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신을 로마에 전한 메신저가 바울이 보낸 사도 ‘뵈뵈’라면(롬 16:1,2), 그녀는 결코 얼렁뚱땅 적당하게 바울의 복음을 전하려는 껄렁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적어도 누가에게까지 알려진 만큼, 뵈뵈라는 여성은 만만하게 여길 위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뵈뵈는 겐그레아 교회의 집사로서 많은 사도들과 복음 사역자들이 그녀를 통해서 안위를 얻을 수 있었고, 그녀의 사역 지를 방문한 이들은 그녀의 마음과 인품에서 우러나오는 파장 때문에, 아무리 겹친 피로로 인해서 회복이 불가했으리만큼 탈진한 전도자였다 하더라도 그녀에게서 마련된 공동체는 참된 쉼과 새로운 기운을 얻기에 넉넉하였던 것이다.
바울이 서원이 있을 때에 겐그레아에서 수염과 머리를 밀고, 차분한 정리와 새로운 점프를 준비할 때에, 그 머리가 다 자라고, 수염이 넉넉하게 되기까지는 짧지 않은 기간이었다. 그 기간 동안에 바울은 자신의 지나온 사역과 삶을 재점검할 수 있었고, 바울의 뜨거운 정열은 뵈뵈에게 투명하게 교감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송구스러운 이야기지만 필자가 46년 전에 복음을 들고 집을 나선 이후부터, 로마서를 그 풋 시절부터 사람들에게 항시 강론해 왔지만, 로마서란 너무나 심오하여서 결코 뜨내기 같이 어설프게 덤벼들었다가는 복음을 전혀 모른 채 종교인으로만 남아있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의 복음서를 총정리하면서 그가 만난 예수님과 어떻게 동행하고 있으며, 예수를 믿는 것과 인간 구원, 예수그리스도의 계시적인 지식을 모두 신중하게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더더욱 그는 그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될 청중들에게 가장 고귀한 그리스도의 말씀에 합일하는 삶과 인격을 내포하였고, 개개인의 역동적인 사명을 효율적으로 성과를 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성령의 은사들이 불 일 듯이 일어나게 하려하고, 교회 전체가 통전 적이고도 온전한 교회로서 서도록 하려는 거룩한 뜻을 내포하였기 때문이다.
만약에 복음을 담지 한 담지자가 경솔하게도 성령의 열매가 부재하거나, 사람들에게 구원의 선물을 확실하게 전달하질 못하거나, 복음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은사가 결핍되었다면, 그가 전달하려는 생명의 성령의 복음은 그만 빛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가 본 모습은 잃어버리고 예전만 화려해져서 경건의 모양을 그럴 듯하게 포장하였지만, 이미 경건의 능력을 잃은 지 오래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이 듣고 읽는 복음 자체를 의심하고 돌아서는 지경이 된 것이다. 뵈뵈가 복음을 갖고서 입성한 로마는 이미 유대주의자들과 그리스도인들 간에 충돌이 있어왔고, 그 결과로 추방을 당하기까지 하였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억제되어 있는 상태였다. 교회 안에 깊어진 질곡은 누군가가 풀어야 할 숙제가 되었던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이유로 수차 로마에 가려했으나, 다양한 문제로인해서 좀처럼 기회가 주어지질 않았던 것이다. 저는 로마에 복음 전하는 일은 뵈뵈에게 맡겨야 했고, 그보다 먼저 예루살렘으로 향해야만 하였던 것이다.
바울은 평소 그의 동역자들에게 기본적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숙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복음 전도자들의 자세와 태도를 아주 중요시하였다. 이는 그가 항상 ‘나를 본받으라.’ 한 그 훈련 지침에서도 밝혀진 것처럼, 사람들이 전도자들의 투명성과 정직성을 보고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항상 숙지시켰던 것이다. 특히 바울이 그의 서신들마다 빠지지 않고 기록한 것을 보면, 성령의 역사가 빠짐없이 그의 사역에 나타나고 있던 것을 강조하였다. 복음 전도자의 권위가 복음을 전하는 그의 내면에서 나온다면 인간 구원은 불가하다. 복음 자체가 구원과 부활과 영생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신적권위가 뒷받침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타락한 교권자들은 이를 건물로, 사람들의 수 놀음으로 대신하거나, 예전으로 대치해 버렸으나, 바울은 항시 성령의 나타나심,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화가가 그려낸 그림 안에 그의 인격이 녹아있듯이, 한 사람의 책 안에는 그 것을 기록한 사람의 모든 것이 녹아서 스며들기 마련이다. 모세가 시내산 돌덩이에 오경을 기록하였다면, 바울은 그리스도가 계시와 가르침과 삶을 보여주심과 그와 동행하심으로 만나주셨기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의 가슴에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 있었고, 개개인이 인격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증인의 역할을 다하였던 것이다. 사실 로마로 향하는 배에 올라탄 것은 뵈뵈가 아닌 바울이었을지도 모른다. 바울이 안위를 얻고 예루살렘으로 훌쩍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뵈뵈와 함께 그리스도가 로마로 가시고 계셨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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