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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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의 <신곡>에서, 첫 책인 <지옥편>의 끝장 제34곡은 “아홉째 지옥” “코키투스”를 묘사하는 것으로 막이 내린다.  코키투스는 지옥의 가장 밑바닥, 배신자를 가두고 있는 지역으로, 다시 4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첫째 구역은 카이나(Caina): 육친을 배신한 자를 대표해서, 아벨을 죽인 카인의 이름에서 땄다. 둘째 구역 안테노라(Antenora): 조국을 배신한 자를 가두고 있는데, 트로이의 전쟁에서 트로이를 배신한 안테노르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셋째 구역 트로메아(Ptlomea): 손님을 배신한 죄인을 가두고 있는데, 시몬 마카비와 그 아들들을 초대해서 살해한 여리고의 장관 아브보스의 아들 프트레마이오스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구약외전 마카비서). 마지막 네 번째 구역 주데카(Judecca)는 주인을 배신한 가리옷 유다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거기에는 시저를 배신한 브루투스와 캐시우스도 갇혀있다. 
“주데카”의 중심, 지구의 중력이 집중되는 이 지역에는, 하나님을 반역하고 타락한 천사 사탄(루키페로)이 얼음 속에 갇혀있는데, 마왕은 예수를 배신한 유다와 시저를 배신한 브루투스와 케시우스 세 사람을 입으로 깨물고 있다. 소름이 끼치는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 유다를 쳐 박은 공로는 결코 단테 혼자의 것으로 돌릴 수는 없으리라. 로마 가톨릭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유럽인의 정서에는 유다는 배신자요 구원받을 수 없는 악마라는 낙인이 깊이 새겨져 있은 지가 오래였기 때문이다.
12세기가 되기 전에, 프랑스에서는 “유다”라는 고유명사가 “배신자”를 뜻하는 보통명사로 사용되고 있었고, “유다 짓”은 곧 “배신하기 위한 키스”를 의미하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아이들에게는 물론 개나 고양이에게 조차도 유다란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유다는 “스파이”를 의미하기도 했다. 만찬 후,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기도하는 예수를 몰래 훔쳐보았다는 인식이 민중들 틈에 나돌아 다니면서였다. 충실한(?) 다른 제자들이 잠들고 있는 틈에, 기도하는 스승을 냉정한 눈초리로 살피면서, 성공적으로 스승을 체포할 방책을 궁리하는 유다의 이미지가 생겨났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으리라. 몰래 들여다보는 행위는 일그러진 “성적 욕구”도 상징할 수 있었다. 이런 저런 소위 “유다근성”이 유럽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 모두에게 덧 씌워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셰익스피어는 <베니스의 상인>에서 “샤일록”을 연출해서 박수갈채를 받았고, 나치는 온 유럽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냈지만, 종교인 예술가는 물론, 내로라하던 지성인도 입을 다물었다. 세계적으로 종교 문화 사회, 여러 측면 여러 차원에서 “배신자”이기 때문에 증오의 대상이 된 캐릭터는 유다 말고는 달리 유를 찾을 수가 없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하고 선언한 이후의 세계에서도 유다에 대한 증오는 보기 좋게 살아남아 시대마다에 걸맞은 변용을 거듭해온 것이다.
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것은 제사장과 로마 병사. 그 정점에는 빌라도 총독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도 아니라면, 빌라도가 제안한 예수의 석방을 거부했던 민중들에게 책임을 돌릴 만도했다. 유다는 직접적으로 예수를 죽이는 데 가담하지는 않았다. 이리저리 따져보아도 그 동기가 석연찮은 “밀고”가 죄목이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세월이 더 해갈수록 유다가 악의 화신으로 변모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양이 된 것처럼, 유다도 그 대극에서 모든 악을 한 몸에 뒤집어쓰고 인류의 죄악감을 소멸케 하거나 그 색깔이 묽어지게 하는 역할을 감당한 것은 아니었을까.   
스승이 죽은 후 유다가 제사장들에게 돈을 돌려주려 하자, 제사장들은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요? 그대의 문제요!” 하고 말한다. 또 예수의 처형을 결심한 총독 빌라도는 민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오!” 했다.
유대민족을 대표한 제사장들 쪽에서나, 로마를 대표한 총독 편에서나, 다 같이 책임을 이 가리옷 사람 유다에게 뒤집어 씌우려한 몸짓이 아니던가. 
유다의 죄가 제사장이나 로마 병사 그리고 빌라도의 그것에 비해 두드러지게  부각된 이면에는 유다가 예수의 제자 중의 하나였으면서도 배신했다는 기록을  강조해보이며 자신들의 죄과를 묽게 해보려는 의도가 감추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들”의 범위를 어디까지 잡을 수 있을지는 쉬 판단이 서지 않지만, 오늘의 우리도 그 범위를 벗어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을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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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배신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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