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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 윤보환새해에는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물질의 이익을 비롯하여 그 어떤 것도 생명보다 우선하지 않는 세상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처럼 정의와 평화, 생명이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이 되기를 기원합니다.새해에는 온전히 치유되지 못한 채 슬픔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에게 위로의 소식이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해고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민, 소수자 등 이 사회의 경쟁에서 밀려난 약자들의 고통이 사라지기를 원합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아파하는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이 생명의 희망을 볼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2020년은 민족이 이념으로 나뉘어 전쟁의 아픔을 겪은 지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제 한반도의 평화를 더 이상 유보할 수 없습니다. 민족의 화해와 평화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는 계기가 만들어지는 2020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모아 2020년을 갈등이 화해로, 반목이 화목으로, 증오가 이해로 바뀌는 하나님의 은혜의 해, 희년으로 만들어 갑시다.그리스도인들에게 당부합니다. 2020년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심스레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한 해를 만들어 갑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지키시는 모든 생명을 마음과 뜻을 다해 온몸으로 지켜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기 전에 최선을 다해야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일을 위해 일하는 이들에게 은총을 더하여 주시기를 빕니다.한국교회총연합 공동대표 김태영 류정호 문수석첫째,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교회와 지도자들은 사회갈등의 원인자가 아니라 치유와 회복, 화해와 동역의 소명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교회와 지도자들이 신뢰 회복을 위해 노력하며, 초 갈등 국면에 처해 있는 세상 속에서 ‘화평케 하는 자’로서, 분열을 극복하고 화합의 길을 열어가는 ‘피스메이커’들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지혜를 찾도록 서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역사적으로 교회 안에 세상 권력이 들어왔을 때의 결과는 분열과 증오와 전쟁이었습니다. 화해와 용서의 정신을 갖고 우리와 다른 이웃과 사랑으로 교제하며 화합하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서로 인내하고 존중하고 배려함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셋째, 사회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개항과 더불어 근대 서구 문명을 한국에 들여왔고,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운동의 중심에 있었으며,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와 맞서서 대한민국을 지켰습니다. 기독교는 정부가 감당하지 못하는 교육, 의료, 복지, 문화 등 다양한 방면에서 정부가 할 몫을 담당하며 국가와 사회를 섬겨왔습니다. 이제 정부와 정치 지도자들이 이념적 분열을 부추기는 제도와 정치적 언행을 멈추도록 기도합시다. 지도자들은 국민의 안보 불안을 불식하기 위해 가시적으로 행동해야 하며, 국민의 화합을 통해 대한민국의 지속 가능한 청사진과 올바른 정책을 제시하여 국민의 선택을 다시 받아야 할 것입니다.한국교회연합 대표회장 권태진 목사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다가오는 새해, 모두가 행복하기를 소원합니다. 새해는 모두가 환경을 초월한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위대함을 새롭게 인식하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대한민국은 위대한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과 자유를 사랑하는 우방 덕분에 세계 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 가운데 교회도 아름답게 성장하여 우리나라에 자유 민주주의가 꽃피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인적·물적·양적인 복을 자신의 영달과 정욕에 사용함으로 화합 대신 나뉘어 갈등하고, 권력과 야합하여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고 말았습니다.새해에는 그 어느 때보다 특별한 각오가 필요한 때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1:29)는 바울 사도의 고백같이, 이제 한국교회는 그동안 은혜 입은 것을 갚아야 합니다.십자가를 지는 각오가 있어야 부활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불신앙과 어둠의 권세가 득세하는 곳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건 계시를 보이심 같이 해결의 방법은 미스바의 기도 운동, 갈멜산 엘리야의 헌신의 기도입니다.새해에는 믿는 자의 생존을 위협하는 무신론과 타락 문화가 그 어느 해보다 거센 바람이 되어 불어닥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시대의 위중함을 깨달아 기도원과 전국교회에서 뜨거운 기도의 불을 지피고, 하나님 앞에 소리높여 절규하며 비상 기도를 올려야 할 것입니다.한국장로교총연합회 대표회장 김수읍 목사한국교회는 어두움에 빛을 비추는 역할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빛이 있기 전에는 ‘혼돈과 흑암’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질서와 불투명,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의 상태를 말합니다. ‘빛이 있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습니다. 1885년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들이 진리의 빛을 갖고 들어오면서 혼돈과 흑암이 걷혀 밝은 시대를 열게 되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2020년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진리의 빛으로 각 분야에서 송구영신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한국장로교회는 연합의 구심점이 되어야 합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 삼겹줄이 하나 보다 세배가 아니라 그 이상의 몇 배 강합니다. 우리는 당파싸움으로 힘을 모으지 못하여 왜침에 처참하게 당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지금도 남과 북이 나뉘는 아픔이 있습니다. 1,100만 교인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장로교회가 분열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새로운 한 해의 출발에 있어서 한국장로교회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서 교회가 연합하고 사회통합을 이루어 이 나라의 자유와 번영을 지키는 일에 힘을 다하여야 하겠습니다.2020년 새해, 한국장로교회는 이러한 각오로 송구영신의 희망을 세상에 전하여야 하겠습니다. 인구절벽의 문제, 경제적 침제, 안보 불안, 교육, 문화 등 각 분야에 희망의 태양이 솟아오르기를 기원합니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대표회장 지형은 목사기독교의 희망은 본질적으로 상황이 아니라 근원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성경 시대의 예언자들과 기독교 역사의 선진들은 암울한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근원적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야만의 시대에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에서 완결된 하나님의 계시를 신뢰하며 열린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남북으로 갈린 한반도와 군비가 증강되는 동아시아의 격랑이 험난하고 우리 사회의 내부 갈등이 힘겹지만 구한말부터 여기까지 걸어온 백 수십 년의 시간이 그러했듯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근대사는 힘겹지 않은 때가 없었지만 크게 볼 때 언제나 발전해 왔습니다. 우리나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에서 이루시려는 거룩한 뜻이 있음을 믿고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통하여 성숙해지는 미래를 희망합시다.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거룩한 공교회 안에서 이 땅의 모든 교회가 하나임을 믿습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일이 한국 교회와 우리 사회의 희망입니다. 교회가 불의한 이익과 편협한 이념에 휘둘리지 않도록 목회자를 비롯한 교계의 지도자들이 더욱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2020년은 해방 및 남북분단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 4·19혁명 60주년,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해방 이후 일련의 격변 상황과 연관된 중요한 기념일이 모여 있습니다. 대통령을 중심으로 정부와 국회와 사법체계가 시민단체와 경제 주체들의 활동과 조화를 이루어 우리 사회가 여러 갈등 현안을 극복하고 국제사회에서 더욱 충분히 강한 나라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랍니다. 세계한국인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최낙신 목사2020년 새해를 맞이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한 해의 역사의 장을 여셨습니다. 붉은 태양이 하늘 높이 솟아 그 웅장함을 통해 하나님이 다시 한 번 그의 영광을 온 지상에 나타내셨습니다. 새로운 한 해를 인류에게 허락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세계한국인기독교총연합회 및 산하 각 기독교 단체와 교회 및 성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지난 한 해는 우리의 삶속에 가난이나 재난 같은 여러 가지 사건사고가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세계교회와 믿는 성도들을 그의 능력의 팔로 보우하사 믿음을 굳게 지켜 가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늘 감사하면서, 새해에도는 하나님의 역사 운행의 능력을 믿고 나아갈 때 놀라운 일들이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새해에는 분열된 국민들의 마음이 치유되고 하나가 되어야만 합니다. 완전한 비핵화의 희망이 있었던 지난해의 기대가 이루어지는 평화의 새 물결이 이루어지는 새해가 되어야 합니다. 4월 15일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새로운 정치의 지평을 여는, 그래서 변화의 원동력도 변화를 이뤄내는 힘도 국민에게 있음을 선포하는 새해가 되어야 합니다.세계한국인기독교총연합회 산하 단체들과 교회들은 5대양 6대주 땅 끝까지 이르러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새로운 역사 운행의 섭리가 지구촌 구석구석 현장에 스며들어 어둡고 그늘 진 사회를 밝고 희망찬 세계로 변화시켜 갈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각오를 새롭게 하는 새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해설/기획
    2020-01-06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27
    이사야는 그가 살던 세상을 “사람들이 그 땅을 바라보면 어둠과 고통뿐이며 빛도 그 구름으로 인해 어두워 질 것이다.”(사 5:30)라고 기술하고 있다. 전운이 온통 팔레스타인에 뒤덮고 있어서 왕 아하스를 비롯하며 온 유다 백성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때에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아하스 왕에게 보내어 그를 안심시키시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라고 안심시키며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을 믿으라고 명하신다. 그 증거로 하나님은 처녀가 아들을 낳게 하실 것이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임마누엘은 그의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두고 일컫는 이름이다. 그리고 이사야 11장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처녀가 낳을 아이가 어떤 분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알려주신다. 이스라엘에게는 소망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안심을 시키고 격려를 하신 것이다.본문은 11:1-5은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한 아기의 정체와 그의 할 일, 6-10절은 그 아이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새 세상의 모습, 11-16절은 언약의 하나님을 배반한 남북의 이스라엘은 동족끼리 싸우다가 결국 망하게 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다시 불러 모아 서로 평화를 누리는 세상을 이루게 될 것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1절은 10절에서 반복되고 있다. 이것을 수미상관법을 사용하여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싹을 강조하고 특히 1절을 더 부연, 확장하여 설명하고 있다.이사야는 여기서 처녀가 낳을 아들, 임마누엘을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한 싹, 그 뿌리에서 나온 한 가지라는 비유로 말씀하신다(사 11:10).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이다. 그러므로 이새의 뿌리라함은 다윗의 후손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다윗에게 그의 왕조가 영원토록 이어가게 하시겠다는 언약의 말씀을 주셨다(삼하 7장). 다윗의 후손 가운데 임마누엘을 주신다는 것이다. 후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농부에, 자신을 포도나무에, 제자들을 가지에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을 보면(요 15장) 여기서 말하는 나무나 뿌리에 난 싹은 분명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을 가리키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이새의 뿌리에서 난 싹, 임마누엘은 어떤 분이신가? 여호와의 영이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여호와의 영이 어떤 영인가? 지혜와 분별의 영, 권면과 능력의 영,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라고 했다. 여호와의 영이 함께 하셔서 공의와 공평과 성실로 세상을 다스리고 재판한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다스리고 재판하는 지도자, 왕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바로 하나님의 지혜와 분별력, 전략과 전력, 지식과 겸손임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두 번째의 권면과 능력이라는 말은 설명이 필요하다. “권면”이라는 말을 개역성경에서는 “모사”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한국어의 모사는 간신들이나 반역자들이 꾸미는 음모를 의미하는 말같이 그 용도가 본문에 적절하지 않다. 히브리어 “에차”라는 말은 충고(advice), 상담(counsel), 계획(plan), 목적(purpose)이라는 뜻이 있다. “에차” 다음에 “그볼라”, 곧 “힘”(power), 그 파생어로 군대의 “장수”(기볼)라는 말과 연계해서 생각해보면 이 말은 주로 전쟁에서 사용되는 말이다. 전쟁에서 작전을 짜고 그것을 시행할 수 있는 기획, 곧 전략을 의미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힘, 곧 전력을 의미하는 말이다. 왕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백성을 위하여 전장에 나가 싸우는 것이다. 따라서 한 아기 위에 함께 하는 영은 작전과 전력을 가진 영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하나님은 아람 왕 르신과 북왕국의 왕 베가가 아무리 좋은 작전을 짜고, 이것을 실행할 수 있는 전투력을 동원하여 유다왕 아하스를 침공한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계획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하나님의 전략과 전력을 당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전략은 꼭 전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 세상의 역사를 기획하시고, 인생들의 생사화복을 섭리하시며, 그 뜻대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이시다. 심지어 우리 인생들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세고 계시는 분이다. 그래서 이새의 뿌리에서 난 그분에게 전략과 전력, 창조와 섭리의 영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리 인생을 기획하시고 인도하시는(control) 분이라는 것이다.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한 아기, 임마누엘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와 분별력, 전략과 전력, 그리고 지식과 겸손의 영이 함께 하시는 분이다. 아하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왕이었다. 시편 1편에 나오는 말처럼 “오만한 자”이다. 지식이 없이 오만한 왕은 자기도 망하고, 나라도 망하게 한다. 그런데 이사야 9장 6절에는 이 한 아기를 가리켜 “그 어깨 위에 통치권이 있으며, 그 이름은 위대한 상담자(전략가 혹은 섭리자)라, 전능한 하나님이시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 이새의 뿌리에서 낳은 아이가 바로 하나님이며, 아버지이시고, 평강의 왕이시라는 것이다. 임마누엘 한 아기로 오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는 세상을 다스리고 심판하시는 왕으로 오실 것이다. 그러면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한 왕, 곧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 될 것인가? 9절에 보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지식이 충만한 세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은 마치 에덴동산과 같다. 이리와 어린양, 표범과 어린 염소, 송아지와 젊은 사자가 함께 살고 누우며, 어린 아이가 이들을 이끈다.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뜯으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다. 이 말씀은 꼭 이대로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비유이다. 여기에 나열된 짐승들은 다 만나면 잡아먹어야 하고 잡아먹힐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적대감을 가진 약육강식의 원수들이다. 살기 위해서 먹고, 먹히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치지만 먹히지 않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임마누엘이 오시는 그날에는, 모든 생물들이 그들 사이에 있는 적대감을 다 버리고 한데 어울려 산다는 것이다. 평화로운 세상이 되는 것이다. 먹고 먹히는 세상이 아니라 함께 먹고 마시며,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싸우지 않고 어울려 사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이때 어린 아이가 이 야생 포식자들과 이들의 먹이감과 같은 존재들을 이끈다고 했다(6). 어린 아이가 자연 만물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10절에는 이때에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한 싹, 곧 임마누엘이 만민들의 깃발이 되고, 열방들이 그 깃발을 보고 찾아와서 안식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는 곧 “열방들의 안식처”가 될 것이며 그곳이 영화로울 것이라고 했다. 전장터에서 병사들은 앞에 나가는 대장의 깃발을 보고 따라간다. 임마누엘이 깃발이 되어 그를 표적 삼아 따르며, 그가 있는 곳에서 안식과 평화를 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 아기, 임마누엘은 하나님으로 오셔서 온 세상의 자연 만물과 세상에서 억압받고 상처받은 인생들에게 안식과 평화로 인도하는 길 안내자가 될 것이다. 여기서 특히 이 한 아기가 깃발로 선다는 모습은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모세가 광야에서 뱀에 물려 죽어가는 인생들을 살리기 위하여 놋뱀을 든 것 같이 자신도 십자가에 들려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 이사야서에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만민들의 깃발”을 가리키는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다.세상 만민들이 전략과 전력의 영이신 예수께서 무력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침으로 왕이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깃발아래 모여들 때, 이 세상에 참 평화와 안식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때야 말로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한 세상이 될 것이다. 평화를 원하는 자, 안식을 찾는 자, 말씀을 구하는 자들이 열방에서 다 이새의 뿌리에서 난 한 싹, 바로 그 깃발아래 모여들 때, 이 세상은 참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다. 임마누엘이 열방의 깃발로 서는 날 세상 사람들은 이 깃발을 향하여 모여들 것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모으실 것이다. 특히 여호와의 언약을 배반하고 동족상쟁의 남북전쟁을 일삼다가 다같이 멸망하여, 세상의 떠돌이 신세가 된 이스라엘 백성도 임마누엘 깃발아래 모여 지난날의 모든 적대감과 질투심과 증오심을 버리고, 다시 출애굽 때와 같이 여호와께 돌아와 그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남북 이스라엘이 이제는 임마누엘 안에서 서로 화해하고 화합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통일이 “임마누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하스는 이것을 믿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아시리아에 찾아가 조공을 바치고 스스로 분봉왕이 되어 원군을 청함으로 잠시 숨을 쉴 수 있었지만 유다는 바로 그 아시리아의 뒤를 이은 바빌로니아에게 망했다.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은 처녀가 어린 아이를 잉태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하게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굳게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다. 이사야는 한아기, 임마누엘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의 어깨 위에 통치권이 있으며, 그 이름은 위대한 상담자(섭리자)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불릴 것이다. 그의 통치력은 확대되고, 평화는 끝이 없을 것이며, 다윗의 보좌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부터 영원까지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할 것이니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사 9:6-7).전능하신 하나님, 평화의 왕이 세우시는 임마누엘의 나라, 그것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시고야 말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정세와 남북한의 대치 상황, 그리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국내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총체적인 불안정이 아하스 이상으로 우리의 마음을 짓누르고 두렵게 한다. 온 세상이 온통 아하스 시대의 이스라엘처럼 어둠과 불안으로 싸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 우리에게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임마누엘이 있다. 하나님은 세계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리의 생사화복을 control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선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고 멸망시키고, 우리 인생을 심판하고 죄와 죽음으로 몰아넣기 위해서 구원 사업을 시작하신 것이 아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살리고, 멸망에 처한 세상을 회복하시려는 분이시다. 궁극적으로 선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과 함께 하면 되는 것이다. 위대한 섭리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그분이 바로 한 아기, 임마누엘이다. 그분이 우리의 깃발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12-23
  • 학술/ 한국복음주의협의회 11월 ‘한국교회 목회자 자존감 회복 방향’
    본고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 11월 발표회에서 이윤호 목사가 발제한 ‘나는 소형교회 목회의 어려움을 이렇게 극복했다’의 일부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첫째,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문제국민일보 2017.10.21.일자 신문에 “한 해 문 닫는 교회 수 3000, 실패하는 원인 10가지” 라는 기사가 있다. 평신도 사역전문가가 말한 10가지는 다음과 같다.1.뚜렷한 목회전략 없이 개척 2.주님보다 사람에 의지하는 타성 3.교만한 일꾼 세움 4.헌금의 사유화 5.능력을 과신함 6.말로 상처를 줌 7.변질된 목회 동기 8.잘못된 친교 9.수평 전도 10.설교를 잘한다는 착각 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기사를 읽으면서 실패하는 원인이 목사에게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왜 목사가 된 것일까? 목사는 누구이고, 목회는 누구를 위해 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져 본 적이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면서 정체성문제를 이길 수 있었다.한동안 교회들이 활발하게 진행했던 노인대학이나 노인교실들도 이제 복지관, 문화센터에 어르신들을 다 빼앗겼다. 고령화 시대를 매력적인 시장으로 보고 이러한 기회를 잡으려는 시도들이 의식 있는 목회자들이나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있었으나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왜 그럴까? 첫째, 정보의 부족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엄두를 못 내고 있다. 둘째, 실버세대에 대한 이해부족이다. 연령을 고려한 사역을 준비해야 한다, 한아름교회를 개척하면서 먼저 실버목회를 왜 해야 하는지를 자신에게 질문하였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어떤 사역에 어떻게 집중하시기를 원하실까? 이에 대한 결론은 한마디로 “오직영혼구원” 이었다. 내 생각, 내 철학, 내 비전, 내 가치관, 내 욕심대로 목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만 목회를 해야 한다는 마음이다. ‘오직영혼구원’이 목회의 뿌리이며 기본이고 핵심이다 생각하니 이때 보이기 시작한 것이 실버목회였다. 영혼구원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세대가 실버세대이다. 주일학교는 중요하다, 다음세대를 위하여 반드시 세워야한다, 동시에 실버세대는 시급하다, 발등의 불이다. 그들이 기력이 더 쇠하기 전에, 세상을 떠나기 전에,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우선적으로 제공해야 한다, “더 이상 어르신들을 외면하지 말라!”둘째, 경제적인 문제개척을 시작하면서 매월 받는 사례는 없고 사택은 아내와 4명의 자녀, 총 6명의 가족이 생활하기에 비좁았다. 교회는 매월 임대료를 부담해야 되고 성도들이 드리는 헌금은 시작당시 매주 1만원 정도였다. 교회 임대료와 사역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했고, 후원자들을 찾아야 했다.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면서 주중에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처음으로 일한 곳은 시각장애인들의 예배를 위해 매주 월요일 차량운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받은 수입으로 가족들 주일헌금과 십일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17년 5월부터는 이웃교회에서 운영하는 주간보호센터의 차량운행을 하고 있다. 오전 오후 2시간씩 운행을 하면서 받은 월급은 교회와 사역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노회와 교회, 개인들에게 사역편지를 보내고 후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다행히 2015년 가을 노회 이후 노회와 몇 교회 후원으로 교회 임대료는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역을 위해 필요한 것이 있었다. 실버처치를 하면서 매주 사랑의 쌀 1Kg씩을 포장해서 나누어 드렸다. 개척초기에는 매주 20kg의 쌀 2포대 정도였지만 1년이 지나면서 3포대로 늘어나고, 2018년 겨울부터는 매주 20kg짜리가 5포대씩 나가고 있다. 개척 3년부터는 서울의 노숙자 기관에서 매월 20포씩의 쌀을 후원받아서 6개월 정도는 나눔에 어려움이 없었지만 2019년부터는 정부의 쌀값 인상과 후원기관의 어려움으로 더 이상 후원을 받지 못하고 교회와 개인 후원을 통해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셋째, 일꾼이 없는 문제실버처치를 매주 금요일 오후 2:00에 시작을 하였다. 매주 유인물과 간식을 준비하고 쌀을 포장하여야 한다. 처음에 20-30명 오실 때는 혼자서도 이것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런대 입소문이 나면서 30명, 50명, 70명 100명까지 이어지면서 혼자 감당하기는 어려움이 많이 있다. 다행히 자녀들이 장성하여 군대 재대후 복학 전에 도움을 주었고 사역을 위해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것이다.치매 친화적교회를 생각하면서 <올리사랑바이블센터> 안에 올리사랑봉사단 활동을 한다. 어르신들이 한 달에 한번 만두를 만들어서 이웃과 기관에 봉사하며 나누는 활동이다. 매월 1회 수요일에 만두를 500개정도 만들고 있다. 주민센터, 경찰서, 소방서, 장애인시설, 미화원등 다양한 봉사도 함께 하고 있다.<한아름 섬김프로젝트> 교회와 성도들의 사랑을 받았기에 목회자를 돕는 방법이 없을까? 기도하던 중 <종려가지> 한치호 목사님께서 도서를 후원해 주어서 안양노회(통합) 안에 있는 작은교회에서 부정기적으로 도서 1권씩을 보내드리는 일을 하고 있다. 또한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은 <해피시네마>를 통해 영화 1편씩을 감상을 합니다. 70-80년대 영화를 보면서 과거를 회상하고 치매예방을 도우며 전도하고 있다.주일예배에는 예배반주를 딸이 하였지만 이제 성장하여 다른 교회 예배반주자로 섬기고 있고 막내가 피아노를 배워서 예배반주를 돕고 있지만 대부분 반주는 반주기를 사용하고 있다. 교회 식당은 아내가 감당해 준 덕에 해결이 되었지만 그 외의 것들은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주일 예배에 평균 18명 정도가 참석하고 있다.소형교회에 다양한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이 모든 것을 목회자 부부와 자녀들이 하다보니 함께 동역할 일군이 절실히 필요하다.넷째, 예배 공간의 열악함개척자들마다 형편이 각기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50평의 공간에 반은 교회 반은 사택으로 하여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예배 공간이 협소하다보니 의자는 30개정도를 놓았다. 교육관을 함께 한다는 생각으로 테이블과 의자를 준비하였다. 예배 때마다 문제는 화장실이다. 사택 쪽에 화장실이 있다 보니 어르신들이 사택으로 와서 이용해야 했고, 주일 식사도 사택 식당을 이용하여 식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사택과 예배 공간 해결을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매주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어르신들의 수가 늘어났다. 매주 금요일 실버처치에 처음에는 30여명에서 1년 후에 50여명, 2018년 10월부터는 100여명까지 오시는 것이다. 예배공간이 더 이상 수용을 못하니 3층 계단까지 서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하나님 예배공간을 주옵소서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12월초에 같은 건물 4층을 임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재정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목회자나 교회를 통해 은행권에서 대출이 어려웠고 여러 가지 방법을 놓고 기도하고 있을 때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통해 임대(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50만원)와 예배당수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4층을 임대하고 교회수리를 위해 4일 동안 예배당 리모델링을 하고 매주 금요일 실버처치는 한 번도 쉬지 않고 할 수 있게 되었다. 예배공간에는 보조의자를 놓아서 80여명이 앉을 수 있게 되었고 목양실과 교회 창고, 식당을 구분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아직도 계단에 서 계시는 어르신들도 있지만 화장실은 편안한 가운데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다섯째,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개척초기 좋은 의도요 사랑이 담긴 동기에서 묻는 것이겠지만 개척교회 목사의 입장에서 교회의 상황과 처지에 대해 자꾸만 묻는 분들을 만나면 곤혹스러웠다. 특히 실버처치를 한다고 했을 때 돈으로 연결하는 모습에 심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고령화 시대에 실버처치 참 좋다고 하면서도 개인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냉랭한 것이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이 시대 시니어목회, 치매친화적교회를 세워야 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와 사역에 대한 보고를 하면서 이제는 앞서가는 준비된 목회라라는 반응을 듣고 있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신문들에서도 관심을 가져주었고(기독교연합신문, 기독공보, 가스펠투데이, 2018년 교회성장12월호), 매일 올리는 SNS 글을 보고 후원하며 기도 해주시는 분들도 있다. 또한 CTS 7000미라클 (2019.5 https://youtu.be/4pK4p43VV0E) 에서 자세하게 소개를 하여주어서 사역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기도해주시고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 해설/기획
    • 학술
    2019-12-20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26
    한국의 교회들은 대개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전후에 성례식을 거행한다. 특히 성만찬을 베푸는 일을 한다. 거룩한 성만찬에 참예하기 위하여 집례자들은 물론 성도들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주님께서 주신 그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신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주시는 살과 피에 대해서 그 의미를 잘 아는 자들은 많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성만찬에 참여하며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성만찬이 예수께서 제정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예식은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 곧 유월절 밤에 그의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시며, 제정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빵을 들어 감사 기도하시고,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나의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여라.”고 말씀하셨다, 식후에는 잔을 드시고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26절에서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 분이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친다. 이 말씀대로 성찬 예식은 주님의 죽으심과 더불어 주님의 부활과 재림을 고대하며, 주님의 재림 때까지 행해야 할 제자들의 사명을 새롭게 다짐하는 예식이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주께서 왜 죽으셨는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선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례에 참예할 때마다 그의 우리를 위한 대속 사역에 감사하고 찬송하며, 우리에게 주신 무거운 사명감을 새롭게 다짐해야 한다.예수께서는 그의 성만찬에 참여한 자들에게 빵을 떼어주시며 그 빵을 “너희를 위한 몸”이라고 칭하셨고, 포도주를 가리켜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후에 그를 왕으로 삼고자 찾아온 무리들에게 “내가 곧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니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다.”(요 6:51)고 말씀하셨다. 또한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이 없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마다 영생을 가졌고,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요한 6:53-55)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광야에서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주님은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는 주께서 하나님의 거룩한 한 분이심을 믿고 알았습니다.”(요한 6:68-69)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주시는 양식과 음료가 바로 “말씀”이라는 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만찬 석상에서 주시는 빵과 포도주가 바로 예수께서 광야에서 무리들에게 주신 그의 살과 피이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그 예수님의 살과 피, 그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자신인 말씀이었다(요한 1:1, 14). 그 말씀이 우리에게 왜 그렇게 필요한 것인가? 그런데 이것을 왜 주시는 것인가? 요한복음 6장 56절은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내가 네 안에 네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루는 온전한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만찬은 바로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예수님 안에 있는 신비한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예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며, 말씀은 성령과 비분리의 관계이기 때문에,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며,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우리를 예수님과 연합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만찬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예수님과 연합을 이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성만찬은 우리 제자들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고, 또한 성만찬을 통하여 우리 성도들이 연합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성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한 날, 한 시, 한 자리에서 함께 먹고 마심으로 우리가 한 몸이고, 한 지체가 됨을 확인하고 다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만찬을 통하여 우리 개개인이 한 몸 받고, 한 피 받은 그리스도의 형제이고, 자매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만찬은 연합의 자리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신비한 몸을 이루는 자리임을 감사하고, 찬송하며, 즐거워하는 자리이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나누는 식사 자리에서 그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떡을 떼시며 그것을 그의 몸이라고 칭하셨고, 포도주를 가리켜 흘리는 그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십자가에서 찢겨지는 그의 몸을 마치 떡덩이가 찢겨지는 모습으로 비유하시고, 그가 십자가에서 흘리는 그 피를 붉은 포도주에 비유하신 것이다. 그의 살과 피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포도주를 주시며 계속하여 “너희 모두 이것을 마셔라. 이것은 죄 용서를 얻도록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마 26:28)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주시는 포도주가 예수님의 피를 의미하며, 그것은 우리 모두의 속죄를 위한 언약의 피라는 것이다. 여기서 “죄 용서를 얻도록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 개인이, 많은 사람의, 죄 용서를 위해서, 피를 흘린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많은 사람이 죄인이며, 그들의 죄 용서를 위해서, 자신의 피, 곧 자신의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과 맺는 이 언약은 예수께서 유월절 전날 밤에 제자들과 나누는 새 언약의 성만찬에 대한 모형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주시며 그것이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속죄의 피”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그것은 “새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고 부활하심으로 아담의 죄 값을 치르셨음을 증명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새 언약을 맺으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 죄인들은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죄인들이 이제 새 언약의 백성이 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새 아담의 모든 요구조건을 완전히 충족시키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이제 하나님 앞에서 아담을 대신한 모든 신분과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새로운 왕이요, 새언약의 우두머리가 되어 모든 피조물이 그의 발아래 놓이고, 그의 새언약의 연대성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이 새 언약을 주실 것을 미리서 예고하셨다(렘 31:31-34).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구속역사의 모형으로 쓰시고자 선택한 백성이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었기 때문에 이제 이스라엘의 역할은 끝난 것이다. 우리는 이제 베드로처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새 언약의 우두머리로 우리의 왕이 되심과 그의 피의 피값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음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다. 예수께서 대속적인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었으며, 그와 연대성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사람이 되었고,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다. 나아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됨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왕이 되고, 제사장이 되고, 선지자가 되었다. 예레미야는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을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결혼예식으로 비유했다. 마찬가지로 새 언약 안에 들어간 우리도 새 언약의 주이신 예수님의 신부가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장로들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후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셨듯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들도 이제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성만찬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새 언약을 기리는 언약식사인 것이다. 우리는 그가 주신 빵을 나누고 포도주를 마시며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며, 새 언약의 머리가 되신 예수님의 헌신과 사랑을 찬양하고, 우리가 예수님의 새 언약의 백성이 된 것을 감사하는 축제를 가지는 것이다. 물론 주홍같이 붉은 죄를 씻어주시고, 나 같은 죄인을 그의 백성으로 받아주신 주님을 생각하면 주님의 죽음 앞에 거룩하고 엄숙해야 하겠지만 예수님의 성만찬은 본질적으로 언약축제(Covenantal Festival)이다.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예식이다.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새 언약의 백성이 됨을 감사하고 찬양하며 영광 돌리는 성찬식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만찬은 예수께서 주신 복음전파의 사명을 새롭게 다짐하는 날이기도 하다.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 예수님의 몸, 예수님의 말씀을 주님의 재림의 날까지 전파해야 할 자들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왕권이 확립되고, 더 이상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그 이웃에게 하나님을 알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나라를 만드는 일에 우리가 동참하고, 헌신해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12-06
  • 학술/ 시대의 위기 속에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3
    본고는 지난 11월 11일 국제독립교회연합회가 주최한 ‘제8회 전 회원교육’에서 정일웅 목사가 발제한 ‘현 시대 속 목회자의 나라사랑’를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주 저는 개인적으로 현 정부와 우리 대통령이 참으로 안타깝게 여겨지는 것은 공산주의적이며 사회주의적인 정치체제의 이념실험(1919년-1990년)은 벌써 구소련과 동유럽에서 실패한 작품이며, 폐기처분 된 것이 언제인데, 이제는 대한민국과 한반도에서 그 실패한 이념을 또 실험하려고 선동하고 용납하려는 그 어리석음의 행동입니다.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의 나라들은 일찍이 공산주의적이며 사회주의적인 정치이념이 개인의 자유를 전제하지 않는 정치상황에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줄곧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적인 시장경제이념체제를 분명히 전제한 가운데, 자본주의가 초래하게 되는 빈익빈 부익부의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하여 사회주의적인 이념을 접목하여, 동독공산주의와의 체제경쟁에서 서독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제부터라도 북한이 꿈꾸는 대한민국의 “체제전복”이란 주체사상의 망상에 사로잡혀 위장된 평화와 통일의 주장을 당장 중단하고, 어디까지나 대한민국의 미래는 대한민국의 역사적인 국가체제의 정통성을 가진 자유민주주의체제와 헌법을 존중하는 전제하에, 서유럽의 나라들에서 성공한 기독교적인 사회주의, 또는 사회주의적 정당의 허용을 실험하는 논의를 이제부터 시작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러한 방식을 조심스럽게 한국정치인들에게 제안하고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의 정당정치에서도 기독교사회주의 정당이나, 사회주의 적인 정당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미래정치는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지금까지 견지해 온 자유민주체제와 시장경제체제의 자본주의를 견고히 전제한 가운데서의 허용을 생각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결코 아님을 이해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미 해방이후 지난 74년 동안 겨루었던 남북한의 정치이념의 체제경쟁은 분명히 북한이 실패한 것이기 때문에, 북한은 핵무기로 더 이상 정권연장을 꾀하지 말고, 동독처럼 솔직히 우리 대한민국에 북한정부를 자발적으로 넘겨주는 것이 최선일 것이며, 만일 더 유지하겠다면, 또 다시 백년의 세월이 흘러간다 할지라도, 성급한 남북통일을 기대하지 말고 지금부터 인도적 차원에서 서로 협력과 경제적인 지원을 통한 교류를 순차적으로 해 나가는 과정을 밟아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 대통령은 남쪽 대통령이 아니라, 당당히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남북관계를 선도해야 하며, 국제관계를 견지해가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전광훈목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성도들이 왜 광화문에서, 청와대 앞에서 밤을 새며 하나님께 기도하며. 울부짖고 있는지를 현 집권당과 대통령은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납득할만한 대통령의 솔직한 대답을 내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국론분열의 단초를 제공한 분이 대통령이며, 그것을 수습해야 할 분도 바로 대통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든 한국교회의 목회자들 또한 지금 돌아가고 있는 한국정치의 현안들을 직시하며, 이웃사랑과 나라사랑의 공동의 책임을 함께 짊어지고 갈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한국교회는 그간의 지나친 개인주의적이며 자본주의적인 사고에 물들어 교회의 재산을 사유화하려고 했던 과오를 인정하고, 여러 교파들로 분열시키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교회공동체를 이해하지 못했던 실수들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작금에 일어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치적 상황을 예의 주시하면서, 일전에 기독언론지에 설교문(칼럼)하나를 또 발표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12장41-45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작성했던 것인데, 정확히 말씀드리면, 임우성목사님께서 기독언론지에 게재하겠다고 설교문 하나를 작성해서 보내주시라고 해서 쓴 글입니다. 제목은 “지금은 대통령을 위해 기도할 때입니다.”라는 한국교회 성도님들에게 호소하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인용했던 성경본문의 말씀은 한 사람에게서 떠났던 악령이 되돌아와 깨끗하게 수리된 집에 더 악한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와서 그 집을 온통 지배함으로, 그 사람의 형편이 이전보다 더 악해지게 되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 단락의 말미에 “이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고까지 말씀했습니다(45).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전체사역이 악령(귀신)을 내쫓는 일임을 제자들에게 상기시키면서, 그러한 일들이 발생한 곳에는 자칫 잘못하면, 도리어 쫓겨난 악한 영들이 더 많이 들어와서 현재의 상황보다 더 악한 상황을 만들게 될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행한 사태를 대비하는 유일한 대책은 선한 영들로 그 빈집을 가득 채우게 하는 것이며, 예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유지를 통하여 예수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인 성령으로 그 집을 가득 채우게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준 것입니다. 즉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예수의 복음을 더욱 열심히 전파하는 일임이어야 함을 깨우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목회자 여러분, 생각하면 바로 3년 전, 한국정치는 그 당시 박대통령을 탄핵하였고, 우리사회에 만연된 정치권력남용의 적폐(불의)가 청산되며, 불의한 법과 제도가 고쳐지는 정치개혁의 과제를 안고, 새로운 대통령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리고 문대통령은 취임사를 통하여 ‘기회는 평등하며,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말한 공약(의지)은 국민들에게 큰 감동과 기대감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2년 반이 지나는 지금, 대통령의 공약은 빈공약이 되어가는 듯하며,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한 그 말은 바로 지금의 이러한 혼란스러운 나라를 말한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도 됩니다. 역시 정치인의 레토릭(수사)은 참으로 현혹스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 때가 그토록 국민의 불신을 받던 법무부장관후보자를 임명한 때였습니다. 매스컴의 연일 보도는 자신뿐 아니라, 그의 가족의 불의한 행태들이 알려지면서, 오히려 문정부의 인물들이 적폐의 대상임을 국민들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후보자 지지자들과 반대자들의 소요는 광화문과 서초동에서 극을 치닫고 있는 모습이 지난 10월 이었습니다. 이러한 대통령의 정치행위는 더 심각한 국론분열로 이어졌고, 결국 우리 사회는 참으로 악한 영들에 지배당하는 정황으로 돌변하였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저의 마음에는 우리 문대통령이 또 탄핵당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와 함께 예수님의 이 본문말씀이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악한 세대가 또한 그렇게 되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사회가 3년 전에 박근혜정부의 부패와 불의를 비난하면서 대통령을 탄핵했던 일이 또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 한국교회는 대통령을 위하여 기도할 때입니다”라는 제목으로 한국교회의 성도들에 기도를 호소하였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우리사회의 국론이 분열되지 않고, 우리 대통령이 국민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며, 정치가 화합과 안정을 되찾고, 우리 국민들의 염원인 올바른 사법개혁이 이루어지며, 평등하며 공정하며, 정의로운 사회로 발전되도록,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임하게 되기를 기도할 것을 제언했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 대통령은 참으로 포용적인 리더십을 발휘하여 지지자만이 아니라, 반대자의 대통령이 되어 남남갈등을 극복하며, 마침내 남북평화통일의 초석을 놓는 일에 크게 기여하는 대통령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기를 호소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목회자의 나라사랑의 적극적인 방법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수많은 교파들로 분열된 한국교회가 하나로 연합하는 방법입니다. 그간 한국교회가 분열하면서도 연합활동을 중요하게 여기고, 또 여러 개의 연합체들이 생겨나 있기도 합니다(한기교연, 한기총, 한교연, 한장총, 한장연, 한교총). 그러나 이러한 연합기관들은 저의 소견으로는 제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것 같아 역시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러한 때에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연합기관에서 목회자의 나라사랑의 방법을 적극적으로 대처한다면, 개인이 각각 행동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전도서 4장11-12절을 인용하면,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 하느니라” 아멘!  한국교회가 이와 같이 하나로 연합하여 해야 할 책무는 크게 5섯 가지로 봅니다. 첫째는 전 세계의 복음전파를 위하여 함께 모여 선교전략과 방법을 협의하여 세워야하며, 둘째, 사회봉사의 역할을 감당하며, 셋째, 이단적인 가르침을 방어하고,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며, 넷째. 신앙의 가르침을 통일시키며, 다섯째, 대사회, 대정부 및 정치, 대 북한, 대 국제적으로 대두되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하여 한국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향력을 사회적으로 더 크게 미치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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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
    2019-12-06
  • 학술/ 시대의 위기 속에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2
    본고는 지난 11월 11일 국제독립교회연합회가 주최한 ‘제8회 전 회원교육’에서 정일웅 목사가 발제한 ‘현 시대 속 목회자의 나라사랑’를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주 2. 세상나라의 정치와 권력은 언제나 하나님나라와 복음의 관점에서 주목하고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목회자들은 세상나라의 일들, 특히 정치와 권력사용과 관련하여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판단하며 행동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의 대답은 역시 “하나님나라와 복음의 관점에서 세상나라를 직시해야 합니다. 이러한 시각을 보여주는 성경말씀은 바로 로마서13:1-7절 사이에서 발견합니다. 1절에서 바울은 “각 사람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고 일러줍니다. 그 이유는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으며,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말씀합니다. 즉 세상정부와 정치와 권력(칼)은 그들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 때문에 오늘날 세상나라의 최고 권력자이며, 통치자인 대통령이 국민의 손에 의하여 뽑아 세워지는 민주적인 과정을 거치게 되지만, 역시 권력자는 하나님이 세우셨음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과 경륜과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불신앙 자가 통치자가 된다 할지라도, 그를 통하여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사도바울은 세상정부의 정치권력은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며, 그것은 근본적으로 천지만물의 주권자이며 통치자이신 하나님이 하신 것이며, 또한 하나님은 이와 같이 세상정부를 통하여 인간사회의 질서가 지탱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1-2), 그리고 국가의 사법적인 권력(칼)을 통하여 선이 포상을 받으며, 악이 징벌을 받게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3-4). 그것은 현대적으로 말하면, 입법권과 경찰권과 사법권의 행사에 해당하는 것이며, 사회적으로 선과 악의 분별을 통한 통치권의 상징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의 통치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5절에서 권세자들에 대한 복종은 우리 기독인들이 양심으로 행할 것과, 6절에서 각종세금납부에 관한 것을 말하고 있으며, 7절에서는 국가의 다양한 대표자들에 대해, 기독인들은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는 질서의 중요성을 일러줍니다(벧전2:17). 그러나 바울은 이 본문에서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국가의 통치 권력이 악을 저지르며, 총체적인 불의를 행하는 국가로 전락될 경우에 그 통치자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자세히 말해주지는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깊은 신학적인 행동철학의 통찰이 요구된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교훈하시는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더 깊은 이해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은 천국(하나님의 나라)복음을 전파하시면서, 병행했던 일이 바로 병자치유와 특히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는 사역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지상사역의 전체를 종합하면, 귀신(악령)을 내쫓는 모습으로 요약됩니다(막9:14-29,마8:28-34,마12:22-30). 여기에 귀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부정한 악한 영(사탄)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러한 귀신축출사역은 역시 복음전파의 맥락과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즉 귀신축출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곳에서 하나님의 영, 즉 예수의 영이 임하는 자리를 내어 주고, 악한 영들이 쫓겨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것은 또한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영역이 확장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국 기독교(교회)의 복음전파는 이 땅에 그리스도의 통치영역의 확장이며, 동시에 세상의 악한 영들과 대립하여 싸워야 하는 영적전쟁을 뜻합니다. 악한 영을 쫓아내고, 그리스도의 영이 다스리는 환경으로 바꾸는 일이 기독교복음전파의 사명입니다. 그 때문에 사도바울은 벌써 성도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전심갑주를 입으라고 권고하였으며, 우리의 씨름(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한 것”(엡6:10-13)임을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지상의 교회는 예수의 영(성령)에 붙들린 택함 받은 성도들을 모으는 곳일 뿐 아니라, 이 땅에 정의롭고, 공정하며, 평화로운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도록 복음의 영향력을 사회적으로 미칠 하나님의 일꾼을 양육하며, 훈련하는 영적전쟁준비의 장소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세상정치를 예의주시하며, 특히 그곳에서 악한 영들이 좌지우지하는 환경이 되지 않도록 항상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나라가 확장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복음의 사회적인 책임(빛과 소금의 역할) 때문에 유럽에서는 세속정부에 기독교정당이 생겨나기도 합니다(유럽에서 독일은 대표적인 나라입니다). 생각하면 세상의 통치자, 또는 권력자가 기독인이라면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하나님 앞에서 더 분명하게 인식하고 사명을 책임 있게 수행할 것입니다(미국의 트럼프대통령처럼). 그러나 비기독인의 통치자라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오늘날 민주화가 이루어진 국가에서는 국민을 위하고, 인권존중과 사회적 약자보호와 사회복지실현을 통한 경제평등과 평화지향의 환경조성에 정치적인 책임을 다하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불신자 통치자를 통하여서도 하나님나라와 복음의 가치실현이 땅에서 부분적으로 이루어짐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의 나라사랑은 그런 점에서도 선한 정치가 펼쳐지기를 위하여 대통령과 위정자들을 위해서 주일 공 예배에서 기도하는 일을 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각 지역의 교회들은 국회의원과 각 지역의 시장, 구청장, 경찰과 각 주민 센터의 장과 직원, 통반장들을 위해서도 하나님께 기도해주는 나라사랑이 동반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자의 나라사랑의 중요한 방법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국가의 통치자들의 모습이 그 반대일 경우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를 통하여 불의한 일과 부당한 정치행위에 대하여 선지자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면 우리는 청와대 앞과 광화문에서 대통령하야운동을 벌써 6개월째 지속하고 있는 광훈목사의 나라사랑 행위를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여전히 질문입니다. 물론 그분의 행동에 대한 한국교회의 찬반견해가 있는 줄 압니다. 지난 8월경 한 통계는 전광훈목사의 행동에 대한 여론이 반대가 86%, 지지가 14%로 보도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11월의 여론은 오히려 정 반대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지지자의 상승으로). 다만 본 강연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전광훈목사가 내건 시국선언과 투쟁에는 중요한 명분이 포함되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이 부정되고, “자유민주주의”적인 정치체제가 무너지게 되는 국가적인 위기에 관한 그의 통찰입니다. 아마도 전목사는 이러한 중요한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관한 가치가 대통령과 집권여당에게서 잘 계승되기보다는 허물어지는 위기감을 느낀 것 같습니다. 특히 대통령의 그간의 친북성향의 언행에서 의심과 불신을 가진 것이 분명합니다(전목사가 제기한 7가지 대통령정책비판참고). 물론 전광훈목사의 지나친 기우이거나 오해일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문대통령이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북미회담의 중재자역할에서 보여준 그간의 지나친 친북적인 언행들이 단초가 되었으며(평창동계올림픽 연설에서 6.6현충일 연설에서 김운봉(신영복)을 거론한 일), 더욱이 현 정권의 배후세력으로 회자된 소위 정치권에 등장한 주사파인물들의 활약과 관련하여 결코 단순한 루머로만 넘길 수 없는 근거들이 드러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목회자들의 나라사랑은 현 정치시국을 예의주지하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특별히 문대통령의 정치사상이 자유대한민국의 역사적인 정통성을 얼마나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지가 질문되며, 무엇보다도 이승만정부와 박정희정부로 이어진 자유대한민국의 역사와 정치체제를 의도적으로 부정하며, 오히려 대한민국건국의 역사를 1919년 3.1운동과 1919년 4월11일 상해임시정부수립으로 보려는 대통령의 주장에서 불신이 증대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수년간 전교조들에 의하여 한국역사가 왜곡되어 우리의 청소년들에게 교육된 좌편향(친북)적인 교육행위들은 결코 한국교회가 외면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 대통령이 종교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북한을 너무 쉽게 판단하여, “우리민족끼리”라는 단순한 민족감정을 앞세워 그토록 회자되고 있는 연방제통일을 정치적으로 고집한다면,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분명히 이의를 제기하고, 전광훈목사와의 반정부투쟁에 함께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우리사회의 젊은이들을 충동하던 촛불시위논리와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이란 정치논리만으로는 엄청난 종교박해의 역사를 경험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을 납득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대통령과 여야 정치권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 해설/기획
    • 학술
    2019-11-22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26
    종교개혁기념 주간이다. 독일의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31일 비텐버그 교회의 담벼락에 면죄부의 타당성에 대한 95개항의 신학적 토론을 제의하는 대자보를 붙인 날이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교회 개혁의 물결이 온 세상을 덮치게 되었고, 개신교의 시발점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 한국처럼 개혁을 외치는 나라는 없을 것이고, 또한 아무리 외쳐도 개혁이 안 되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 등 어느 부분에도 개혁이 요구되지 않는 분야가 없는, 총체적인 개혁이 요구되는 사회이다. 그러나 요사이는 종교개혁이라는 말처럼 부담스러운 말이 없다. 개혁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개혁을 외치기 때문에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개혁이라는 말에 피로감을 느끼는 것이다.종교는 사회의 양심이다. 따라서 사회가 개혁되려면 먼저 종교, 특히 기독교부터 개혁되어야 한다. 기독교가 썩으면 사회가 썩는다. 전 세계의 문화 문명은 기독교의 사상과 철학, 윤리와 도덕의 기초와 틀 위에서 발전해왔기 때문에, 기독교가 제 구실을 못하면 기독교가 오히려 사회에 엄청난 해악을 끼치게 되며, 기독교가 무너지고, 그 틀이 깨어지면 세계는 붕궤되고 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독교는 그 본질상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하며 인류의 갈 길을 밝혀주는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 종교이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새롭게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 개혁주의의 주장이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The Church must always be reformed). 이 주장은 1674년, 네델란드, 암스텔담의 야곱 반 로덴스타인이 처음 주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회는 개혁된 상태로만 항상 있어도 안 되고,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기독교가 개혁이라는 말을 마치 이미 완성된 개혁을 항상 새롭게 개혁되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해왔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시초부터 깊은 관심을 갖지 못한 점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미완의 종교개혁”을 마치 “완성된 종교개혁”처럼 생각하고,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온 것이다.종교개혁자들은 “만인 제사장”론을 주창하였다. 카톨릭의 제사제도가 성경적이 아님을 밝혀내고, 우리 모든 성도들이 다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이라고 가르치고 주장했다. 위대한 발견이요, 교회를 개혁하는 핵심적 기치가 되었다. 에덴동산의 아담이 가졌던 제사장직은 아담의 타락으로 그 본래적 기능을 할 수 없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아담을 대신한 언약적 연대성의 우두머리가 되어 온전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 그와 함께 언약적 연대성 안에 들어간 우리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제사장들이 된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들이고 거룩한 나라이다”라고 가르치며(벧전 1:9), 요한도 계시록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하나님, 곧 그분의 아버지를 위하여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다고 가르친다(1:6; 5:10). 그러나 에던 동산의 아담은 제사장직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왕직도 있었고 선지자직도 있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처음 만드실 때 사람을 그를 대신하여 그의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우기 위하여 그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으시고, 그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모든 만물을 다스리라는 왕으로서의 사명을 주셨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선지자적 직분도 주셨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그 말씀을 해석해 주고, 그 말씀을 적용하여 순종하며 살도록 가르치는 일을 하는 자이다. 아담이 모든 생물의 이름을 짓는 것이 왕으로서의 하는 일이라면, 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으면 안 된다는 바르게 대언하고, 모든 생물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고 가르치는 것이 선지자로서의 일이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지 못하고, 바로 해석하지도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여 타락하게 되었고, 그와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죄와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왕이요, 새로운 선지자로 오시고,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예수님과 언약적 연대성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과 함께 한 왕,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한 선지자가 된 것이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 주중의 주로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왕도를 가르치셨다. 세상나라의 왕들은 백성들을 지배하고 착취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왕들은 낮아져서 백성을 섬기는 왕이 되라는 것이었다(막 10:45). 그러나 이 시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왕도를 버리고, 세상 나라의 왕이 되어 하나님의 양떼들을 짓밟고, 핍박하고, 착취하는 세상이 되었다. 예수님의 몸 된 교회의 지도자들은 세속의 권세를 탐하며,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시류를 따라가기에 바쁘신 몸이 되어, 종교개혁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여전히 미완의 개혁이고 계속 개혁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그러나 선지자로서 직분은 종교 개혁시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선지자가 되었다는 것을 입으로 잠간 언급했을 뿐 별로 깊은 관심을 갖지 않았다. “만인 제사장”이라는 직분과 더불어 “만인 선지자”라는 직분도 있어야 하는 데 만인 선지자라는 말은 낯설기만 하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선지자였다. 아담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모든 생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다스려야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타락한 선지자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선지자들을 세우셔서 아담의 실패를 바로잡는 대 역사를 시작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노아의 후손, 아브라함을 불러 그를 선택하신 목적을 밝히시며 그의 후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라는 선지자적 사명을 맡기신다(창 18:18-19). 그리고 그를 성경에서 최초의 공식적인 “선지자”로 부르신다(창 19:7). 모세를 비롯하여 이스라엘의 70인의 장로들을 선택하여 이들에게 모세에게 주셨던 영을 주어 예언하게 하신 것도 400년 동안 바로의 노예로 살면서 몸에 배인 노예근성을 뽑아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법을 가르치는 선지자로 부르신 것이며, 이때 모세를 통하여 “여호와께서 그분의 영을 모든 백성에게 주셔서 모두 선지자 되게 하셨으면 좋겠다”(민 11:29)는 원대한 세계적인 뜻을 밝히신다. “모든 백성이 선지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종말의 뜻이다. 만인이 선지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에게 세상 모든 사람들의 가슴 판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 하나님을 알라고 전도할 필요가 없는 세상을 만드시겠다는 새 언약을 주신다(렘 31: 31-34). 요엘에게도 종말에 모든 백성에게 그의 영을 부어주시어 예언하는 선지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셨다(요엘 2:28-29). 결국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대선지자로 오신 예수께서는 직접 말씀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셨다 (막 1:38).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모세처럼 그의 영을 제자들에게 보내셔서, 성령세례를 통하여 선지자로 인치시고, 전 세계의 선지자로 내 보내셨다(마 28:16-20).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선지자 예수님처럼 선지자로 전 세계, 모든 민족에게 나가서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마가복음은 온 우주에 나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적고 있다(막16:15). 만인을 선지자로 세워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땅에 전쟁이 없고, 원수 맺는 것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사 11:1-9). 그래서 종교 개혁의 궁극적인 목표는 “만인 제사장” 뿐만 아니라 “만인 선지자”가 되게 하여 만인의 가슴 속에 말씀 새기는 일이어야 했다. 그러나 500년 동안 교회는 이신칭의, 만인 구원, 만인 제사장 등의 구호에 매달려 정작 만인 선지자의 하나님의 비전은 강조하지 못하였다. 미완의 종교개혁을 붙들고 교회 개혁만 부르짖은 셈이다. 물론 칼빈이나 투터, 쯔잉글리 같은 분들은 당대에 선지자로서의 성경해석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종교개혁의 이론을 정립시킨 위대한 업적을 남겼고, 또한 이들의 선지자적 활동은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을 했다. 그러나 성도들의 “만인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적극적으로 강조하지는 않았다. 이 사명을 교회에 정착하게 하지는 못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여러 가지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평신도들이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을 금해왔다. 그러나 누구든지 세례를 받은 사람은 선지자로서 헌신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대선지자 그리스도께서 분부하신 명령이다.물세례는 제자들을 선지자로 세우는 성령세례의 가시적인 의식이다. 물세례를 받음으로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룰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는 선지자가 되는 것이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들어가 대선지자 그리스도와 함께 선지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대언하고, 말씀을 바로 해석하고, 말씀을 바로 적용하고 순종하도록 가르치는 선지자적 사명을 받았다. 우리는 물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성령 세례를 받고, 선지자로서 인치심을 받고 세우심을 받은 자들이다. 기독교의 종교개혁은 이제 “만인 선지자”의 기치를 들고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한 세상을 향하여 나가야 한다. 모든 성도들이 말씀을 가르치는 성경선생이 되어야 한다. 말씀이 선포되고 가르치는 곳에 성령은 역사하신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11-18
  • 학술/ 시대의 위기 속에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본고는 지난 11월 11일 국제독립교회연합회가 주최한 ‘제8회 전 회원교육’에서 정일웅 목사가 발제한 ‘현 시대 속 목회자의 나라사랑’를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주 문제제기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매우 혼란스러운 나라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느껴지지 않으세요? 매 주말만 되면, 광화문 사거리에는 “대통령하야”를 외치는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있으며, 서초동 검찰청 앞과 여의도 국회 앞에서는 친정부를 위한 데모로 야단들입니다. 왜 우리 대한민국이 이렇게 되었을까요? 우리 대통령은 이러한 혼란스러운 모습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아요! 너희들 떠들어라, 권력은 내가 쥐고 있으니,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오기로 청와대 안에서 버티고 계신 것 같습니다. 대통령 은 그의 취임사에서 참으로 감동을 주는 멋진 말 하지 않았던가요? 나를 반대하는 사람들과도 광화문에 나가서 기꺼이 만나 함께 대화하겠다! 역시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달라야 하는가봅니다. 존경하는 목회자 여러분, 중요한 것은 지금 이념대립이 극렬해지고 있는 혼란스러운 현 시국상황을 경험하면서,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던져진 화두는 “목회자의 나라사랑”에 관한 주제입니다. 우리는 목회자로서 나라사랑의 방법을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목회자의 나라사랑”은 과연 청와대 앞에서 전광훈목사처럼 행동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 대통령처럼 가만히 시간이 지나가도록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 것이 나라사랑일까요? 곤란한 질문입니까? 그러면 이렇게 질문해 보겠습니다. 전광훈목사는 왜 청와대 앞과 광화문광장에서 벌써 약 6개월째 저렇게 “문대통령하야”를 외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합법적으로 국민투표에 의하여 선출된 대통령을 그렇게 물러가라고 막무가내로 소리치는 것이 정당한 행동일까요? 아마도 전목사님은 3년 전 박근혜대통령의 탄핵 상황을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됩니다. 그는 비록 한국교회의 한 목회자요, 소위“한기총대표”라는 직함을 가진 자로서 이와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그것이 과연 목회자의 참된 나라사랑하는 모습인지? 먼저 질문됩니다. 잘 아시는 대로 처음 전광훈목사가 이러한 행동을 시작했을 때(6월), 소위 한국교회의 자칭 원로님들이 기자들 앞에서 전목사의 행동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대통령하야를 외치려면, 목사직 내려놓고, 정치인의 이름으로 행동하라고 충고했습니다. 한기총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기관이 아니라고, 그 대표직도 내려놓으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저는 그 기자회견을 보면서, 질문이 생겼습니다. 전목사가 목사직을 내려놓고, 한 정치인으로 행동하라는 비판에는 동감하지만, 그러나 전목사가 지금 제기한 대통령의 정책실패와 국론을 분열시키는 언행과 관련된 7가지를 지적한 대통령을 향한 전목사의 비판은 정당해 보였으며, 그 문제의 당사자인 대통령을 향해서는 한마디도 충언하지 않는 원로님들의 행위가 참으로 아부하는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존경하는 목회자 여러분, 목회자가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목사이전에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인 줄 압니다. 아마도 전목사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국가가 위기에 처하여 있다면, 어떤 면으로라도 목회자는 당연히 나라사랑의 의지를 표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로서의 나라사랑에 관한 표현과 행동은 과연 어떤 것이 좋은지? 이러한 질문에는 역시 신중성이 요망됨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1. “정교분리원칙”에 관한 올바른 이해요망 한국교회는 오래전부터 “정교분리”라는 원칙을 고수해 왔습니다. 그 때문에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국가의 통치자가 독재를 하거나 잘못해도, 교회는 오직 침묵하고, 조용히 기도나해 주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정교분리”라는 이 원칙이 왜 생겨난 것인지? 그 본래의 의도를 정확히 알고 보면, 한국교회가 그간 얼마나 오해하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즉 그것은 교회가 국가(정치)에 대하여 간섭하지 않고 침묵해야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국가(권력)가 교회를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어디까지나 국가는 교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뜻에서 제시된 원칙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전광훈목사의 행동은 이러한 원칙을 바로 잡아, 행동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목사는 그가 청와대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시작하면서 그의 행동에 대한 명분을 히틀러 독재정치에 맞서서 외쳤던 본회퍼의 말을 인용하면서, “미친 운전수에게 운전대를 맡겨서는 안 된다”는 유명한 말인데, 이 말을 내세우면서 전목사님은 그의 행동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대통령하야”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전목사를 향하여 우리 모두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문제인대통령이 과연 독일의 독재자였던 히틀러와 동일시할 수 있는 일인가?” 전목사의 시각에서는 그렇게 비쳐졌는지 모르지만, 국민 다수의 시각에서는 전목사의 지나친 오해가 아닌가? 지금 반박되고 있기도 합니다. 원래 “정교분리”의 원칙은 미국 3대 대통령 제퍼슨이 미국 헌법에 제정한 것인데, 그의 의도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역으로 간주된 교회를 정부나, 정치권력이 간섭하여 좌지우지 못하도록 지상의 교회를 정부와 정치적인 권력의 간섭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유럽의 교회사는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지요,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래로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가종교로 등장하면서, 황제의 권력이 유럽의 교회를 1000년 이상 지배하고 다스리는 시대가 있었지요! 그러다가 종교개혁을 통하여 루터는 국가와 종교의 관계를 분리시켰습니다. 국가가 교회를 간섭하고 통치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국왕이었던 헨리 8세가 아들하나 얻고 싶어서 로마교황청에다 이혼허락을 여러 번 청구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자 마침내 수장령을 발표하여 교회위에 국왕이 있다는 소위 주장을 펴고, 프로테스탄트 편에 서면서 국가종교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것이“앵그리컨 처치”(Anglican Church)라 부르는 우리말 성공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교분리원칙이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일제식민통치시대를 거치면서, 일제의 정치권력이 한국교회가 독립운동에 가담하는 일을 방지할 목적으로 정치가 교회에 간섭하지 않는 대신, 교회(종교)도 정치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으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한국교회 지도자들도 교회가 일제의 정치적인 탄압을 받아 교회와 지도자들이 옥고를 치르는 피해를 입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뜻에서 조선교회는 지혜로운 선교사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정부(정치)를 간섭하지 않는 원칙을 강조하게 되었고, 그러한 생각 때문에 주기철목사는 일제의 신사참배강요에 항거하다가 순교했지만, 1939년 제28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 신사참배를 결의하는 우를 저지르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이후 정교분리원칙은 이승만 대통령 덕분으로 대한민국 헌법 제20조에 명시되었는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이며, 제2항은 “국교는 인정되지 않으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정교분리원칙의 본뜻은 국교를 막자는 것이며, 교회가 국가나, 정부(정치)의 권력남용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정교분리원칙은 한국교회의 역사를 보면, 아이러니하게 그동안 진보교회와 보수교회의 이해가 달랐습니다. 한국의 진보교회 지도자들은 그동안 독재정치권력에 대항하여 민주화투쟁을 주저하지 않았으나, 보수교회지도자들은 일제식민통치시대의 경험을 근거로, 교회가 정치권력의 부패와 독재정치에 아무런 비판을 행하지 않았으며, 그러나 뒤로는 오히려 독재정권에 붙어 이득을 취하면서 지지까지 하는 상반된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정치하면 오히려 침묵으로 일관하는 관습에 빠져, 정교분리원칙만 강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정교분리의 원칙은 교회가 정부를 간섭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와 정치권력이 교회를 보호하며,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방점이 있으며, 권력을 남용하여 악을 저지르는 정치권력에 대해서 침묵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새롭게 일깨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한 정교분리의 원칙이 아니라, 교회의 보호를 위하여 국가가 교회를 간섭하지 않도록 분리를 말하지만, “정교분리원칙은 정치와 종교는 구분되지만, 결코 서로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국민의 한사람으로서도 그러하지만, 역시 목사의 직분으로도 정치에 대하여 언제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일정한 역할과 공동체(국민)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책임을 질 감당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목사의 직분이란 세상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하며, 정치적인 혼란으로 바른 구원의 길을 찾는 백성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참된 진리, 구원으로 안내하는 영적인 지도자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선지자적인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국가와 종교는 각각의 역할을 가진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으로 사회적인 역할 때문에 구분되지만 결코 분리되는 것이 아닌, 깊은 관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목회자의 나라사랑에 최선을 다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 해설/기획
    • 학술
    2019-11-15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25
    시편에는 119편처럼 176절에 달하는 긴 것도 있지만 117편처럼 단 두 절의 짧은 것도 있다. 133편은 3절에 불과하다. 117편에 이어 두 번째로 짧은 시이다. 그 주제는 형제들이 연합하여 사는 것이 아름답다는 단순한 서술이지만 그 이유를 2개로 비유로 설명하고 있어서 독자들은 그 정확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이 시의 저자는 다윗이라고 했다. 다윗은 형제들이 연합하여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감탄하고 있다. 형제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모습을 보고 그 아름다움을 비유로 말하고 있다. 첫째는 머리에 부은 기름과 같다고 했고, 둘째는 시온의 산들에 내리는 헬몬의 이슬과 같다고 했다. 형제간의 불화는 아담과 하와의 자식들인 가인과 아벨 사이에 일어난 살인 사건이 그 시초이다. 가인과 아벨은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들이지만 가인은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살인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물 때문에, 더구나 형제지간에, 그것도 아주 계획적으로 일어났다. 우리 인간 역사에 있어서 분쟁은 형제간에 처음 벌어졌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죄의 충동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살인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사람을 그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다. 사람은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은 생명체요 하나님의 형상이었다. 그래서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부여하고 하나님께서 생명을 거두신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소유에 대하여 어떠한 이유로든지 손을 대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 그래서 성경은 곳곳에 형제 우애에 대해서 언급하고 가르친다. 그런데 이 시의 저자가 다윗이라고 전해 내려오기 때문에 우리는 다윗이 형제들간의 우애에 대한 시를 쓰게 된 배경에 대해서 추측해 보지 않을 수 없다.다윗은 형제간에 싸우지 않고 연합하여 사는 것을 마음에 갈망하며 산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맏아들 암논이 배다른 그의 누이 다말을 성폭행하고 매정하게 버리자, 다말의 친 오라비 압살롬이 2년 동안이나 복수의 기회를 노리다가 마침내 그의 양털 깎는 날을 택하여 암논을 자기 집에 초청하고, 술을 먹인 후 그를 살해하여 누이를 대신한 복수를 감행했다. 온 집안이 박살이 났다. 다윗은 이 사건 후 날마다 울며 지냈다고 했다(삼하 13:34-36). 그러나 압살롬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아버지 다윗을 반역하여 난을 일으켰다. 백전백승의 대 장수인 아버지 다윗이 자기 목숨을 건지기 위하여, 아들을 피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궁전을 떠나 피난을 가야 했다. 살인자, 아들의 광기를 피하여 도망가는 아버지의 심정이 참담했을 것이다. 결국 압살롬의 반란은 진압되었고, 그는 다시 궁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궁전은 옛날의 궁전이 아니었다. 피 비린내 나는 자식들의 칼부림을 보고 겪으며 그는 많은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시편 133편은 다윗이 이러한 배경을 두고, 형제우애의 아름다운 모습을 동경하며 쓴 시가 아닌가 싶다. 이 시의 부제는 “올라가는 노래”라고 했다. “실 하마알롯”()이라는 부제는 시편 120-134편에 연속적으로 붙여지고 있는데, 그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학자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축제 때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가 아닌가 추측한다. 하나님께 경배하러 나아가며 형제자매 친구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축제를 앞두고 모두 즐겁고 재미있게 동행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일손을 멈추고 동네 사람들이 함께 길을 가며 이야기하고, 노래하고, 때가 되면 함께 앉아서 싸가지 온 음식도 나누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시이다. 다윗은 이러한 광경을 되돌아보며, 형제들이 연합하여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모습이 마치 제사장 아론의 머리로부터 수염을 타고 내려와 옷깃을 적시는 값진 기름과 같다고 비유한다. 이 모습은 제사장이 다른 사람, 곧 다른 제사장이나 왕을 세우는 위임식처럼 양식은 같지만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바로 제사장 자신, 아론이다. 레위기 8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아론을 제사장으로 기름붓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아론의 몸을 씻기고, 우림과 둠밈을 담은 가슴패와 이스라엘 12 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온갖 화려한 제사장의 제복을 입히고, 금을 입힌 거룩한 판을 붙인 관, 곧 모자를 씌우고, “또 붓는 기름을 아론의 머리에 붓고 그에게 발라 그를 거룩하게 하였다.”(12)고 했다. 거룩하다는 말은 깨끗하고 구별되다는 말이다. 빛나고 위엄이 있고, 순결하여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에게 제사장을 세우는 날은 참으로 복되고, 기쁘고, 즐거운 날이다. 그래서 한글 성경은 “얼마나 좋고 아름다운가”라고 번역했는데, “Hinneh mah-tov wumah na‘yim” ()은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How beautiful and pleasant!) 혹은 “얼마나 복되고 사랑스러운가!”(How blessed and lovely!)라고 번역이 더 원문에 가깝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아론의 위임식이 하나님께서 명하셔서 모세가 행한 일이라는것이다.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장벽이 생기고 부부간에 또한 형제간에 장벽이 생기고 서로 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장을 세우심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리가 놓이고, 형제지간에 피를 흘린 자들을 위한 중보자가 세워진 것이다. 그래서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속죄의 길이 열리고 형제들 사이에 평화의 싹이 트게 되는 세상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된 것이다. 만일에 아론의 제사장직이 모든 향제들 사이의 분쟁을 그치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의 죄가 온전한 속죄를 이루는 것이었다면 다윗은 이러한 소망을 가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다윗은 비록 지금은 자식들 사이에 생긴 분쟁과 살상을 마음 아파하고 슬퍼하지만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영원하고 온전한 제사장을 세우셔서 모든 인생들이 형제들과 연합하여 함께 동거하는 세상을 이루실 것을 마음에 그리고 바라며 이 시를 썼을 것이다.다윗은 형제들이 연합하여 동거하는 세상이 언젠가 이루어지기를 동경하며 죽었다. 그런데 이 다윗의 소망과 비전이 이루어졌다. 제사장 아론이 이루지 못한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의 온전한 속죄와 중보를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친히 거룩한 속죄의 제물이 되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해와 중보를 이루게 하셨디. 아론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다”(딤전 2:5)라고 가르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가인이 흘리게 한 피, 암논과 압살롬이 흘리게 한 피를 씻으시고, 형제들이 화해하고 연합하게 하셨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다. 한 성령으로 우리를 띠띠우시고 한데 묶어 한 하나님의 자녀, 한 형제가 되게 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한 형제, 자매가 되었다. 형제로서 연합하게 하셨디. 바울은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그러나 그 때에 멀리 있던 너희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 그분은 우리의 화평이시다. 자신의 육체 안에서 둘을 하나로 만드시고 중간에 막힌 담, 곧 원수된 것을 제거하신 분이시며 ...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둘을 한 몸으로 만들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는 것이다.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 2:13-16)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되게 하시고 세례를 통하여 이를 인치셨다.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게 하셨다. 서로 연합된 한 몸, 한 형제가 되게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아론의 머리로부터 수염으로, 그리고 옷깃으로 기름이 넘쳐흐르듯이 성령의 역사가 넘치는 형제, 자매의 연합체가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서로 하나되는 아름답고 즐거운 사귐을 갖게 된 것이다.다윗은 형제간의 우애를 아론의 머리로부터 흘러내리는 기름에 비유할 뿐만 아니라 시온의 산들 위에 내리는 이슬로 비유하고 있다. 예루살렘에는 시온산, 성전산, 감람산 등 세 개의 산이 있는데, 시온은 시편에서 하나님의 성산으로 불리우고, 일반적으로 예루살렘을 의미한다. 시온은 유다 지역에 있다. 유다 지역은 지중해 지역처럼 비옥한 땅이 아니다. 지중해에 접해있는 해안 지역은 비가 자구 오기 때문에 비옥하여 농산물이 풍부하게 생산되지만 중앙산맥 동쪽, 유다지역은 비가 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무나 풀이 자랄 수 없어 메마른 광야이다. 그리고 전형적인 열대지방 기후라서 낮에는 사막처럼 뜨거운 햇볕이 내려쬐지만 밤에는 기온이 낮다. 그래서 낮과 밤의 온도차가 심해서 이슬이 흠뻑 내린다. 그래서 유다지역에서는 포도나 올리브, 바나나와 같은 열대성 과일이 많이 생산된다. 그래서 비가 오지 않아도 이슬만으로도 과일이 풍성하게 생산된다. 참으로 신비한 나라이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 산들에 내림과 같다는 말은 마치 이슬이 헐몬 산에서 내린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해하기 쉽다. 헐몬 산은 높아서 사시사철 눈이 덮여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름에도 스키를 타러 간다. 헐몬 산에서 녹아내리는 물은 요단 강을 이루고 이 강물이 갈릴리 호수와 사해로 흘러내려 간다. 이스라엘의 젖줄이다. 갈릴리 지역의 풍성한 농산물은 다 갈릴리를 지역을 관통하는 요단 물 먹고 자라고 열매를 맺는다. 마치 할몬 산의 물이 갈릴리에 온갖 풍성한 농산물을 생산해내듯이, 시온의 이슬도 유다 지역에 온갖 풍성한 과일을 생산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다윗은 형제들이 연합하여 함께 동거하는 이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부요한 모습을 마음에 그리고 있는 것이다. 형제들이 연합하여 함께 동거하는 모습이 부족함이 없이 부요하고 평화로운 모습이다. 사실 그렇다. 우리 성도들이 연합하여 함께 사는 것처럼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말씀이 있고, 찬송이 있고, 기도가 있고, 나눔이 있다. 마음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우정을 나누고,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용기와 위로와 소망을 나눈다. 물건을 나누고, 음식을 나눈다. 성도들 사이의 이러한 풍성함을 한번 맛본 사람은 다른 곳에 갈 수가 없다. 떠날 수가 없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10-25
  • 학술/ 한복협 10월 월례회 ‘2020년대를 준비하는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
    본고는 지난 10월 11일 신촌성결교회에서 열린 한복협 10월 월례회에서 임석순 목사가 발제한 ‘한국교회 미래에 적용할 실제적 목회 패러다임’을 일부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미래를 예측하게 하시는 것은 역사적 소명, 즉 미래에 그들을 사용하시기 위한 부르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한국 교회와 미래에 대한 세 가지 질문의 답을 말씀을 통해 찾고, 한국 교회의 미래에 대해 예측하며 어떻게 실천해갈지를 생각하여 보고자 합니다.1. 한국교회는 어떻게 성장해 왔는가? 1900년대 한국 교회의 기초를 세운 한국 교회 1세대는 순교를 각오하고 신앙을 지키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큰 부흥이 있었고, 많은 기적과 이사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한국 교회 1세대 선배들은 너무도 훌륭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1세대 거목들이 하나, 둘 떠나고 한국교회는 그 분들이 이루어 놓은 서광 위에 교회가 빛을 보았다고 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의 두 번째 세대가 광야에서 출생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서 이들은 자신들이 건축하지 않은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광야 생활에서는 큰 성이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생활하던 광야 2세대가 가나안에 입성하자마자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누리게 됩니다. 바로 이들처럼 한국교회의 2세대들도 한국교회의 엄청난 성장을 직접 목도했습니다. 2.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어떤가? 한국은 1960년에 5천개의 교회, 6만 명의 성도를 기록했고 40년이 지난 후에는 교회가 6만개, 성도의 수는 9백만으로 늘어났습니다. 40년 만에 어마어마한 급성장을 이룬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교단을 가리지 않고 모두 다 성도의 감소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갤럽 설문 조사에 따르면 2015년도에 한국 국민 중에 종교인이 50%이고 이 중에서 22%가 불교, 21%가 개신교, 7%가 천주교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이를 계산하면 2015년도의 종교인은 5천만 국민 중 2500만 명이고 그중에서 21%가 개신교인이라면 개신교인이 약 5백만 명 정도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2000년의 9백만 성도에서 4백만 명이 줄어든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 하고 9백만이라는 숫자만을 믿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성도들은 이중 삼중 등록교인도 많은 사례를 보면 이 숫자가 가능한 수라고 판단됩니다. 2015년도에 나타난 기독교인 감소율을 근거로 2025년의 한국 교회 성도의 수를 추정하면 300만 명입니다. 그러나 이들도 다 교회에 등록하고 출석하는 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미국 퓨리처 센터에 따르면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지만 교회에는 출석하지 않는 성도가 미국 성도의 35%이며 유럽은 69%, 한국은 23-25%라고 합니다. 2025년도에 한국 교회에 그러한 성도의 숫자도 결코 적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성도는 300만 명보다 현저히 적은 수일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것이 앞으로 6년 안에 마주할 한국 교회의 현실입니다. 현재 교회 안의 세대는 이스라엘의 2세대라고 할 수 있지만 분명 6년 이후의 미래세대 대다수가 이스라엘의 세 번째 세대와 같을 것입니다. 결코 머지않은 미래가 이토록 심각한 상황인데도 미래세대를 돌보아야 할 한국 교회는 여전히 매우 안일한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3. 우리는 어떻게 이 미래를 준비할 것인가? 1) 여호와를 잊지 말라.“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신6:12).여호와를 잊지 않는 것이 바로 가나안에서 살아가는 자들, 배불리 먹고 사는 세대가 해야 할 일입니다. 여호와를 잊지 말라는 것은 복음을 소유한 자신의 정체성을 알라는 것입니다. 최근 한국의 교회들이 놀이터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할 일이 없어서, 재미로 교회에 나와 있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복음의 메시지가 전해지지 않으면 성도들은 여호와를 잊게 됩니다. 어떻게 여호와를 잊지 않게 할 수 있을까요? 한국교회가 세상 것을 얻는 수단으로서의 하나님을 찾는 자리에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는 가르침과 목표를 향하여 가야합니다.“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2:4,5).신앙이 미성숙한 성도는 하나님을 수단 삼아 기도하고 찾기도 하지만 반드시 나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이끌리지 않으면 풍요 속에서 여호와를 떠나고 말 것입니다.2) 여호와를 경외하라.“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신6:13).‘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여호와를 사랑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말라기 3장 16절의 ‘그 때’는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는 자들 모두가 완악해져서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는 때입니다. 가나안 땅의 사람들은 다 완악해져서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가나안 시대에도 여호와를 경외해야 합니다. 어떻게 여호와만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 시대에는 세상보다 여호와가 나의 힘이 되심을 보이는 지도자가 요구됩니다. 세상 것이 없어도 하박국 선지자와 같은 고백의 삶을 사는 지도자가 있어야합니다많은 신학적 지식 보다 여호와 한분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하는 교회 지도자가 있어야 합니다.3) 여호와를 섬기라.“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신6:13).우리는 반드시 섬기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곧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선교의 현장이든 봉사의 현장이든 섬기는 자리를 기뻐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다음세대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섬기고 우리의 공동체와 이웃을 섬기는 것이 한국 교회와 미래세대가 맞이할 미래를 대비하는 일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맹세하라.“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신6:13).가나안의 크고 아름다운 건물들과 넘치는 풍요 속에서 살아갈 때 필요한 것은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누구도 맹세할 만한 이름이 없습니다. 이는 겸손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질이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이 시대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것은 우리 스스로의 능력과 경험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이루셨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세상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물질로 목회하는 패러다임, 세상의 힘으로 선교하는 패러다임에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하며 목회하고 선교하는 패러다임화 되어야합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없습니다.(막9.14)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는 패러다임을 가져야 합니다.5) 오직 하나님만 따르라.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르지 말라”(신6:14).가나안 세대들은 반드시 세상을 따라가게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하나님만을 따르는 순종을 보여줄 때 이 가나안 세대들이 변화될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먼저 보이고 또한 가르쳐야 합니다. 사도행전 1장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먼저 행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집니다. 나가는 글지금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회개가 있어야합니다. 세속화 된 우리의 모습을 매일 회개하는 것은 영적 전쟁터인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무장하는 방법이며 미래세대를 지키기 위한 방법입니다. 구원의 하나님 한분만으로 힘을 얻는 그리스도인을 키워야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면 충분합니다.’의 고백을 할 수 있는 신앙인으로 키워가지 않고는 미래세대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섬김과 기도 순종의 패러다임으로 교회가 전환되지 않으면 미래목회는 놀이터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 미래세대 목회는 프로그램이나 방법론에 문제가 있어서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위기 가운데 있으나 우리는 위기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본질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 한 사람이 일어날 때 세상은 변화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이러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또한 이러한 그리스도인을 키우는데 기도하고 전력한다면 미래세대가 일어날 것입니다.
    • 해설/기획
    • 학술
    2019-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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