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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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가 오십대 중반을 넘어서면, 여성은 남성 호르몬이 늘어 강해지는 반면 남성은 뱃살과 함께 여성 호르몬이 늘어나게 됩니다. 필자도 그 나이를 넘어서니 확실히 남성다움이 줄어든 것 같습니다. 사십대까지만 해도 여류 문인들 앞에서 몸부림춤을 추며 남성다움과 열정을 과시하였는데, 요즘은 눈가에 주름살이 깊어지며 노래 부르는 것도 어딘가 매가리가 없고 말소리도 조근조근해졌네요. 특히 아내 앞에만 서면 도도해진 여성상 앞에서 왜 그렇게 주눅이 들까요. 더구나 아내는 예순을 넘은 나이에도 당당하게 직장에 출근하는 반면, 나는 한 달 내내 책상 앞에서 자판을 두드려서 얻은 원고료로 생활하는 삼식이인지라, 이건 남자 체면이 말이 아니네요. 그러나 이런 나에게도 한때는 패기가 넘친 적이 있답니다. 특히 연애 시절이 그렇네요.
평소에 우둔하다고 평가받던 나는 H여고를 수석으로 졸업한 아내를 만난 것이 기회다 싶었답니다. 어떻게든 남성다움을 보여 상대를 아내로 만들고 말리라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우선 당시 개그맨 제조기로 알려진 S예대 무용과에 무용 강습을 신청하여 고전 무용·현대 무용·발레·에어로빅 댄스·탈춤을 단기간에 익혔네요. 여성 무용수들 앞에서 청일점이긴 하였지만, 만년 노총각 신세를 탈출하기 위해선 별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지도 교수가 무용 타이즈와 발레 슈즈를 안 입고도 반바지 차림으로 수강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나와 같이 입교한 체육 선생은 에어로빅 댄스를 배우러 왔다가 남성들이 없어 쑥스럽다며 중도 하차하였지만, 나는 끝까지 버텼지요. 그리하여 지도교수는 나의 공중으로 튀어오르는 도약이 처음엔 이십 센티미터도 안 되었는데, 수강 후 오십 센티가 되었다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무용에 자신감이 생겨 아내를 만난 지 일주일만에 종로에 있는 나이트클럽에 데려갔네요. 노오란 조명 불빛에 보니까 아내가 그렇게 예뻐 보이데요. 기회다 싶어 팔을 풍차처럼 흔들고, 머리를 사물놀이하는 것처럼 흔들며, 허리를 고무줄 튕기듯 휘저어 몸부림춤을 추었지요. 이른바 느끼한 동작을 빠른 몸놀림으로 처리하는 저만의 몸부림이었던 것 같습니다.
디스코 타임이 끝나고 블루스를 출 때에는 아내도 내가 맘에 들었는지 푹 안겨오데요. 그리하여 아내와 처음 만난 지 사십여 일만에 결혼하였지요.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답니다. ‘아! 드디어 내가 고대하던 영리한 여자를 아내로 맞을 수 있게 되었구나. 이제 2세는 영락없이 똑똑한 아이가 나올 거야. 크하하하.’ 결혼식을 꿩 궈 먹듯 마치고 신혼 여행을 갔습니다. 신혼밤을 정신없이 보내고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를 하러 나가기 위해서 아내를 불렀습니다.
“여보. 어딨어?”  고개를 여기저기 휘둘러 보니 아내가 내 턱 밑에서 “나, 여기있는데”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아내의 키가 나의 큰 키(178cm)에 비하여 작아도 너무 작았습니다. 거울을 통해 아내의 머리 끝이 내 어깨 아래에 닿는 것을 보고, 나는 그제서야 아내가 날 만나는 동안 줄곧 키높이 구두만 신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오! 나의 어리석음이여. 그대는 눈에 뭐가 씌워 아내의 키가 그렇게 작은 것도 모르고 사십여 일만에 결혼하여 아내가 구두를 벗었을 때의 키를 알지 못하였도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엎질러진 물.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내가 평소에 형제들에게 우둔하다고 일컬어 온 데 비하여, 아내는 고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인재였다는 사실. 아내가 결혼 후 이 년만에 큰 아이를 순산하였습니다. 아이는 태어나자 마자 우유 50cc를 단숨에 해치울 정도로 건강하였지요. 오십억 개의 정자 가운데 난자 도달에 성공하였으니, 오죽했겠습니까.
나의 잔뜩 기대 어린 눈썰미를 받으며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날부터 이게 웬 일? 아이가 경기도에 있는 시골 초등학교에서도 공부하는 게 더뎌 맨 날 다른 아이보다 한 시간 늦게 오더니, 집에서 한자 외우기를 여러 번 반복시켜도 외우질 못할 정도로 공부엔 영 신통찮네요. ‘이놈이 아내에게서 나온 게 맞아?’ 하고 아무리 관찰하여도 영락없이 날 닮은 국화빵이긴 하네. 아내의 몸에서 연이어 딸아이가 튀어나왔는데, 애기 시절에도 별로 예쁘지가 않데요. 영리하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는 아이라면, 그 다음엔 어떤 아이가 나올 지가 뻔해 보였습니다. 나는 우둔함으로 인해 젊은 시절에 하도 고생하였던 터라, 고심 끝에 결정하였습니다. 더 이상 우둔한 아이가 나오게 할 순 없다. 그리하여 곧바로 병원에 가서 정관 수술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하여 보니, 키높이 구두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젊은 시절에 아내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놈의 키높이 구두 때문에 내 눈에 뭐가 씌우긴 씌워진 모양입니다. 그래도 큰아이가 세상에 나와 비록 서른이 넘도록 취직을 못했어도 인성은 착하고, 딸아이는 결혼해서 미국에 유학 가 잘 사는 것은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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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높이 구두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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