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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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약이나 구약에 있어서 가장 많이 다뤄진 인물이 있다면 이는 곧 아브라함이리라. 경전이 저를 중요시하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스라엘은 저들의 역사에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모세의 율법위에 건설되었다. 이들이 팔레스타인에서 세운 다윗왕조가 얼마가질 못하고 바빌론으로 붙잡혀 가서 포로생활을 하게 되자, 비로소 종교 사역을 담당하는 서기관들은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모세 오경을 정리하고 백성들에게 체계 있게 보급할 수 있는 교육의 틀을 마련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오늘의 아카데미와 같은 역할을 하는 회당이었다.  바빌론 이후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이미 세계화에 적응된 일부 시민들은 귀환하질 아니하고 세계 도처로 흩어져서 살게 되고, 마카베오 형제 난 이후 예루살렘이 안정되질 못하고, 중앙 성전의 역할이 무용지물이 되자, 이집트로 빠져나간 서기관들은 세계화에 적응하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재결집하기 위해서 비로소 70인의 서기관들이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서 해외에 널리 흩어진 이스라엘은 헬라어로 기록된 70인이 번역한 모세 오경을 회당에서 읽고 학습할 수 있게 되었다. 구약에서의 아브라함은 혈통의 틀을 벗어나질 못하다가, 예수가 등장하면서부터 혈통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아브라함이 정신적인 믿음의 조상이 되기 시작하는데, 이는 복음서를 기록한 서기관들 덕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최초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록한 바울서신의 저자인 바울도 이 70인경에 익숙 된 율법학자였고, 사도행전을 기록한 이방인 누가, 가장 아름다운 헬라어로 히브리서를 기록한 아볼로도 이 헬라 역 경전에 익숙 된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보편화 되었고, 동화 작가에서부터 헐리우드의 영화감독조차도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이다.
신약성경의 마지막 저자인 요한도 헬라어에 익숙할 뿐 아니라 랍비 전통에도 익숙하였다. 창세기 24장 1절을 원문을 직역하면 ‘그 날들로 나아가다’(went into the days)이다. 랍비들은 ‘그 날들로 나아가다’라는 문장을, ‘아브라함은 야훼 앞에서 그의 백성들로부터 메시아까지의 역사를 보았다’고 해석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 8장 56절의 유대인들과의 논쟁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라고 하였다. 이 문장을 보면 무엇보다도 요한 자신이 랍비 전통과 해석을 세밀하게 알고 있었음은 물론, 논쟁 당사자인 예수님은 랍비의 토라 해석을 잘 소화하고, 자신에게 적절히 적용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자신의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 적절한 정신적인 아이콘이 된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인식하는 이라면 누구든지, 그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더욱 빛을 발했다. 실제로 우리를 건강한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들은 물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늘도 많은 목회자들이 눈에 쉽게 보이는 것들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떠한 자였나? 그는 문명국을 떠나 하란으로, 하란에서 다시금 가나안으로, 한때 이집트로 내려간 일이 있었으나, 거대한 피라미드나 소돔문명의 그늘에 안착하질 않았다. 저는 오히려 간편한 텐트 생활을 즐거워했다. 그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소중한 제단마저도 반시간 만에 수축하였다. 제사를 마친 후에는 훌훌 그 곳에서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다. 우리는 솔로몬의 성전과 다윗을 엮어보려고 안간 힘을 쓰는 궁중학자들 같이, 다윗을 웅장한 성전을 건축한 사람으로 슬그머니 껴 넣으려 하지만, 다윗은 죽기까지 작은 예배당에 나아가 항시 하나님과 대면하였다.
요한이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을 들어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다시금 되살림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은 멀리 내다보았기 때문이다. 눈앞의 작은 이익에 마음을 빼앗기질 않았다. 저가 그의 주변에 학연, 지연, 혈연을 부르짖는 이들의 문화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았다면 결코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나질 않았을 것이다. 그가 혈통을 중요시 하였다면 하란에서도 떠나질 못하였을 것이다. 더더욱 이집트에서도 정착하질 않고, 저 멀리 보이는 것을 붙들기 위해서 나아갔던 것이다. 저는 마지막에 그의 기쁨이었던 이삭마저도 하나님의 제단에 올렸던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신다. 이 뜨거운 여름, 오로지 믿음만 가진 나를 기업으로 받으신 예수님을 아브라함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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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한 예수교회-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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