다 죄인이라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접근할 수 없다. 인간들 스스로가 죄를 짓고 하나님의 존전을 피했다.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이 휘장이 거두어지고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 성전의 이 휘장이 갈라졌다. 그리고 그 후 성전 자체가 다 파괴되고 진멸되었다. 실형 인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모형은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둘째로 제사에는 재물이 필요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흠 없고 점 없는 깨끗한 어린 양이나 염소를 속죄 제물로 바치도록 하셨다. 죄인들은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자기의 죄를 고백하여 죄를 그 짐승에게 전가했다 (transfer). 전가라는 말은 옮기다, 덮어 씌우다는 의미이다. 나의 죄를 그 양에게 덮어씌우고 양을 잡았다. 그리하여 나의 죄를 뒤집어 쓴 그의 양이 나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나의 죄 값을 치르게 한 것이다. 속죄가 이루어 진 것이다. 재물은 양과 염소를 드렸고, 곡식도 드렸다. 죄와 관련된 제사에는 반드시 짐승의 피가 필요했고, 곡식 제사는 화목제나 감사제에 쓰였습니다.이사야서 53장은 새 아담, 그리스도로 지칭하는 하나님의 종이 우리 죄인들을 위한 속죄물로 자신을 드리는 대속 사역과 그 의미를 적나나하게 묘사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친히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자기 목숨을 많은 이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왔다.”(막 10:45)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예수께서는 식사 후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마시라고 권하셨다. “또 잔을 들고 감사기도 하신 후에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너희 모두 이것을 마셔라. 이것은 죄 용서를 얻도록 많을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마 26:27-28; 막 14:24).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주시는 포도주가 “언약의 피”라는 것이니다. 이 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의 죄가 용서함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언약적 연대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속죄의 원리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피는 언약의 피가 되는 것이며, 이 최후의 만찬은 새 언약의 언약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아담과 그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위한 대속 제물이었던 것ㅇ다.셋째는 제사장이 필요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아무나 나갈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직접 선택한 자를 일정한 의식 절차를 통하여 제사장으로 세우시고 그가 드리는 제사를 받으시고, 그와 교통하셨다. 제사장은 모세의 형, 아론과 그의 자식들이 맡았다. 그러나 아무리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지성소나 언약궤를 다루었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했다.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번씩 속죄양을 선택하여 그 머리에 백성의 죄를 고백하여 그들의 죄를 양에게 전가시키고, 그 양을 잡아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의 죄를 대신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이같은 대제사장의 제사에 대하여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일들의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손으로 짓지 않은, 곧 창조에 속하지 않은, 더 크고 완전한 장막에 들어가셨다. 그분은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피로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셔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히 9:11-12)그리하여 새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이 성전이시고, 속죄물이시고, 또한 대제사장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구약시대의 제사제도에는 한 사람이 이러한 성전과 제물과 제사장이라는 세 역할을 다 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새 아담, 그리스도는 이 세 가지 역할을 다 완벽하게 행하신 것이다. 새 아담은 제사장 레위 가문에 속한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히브리서는 새 아담, 그리스도를 영원한 멜기세댁의 계얄을 따른 제사장이라고 가르친다(히 5:5-6). 여기서 멜기세댁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영원한 제사장이고 가르친다.“이 멜기세댁은 살렘 왕이며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왕들을 무찌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축복한 자이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드렸으니, 그의 이름을 해석하면, 첫째로 의의 왕이고, 다음으로 살렘 왕, 즉 평강의 왕이다.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으며 하나님의 아들을 닮아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히 7:1-3)새 아담, 그리스도의 제사장 되심은 아담의 모든 죄 값을 치러 영원한 속죄를 이루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평안한 관계, 곧 영원하고 거룩한 교제를 이루기 위함이었다. 우리 성도들은 옛 아담, 옛 언약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이제 새 아담, 새 언약에 속한 사람이다.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사람들이 되었다. 새 아담, 그리스도 예수님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들어간 사람들이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 또한 우리는 성령이신 예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께서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4:16). 성전되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시며,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셨는데 예수께서는 우리 안에 그의 성전을 지으시고 우리에 안에 거하시게 된 것이다. 그래서 복음서, 특히 요한은 “우리가 그 안에, 그가 우리 안에”거하라는 명령을 계속 반복하여 말씀하신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그릴 합당한 예배라고 하였다(롬 12:1). 베드로는 “너희고 산돌같이 영적인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영적인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라”(벧전 2:5). 또한 2:8 절에는 “그러나 너희는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고 왕같은 제사징들이고, 거룩한 나라이고, 그분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움에서 그 분의 놀라운 빛에 들어게 하신 분의 덕을 선포하게 하시려는 것이다”라고 가르친다. 바로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의 제사장이고, 제물이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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