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삼상 19:24)는 이 말은 사울이 그의 대적 다윗을 쫓아 다닐 때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자 그는 라마의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고 심지어는 그는 옷을 벗어버렸다. 그리고 사무엘 앞에 이르자 그 앞에서 예언을 했으며, 그날 온 종일 벗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도저히 선지자 같지 않는 사람이 선지자와 같은 행동을 하기 때문에 비꼬아 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사울의 행동은 분명히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다. 사울의 행동은 정성적아자 않다. 분명 미친 사람이나 할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울이 미쳤다”라고 말을 해야 옳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고 말한다. 자기들의 눈으로 볼 때 선지자가 아닌데 선지자적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지자는 누구이며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인가?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삼상 19:24)는 이 말은 사울이 그의 대적 다윗을 쫓아 다닐 때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자 그는 라마의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고 심지어는 그는 옷을 벗어버렸다. 그리고 사무엘 앞에 이르자 그 앞에서 예언을 했으며, 그날 온 종일 벗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도저히 선지자 같지 않는 사람이 선지자와 같은 행동을 하기 때문에 비꼬아 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사울의 행동은 분명히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다. 사울의 행동은 정성적아자 않다. 분명 미친 사람이나 할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울이 미쳤다”라고 말을 해야 옳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고 말한다. 자기들의 눈으로 볼 때 선지자가 아닌데 선지자적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지자는 누구이며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인가?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라고 번역하는 히브리어는 “나비”(איבנ)이다. 이 말은 “예언자적 황홀경에 빠져있다” (be in the prophetic ecstacy) 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동사 “나바”(אבנ)의 파생어이다. 히브리어 사전 BDB에 의하면 “나바”(אבנ)는 가장 고대적인 종교적 황홀경 형태의 예언으로 노래나 음악을 동반하는 경우도 있었고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었으나, 후대에는 경우에 따라 미래에 있을 일을 미리서 말하는 예언(prediction)도 있었지만 주로 종교적 가르침 (religious instruction)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명사형 “나비”(איבנ)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대언자”(the Spokesman of God)로 번역하고 쓰이는 말이다. 하나님꼐서는 그의 선지자자에세 말씀을 주시고, 선지자는 그 말씀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입의 역할을 하는 자이다. 따라서 구약성경에서는 선지자를 가리켜 “여호와의 입”(הוהי יפ)이라고 일컫는다(레 24:12;사 1:20; 6:7; 40:5; 58:14; 62:2; 렘5:11; 미4:4).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도구로 쓰시기 위하여 특별히 선택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미래에 일어날 일을 대언하게 하는 경우도 있지만, 과거에 있었던 일을 돌이켜 생각하게 하고 그 뜻을 해석해주시거나,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의미를 깨우쳐 주시기도 한다. 따라서 “나비”(איבנ)를 가리켜 미래의 일을 점치는 예언자라고 일컫는 것은 “나바”(איבנ)의 의미를 지나치게 축소시킬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의미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번역도 아니다. 따라서 “나비”(איבנ)를 “예언자”라고 말하는 것보다 “선지자”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다.
선지자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알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방법은 꼭 말씀을 대언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말이 아닌 의미있는 행동이나 특별히 상징성 있는 사건을 통하여 표적과 징조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겅우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여 발가벗긴 체로 포로로 잡혀갈 것을 미리서 알려주시며, 이것을 백성들에게 실감나게 가르치기 위하여 선지자 이사야에게 발가벗고 3년을 살으라고 명하신다(사 20:1-3). 뿐만 아니라 그의 자식들에게도 “스알야숩” (남은자는 돌아오리라, 사 7:3) 또는 “마할살랄하스바스”(노략이 빠름, 사 8:3)과 같은 별로 성스럽지도 않고 의미도 어려운 이름을 지어 부르게 함으로 앞으로 다가올 이스라엘의 멸망과 바빌로니아로부터의 귀향을 예고하게 하신다. 호세아에게는 고멜이라는 자식이 딸린 창기와 결혼을 하라고 하심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비뚤어진 결혼관계를 비유하며 살게 하시며, 에스겔에게는 그가 사랑하고 아끼는 아내를 빼앗아 비정한 장례를 치르게 하심으로 다가올 이스라엘의 처참한 전쟁의 참화와 그들이 당할 비극적인 종말을 알리게 하신다(겔 24:19-27). 선지자들의 활동이란 입으로만 하는 것은 아니고 온 몸으로 하고, 선지자 자신 뿐만 아니라 선지자의 온 가족이 함께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는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둔다면 사울이 다윗을 체포하기 위하여 다윗이 머므르고 있는 라마의 나욧에 있는 사무엘의 집으로 그의 부하들을 세번이나 보냈을 때 그들이 모두 예언을 한 일이나, 심지어 그가 보낸 부하들이 돌아오지 않자 사울 자신이 직접 다윗을 붙잡으려고 라마에 올라 갔을 때, 그도 가면서 예언하고 심지어 사무엘의 집에 이르러서는 아예 옷을 벗어버리고 온 종일 쓰러져 있었는데 이들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거나 방언을 한 것이 아니지만 성경은 이들이 예언을 하고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울의 부하들에게나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삼상 19:20, 23) 예언을 했다고 했다. 이들은 자기들의 자의로 예언을 한 것이 아니다. 사울은 거의 의식불명의 상태인 것 같다.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 아닌데도 예언했다고 말한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예언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이들의 행위가 말로서 하나님의 뜻을 전한 것은 아닐찌라도 분명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는 상징적 행위를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하여 자기들의 부하를 보내고 심지어 자기도 출동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임하심으로 이들의 악행이 제지되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울의 이 악행으로부터 다윗을 보호하고 계심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행위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간접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의미에서 예언했다는 말을 쓰고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그들의 하나님의 영을 받아 예언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무엘 앞에서 사울이 옷을 벗었다는 사실은 의미있는 선지자적 예언 행위(prophetic ac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사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블레셋과의 전쟁 중에 스스로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께 번제를 드려 하나님의 법을 불순종하였다. 이를 불쾌하게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아서 자기 백성의 주권자로 삼으실 것이기 때문에 사울의 왕국이 길지 못할 것임을 사무엘을 통하여 말씀하셨다(삼상 13:13-14). 뿐만 아니라 삼상 15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하셨는데 진멸하지 않고 진멸할 물건을 취함으로 마치 자기가 하나님 행세를 함으로 신성을 모독하는 죄를 범했다. 그리하여 그는 아간처럼 진멸할 물건을 취하는 자가 진멸될 물건이 되리라는 여호와의 진멸의 법칙(헤렘[םרח]의 법칙, 수 6:18)을 범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입을 통하여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하니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삼상 15:23)라고 왕을 폐하는 선언을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하나님께서 그를 대신하여 새로 왕으로 기름부으신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 다니다가, 결국 사무엘 앞에서 그는 스스로 그의 왕복을 벗고, 온종일 “벗은 체로 쓰러져 있었다.”(삼상 20:24). 하나님께서는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이 전사하기 전날 밤, 신접한 여인을 찾아온 사울 앞에 사무엘의 망령을 불러 그의 입을 통하여 그의 죽음을 예고하신다. 그때 여호와께서는 사울이 주의 맹렬한 진노를 아말렉에게 실행하지 않았던 죄, 곧 “헤렘”(םרח)을 범한 때문에 그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겨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삼상 28:18-19). 그를 버리시고 심판하신 이유가 아말렉 사건과 관계가 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사울은 길보아 산에서 처참하게 죽었다. 아말렉 사건으로 그는 죽음을 선고 받았고, 결국 아말렉 사건으로 죽음을 맞았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사울이 사무엘 앞에서 발가벗고 마치 죽은 사람처럼 엎드려 있는 모습은 분명 다가오는 그의 주검의 모습을 그 스스로 예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지자가 될 만한 사람이 못되는 사람이 선지자처럼 행동하니까 장난스레 비꼬는 말처럼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고 말했겠지만 그는 분명 선지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기름부은 후, 그를 그의 아비 집으로 돌려보내며 그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받은 사실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그 표적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수비대가 있는 하나님의 산에 이를 때에 각종 악기를 앞세워 예언하고 내려오는 선지자들의 무리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만일 사무엘의 말대로 그들을 만나게 된다면 사무엘의 말대로 그가 이스랑레의 왕이 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무엘의 말대로 그는 선지자 생도들을 만났다. 그리고 이때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강하게 임하시어 이들과 함께 예언을 했으며, 이때 사울은 딴 사람 (another man)이 되었다. 중생하여 새사람이 된 것은 아니었다. 사울이 선지자 생도들과 함께 어울린 사실 자체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변화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징조요 상징적인 행위였다. 사울의 인생은 예언으로 시작하여 왕이 되었는데, 자신의 운명을 자기가 예언한대로 결국 그 예언이 성취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필요에 따라 사람을 선택하여 선지자적 역할을 하도록 그의 영을 주시고, 그들을 그의 뜻을 전달하는 도구로 쓰신다. 선지자의 입도 쓰시고, 발도 쓰시며, 몸도 쓰시고, 가정과 아내와 자식들도 쓰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전하고, 해석하고, 가르치게 하기 위하여 누구든지 선택하실 수 있고, 누구든지 그가 원하는 형태의 도구로 쓰실 수 있다.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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