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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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를 무대로 활동하는 족장들에게 있어 강을 건넌다는 노릇은 오늘날 우리가 교량을 이용해서 쉽게 강을 건너버리는 것과는 사뭇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그러기에, 요단강을 건넘은 차안에서 피안으로 넘어가는 일이었고, 동양권에서의 황천 또한 같은 개념의 경계선이었던 것이다.  
건널 강이 깊지도 넓지도 않아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쉬 건널 수 있는 강이어도, 건너에서 발붙여 사는 족속은 건너오는 자들에게 동반자도 될 수 있고 대적자도 될 수 있기에 불안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더하여 그들 선주민이 섬기는 신들은 그 결정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터라, 두려워하며 강을 건너는 이가 초자연적 존재와 맞닥뜨릴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생각이었으리라. 
야곱은 홀로 얍복 나루에 있다.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과 딸린 식구들 그리고 모든 소유를 미리 건너보내고 난 후여서, 나름대로 도강작전은 성공적이었다고 한숨 돌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바로 그 때 야곱은 갑자기 나타난 이름 모를 타자를 맞잡고 씨름판을 벌인다. 끈질긴 야곱답게.  
“그가 야곱에게 물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했다. ‘야곱입니다.”
“야곱”이 어떤 이름이던가? 그의 탄생기록을 더듬어본다. “달이 차서, 몸을 풀 때가 되었다. 태 안에는 쌍둥이가 들어 있었다. 먼저 나온 아이는 살결이 붉은데다가 온몸이 털투성이어서, 이름을 에서라고 하였다. 이어서 동생이 나오는데, 그의 손이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있어서, 이름을 야곱이라고 하였다.”
“야곱”은 히브리 고유의 이름은 아니었다. 고대 오리엔트 세계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던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그 본래의 뜻은 “하나님께서 지키신다!”였고. 
“발뒤꿈치“를 가리키는 ”아아케브”나 “앞지르다”라는 뜻의 “야야코브”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이 학자들의 소견. 그럼에도 <창세기>는 구태여 “그의 손이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있어서, 이름을 야곱이라고 하였다.”고  명시한다. 
고대 셈족은 조상을 끔찍이 존중하는 족속이 아니던가. 그런 그들이 조상의 이름을 “발뒤꿈치”와 같은 상스럽지 못한 단어로 나타낸 것은 어떤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터.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그럴듯한 해석으로 상징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을 터인데도 말이다.
설사 <창세기>의 기록대로, 아우가 형의 발꿈치를 잡은 채로 어미의 태에서 태어난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키신다” 쪽으로 해석의 가닥을 잡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인데도 말이다.
히브리인이 당시 오리엔트 세계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던 해석을 물리치고,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난 지독한 “야곱”을 고집한 데에는 그들 나름의 절실한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말이다. 과연 우리의 “야곱”, “악착같은 야곱”은 그 강인한 정신으로 해서 수많은 환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한 족속의 시조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 밤 야곱은 그 이름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이름은 곧 정체성이다.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울부짖은 것은 그 정체성 때문이었고, 하나님의 침묵은 바로 그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신뢰요 사랑이 아니었던가. 정체성은 겸손과 같은 미덕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정체성이 확립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겸손은 미덕이 될 수 있는 것. 그러기에 이름은 다른 누구의 이름으로 대신할 수 없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라는 것은 겉모양을 바꾸라는 요구가 아니지 않는가. 너의 본질을 바꾸라는 말씀이다. 지금까지는 형의 발뒤꿈치를 붙들고 늘어지는 악착한 근성으로 목숨을 이어오고 종족을 이어왔지만, 이제는 나 하나님과 겨룰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이 왜 인간이며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싸움에서 엉덩이뼈를 다친 것은 야곱이었지만 정작 진 것은 초월자였다. 너희가 나와 겨루어주면 나는 언제든지 져줄 수 있다는 뜻일까. 내가 왜 너희에게 져주지 않을까보냐! 나는 너희에게 이기기 위해서 너희의 하나님이 된 것이 아니지 않는가. 너희에게 지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너희를 너희 되게 하고자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았거늘...
구약성서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광경은 솟아오르는 태양을 향해 쩔뚝거리며 걸어가는 주인공의 뒷모습이 아니던가. 그 실루엣은 한 해를 마감하며 한국의 교회들이 만들어야할 실루엣이 아닐까하고 생각해본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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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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