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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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사람들에게는 지혜롭게 대하고, 기회를 선용하십시오. 언제나 친절하게 유익한 말을 하고, 묻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적절한 대답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말은 소금으로 맛을 내어 언제나 은혜가 넘쳐야 합니다. 여러분은 각 사람에게 어떻게 對答해야 마땅한지를 알아야 합니다.”(골로새서 4장 1-6).
바울은 크리스천이 교회 밖 사람들에게 해야 할 말을 음식조리법에 비유하고 있다. 나의 미각이나 사정을 따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말을 전해야할 상대방의 미각과 문화적 토양에 까지 관심을 기울이며, 사정을 따라 알맞게 소금을 치라는 충고로 받아들이고 싶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마음의 자세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뛰어난 요리사가 될 수 있는 기본자세는 역지사지에 있다. “내가 전하는 말씀은 절대 진리”이니, “나의 말은 진리이고 평화이니” 무조건 받아 들여야 한다는 식의 데모꾼의 외침일 수는 없다는 뜻이 아닐까.
“소금으로 맛을 내어 언제나 은혜가 넘쳐야한다”했다. “언제나” 하는 말은 늘 그런 준비가 되어 있어야한다는 말일 터. 차라리 그런 체질이 되어 있어야한다는 말로 이해해 보자. “은혜가 넘쳐야한다”는 말은 소금으로 맛을 냈으면, 그 맛의 효과가 제대로 상대방이 동의하고 즐거워하는 바가 되어야한다는 말로 새겨본다.
혀끝에 닿는 맛은 그 사람의 표정을 바꾼다. 곁에서 보는 사람도 그가 뭣을 맛보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지경이다. 혀끝으로 단 맛을 맛본 얼굴과 혀뿌리로 쓴 맛을 느낀 표정은 사뭇 다르다. 혀의 양옆에서 신맛을 맛본 표정 또한 다르다. 신맛을 접한 얼굴과 단맛을 맛본 표정은 사뭇 달라서 바라보는 다른 사람도 얼른 감을 잡을 수가 있다. 짠 맛이라면 더 그렇다. 소금으로 맛을 낸다고 하는 노릇은 확 소금을 뿌려 썩지 않게 간을 하는 방부처리가 아니다. 소금은 달콤한 맛에 가까워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소태맛에 가까워지기도 한다. 그 양과 솜씨에 따라 사뭇 달라진다.
“고등어자반”이란 것이 있다. 생선을 제대로 먹어볼 수 없었던 내륙 안동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즐기던 소금으로 간을 친 고등어를 일컫는데, 오늘날에는  거의 모든 지방 사람들이 덩달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아무나 조리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좋은 스승을 따라 적잖은 시간 훈련을 쌓은 손에서만 제대로 된 “고등어자반”이 생산된다는 것이다.
맛은 인간의 표정을 바꾼다. 그리고 감정을 움직이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동작이 쌓여가노라면 인간의 성격을 더 복잡하게 바꾸어가게 마련이다. 아비의 미각은 자손에게 전해지고 어미의 먹거리는 태아의 성격형성에도 영향을 미친다지 않는가. 
히브리인의 성격과 표정을 형성해온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그들이 먹어온 음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이 그리스도교회가 세계를 향해서 제공할 수 있는 “말씀”이 어떠해야할지를 충분히 고려한 나머지 내뱉은 말이 아니겠는가. 
요한 12장,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 이야기에서, 한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어이 배신자가 될 유다에 대한 비난을 첨가하는 것 까지는 그래도 그 일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의미에서 수긍이 간다고 하더라도, 6절에서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가 도둑이어서 돈 자루를 맡아가지고 있으면서 거기 넣은 것을 훔쳐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라고 까지 모진 소리를 한 것은 요한기자의 짓궂은 악의가 두드러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모양의 보도가 결국에는 유대인을 핍박하는 구실로 이어졌다는 설은 제법 설득력을 얻고 있기도 하다. 
소금으로 맛을 낸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가슴에 굳이 상처를 내기 위해서 이기보다는 소금으로 맛을 내어 우리들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가꾸어간다는 뜻일 것이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전신만신 성모 마리아’판이란 느낌을 가지게 된다. 예수는 저만큼 비껴 있어 유럽의 그리스도교회는 마리아교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역지사지하는 마음으로 접근해보면 나름대로는 소금으로 맛을 내려했던 중세 그리스도교의 심정을 이해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한국의 기독교신학은 소금으로 맛을 내는 여유까지를 가꿀 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더욱 알맞게 소금으로 맛을 내는 솜씨를 터득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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