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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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추(春秋)>에는 “송공(宋公=양공(襄公)이 초(楚)나라 군사와 홍(泓)에서 싸워 송이 패했다.”는 아주 짧은 전쟁기록이 있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 기록을 두고 서로 엇갈리는 평가들을 남기고 있어 흥미롭다. 
<공양전(公羊傳)>에서는, 송과 초 두 나라가 홍수(泓水) 기슭에서 싸우기로 약속했던 모양으로, 송의 양공이 먼저 현장에 도착해서 상대를 기다리고 있는 참에, 초나라 군대가 허둥지둥 강을 건너는 장면을 목격한다. 양공의 측근이 “적군이 홍수를 건너버리기 전에 공격하자”하고 권했지만, 주군의 반응은 달랐다. “군자는 사람을 곤궁에 밀어 넣지 아니하는 법, 적군이 미쳐 대열도 가추기 전에 공격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면서 공격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초군이 강을 건너긴 했지만 미쳐 진영을 가다듬지 못하고 있는  틈을 노려, 이를 기회로 잡아야 한다는 측근의 귀띔도 거절한다. “군자는 상대 진영이 정돈되지 않았는데도 진격명령을 내리는 비겁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초군의 진영이 정돈된 것을 보고서야 전투개시의 북을 울린다. 그러나 양공이 이끄는 송의 군대는 대패하고 말았다.  
훗날, <공양전>은 양공이 큰일을 앞두고도 “예”를 저버리지 않은 것은 훌륭한 처사였다고 평가했다. 송이 패한 것은 “훌륭한 군주는 있었으나 그에 걸 맞는 신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더해서 “문왕(文王)이라할지라도 그렇게 훌륭한 싸움은 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찬사를 덧붙였다.    
고대에는 편전(偏戰)이라 해서, 미리 약속해둔 시기와 장소에서 양 진영이 전열을 가다듬은 후에, 북소리로 전투를 시작하고 징소리로 마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공양전>에서는, 양공이 기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못 본 채, 적군이 진영을 가다듬을 때를 기다려, 북과 징으로 시작하고 마치는 ‘편전’의 약속을 지켰기에, “‘군자’의 인의(仁義)를 귀히 여겨 대례(大禮)를 지켰다”고 칭찬한 것이다.
한편 <곡량전(穀梁傳)>은, 그 전투가 송의 양공이 지난 해 초나라에 사로잡힌 적이 있어서 그 수치를 설욕하기 위한 복수전이었다고 풀이하는가 하면, <좌씨전(左氏傳)>은 송의 양공이 맹주로서의 체면을 지키려고 초나라를 공격했고 이에 질세라 초나라의 성왕(成王)이 맞선 싸움이었다고 풀이한다. 그러한 상황해석으로 해서 <곡량전>과 <좌씨전>은 <공양전>의 것과 사뭇 다른 평가를 내린다.      
“적에 비해 우세하면 공격하고, 필적할 만하면 맞서 싸워야하지만, 불리하면 방위 전으로 대처해야 하는 것이 전장에서의 상식이거늘, 요행만을 의지해서 이겨보려는 싸움은 있을 수 없다. 매사에는 기회가 있게 마련이고, 이를 잘 이용해야 기세를 잡을 수 있는 법. 그럼에도 ‘도리’에만 매달려서 주어진 기회를 놓치고 기세를 잡지 못하면서, 도대체 무엇을 하려 하는가. ‘시(時)’와 ‘세(勢)’를 잡지 않고서는 ‘도(道)’를 성취할 수는 없는 법” <양곡전>은 제대로 시세를 판단할 줄도 모르는 무능한 군주 양공을 맹비난한다.
<좌씨전>의 비난도 만만치 않다. “송나라 백성이 모두 양공을 비난하자, 양공은 ‘군자는 부상한 자를 따라 잡지 아니하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을 붙잡지 않는 법. 즉 사람을 곤궁으로 밀어 넣지 아니한다. 우리 송나라는 주(周)에게 멸망당한 은(殷)나라의 자손이 책봉된 나라이긴 하지만, 적군의 틈을 노려 공격할 정도로 나약하지는 않다.’하고 말했다. 이에 자어(子魚)가 대꾸했다. ‘군주께서는 전쟁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소. 강적 초나라가 어려움에 처해있는 시기는 바로 하늘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절호의 기회이거늘, 할 일없이 그 기회를 놓친다면 전쟁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이오. 전쟁이란 적을 죽이는 노릇일 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라오. 부상자나 노인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는 것만이 군자의 도리라면, 처음부터 전쟁은 하지 말고 굴복하는 것이 좋았지 않소.”
훗날 사마천은 송공의 군자다움을 칭찬하면서도, 나란히 자어의 반론을 인용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또 송나라 군대가 대패해서 양공 자신도 부상을 입는 처참한 결과를 맞게 되자, 모든 국민이 양공을 원망했다는 <좌시전>의 서술도 인용했다.
<한비자(韓非子)>의 평가는 아주 날카롭다. “양공은 백성을 사랑하지도 않았거니와 신하를 사랑하지도 않았다. 다만 들은 풍월에 놀아나 작은 의(義)에 사로잡혔을 뿐이었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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