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이 아름다운 세계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사람과 생태계가 서로 하나 되고, 서로 교제하며 살 것을 기대하고 계신다. 그런 코이노니아의 구체적인 실천이 바로 ‘서로 사랑’이다. 그러므로 이제 인간과 자연의 바른 관계가 하나님과 인간의 궁극적인 관계임을 생명 중심적 환경의식의 변화와 기독교 환경윤리로서의 그 실천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고 더 나아가 자연을 인간의 지배 개념이 아닌, 가꾸고 보존하여 상생하는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어가기 위해 개인과 가정, 교회와 사회가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할 것이다.
예수가 선포한 세계 속에서 하나님 나라는 그의 ‘말씀’과 더불어 그의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의 말씀이 당시의 종교지도들처럼 단지 사변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사상성으로 침몰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예수의 ‘삶의 행위’때문이라는 실제적인 사실을 알게한다. 그리고 반대로 예수의 행위가 당시의 행동주의자나 마술적인 기적행위자와 구별되는 이유는 바로 그의 행위와 함께 나타난 종말론적인 특성을 지닌 그의 ‘말씀선포’에 있었음을 깨닫게 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곧 예수의 인격인 그의 말씀과 몸으로 산 그의 삶의 행위에서 비롯된 살아 있는 하나님의 사건이었던 것임을 성서는 이를 알게 한다. 그런데 오늘날 과학적 세계관을 가지고 높은 지식에 처하여 있는 현대인들이 성서를 대할 때, 오늘의 세계관이나 세상살이뿐만 아니라 교회의 목회적인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임을 깨닫게 한다.
예컨대 기독교의 구원이라는 범주가 영과 육의 이분법적인 구분으로 본다든가 단지 미래적인 영의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그의 '말씀'과 더불어 그의 '행위'를 통해 나타나는 신앙의 행위를 알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의 말씀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처럼 단지 사변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사상성으로 침몰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예수의 ‘행위’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곧 예수의 인격인 그의 말씀과 몸으로 산 그의 삶의 행위에서 비롯된 살아 있는 하나님의 사건이었기에 기독교의 구원이라는 범주가 영과 육의 이분법적인 구분이나, 단지 미래적인 영의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삶의 구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그의 ‘말씀’과 더불어 그의 ‘행위’를 살아 있는 생명을 통해 나타내기 때문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곧 예수의 인격인 그의 말씀과 몸으로 산 삶의 현장에서 그의 삶의 행위가 살아 있는 하나님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 하나님 나라 운동의 중심으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의 이 세계의 문제를 치유하는 행위였다. 예컨대 창세기 1장의 내용은 그저 독립적인 해석이 아니라, 창세기 2장과 연관지어 바른 해석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즉 창세기 1장의 ‘정복’과 ‘다스림’은 ‘지배’와 ‘통치’의 의미가 아니며, 창세기 2장과 연계하여 해석할 때 ‘돌봄’과 ‘지킴’의 의미로 해석되어 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창조보전 사상은 구약의 율법서, 성문서, 예언서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신약에서는 바울서신과 요한문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에서 일관되게 견지되고 있다는 점과 일치한다. 전통적 구원론은 구원을 인간 개인의 영혼 구원으로 제한하며 자연의 세계를 소외시켰으나 성서의 말씀은 모든 피조물이 구원받는 우주적 구원론을 향하여 열려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은 희망하는 인간과 모든 창조 세계의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구원하실 것이라는 구원의 우주적 세계적 보편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에 대한 성령론적 이해에 있어서도 성령은 창조사역에 참여하여 삼위일체적 창조를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피조물 안에 내주하고 계시기에 새 창조의 사역을 통해 인간을 새롭게 변화시키시며 동시에 창조세계를 새롭게 하신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에 대한 파괴와 착취는 성령을 통하여 자연에 현존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괴롭히는 일이며 ‘성령의 전’을 파괴하는 악행인 것임을 알게 한다.
오늘의 생태계 위기의 문제는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의 사고와 가치관의 문제임을 고려할 때 기독교 윤리적인 문제가 된다. 생태계의 위기를 극복하고 창조 보전(保全.integrity)을 위해 제시하고 있는 윤리는 청지기 윤리와 생태학적 윤리 그리고 생명공동체 윤리이다.
예수가 선포한 세계 속에서 하나님 나라는 그의 ‘말씀’과 더불어 그의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의 말씀이 당시의 종교지도들처럼 단지 사변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사상성으로 침몰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예수의 ‘삶의 행위’때문이라는 실제적인 사실을 알게한다. 그리고 반대로 예수의 행위가 당시의 행동주의자나 마술적인 기적행위자와 구별되는 이유는 바로 그의 행위와 함께 나타난 종말론적인 특성을 지닌 그의 ‘말씀선포’에 있었음을 깨닫게 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곧 예수의 인격인 그의 말씀과 몸으로 산 그의 삶의 행위에서 비롯된 살아 있는 하나님의 사건이었던 것임을 성서는 이를 알게 한다. 그런데 오늘날 과학적 세계관을 가지고 높은 지식에 처하여 있는 현대인들이 성서를 대할 때, 오늘의 세계관이나 세상살이뿐만 아니라 교회의 목회적인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임을 깨닫게 한다.
예컨대 기독교의 구원이라는 범주가 영과 육의 이분법적인 구분으로 본다든가 단지 미래적인 영의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그의 '말씀'과 더불어 그의 '행위'를 통해 나타나는 신앙의 행위를 알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의 말씀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처럼 단지 사변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사상성으로 침몰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예수의 ‘행위’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곧 예수의 인격인 그의 말씀과 몸으로 산 그의 삶의 행위에서 비롯된 살아 있는 하나님의 사건이었기에 기독교의 구원이라는 범주가 영과 육의 이분법적인 구분이나, 단지 미래적인 영의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삶의 구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그의 ‘말씀’과 더불어 그의 ‘행위’를 살아 있는 생명을 통해 나타내기 때문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곧 예수의 인격인 그의 말씀과 몸으로 산 삶의 현장에서 그의 삶의 행위가 살아 있는 하나님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 하나님 나라 운동의 중심으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의 이 세계의 문제를 치유하는 행위였다. 예컨대 창세기 1장의 내용은 그저 독립적인 해석이 아니라, 창세기 2장과 연관지어 바른 해석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즉 창세기 1장의 ‘정복’과 ‘다스림’은 ‘지배’와 ‘통치’의 의미가 아니며, 창세기 2장과 연계하여 해석할 때 ‘돌봄’과 ‘지킴’의 의미로 해석되어 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창조보전 사상은 구약의 율법서, 성문서, 예언서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신약에서는 바울서신과 요한문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에서 일관되게 견지되고 있다는 점과 일치한다. 전통적 구원론은 구원을 인간 개인의 영혼 구원으로 제한하며 자연의 세계를 소외시켰으나 성서의 말씀은 모든 피조물이 구원받는 우주적 구원론을 향하여 열려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은 희망하는 인간과 모든 창조 세계의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구원하실 것이라는 구원의 우주적 세계적 보편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에 대한 성령론적 이해에 있어서도 성령은 창조사역에 참여하여 삼위일체적 창조를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피조물 안에 내주하고 계시기에 새 창조의 사역을 통해 인간을 새롭게 변화시키시며 동시에 창조세계를 새롭게 하신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에 대한 파괴와 착취는 성령을 통하여 자연에 현존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괴롭히는 일이며 ‘성령의 전’을 파괴하는 악행인 것임을 알게 한다.
오늘의 생태계 위기의 문제는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의 사고와 가치관의 문제임을 고려할 때 기독교 윤리적인 문제가 된다. 생태계의 위기를 극복하고 창조 보전(保全.integrity)을 위해 제시하고 있는 윤리는 청지기 윤리와 생태학적 윤리 그리고 생명공동체 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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