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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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겔이 하루는 교회의 문지방에서 물이 솟아나서 흐르는 그림을 보았다. 그가 본 환상은 아주 세밀하게 에스겔서에 기록되었다. 목회자에게는 교회에 대한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요즈음에 와서도 교회 성장 세미나에 인파가 몰리는 것들을 보면 아직도 슈퍼마켓 식 경영 방식이 수그러들지를 않는다.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경제력이 좋아지면 무언가 되는 것 같아 보여도, 이러한 것들은 에스겔이 본 생수의 강이 아니다. 인구 감소와 노령화, 젊은 세대의 감소가 교회에 상당한 위협이 되고 있긴 하지만, 이보다도 더 심각한 것은 끊이지 않는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교회들의 일탈로 인해서 세인의 근심거리가 되는가 하면, 하루가 멀다 않고 터지는 교회 지도자들의 탈선으로 인해서, 교회의 본질과 존재의 이유에 대하여 의구심이 드는 시점에 우리가 와 있다.
이렇게 교회의 근원적인 문제에 직면한 우리 교역자들로서는 ‘교회가 무엇인가? 이럴 때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해야 된다. 아마도 에스겔이 당면한 교회의 문제가 오늘 우리의 문제와 다르질 않았을 것이다. 에스겔의 그림 중에는, 주검의 골짜기에서 해골들이 군대가 되어 일어나, 잃어버린 도성을 되찾아 복구시키는, 성령의 역동적인 사역의 그림이 투사되어 있다. 이 모든 환상들은 교회의 회복을 꿈꾸며 그려진 성령의 말씀이다. 죽은 예전만 있던 교회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그 무엇이 시작된 것이다. 물이 흘러내리면 땅들이 적셔지고 비옥해진다. 물고기도 살지만 숲도 우거져서 온 세상이 낙원이 된다. 농부나 어부 할 것 없이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정황을 리메이크 한 복음서가 요한복음이다. 요한은 에스겔을 그대로 읽어서 요한의 시대로 번안해 놓은 것이다. 단지 에스겔의 교회는 한정된 이스라엘 시민과 팔레스타인 지역과 중앙 성소에 집중되어 있지만, 요한의 교회는 모든 세계인을 향한 거룩한 공회를 다루고 있다. 독자들이 알다시피 요한의 시대에도 교회들이 피폐하여졌다. 그 시대의 교회들을 일곱 교회로 정리한 요한계시록이 이에 대하여 잘 시사한다. 계시록 이후 십년정도 지나서 요한복음이 나왔으니, 교회가 음녀들의 포도주와 향연에 얼마나 취해있던지 중심을 잡지를 못하였다. 요한은 이렇게 혼탁해진 교회를 순수한 복음으로 재설정해야 했다.
오늘 이런 상황에 맞닥뜨린 우리로서는 책임감을 무겁게 갖는다. 우리 역사에서 보았듯이, 국가가 패망한 때에, 이 땅의 젊은이들은 잃어버린 강산을 되찾기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던지고, 가족마저도 멀리하고, 조국의 광복만을 바라고 자신들의 몸을 아낌없이 내어던지지 않았던가? 에스겔은 조국을 잃은 상태에서 먼 나라에서 포수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교회의 꿈을 꾸었는데, 요한은 공간적이거나 제한적 범주들을 넘어서서, 온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사치의 세력과 음부의 권세에서 벗어나고, 순수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유기체가 되도록 숨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오늘에서 교회란 무엇인가? 신학자라면 작금의 피폐한 상태에 있는 교회의 신학을 재설정해야 한다. 구원론과 관련해서 우리가 보다 큰 것을 잃은 것이 무엇인지도 성찰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간과한 것들 중에 지금도 놓치고 있는 것들이 적지 않다. 우리가 소홀히 한 것들 중에서 본질적인 것을 재발견할 수 있다면, 오늘의 교회는 보다 건강하게 회복될 수 있지 않을까? 대다수의 목회자들이나,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춤을 춘 신학자들도 무엇보다도 교회주의에 빠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도는 물론, 성령마저도 소홀히 하였다. 순수한 복음보다는 교회론적인 복음으로 윤색되었고, 교회론에 짜 맞춰진 옷이 그리스도에게 입혀졌고, 성령마저 교회론의 들러리가 되었다. 정황이 이렇게 교회에 집중되다 보니 그리스도와 성령과 그의 복음은 소원하여진 것이다.
목회자들이 저마다 교회의 성장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도덕과 윤리를 땅에 떨어뜨렸고, 복음마저 상실하였다. 에스겔의 교회가 바빌론의 포로 신세가 되었듯이, 요한계시록의 교회도 촛대가 옮겨질 상황이었다. 요한은 이를 보고 일어나서, 포도주가 떨어져 흥을 잃은 잔치 집에 새 포도주를 공급하여 잔치의 흥을 일깨웠고, 본질과 기능과 역할이 쇠퇴한 낡은 교회에 다시금 성령의 숨을 불어 넣는다. 루터와 칼뱅이 죽은 중세교회를 다시 일으켜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고, 김 추기경이 수취와 허물로 주검가운데 있던 한국가톨릭을 살려서 세상에 물을 공급할 수 있었던 그 신학과 역동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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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한 예수교회-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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