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에 깊은 관심을 가진 목회자라면 복음서 8장에 갑작스러운 이야기가 끼어든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끼어든 이야기가 하나 더 있는데, 요한복음 21장이다. 이 두 개의 스토리는 요한복음의 전체 구조에서 보면 끼어들 필요가 없는 이야기지만, 아마도 이 복음서가 완성되고 나서 시간이 한참 경과된 후에, 따로 돌아다니는 8장 전반과 21장의 스토리가 너무 소중하여서, 서기관들 중에 어떤 분이 재편집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이 지상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선지 이미 2000년이 경과하였다. 천년을 두 번 넘겼으니 우리 교회가 상당히 사회적으로도 숙성해 있을 법 한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데에 문제의식을 갖는다.요즈음 요한복음 8장의 스토리가 얼마나 소중하게 느껴지는지, 만일 그 어떤 서기관이 이 말씀을 첨부하는 데에 게으름을 피웠다면 우리 교회는 영적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에 기록된 스토리는 예루살렘에서 전개된 이야기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체포된 여인과, 그녀를 이용해서 예수에게서 어떤 결점을 찾고, 올무에 씌우려는 영악한 율법사들과 종교 지도자들 군(群)과, 그리고 그들의 계략에 의해서 동원된 정의를 외치고 인민재판으로 여인을 처형하려는 성난 군중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서기관과 군중들에 의해 방화가 일어나고 처형되어지는 것을 유투브에서 너무 많이 보아왔다. 그녀가 현행범으로 서기관들에게 직접 체포되었다는 것은 무슨 음모가 발동되었음을 시사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법망에 걸려들면 빠져 나올 자가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오늘의 교회와 국가, 그 지도자들이 바로 이와 흡사한 상황에 맞닥뜨려 있다. 요즈음 세간에 떠들썩한 L기업이 검찰의 그물에 걸려들고, 매스컴에서 털리는 것을 본다. 이와 같은 시나리오의 유형들에서, 적은 나라에서는 기업이 문을 닫게 되지만, 큰 국가 주변에서는 나라가 하나 둘 없어지는 것을 얼마 전에도 보아왔다. 대국굴기(大??起)가 아니더라도, 저들은 연례행사로 나라 한둘씩을 무너뜨렸다. 강대국의 지도자는 누가 된다 하더라도, 그의 임기 중에 주변국들에 손을 대는 것은 뻔한 이치이다. 우리가 앞으로 당면하게 될 한반도 정세는, 북한으로 인해서도 비켜갈 것 같질 않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8장에서 여인과 예수가, 권력을 장악한 자들과, 그들의 계략에 의해서 조정되는 군중들에 의해서 둘러싸였다. 이 성난 군중들의 손에는 저마다 돌덩이가 들려져있다. 서기관들은 예수에게 묻는다. ‘모세는 이런 자를 돌로 치라 하였거늘, 선생은 뭐라고 말할 것이오?’ 그녀를 돌로 치라 할 것이면 비정한 인간으로 낙인 될 것이고, 용서하라고 하면, 불법을 저지르는 자가 될 것이 아닐까? 어느 인문학자는 오늘날에 우리가 예수처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한다면 그녀는 필연 희생되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린, 예수와 같은 권위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마다 자기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도 서슴없이 돌로 친다는 것이었다.
1957년에 제작된 시드니 루멧 감독의 ‘12 Angry Men’은 비가 막 올 것 같은 고온다습한 여름, 선풍기도 고장 난 6평 남짓한 작은 배심원 방에서, 부친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젊은이를 11명의 배심원이 성급하게 유죄로 평결하고 그 방을 떠나려 한다. 그러자 여덟 번째 배심원인 건축 전문직인 데이비스(헨리 폰다)가 꼼꼼하고 섬세하게 검사와 변호사가 간과한 사실들을 하나하나 지적하면서, 성격과 생각이 다른 배심원들에게 무죄 가능성을 입증하고, 무죄평결을 이끌어낸다. 이 영화는 헨리 폰다가 직접 제작한 영화로써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 곰 상을 받았다. 요한복음의 상황과는 다른 감이 없진 않지만, 무대에 흐르는 긴장감과 식별 능력과 공감대로 정의를 지켜내는 노력이 흡사하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께서는 먼저 숨고르기를 하셨다. 그칠 줄 모르고 조여 오는 서기관들 앞에 앉으시더니 무언가를 땅 바닥에 쓰시었다. 그러나 서기관은 예수를 더더욱 옥죄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때 예수께서 일어나셔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하시고, 다시금 앉아서 무언가를 땅에 쓰시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어른에서부터 아이까지 돌을 떨어뜨리고서는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현대 뇌 심리학에서, 6초의 시간이면, 감정이 상층부인 전두엽의 이성과 교감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날 자칫 정죄와 죽음으로 내 몰릴 수 있었던 여인은 참 자유와 평안과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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