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위를 보자. 쉴 새 없이 많은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다. 또 그러한 사건과 문제들로 인해 세상은 한시도 편할 날이 없고 소란하다. 더 안타까운 것은 사건과 문제가 터질 때마다 자신에게 돌아올 질책이나 책임이 두려워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이는 하나도 없고 모두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사실이다. 이에 정치적으로 문제가 생기면 국민들은 정치인들을 공박하는 반면, 정치인들은 오히려 국민들을 탓하기에 이른다. 또 여당은 모든 잘못을 야당에게 돌리고 야당은 힘없는 자기들보다 권력을 쥔 여당 쪽에 모든 잘못이 있다고 주장을 하는 것이다. 일전에 유일호 경제부총리를 비롯한 경제 사회부처 장관들이 행정부는 잘하고 있는데 국회와 야당과 교육청들이 못했다는 남 탓 담화문을 발표하여 국민들을 놀라게 했다. ‘정부는 개혁입법을 최선을 다해 국회를 설득해 왔지만 더 이상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라며 ‘대통령과 정부가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국민이 도와 달라’고 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정부나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직장과 가정, 심지어 교회의 성도들 사이에서까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예컨대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성도들은 목회자에게 목회자는 역으로 성도와 중직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서로를 비난하기에 바쁘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내 생각이 옳으면 다른 사람의 생각도 옳을 수 있다. 서로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즉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상대방의 주장이 옳다면 내 생각을 양보할 수도 있어야한다. 이 땅의 모든 다툼과 분열은 바로 이 같이 자기 생각만 지나치게 고집함으로 발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자기주장이 옳을 수 있다. 그러나 상대방의 주장도 옳을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의 주장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완전하다면 서로의 주장이 다르게 나올 수 없다. 불완전하기에 관점에 따라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고 그러다보면 자신의 주장이 틀릴 수도 있다. 고로 자신에게는 전혀 잘못한 점이 없고 상대방에게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 걸음 물러서서 ‘내 탓이오’ 하는 겸허한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하루를 다 보내기 전에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자. 오늘 하루 동안 나는 화해를 위해 몇 번이나 내 잘못을 시인했는가? ‘나 때문’ 이라는 생각을 한번 이라도 해 보았는가?
세상에서 남 탓만 하고 살다가 나중에야 ‘내 탓’을 깨닫는 한 성도의 이야기이다. 지금 살고 있는 시골 마을로 처음 이사 왔을 때 우리는 길게 뻗은 자갈길을 지나 한적한 마을 변두리에 있는 낡은 집을 개조하여 보금자리를 꾸몄다. 나는 외출할 때마다 내 발보다 훨씬 크고 딱딱한 구두를 신고 그 자갈길을 다녔다. 자칫 방심했다간 돌에 채여 넘어지기가 십상 이었다. 당시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부드럽고 발에 맞는 신발을 사기란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고충으로 인해 부드러운 신발을 사지 않으면 도저히 그 길을 걷지 못할 것 같아 큰 맘 먹고 구두 가게에서 부드럽고 발에 꼭 맞는 신발을 하나 샀다. 새 신은 바닥이 유연했으므로 울퉁불퉁한 길을 훨씬 쉽게 걸을 수 있었다. 그 일로 인하여 나는 험난한 인생의 길에서 자주 미끄러져 실패했던 것은 내가 너무 딱딱하게 대처했던 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 그랬다. 나는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모든 어려운 상황들에 거칠게만 대항했지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부드러운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리석게도 나는 그것들과 대항하고 싸움으로써 내 인생을 더욱 많은 상처로 점철시켰던 것이다. 일리가 있다. 이제 우리를 실족케 하는 아집과 편견과 교만의 구두를 벗고 사랑과 믿음의 신을 신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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