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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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즈음 브랙시트 투표이후, 영국은 여성 전성시대로 들어섰다.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가 1990년 총리에서 물러난 지 26년 만에 테리사 메이(59)가 두 번째 여성 총리로 지난 13일 영국 총리에 취임했다. 스코틀랜드나 북아일랜드 지도자들도 역시 여성이다. 영국은 지금 사회 전반에 걸쳐서 앞장선 이들의 여성 비율이 남성보다 높은 편이다. 이 뿐 아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세계 60개국이 여성 총리이거나 여성 대통령이 지도자의 반열에 들어선 것이다. 미국의 차기 대통령 도전에서도 여성 후보가 대두되고 있어서, 앞으로의 세계는 보다 많은 여성들이 일선에 나서서 세상을 이끌 전망이다.
우리 세계에서 중동만큼이나 보수적인 곳은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의외로 보수적인 유대인들도 골다 메이어 여성을 이스라엘의 총리로 뽑아서 앞세웠다. 오늘의 세계는, ‘여성들에게 있어서 세상은 유리천장’이란 말이 무색하게 된 것이다. 지금 독일 메르켈 총리의 리더십과 영향력이 세계 1위인 것을 보면, 여성들에게 편견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계적 추세가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유독 종교단체에서는 편견이 사라지질 않고 있다. 예를 들어서 여성은 죽어서 다시 남성으로 태어나야만 한다 던지, 여성은 주기적인 생리 때문에 사제가 될 수 없다는 둥......, 그러나 보수적인 종교단체일지라도, 여성에 대한 편견을 해소시킬 구체적인 노력이 현실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적인 성숙과 변화를 우리 개신교가 직면하면서, 사람들의 회집이 이뤄진 교회 공동체도 성찰이 필요하겠지만, 교회주의론자들에 의해서 슬그머니 경전에다가 자신들의 욕구와 가치관을 삽입시킨 것에 대한 학문적 성찰도 필요할 때가 된 것이다. 대다수의 학자들이 교단에 소속되어 있고, 교단의 영향력으로 부자유하지만, 경전 사본사에 있어서, 보다 후에 첨부된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구절과 관계된 문항을 공개적으로 학술적 토론에 부칠 필요가 있다.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문항은 그 서신의 저자인 의도와도 맞지를 않고, 불합리하며, 후에 어느 사본에는 이 쪽 문장에 첨부되었거나, 어느 사본은 저쪽 문장에 첨부되어 있어서,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문항과 문장이 지도자들과 필사자의 교회주의적인 입장에서 첨부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라는 문구가 아예 오래된 사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보아, 이러한 정황을 살필 때에, 오늘과 같이 여성들이 지도자로 진출하고 있는 사실적 정황에서 굳이 고집을 부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과거 여성에게 기회를 일찍이 배려한 교단들에서는 우리나라에서도 세계적인 여성 지도자들이 배출되었으나. 여성의 권한을 축소하고 억누른 교단에서는 여성들이 성장할 수도 없었고, 저들이 활발하게 세상에 진출한다는 것은 그림의 떡이었던 것이다. 우리 한국 기독교가 여성에 관한 편견이 지나친 것은 유교적 가치관에서 탈피하질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편견과 오염을 씻어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사역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여성에 대한 편견은 물로 씻기듯이 지워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복음서들 가운데에 가장 후기에 기록된 복음서로써, 요한복음처럼 여성에게 남성과 같이 공평하게 가르침과 문장과 문단을 배려한 책은 없었다. 요한복음의 기적의 첫 사건도 여성에 의해서 연출된다. 그리고 예수의 사역이 완성되는 마지막 장면과 예수부활의 첫 대면도 여성이다. 예루살렘의 랍비 니고데모는 예수와의 대화에서 책망을 받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지만, 수가성의 여인은 그 도시의 시민들을 대낮에 예수께로 이끌어내는 선지자로 부각되어 있는 것을 보아서도, 당시 예수의 가르침에 눈을 뜬 선각자들이 얼마나 과감하게 남녀 편견을 뛰어넘고 고정 관념을 탈피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살려내었음을 명명백백히 알아 차려야 할 것이다.
 얼마 전에 은퇴한 연세대 김 모 교수의 글을 읽다가 깜짝 놀란 구절이 있었는데, 그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종교적인 편견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한번 몰트만의 ‘성령론’을 읽고서 그의 강론을 요약하여 발표하였더니, 몰트만이 성령 받은 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는데, 누가 강의하냐에 따라서 그가 성령 받은 자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우린 요한복음의 다양한 강론들을 많이 보면서, 불자나 유학자나 철인들의 요한복음 강론이 저마다 강조점과 결론이 달랐음을 보아왔다. 우리가 만일 성경을 그리스도론 보다는 교회론(교단)적인 범주에서만 고집한다면, 원 저자의 의도가 퇴색되어질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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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한 예수교회-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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