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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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성담론 연구에 매달린 적이 있습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염상구가 빨치산 간부의 아내인 외서댁을 강간하고 나오면서 “고것 참 꼬막맛이네”라고 혼자 되뇌이는 것이 성 표현에서 일품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바람둥이로 유명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에 나오는 주인공 발몽과 몰리에르의 희곡에 나오는 돈주앙을 고찰하기도 하였습니다. 전자는 향유의 대상에 대하여 ‘부분부분’ 접근하여 가고, 후자는 향유의 대상을 ‘하나하나’씩 즐겼습니다. 발몽이나 돈주앙은 바람둥이의 표본입니다. 이들을 말하는 것은 이들의 행동을 본받으라고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들의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보고 적그리스도적인 것을 비판적으로 분별하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필자는 성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가치관을 정립하고 싶었습니다. 성을 음욕에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아울러 고찰하여 사람들이 올바른 성 가치관을 가지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성의 본질을 알아야 그것을 제대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영화로도 나온 <젖소 부인 바람 ……>였습니다. 그래서 초등학생이 설마 이걸 알겠느냐 싶어 아들에게 비디오 가게에서 그걸 빌려 오도록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아들은 쏜살같이 비디오 가게를 다녀와서 하는 말이, “가게 주인이 이걸 주면서 씩 웃던데 왜 웃는지 모르겠어요.” 하는 것이었다.
아들이 대학생이 된 어느 날, 컴퓨터를 보다가 나는 아들이 야동을 본 흔적을 발견하고 등짝을 한 대 후려치며 “너 한창 꿈을 가져야 할 나이에 이런 걸 보면 되니?”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 녀석 하는 말 “아빠는 예전에 안 봤어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이미 초등 학생 때부터 성을 사회적으로 말하는 게 금기 사항인 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여름날, 뜨거운 햇볕이 도로 위의 아스팔트를 녹일 듯한 기세로 달려드는 날, 가족들을 데리고 처갓집 나들이를 갔습니다. 차 트렁크에는 아이스 박스에 과일을 잔뜩 챙겨 넣고. 차의 에어컨을 틀어 놓고 한창 달리고 있는데, 택시들이 옆에서 빵빵거렸습니다. 내 차의 타이어가 펑크났다는 신호였습니다. 평소에 아내한테 기계치라는 소리를 듣던 나. 차를 길가에 세우고 바퀴를 보니 많이 구겨졌습니다. “할 수 있겠어? 지나가는 택시 운전 기사분에게 부탁하지 그래.” 아내는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아니야. 난 할 수 있어.” 나는 목에 힘을 주고 트렁크에서 기구들을 꺼냈습니다. 이 기회에 가족들 앞에서 아빠의 위력을 보여줘야 했습니다. 작키를 넣고 차를 들어올려 바퀴를 빼냈습니다. 나는 가족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봐. 아빠도 이런 걸 다룰 수 있잖아?” 그러고서 돌아보니 어느 것이 펑크난 것인지 구분이 안 갔습니다. 골라 잡은 하나를 끼웠는데. 아뿔사. 아내가 하는 말. “여보. 차가 다시 내려와요.” 펑크난 타이어를 또 끼우고 말았던 것입니다. 가족들은 화를 내며 택시를 타고 가 버리고. 나만 홀로 빈 하늘만 바라보았습니다. 애비 노릇 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얘긴데,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사색을 하고 바른 몸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인류의 죄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고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서 주님은 몸소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며 인류를 위한 최고의 사랑을 베푸셨지요.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행복의 길을 열어 준 것이지요. 그러므로 말씀 보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생활은 사실 인간이 구원으로 나아가는 행복입니다. 이는 아버지 안에서 신자가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행복이고, 한편으로는 기쁜 신앙 생활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 안에서의 행복이 타인에게 어떻게 비칠 것인지도 고려해야 합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다윗 성으로 옮길 때에 “여호와 앞에서 뛰놀고 춤추”었습니다(<삼하> 6:16). 이를 보고 사울의 딸 미갈이 “심중에 그를 업신여”겼지요. 이로 인해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삼하> 6:23)었습니다. 이는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의 행복을 누리는 것을 타인이 곡해할 수도 있음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성 가치관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확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부부간의 성생활은 부끄러운 행동이 아닙니다. 그래서 <창세기> 2:24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그렇습니다. “둘이 한 몸”이 되는 데에는 성생활도 포함됩니다. 거기에는 조건이 있지요. 상대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짝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 필자는 이런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아내에게는 세상 모든 여자들의 아름다움이 다 들어 있다. 아내도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내 남편이 세상에서 제일 멋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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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행복론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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