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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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시인 윤동주(尹東柱)가 세상을 떠난 지 지난 2월16일로 고희(70주기)를 맞았다. 1917년(12월30일) 태생으로 1945년(2월16일)에 서거했으니 고작 이십칠 년여를 살고 생을 마감한 셈이다. 그는 그 짧은 생애에 ‘서시’와 ‘별 헤는 밤’ 등을 비롯한 주옥같은 시 작품들을 다수 남겨놓아 후세인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리고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십자가’와 ‘새벽이 올 때까지’ 등 이른바 기독교 시편들을 남겨놓아 문학과 종교(기독교) 간의 문제를 진지하게 탐구하도록 해 주었다. 실제로 그의 조부 윤하현 씨는 그곳(명동) 교회의 장로였으며, 동만(주)의 대통령이라고 불렸던 명동학교 교장 김약연 목사는 그의 외삼촌이었다. 요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윤동주 시인과 관련된 일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을미년(2015) 올해는 조국 광복 70주년의 해이고, 동시에 민족 분단 70주년의 해이기도 한데, 여기에 더해 민족시인 윤동주의 서거 70주년의 해이기도 하니, 올해는 여러 면에서 민족사적(民族史的)인 의의가 대단히 큰 해인 것 같다.
서거 당일(2.16)에 해당하는 날 연세대학교 윤동주추모사업회가 주관해 루스채플에서 추도예배와 추모공연, 그리고 시·산문 창작대회 시상식 등 여러 행사들이 열렸다. 그러나 이 행사는 국내 인사들에게까지도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다소 한산한 행사로 비쳐지지 않았나 여겨진다. 오히려 70주기 추모 행사는 이국(異國)인 일본 땅에서 더 성대하게 치러졌던 게 아닌가 판단된다.
당시 윤 시인의 ‘죽음’의 형무소가 자리 잡고 있었던 후쿠오카(福岡) 시에서, 또 그가 초기 한 학기 동안 재학한 바 있는 도쿄(東京)의 릿쿄대(立敎大)에서, 그리고 그가 전학[편입]해서 더 오래 다녔던 교토(京都)의 도시샤대(同志社大) 등 여러 곳에서 윤동주 서거 70주기 추모행사들이 열렸다. 우리나라에서 비교적 한적한 행사로 치러진 것에 비해, 오히려 일본에서는 더 성대한 행사들이 열렸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가 다소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윤동주의 죽음과 관련해 많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일부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런 적극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더욱 열성적이었던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나게 되지 않았을까 미루어 짐작해 볼 뿐이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행사가 순전히 일본인 자신들만의 열정에 의해 기획되거나 치러진 것이 아니란 사실만은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일본 문화인[지식인]들로 하여금 윤동주 관련 문제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도록, 또는 윤 시인의 비극적인 문제를 두고두고 자신들의 양심에 따른 고통의 문제로 여기게끔 만든 한국인들도 상당수 있었으며, 그들의 지속적인 노력이 일본의 일부 양심적인 지식인[문화인]들의 그 양심에 호소함으로써 오늘의 결실이 맺어졌다고 보는 게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가 윤동주에 대하여 의문이 들던 몇 가지 문제점들이 근래에 다소 해결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도쿄의 릿쿄대학 재학 시절 소위 까까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던 것과 창씨(개명)의 사실, 그리고 겨우 한 학기 다니고는 다음 학기에 교토의 도시샤대학으로 편입[전학]해버리고 만 일 등에 대해서 말이다.
그가 방학이 되어 잠시 집에 들렀을 때, 배우 율 브린너를 연상시키는 까까머리를 하고 있었던 것은 당시 그 릿쿄대학 안에 소위 단발령이 내려졌던 때문이었다. 군국주의 교육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히라누마 도추(平沼東柱)’란 그의 창씨(개명)도 같은 이유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군국주의 교육의, 지시 일변도의 강압적 분위기 때문에 불가피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가 한 학기 만에 도쿄 지역을 떠나 교토 지역의 대학으로 옮기게 된 것도 알고 보면 릿쿄대학의 그 강압적인 군사교련 교육을 시급히 벗어나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송몽규(宋夢奎)란 인물에 대해 더러 들어본 적이 있는 것으로 안다. 같은 북간도 태생으로 윤동주와 같은 해(1917)에 태어나 같은 해(1945)에 삶을 마감한, 윤 시인의 동갑내기 형(고종사촌 형)이자 친구였던 독립운동가 말이다. 그는 같은 후쿠오카 형무소에 역시 같은 죄목으로 갇혀 있다가 윤동주가 죽은 직후 3주 만에 불귀의 객이 된 청년 문사이다. 그가 접견(면회) 온 사람들(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에게 증언한 바에 의하면 “매일 밤 이름 모를 주사를 강제로 맞고 있다.”는 것이었다. 윤동주가 어떤 생체실험의 희생물이 되었다고 항간에 떠돌던 말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실제로 규슈대학 주도의 생체실험이 당시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오늘날 공인되어 있는 터이다.)
70년 전 차가운 일본 형무소에서 쓸쓸히 죽어간 윤동주 시인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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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윤동주 서거 70주기에 임해-임 영 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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