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20(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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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가철이라서 그런지 금년 여름은 유난히 더운 듯하다. 이런 여름에 여지없이 찾아드는 행사는 신도들의 수련회도 있겠지만 교역자를 위한 프로그램이 많이 있다. 예년처럼 지방에서도 교역자를 위한 세미나를 동반한 부흥회가 개최되었는데, 초빙된 강사가 교역자에 대해 많이 고심하며 원고를 준비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에 있긴 하지만, 강사 자신의 교회나 목회 경력이 상승 기류를 타고 있어서인지 대부분 어두운 부문 보다는 앞만을 내다보고 강의하는 것 같았다.
이 강사의 오후 강론이 ‘복음’에 맞추어 있었는데, 대부분의 교역자들이 ‘복음’과 관련하여 정리가 되질 못한 것임을 아쉬워하며 ‘복음이 무엇임......,’에 집중하려 애를 쓰는 가운데에 정의가 내려지고, 교역자들이 복음에 더 집중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아뿔싸! 이 강사가 강조하는 강의 전체가 ‘승리주의’에서 벗어나질 못한 것이었다.
한국교회는 지난 백여 년의 세월에서 기복적인 복음과 승리주의 복음에서 자유하질 못하였다. 이런 현상은 기독교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느 종교에서도 다르질 않았다. 기복주의 종교란 대다수의 교역자들이 바르게 인지하고는 있으나, 전혀 그 스타일에서 순수한 복음으로는 돌아서질 아니한다는 것이다. 고개를 끄떡이긴 하지만, 결코 실천에 옮기진 않는다는 말이다. 기복종교는 항시 국가와 끊을 수 없는 고리로 연결되어 왔다. 과거 고려시대나 삼국시대에서 국가의 종말을 맞이할 때에, 종교가 호국불교로 타락한 나머지 정권을 유지하는 종교로 전락하므로 인해서 국가나 국민 의식을 계도하기 보다는 정권의 시녀, 혹은 국민의 정서에 아부하다 보니 함께 망해버린 것이었다.
‘승리주의’에 관해서는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에게서 명료하게 분별하여 진 것 같다. 저는 출애굽기를 다루면서, 승리주의에 취한 이집트 종교와, 하나님의 계시에 귀와 눈이 밝아진 모세의 종교를 비교한다. 승리주의 종교는 귀족과 권력자와 가진 자의 시스템을 현상 유지하는 것에 주력하는 종교이다. 그 당시 이집트의 종교는 권력자 파라오의 정권 유지 시스템의 시녀였다. 허지만 모세가 만난 야훼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이집트의 권력에 억압되고, 정권 유지에 희생되던 히브리인들은 오로지 승리주의에 도취한 사회적 시스템에서는 노예이며 소모품일 뿐이었다.
그러나 광야를 넘어서 그 끝 부문까지 다다른 모세는 고통 가운데에 있는 자들의 신음을 들은 야훼신과 마주친다. 여기서 승리주의에 오염된 종교와 모세의 교회와의 현격한 차이와 충돌이 일어난다. 모세는 야훼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이집트에 들어가, 악과 고난 가운데에 있는 히브리인들에게 공감대를 이뤄서, 마침내 이집트에서 출애굽을 하여 자유인이 된다.
오늘의 가치관에서, 가진 자의 편에서 보면 가난한자는 실패한 자이고, 권력과 부의 대열에서 이탈된 자는 항상 피지배자가 될 뿐이다. 예배당을 화려하게 세우고 많은 회중들을 끌어 모은 이는 마치 목회에 성공을 하고, 예배당을 세웠다 해도 빚에 매여서 마지막에는 회중들이 모두 흩어지게 되고, 건축된 예배당은 필연 다른 이가 넘겨받는다. 사정이 이렇게 되면 승자의 대열에서 배제된 목회자는 죄인이 되고, 승자들의 비난거리가 된다. 고인이 되신 한경직 목사님이, 그를 성공한 목회자라 하는 기자들의 말에 답한 것처럼, ‘내가 목회에 성공한 것인지 아닌지는, 예수님 앞에 가서야 판결이 날것이다.’함에 무게를 두어야 하리라.
오늘의 한국교회는 불을 지핀 가마솥 안의 개구리 같은 현상이다. 조금 있으면 물이 펄펄 끓어오를 터인데, 아무도 눈치를 채질 못하고, 자신의 영달에만 집착된 상태이다. 얼마 전 교계에 얼굴이 무쇠처럼 뻔뻔해진 지도자와, 저를 줄곧 비판해온 평신도 지도자가 종교행사 앞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비판하는 이의 소속된 재단이 비판을 받는 자의 후원을 뿌리치지 못한 것이다. 저들의 어정쩡한 얼굴 표정은 숨길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오늘에 이르러서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승리주의에 오염되어 있다. 복음마저도 오염시켰다. 우리는 복음이 승리주의에 오염되고, 교회주의에 오염되었음을 알아차리질 못하고 있다. 요즈음 기사를 보니, 교황이 마리아 상을 바라보고 제단에 오르다가 미끄러져 실족하였다는데, 우리는 이 휴가의 계절에 예루살렘 성전 바깥, 영문 바깥에서 희생의 제물이 되어, 십자가제단에 오르신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미 화려한 성전을 떠나신지 오래이다. 그의 가르침에 훈련된 제자들이 돌덩이로 지은 성전을 건축한 일이 없었음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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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한 예수교회-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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