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세푸스를 더듬다 보면, 로마에 대한 유대인의 항전기록은 그대로 현대사에서도 낯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신정체제의 기치를 내걸고, 동포를 로마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일어난 ‘제롯당’이나 ‘시카리’가 오히려 동포를 약탈하고 학살한 기록 말이다.
당시의 유대민족이 과격파의 기치에 따라나설 수밖에 없는 안성맞춤의 빌미를 제공한 인물이 로마의 총독 프로로스였다. 요세푸스는 치를 떨며 <파멸의 길>의 첫 머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총독 아르비노스의 후임으로 네로가 파견한 게시어스 프로로스는 많은 불행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소아시아 출신으로 교활하기로는 그에게 지지 않을 아내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부임해왔다. 그가 총독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네로의 애첩 포페아와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
프로로스는 사복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악덕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요세푸스의 글은 이어진다. “프로로스는 너무나도 악랄하게 권력을 남용했다. 그 결과 곤궁의 밑바닥에 떨어진 유대인은 전임자인 아르비노스를 은(銀)이었다고 칭찬할 지경이었다. 아르비노스는 적어도 악행이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일 줄은 알았다. 그러나 프로로스는 마치 악덕의 쇼를 위해 파견된 양 우리들 유대민족에게 이것 보라는 듯이 약탈과 불법처형을 자행했다...이 이상 무엇을 더 말할 필요가 있으랴. 우리가 로마인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게 한 것은 프로로스였다.”
그런 상황에서 ‘로마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명분을 반대하고 나설 유대인은 없었다. 그러나 구호를 내건 자들 역시 서민들의 삶은 안중에 없어한다면 해방 꾼과 위정자들이 다를 바가 없어지지 않겠는가. 투쟁자금을 위해서라면 은행이나 인민을 털어도 그만인 그들이었다.
처음에는 보잘 것 없었던 혹은 불가항력적이던 사건이 무한히 부풀어 올라 마침내는 스스로에게 박해를 불러오게 되는 일은 역사가 너무나 자주 경험한 일이 아니던가. 거기에 사건이 신성과 연결되면 걷잡을 수 없어지게 마련. 때맞추어 가이사리아 사람이 불씨를 던지고 나섰다.
그리스 이민이 많던 항구 가이사리아에서는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갈등이 끊어지질 않았다. 유대인이 회당에 인접한 그리스인의 땅을 매입하려하자 턱없는 값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아주 좁은 길을 남겨놓고 공사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분개한 유대인 청년들이 방해하다 체포되자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술책이 프로로스 총독을 매수하는 일. 때맞추어 사건이 겹친다. 안식일에 그리스인들이 회당 입구에서 새를 잡아 희생제물을 바치며 비위를 거스르고 나서는 것은 차마 참을 수가 없는 노릇. 하나님을 향한 모독을 어찌 용서할 수 있으랴. 분별 있고 온건한 인사들이 관헌에게 호소하려했지만 선동꾼들의 부추김은 사건을 기어이 싸움으로 몰고 갔다. 기병대의 만류도 무색해지는 폭력 전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요세푸스의 증언은 계속된다. “프로로스는 마치 싸움의 불씨를 부채질하듯 성전의 보물창고에 사람을 보내 가이사에게 바친다는 구실로 17달란트를 빼앗아갔다.” 격해지는 폭동을 진압한답시고 프로로스가 군사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에 들어온다. 이리하여 국제정세에 밝지 못했던 유대인 사이에 당시의 지중해 세계를 통치하는 로마와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갔다. 대제사장과 지도층 인사들은 프로로스 총독과 열심당 사이에서와 또 로마군의 폭행에 격분하고 있는 민중 사이에서 나름대로의 수습을 시도했다. 그러나 여러 사건이 겹치면서 그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이미 과격파의 영향은 지도층의 자녀들에게도 미치고 있었기에. 요세푸스는 적는다. “당시 대제사장 안나스의 아들 에리아자로스가 성전호위를 맡고 있었는데 그는 호방한 젊은이였다. 그가 제사를 맡은 이들을 설득해서 외국인으로 부터는 제물이나 희생제물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했다.”
그것은 로마제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유대인은 조국을 잃게 되는 유대전쟁으로 돌입하게 된 것이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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