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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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약 성경 디모데 후서 1장을 보면 사도 바울께서 사랑하는 제자인 디모데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녹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장 3-4절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했다.
바울께서 제자인 디모데를 보면서 자신이 행했던 복음증거의 열매를 디모데를 통해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을 한마디로 표현한 성구라고도 볼 수 있다. 사실 디모데는 바울이 제 2 차 전도여행 가운데 만난 사랑하는 제자 이다. 이후 디모데가 바울의 제자가 되어 에베소 교회에 부임하였지만 어린 나이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격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은 디모데 에게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없신여기지 못하게 하고...”(딤전 4:12)라고 쓰고 있다. 사실 디모데에게 바울은 격려가 필요 했다. 사실 격려란 우리 인간이 주고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가운데 하나라고 볼수 있다.
필자는 사도 바울과 디모데와의 관계 속에서 사역의 열매가 무엇인가를 많이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선생의 참다운 역할이 무엇인가를 거울을 보는 것 같이 비춰보곤 한다. 이미 교회연합신문에서 다루었듯이 한세대학에서의 교수사역은 정년식을 가졌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서 학생들을 계속 보기를 원하는 나에게 초빙교수라는 타이틀을 주어서 지속적으로 선교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시간들 속에서 과연 나는 바울처럼 디모데를 사랑하고, 그처럼 순순한 제자를 두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곤 한다.
바울은 다방면에서 제자인 디모데를 가르치고 있다. 디모데 전서 6장을 보면 몇 가지 교훈을 제자에게 주고 있다. 11절을 보면,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라고 기록 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것들”이라는 말씀에 주목해 보아야할 필요가 있다.  “이것들”이란 6장 3절부터 10절에 나와 있는 교회생활과 신앙성장에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통칭해서 말한 것처럼 보인다. 이를 통칭해 보면 교만과 탐욕 이다. 교만한자는,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해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6:4-5)”라고 말씀 하시고 계신다. 다음으로는 탐욕 이다. 욕심이란 끝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잉태한즉 사망에 이르느니라”라고 욕심이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분명히 주장하고 있다. 인간은 타락한 이후 인간의 본성이 악하여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가져보고자 하는 욕망 이 생겼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인간들이 탐욕을 물리쳐야 할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6:7)”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제자인 디모데를 향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6:12)”라고 말하고 있다.  운동 경기하는 자도 금메달을 얻기 위해서는 싸움이 필요 하다. 자신과의 싸움, 상대 선수와의 싸움, 환경과의 싸움이다. 천국 가는 길 가운데 싸움이 없을 수는 없다.  오늘 바울은 이러한 싸움을 “선한 싸움”이라고 말씀 하시고 계신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물리치시는 싸움을 싸워 승리 하셨다.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이란 사실 아무것도 없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교훈은 “영생을 취하라(6:12).”라고 말하고 있다. 영생은 예수 안에 있는 복음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사역과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하겠다. 기독교는 타종교와 다른 절대성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십자가를 믿으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사실 이다. 사실 타종교와 기독교를 비교해 보면, 윤리성 부분에서는 타종교 에도 얼마나 많은 사회적인 일들을 많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인간의 이성을 억제하여 자기완성에 이르는 극기 같은 훈련도 우리 보다는 훨씬 강할 수가 있다. 또한 삼강오륜이든지 장위유서 같은 삶의 질서를 근본으로 하는 종교가 사회적으로 훨씬 강하게 어필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들 종교 속에는 영생이 없다. 영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기 때문 이다. 이 복음의 진수를 디모데에게 전수 하였기에 바울은 로마의 참수터 에서 눈을 감으면서도 기쁨으로 지산에서의 사역을 마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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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화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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