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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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우람한 체격의 빌헬름 프루트벵글러와 남달리 키가 작은 아르투르 토스카니니 두 거장이 만나 언쟁을 벌인다.
토스카니니 왈: “나치의 나라에서 지휘하는 자는 모두 나치이다.” 이를 받아 프루트벵글러는 “예술은 정치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베토벤이 연주되는 곳에서는 언제나 자유가 있다.”하고 응수했다. 만약에 둘의 만남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아우슈비츠의 음악대>란 책을 읽고 난 다음이었다면 같은 말을 주고받을 수 있었을까 하고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아우슈비츠의 음악대>는 1948년, 프랑스에서 출간 책으로, 같은 음악가라도 유대계는 배척을 받아 마치 가축처럼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던 나치 지배시절, 우연히도 음악대원으로 발탁되어 기적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시몬 랙스(Simon Laks)와 르네 쿠디(Rene Coudy) 두 사람이 펴낸 수용소 생활의 기록. 
어느 날 ‘나’는 수용소에 도착한 커다란 짐짝 속에서 나무로 만든 보면대를 발견하고, 이 죽음의 수용소에 왜 보면대가 필요할까 생각했다. 장송행진곡을 위해서? 아니면 죽음의 무도회를 위해서? 나의 궁금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너희 중에 음악가가 있는가?”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수용소에 이송되기 전, 색소폰을 연주하는 한편 편곡가로도 활동했던 ‘나“는 그렇게 아우슈비츠 음악대원 명단에 오를 수 있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수용소 이발사는 너는 살아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부러워하는 것이었다.
음악대원은 모두 35명. 하루에 두 차례, 새벽에 수용수가 작업하러 나갈 때와 저녁 무렵 그들이 돌아올 때 연주했다. 그 밖의 시간에는 노동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스실과 총살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고는 하나, 언제 위기가 닥쳐올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나’는 열심히 연주하며 간부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독일군의 유대인 학살은 계속되었다. 수인들이 가스실이나 사형장에 끌려갈 때도 우리는 연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러 친위대원들과 수용소 간부들의 파티에 불려가 연주하기도 했고, 사령장관 슈바르츠 후버의 탄생일을 위해서는  특별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어느 여름날 오후, 수용소 간부들의 요구를 따라 독일 오페레타의 서곡을 연주하고 있었을 때, 솔로에 열중하는 프룻 주자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열중함으로서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다하는 표정 말이다. 그래서 그는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여자들을 실은 트럭행렬이 화장터로 달려가는 것도 보지 못한다. 실려 간 여자들 가운데는 그의 딸도 섞여 있었는데 말이다. 비유대인인 선임자 악장이 권리를 남용하다가 개처럼 끌려가 목숨을 잃는가하면, 음악대와 친하게 지내던 집시들이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추는 일도 있었다.
또, 사령장관이 화려하게 차려입은 아내와 일여덟쯤으로 보이는 아들 형제를 데리고 와서는 행진곡을 연주하라 명령했을 때는 “왜 우리에게는 그의 명령을 거부하고 그의 두 아들을 끌어다 불 속에 던져 버릴 용기가 없는가?”하는 생각을 하며 자조하기도 했다. 그러니 연주가 어찌 아름다울 수 있었겠는가. 연주는 슬픔과 증오가 얽힌 영혼의 갈등이 번져나가는 그런 음악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우슈비츠에서의 상상을 초월하는 특이한 일만이 아니라, 삶의 기본적인 조건이 철저하게 박탈되고 있는 지옥 같은 세계에서도, 인간의 삶이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생활이 놀라우리만큼 일상적으로 영위되고 있었다는 사실도 기록한다. 몰래 식량과 생활필수품은 물론 귀금속의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 생각해 보면 참으로 기이한 일이지만, 하루에 수백 수천의 인간을 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음악을 열렬히 사랑하며 음악대원들과 친해지려 하는 독일 친위대원이 있었다는 것은 더욱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무엇보다도 음악을 통해 이루어진 그들과의 한 가닥 인연으로 해서 아우슈비츠 음악대에 속한 유대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음악활동은 “엄격한 규율 밑에 있는 수용소의 활동이 빈틈없이 진행하기 위한 일인 동시에, 수용수들을 감시하는 친위대를 즐겁게 해서 그들의 사기를 돋우어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에도 최후의 순간이 온다. 소장은 떠나면서 말했다. “나의 음악대여!”하고. 물론 그는 체포되어 죄수가 되지만 수용수들은 해방된다. 그러니 나치를 낳은 독일 민족과 그들의 희생이 되었던 유대민족이 더불어 다른 민족들에서는 볼 수 없는 깊은 음악적 유대를 유지하고 있다는 특이한 현실을 이해하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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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의 음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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