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양에서 주고받는 이야기 가운데에, ‘남쪽에서 가져와 심어놓은 귤나무가 북쪽에서는 탱자나무가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江南種橘江北爲枳)?’ 하는 이야기는 제나라의 안영과 초나라의 영왕이 주고받은 담화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뜻은 사람됨에 있어서 환경과 풍토가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뜻일 것이다. 요즈음 기독교 지상에서도 의인과 성화에 관한 신학자들의 논쟁이 한창이다. 마틴 루터가 제창한 ‘열매가 좋아야 좋은 나무라’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향하는 영국 복음주의자 톰 라이트(N. T. Wrigt)의 견해에서, ‘칭의의 종말론적 유보’를 김세윤교수가 수용한 것과 관해서 논쟁이 뜨겁다.
이 논쟁은 필시 한국교회의 도덕성 결핍으로 인해서 사회적 문제가 대두되자 촉발된 논쟁일 것이다. 종교개혁으로 인해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그가 의롭다함을 받았음’에 대한 법정적 무죄 선언이 신자들의 도덕성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지난 20세기 역사에서 독일이 종교개혁을 일으킨 종주국임에도 불구하고, 세계 2차 대전 중에 유대인을 600만 이상을 살해하였다. 독일 시민이라면 그 가족 가운데에 한사람이 유대인 살해에 연루되어 있을 만큼, 시민 각 사람의 의식이 복음의 가르침에 훈련되어 있질 못하였던 것이다. 금 번 폭스바겐의 부도덕한 처사에서도 독일 사회의 시민 의식과 도덕성은, 신학자들이 말하는 복음과는 별개의 문제로 다뤄졌으나, 실제로는 기술이 규제를 따라가질 못해서 일어난 처사이기도 하다.우리 교계를 살펴보자. 투표 과정을 통해서 교단장이 선출되고, 그 선거 과정에서 부정선거가 멈춰지질 않고, 당선된 임원 구성에 의해서 정책과 목표가 설정된다. 어디 이뿐인가? 서로 간에 주고받는 전략적 술수에 의해서 부서장과 부서 임원들도 구성된다. 이러한 정치적 책략에 총체적으로 교단들이 휘말려 있다 보니, 도덕성이 훼손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신학교 교수들도 교단의 세력에서 자유하질 못하기 때문에 신학적 논쟁도 자유하질 못하고, 궁중 신학자들 같이 권력자의 시녀 노름에 어울려 춤을 추게 되는 것이다. 어느 신학자가 개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법과 비리에 소금을 뿌려본 일이 있었던가? 다만 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신학적인 논쟁에 국한되어 있고, 신학적이라 하더라도 교단의 눈치를 봐야하기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에는 눈을 감고, 꿀 먹은 무엇 같이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어디 이뿐이랴? 우리 일선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들은 그동안 무엇을 하였는가? 신도들에게 립서비스와 프로그램 진행, 이벤트는 열심히 하였지만, 복음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이를 학습시키고 훈련시키는 것에는 부끄러워하였던 것은 아닐까? TV 생생정보 프로에서 국수집 사장이 국수의 전문가가 되어있고, 국수의 달인이 되어 있으면, 항상 손님들이 줄을 서며 넘쳐나고 행복해하질 않던가? 작금에 와서 종교개혁 이후 문제점이 되어온 신학적인 논쟁은 그동안의 교회사를 보면 핵심적인 논쟁거리가 되질 못한다. 한국교회사에서 교단의 분열이 신학적인 문제로 분열되었던가? 거의가 권력과 야합한 이해집단의 전략과 전술적인 계략에 신학자들이 들러리를 섰기 때문이었다. 오늘 날의 정치 집단이 내건 슬로건들이 정말 그 집단이 추구하는 가치관이었을까?
오늘날 교계에서 정화를 외치는 지식인들도 거의가 헐리우드 액션에 지나질 않는다. 영화 장면에서 하는 총질이 실탄이 장전되어있질 않고 소리만 요란한 공포탄인 것 같이, 허공에 대한 칼질뿐이다. 예를 들어 시민단체 모임을 운영하려면 기업에서 자금을 빼어내야 하듯이, 기독교윤리모임 집단도 개교회에서 지원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고 보니, 결국에는 부자의 밥상에서 나오는 부스러기를 기대해야 하기 때문에 소리만 요란해진 것이리라.
작금의 칭의론과 성화론 논쟁을 좀 더 단순하게 현실적으로 대해보자. 이 복음의 가르침을 우리에게 소개한 바울은 먼저 자기 자신의 죽음이 있었다. 이는 자기중심의 구도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구도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 소중하게 여기던 모든 것들을 모두 폐기처분 하였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 바깥으로 벗어나질 않았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아주 경이로운 선물을 우리에게 전달하였고, 성령의 각양 은사들도 가져 왔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그는 한결같이 우리에게 열매를 맺도록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그리스도를 본받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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