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는 오래간 만에 종로에서 열리는 문학인 행사에 갔다가 청개천의 크리스마스 테마 파크 거리를 걸어 보았다. 낮에 보아도 그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섬세한 모습들이 개천 숲을 걷는 이들을 환영하듯 즐거운 개천과 숲의 걸음이었다.
청개천의 길을 걷다 옛 서점을 돌아보았다. 학창 때는 한 주간이 멀다하고 찾았던 곳, 구하려 하던 서적을 만나면 사랑하는 자를 만난 듯 책 값을 따지지 않고 구입했던 추억의 장소를 물어물어 찾았다.
길가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그때의 모습은 거의 경제 논리에 의해 일반 상가로 대치되었고 몇 서점만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는데 옛 추억을 더듬어 보며 몇 군데를 둘러보다가 어느 서점에 들르니 좁은 공간에 책들이 잘 정리되어 있는데 한눈에 들어와 접어든 책이 있었다. 책 내용을 살펴보니 글과 사진을 함께 어울려 소담스럽게 쓴 것으로 제목은 ‘숲’이었다.
글의 내용도 석류 알처럼 영롱하여 글쓴이의 마음이 내 마음에 와 닿았다. 책을 구해 읽으면서 어느 새 숲속에 기대고 있는 내가 됐다.
목양의 현장은 마치 숲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별별 나무들이 제 나름대로 서있는 곳 각각 제 목소리로 산바람을 휘감는 것이 그렇고 높은 나무 작은 나무 이파리 떡갈나무 참빗 같은 침엽수 등 천태만상 이다.
숲은 속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느림’과 ‘비움의’ 교훈을 품는 삶의 수원지와 같다.
숲은 편리함이나 안락함은 없는 대신 순결함과 침묵의 훈계를 껴안고 있다. 은퇴가 머지않은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나의 목양은 겨우 나무 가지 하나 붙들고 씨름하는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눈먼 목회였지 않았나? 돌아보게 된다. 숲만 바라보고 씨를 뿌리는 목자가 아니었나 본다.
밭을 일구는 일에는 일 년이 걸리지만 씨앗을 뿌리는 일은 하루면 충분하다.
밭을 일구는 데는 많은 땀과 수고가 필요 하지만 씨앗을 뿌릴때는 하루의 즐거움으로 채워진다. 그러나 뿌리는데도 절차가 있는 법, 밭이 돌밭인지 부드러운 흙 밭인지 확인한 후에 씨앗을 심어야 초록색 잎과 풍성한 열매를 를 기대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가 이러 할진데 사람들은 밭을 일구는 데는 관심이 적고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구하는 데만 관심이 있지 았았나?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때로는 실패와 좌절 아픔으로 점철된 목회 여정 이제 생각하니 씨앗에서 싹이 트지 않은 것은 종자의 상태 때문이 아니라 그 내용을 키워갈 밭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임을 이제야 조금은 깨닫게 된다.
밭을 먼저 일구고 씨를 뿌려야 하는 법 내 대지에서 자라는 이웃은 나의 열매이고 내 농토 에서 자라는 엉겅퀴와 잡초는 계속 일구어 가야 할 소중한 생명임을 늦게라도 깨닫게 되니 다행이다.
밭은 영원하지만 좋은 씨를 구하는 것이나 밭은 주인이지만 씨앗은 손님임을 모르거나 치 나치고 숲만 소중히 여겨 왔던가? 한국 교회도 숲만 찾아 가지 말고 밭을 일구어야 하지 않겠나? 믿음의 선조들이 일구어 놓은 밭에 열매를 즐기지 말고 새로 옥토를 만들어 야하지 않겠나?
씨앗을 뿌리려는 다툼과 경쟁은 넘치지만 그것을 심은 밭은 턱없이 부족한 현실을 직시해야 할 때이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단순하고 정직한 밭이 되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기 터라 주장하는 소리는 커가고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현대 속에서 모든 주장을 받 아 들이는 침묵의 밭이 되려는 노력은 보기가 힘든 것 같다. 한 겨울 동안 편안한 휴식을 취하였으니 내 이웃의 아픔에 우리의 사랑 덕분에 희망을 잃지 않고 싹을 틔울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 주는 밭이 되어 지기를 소원해 본다.
밭은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과 비를 마시고 비옥해 지게 된다. 나의 마음 밭에 숲을 이루어 많은 사람들이 산책하며 향기를 피어나는 새해를 꿈꾸어 본다. 또한 좋은 터를 일구어 좋은 열매를 제공하는 한국 교회가 되기를 소원한다.
청개천의 길을 걷다 옛 서점을 돌아보았다. 학창 때는 한 주간이 멀다하고 찾았던 곳, 구하려 하던 서적을 만나면 사랑하는 자를 만난 듯 책 값을 따지지 않고 구입했던 추억의 장소를 물어물어 찾았다.
길가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그때의 모습은 거의 경제 논리에 의해 일반 상가로 대치되었고 몇 서점만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는데 옛 추억을 더듬어 보며 몇 군데를 둘러보다가 어느 서점에 들르니 좁은 공간에 책들이 잘 정리되어 있는데 한눈에 들어와 접어든 책이 있었다. 책 내용을 살펴보니 글과 사진을 함께 어울려 소담스럽게 쓴 것으로 제목은 ‘숲’이었다.
글의 내용도 석류 알처럼 영롱하여 글쓴이의 마음이 내 마음에 와 닿았다. 책을 구해 읽으면서 어느 새 숲속에 기대고 있는 내가 됐다.
목양의 현장은 마치 숲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별별 나무들이 제 나름대로 서있는 곳 각각 제 목소리로 산바람을 휘감는 것이 그렇고 높은 나무 작은 나무 이파리 떡갈나무 참빗 같은 침엽수 등 천태만상 이다.
숲은 속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느림’과 ‘비움의’ 교훈을 품는 삶의 수원지와 같다.
숲은 편리함이나 안락함은 없는 대신 순결함과 침묵의 훈계를 껴안고 있다. 은퇴가 머지않은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나의 목양은 겨우 나무 가지 하나 붙들고 씨름하는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눈먼 목회였지 않았나? 돌아보게 된다. 숲만 바라보고 씨를 뿌리는 목자가 아니었나 본다.
밭을 일구는 일에는 일 년이 걸리지만 씨앗을 뿌리는 일은 하루면 충분하다.
밭을 일구는 데는 많은 땀과 수고가 필요 하지만 씨앗을 뿌릴때는 하루의 즐거움으로 채워진다. 그러나 뿌리는데도 절차가 있는 법, 밭이 돌밭인지 부드러운 흙 밭인지 확인한 후에 씨앗을 심어야 초록색 잎과 풍성한 열매를 를 기대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가 이러 할진데 사람들은 밭을 일구는 데는 관심이 적고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구하는 데만 관심이 있지 았았나?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때로는 실패와 좌절 아픔으로 점철된 목회 여정 이제 생각하니 씨앗에서 싹이 트지 않은 것은 종자의 상태 때문이 아니라 그 내용을 키워갈 밭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임을 이제야 조금은 깨닫게 된다.
밭을 먼저 일구고 씨를 뿌려야 하는 법 내 대지에서 자라는 이웃은 나의 열매이고 내 농토 에서 자라는 엉겅퀴와 잡초는 계속 일구어 가야 할 소중한 생명임을 늦게라도 깨닫게 되니 다행이다.
밭은 영원하지만 좋은 씨를 구하는 것이나 밭은 주인이지만 씨앗은 손님임을 모르거나 치 나치고 숲만 소중히 여겨 왔던가? 한국 교회도 숲만 찾아 가지 말고 밭을 일구어야 하지 않겠나? 믿음의 선조들이 일구어 놓은 밭에 열매를 즐기지 말고 새로 옥토를 만들어 야하지 않겠나?
씨앗을 뿌리려는 다툼과 경쟁은 넘치지만 그것을 심은 밭은 턱없이 부족한 현실을 직시해야 할 때이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단순하고 정직한 밭이 되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기 터라 주장하는 소리는 커가고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현대 속에서 모든 주장을 받 아 들이는 침묵의 밭이 되려는 노력은 보기가 힘든 것 같다. 한 겨울 동안 편안한 휴식을 취하였으니 내 이웃의 아픔에 우리의 사랑 덕분에 희망을 잃지 않고 싹을 틔울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 주는 밭이 되어 지기를 소원해 본다.
밭은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과 비를 마시고 비옥해 지게 된다. 나의 마음 밭에 숲을 이루어 많은 사람들이 산책하며 향기를 피어나는 새해를 꿈꾸어 본다. 또한 좋은 터를 일구어 좋은 열매를 제공하는 한국 교회가 되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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