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인이 가장 애처로웠을 때 중에 한 가지가, 도둑이 자기 집에 들어 왔는데, 가져갈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이 빈손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경우란다. 요즈음에는 이런 집이 더욱 많아져서 도둑들도 웬만큼 꾀를 쓰지 않으면 하루를 공치는 경우가 잦은 모양이다. 한번은 도둑이 작은 교회 교역자의 집을 털려고 들어왔는데, 정말 양말 속까지 다 털어서 거실에 모든 기물과 옷 등 소지품들을 쌓아 놓았다. 집 주인이 들어가 보니 오로지 가져간 것은 딱 하나, 학교 때 받은 실반지 하나였다. 도둑이 들어온 것에 대해 당황스럽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우리 집에 들어온 손님에게 아무것도 들려 보낼 수 없었던 처지가 한동안 애처롭게 느껴지더라는 것이었다.
요즈음 공동체를 운영하면서 경제적인 부문에 관하여는 최소한에 필요한 것만을 지니면서 꾸려 나가는 오XX 공동체가 있다. 이 공동체의 대표가 칠순을 바라보면서 삼십년간을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에게 손을 내밀어 함께 살아온 이야기이다. 그는 세상이 보여주는 가치관에는 거의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익을 좇아서 가는 경제논리도 결국에는 사회적 약자를 만들어 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고, 아무리 법체계가 잘 되어 있어도, 그 법은 종래에 가서는 인간에게 폭력을 가져오기 때문에 법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를 받아줌으로서 서로 사랑하며 존경하는 세상을 어떻게 이뤄갈 수 있을까? 하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던 가운데에, 그 길을 산상수훈에서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이 공동체에서는 출소자도 지체부자유자도 행복을 붙든 것 같았다. 적어도 이 공동체는 이익을 따라가질 않는다. 적어도 인간관계에서만큼은 ‘왜 그랬어요?’라는 말을 사용하질 않는다. ‘그랬군요!’하는 공감대가 먼저이며, 누구에게든지 낯선 나그네라 하더라도 환대를 받는다. 생면부지의 손님이 온다하더라도 한 끼의 식사는 물론, 여러 날도 함께 묵을 수 있고, 그가 좋으면 평생도 함께할 수 있고, 언제든지 들어올 수도 있지만 나갈 수도 있는 문이 활짝 열려있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길이 막힌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직도 퍼즐의 범위가 광범위해서 막다른 벼랑 끝에 서 본 경험이 없는 슬기로운 지식인들도 있겠으나, 모두가 길이 없는 곳에 다다르기 마련이다. 하나님을 떠난 실낙원 증상에 시달리지 않는 이가 어디에 있을까? 바울과 같은 이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구나! 이 사망의 골짜기에서 누가 나를 구해줄 수 있을까?’하였다. 실제로 이 세상에는 길이 없는 것이다. 진정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이란 거의 끝이 막혀있을 뿐이다. 해결의 방안이란 오로지 그 곳에서 떠나는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서 ‘떠나라’는 명령어가 반복되어 있다. 아담이 그 부모를 떠나...,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천사가 롯에게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였다. 바른 길로 갈 수 없도록 하는 더러운 영으로 혼합된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가라 함은, 그 땅의 왕들이 음녀의 포도주에 취했고, 그 도시의 상인들마저도 그녀의 사치 바람에 부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계 18:1-3).
솔로몬 이후 사람들은 야훼 하나님이 중앙 성전에 계시는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야훼의 궁전이라 하였다. 그런데 어찌해서 주님은 주후 80년 아시아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하면서, ‘내 백성아 그녀를 버리고 나오너라. 너희는 그 여자의 죄에 휩쓸리지 말고, 그 여자가 당하는 재난을 당하지 않도록 하라(계 18:4)’ 하신 것일까? 이는 교회마다 이 여자와 함께 치부하면 놀아났기 때문이었다. 계시록이 기록된 10년 이후, 다시 기록된 요한의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맨 처음 행보 하신 곳이 예루살렘 성전이었는데, 그날 성전에서 ‘이 전을 부숴라! 내가 삼일 후에 다시 세우겠다.’ 하심은 왜일까?
어린 시절 ‘텬로력정’을 읽은 독자들은 그 뜻을 깊게 알질 못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그 시절의 교회는, 지금처럼 음녀가 권하는 진노의 포도주에 덜 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날 교회들의 취기가 도를 지나 장망성과 다를 바가 없다. 그 한 예로, 한 중형교회에 후임자가 들어서게 되면 권력투쟁이 시작된다. 한동안 몸을 움츠렸던 세력들이 일어나는데, 온갖 비리가 다 들썩이게 된다. 멀리서 보면 한 개인 지도자의 도덕적인 문제로 위장되었으나 사건의 본질은 권력 투쟁인 것이다. 교회가 이해집단이 되어버린 이상, 아무라도 이러한 통과 례는 피해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 교회연합신문 & www.ecumenicalpress.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