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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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서의 하나님나라 운동에 있어서, 앞서 등장한 세례요한의 활동을 보면, 그 그룹이 중요시한 운동의 요소 중에 하나가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기도’였다. 마틴 루터 킹이 인종차별을 그치기 위해서 시작한 사회적인 운동에서도, ‘을’이 ‘갑’질하는 사회 지배층인 백인들로부터 기본권을 되찾는 요소 중 하나가 ‘노래’인 것을 보면, 그 노래 또한 ‘기도’였던 것이다. 그가 외친 ‘우리에게는 이런 꿈이 있습니다.’라든지, ‘우린 승리하리.’라는 구호적인 노랫말과 선포는 모두 기도의 성격을 띠고 있었고, 이러한 기도야말로 인종차별을 그치고, 인간 개개인의 자유를 획득하는 데에 성공적인 요인이 되었다. 기도야 말로 하나님나라를 확실하게 세우게 하는 지렛대역할이 된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나라 운동을 하면서,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신 마태복음에서의 ‘주기도’를 들여다보면, 기도가 길고 장황한 것처럼 보일 수는 있겠으나, 실제로 핵심적인 언어는 두 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마태복음서 전반에 깔려있는 가르침으로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기둥을 가지고서 마태 서기관은 하나님나라를 세우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예수가 전파한 하나님나라란, 하나님의 품을 떠났던 아담이 다시금 아버지의 품 안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아담의 타락 이후, 하나님이 그에게 물으신 질문이 ‘아담아.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가인아. 네 아우가 어디에 있느냐’에서 엿보이듯이, 하나님은 인간의 소재, 현 위치에 관해서 지속적으로 묻고 계심을 알 수 있다.
타락한 인간은 그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도 멀어졌지만, 그의 형제인 이웃에게서도 소외된 상태이다. 이러한 성경의 질문 앞에서 아담은 ‘내가 부끄러워서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고, 가인도 역시 아주 옹색한 대답,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하는 모습이야말로, 바로 오늘 우리의 현 주소를 대변하는 것이다. 이 타락한 인간의 소재에서, 하나님이신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오고, 형제와 함께 동거 동락하는 자리로 되돌아오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제자들에게 확실하게 각인되었고, 복음을 기록한 서기관에게서도 명료하게 정리되면서, ‘하나님나라’는 대중들에게 이해의 깊이가 깊어지고, 질량도 충실하고 폭도 넓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마태나 누가는 이러한 사정을 책으로 편집하면서 그에 대한 답을 해야 했기에, 우리는 풍부한 하나님나라의 안을 잘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제자들의 삶에서도 들어난 바와 같이 ‘하나님나라’ 운동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권’ 회복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을 거부하고, 다양한 이유들을 붙여서 떠나버린 오늘의 인문학을 비롯해서, 공산주의나 진화론 주장자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공공연하게 거절하고, 인간 스스로가 출생하고 떠나가는 것처럼 모든 것을 꾸며대고 있지만, 하나님은 꾸준히 타락한 아담에게 지금 즉시 돌아오라고 부르고 계신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에서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는, 아버지의 풍성하신 생명과 평화를 공급 받기 위해서, 아버지의 사랑 안에 정착한, 인간 구원의 이야기이다. 이 집에서는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이나, 아버지의 집에 항상 함께 있어온 형마저도, 아버지의 사랑의 권위 아래서 용서와 평화를 누린다.
과거 가톨릭이, 아버지의 집을 ‘가시적인 교회 제도’로 둔갑시켜서 교황의 치맛자락으로 들어오는 것을 구원인양 괴변을 늘어놓고, 성경을 봉인하고, 글도 가르치질 못하게 하면서, 오로지 거짓말로 백성들을 교회의 명령에만 복종하게 만든, 조지 오웰의 ‘Big Brother’와 같은 더러운 역사의 행태는, 결코 우리 개혁교회에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 역사이다. 마가나 마태, 누가나 요한, 바울과 아볼로와 같은 증인들이 얼마나 명명백백하게 ‘하나님나라’를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에 기저를 두고서 전하였는가를 알아차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으신 그 독생자(獨種子)를 십자가에 희생시키셔서 우리의 죄 값을 치르게 하심은, 타락한 아담을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아들이야말로 그 집의 상속자요 주인이 되게 하심이다. 단순히 배나 불리려고 돌아온 것이 아니다. 이는 더 이상 종이 아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회복됨이며, 아버지의 권위 아래서 책임을 지겠다는 뜻이다.
오늘의 교회가 진정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아버지의 집이라면, 돌아온 탕자가 책임을 다 할 수 있도록 용서와 화해를 학습하게 하고, 새 옷을 입히고, 인장을 끼어주어서, 적극적으로 하나님나라에 참여 할 수 있도록 역할과 자리를 구비해야 할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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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한 예수교회-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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