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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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북 철산 출신
정석홍(鄭錫弘 1926. 1. 10~2000. 5. 12) 목사는 평안북도 철산(鐵山)에서 태어났다. 그의 유년시절과 청소년 시절에 관한 이야기는 본인이 남긴 회고록이 전해지지 않아 자세한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그가 태어났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미루어 볼 때 그의 삶이 그리 녹록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다.
그가 태어난 1920년대는 일제의 감시와 조선수탈 작업이 한창이던 이 땅의 유소년들과 청년들에겐 미래가 보이지 않았던 암흑의 시기였다. 제대로 초등교육이나 중등교육 시설이 없었고,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계통의 학교나 한문교육을 받았던 식자(識者)들이 운영하는 사숙(私塾), 유림(儒林)에서 운영하던 서원(書院) 교육이 고작이었을 시기였던 점을 감안하면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만한 환경이 아니었다.
그나마 석홍이 태어난 지역은 일찌기 미국 북장로회 평양선교부의 관할지역이라 철산지역에 세워진 장로교계통의 교회에 부속된 학교와 주일에만 열리는 교회교육을 접하게 된 것은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유·소년 시절을 보냈던 정석홍은 1948년 4월 광복을 맞이했으나 남쪽과 북쪽 지도자들 사이 이념 대결로 혼란에 혼란을 겪던 와중에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하(월남)하게 되었다. 생활고(生活苦)에 시달리면서도 공부하겠다는 의욕이 강해 1956년 서울 남산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을 한 후, 1957년 경북 상주읍에 있는 부원교회(상주시 부원동 273)에 부임, 전도사로서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
그해 가을 경북노회에서 장로교회 목사로 장립받았다(기독교대백과사전 13권 p.1534엔 경서노회에서 안수받았다고 기록했으나, 당시엔 경북노회로 부터 경서노회로 분리되기 전이었다).

해방 후 남산 장로회신학교 졸업
경북과 대구지역에서 목회
서울 대현동 신현교회 두 번 부임
전교인 말씀 훈련에 중점 목회
 무료신학교(신천지) “신앙적 가치없는 집단” 규정

1960년에 대구시 범어동에 있는 대동교회의 부름을 받아 상주에서 대구로 임지를 옮겼다. 다시 1963년에는 대구시 중구에 있는 대구중앙교회에 부임하였다. 당시 대구 중앙교회는 1959년 교단분열 파동에 휩싸여 중립을 선언해 교역자가 바뀔 때마다 한번은 예장합동에 소속, 다음 교역자는 또 예장통합 소속 목사를 모시는 것이 관례화 되어 내려오다가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분립 당시 당회원들이 은퇴하게 되자 젊은세대 장로들이 예장통합으로 귀속하였다.
젊은 목사 정석홍은 그동안 배우고 싶어도 형편이 여의치 못해 못다했던 공부를 하기로 결심, 대구시내에서 목회하고 있던 그에게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당시 미국 북장로교 재단에서 세운 계명기독대학(현재 계명대학교 문과대학) 지리역사 학과에 학사편입하여 사학(史學)을 전공하고 문학사(文學士) 학위를 받았다. 이어서 중국국제신학원(中國國際神學院)과 미국 아칸사시에 소재한 리틀 록라이트하우스 재단에서 운영하는 크리스챤칼리지로부터 명예신학박사(D.D) 학위도 받았다.
정석홍 목사는 단신으로 월남해 하나님의 종이 되어 신앙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면서 남한의 예루살렘 대구에서 10여년의 목회사역을 접고, 1966년 3월 수도 서울 대현동 한국의 명문 여성교육의 요람 이화여자대학교 정문 가까이에 있는 신현교회로 사역지를 옮겼다.
그동안 대구지방에서 목회를 하면서도 과묵하고 성실하고 파워있는 지도자로 자리매김했고, 국내외 초교파 부흥사로서도 꽤 유명한 목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정 목사는 신현교회에서 두 차례나 담임목사로 부름받은 행운의 목회자이기도 하다. 첫번째는 1966년 3월에 부름을 받아 사역한 15년 간의 기간이고, 두번째는 미국에서의 이민목회를 하던 중 다시 청빙을 받은 1981년부터 그가 원로목사로 추대받고 은퇴한 1996년 12월까지 후반 16년, 도합 31년간 목회한 것이다.
그가 신현교회에 두번째 부임하게 된 배경은 정 목사가 미국으로 떠난동안 몇분의 실력있는 당회원들이 이민으로 교회를 떠나고, 또 교인들 일부가 교회에 불만을 품고 교회 분립을 선언하고 이탈하는 사건이 벌어져, 교회가 수습이 되지 않고 어려움에 처해진 가운데 다시 자기가 시무했던 교회로부터 재청빙을 받아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신현교회에서 정 목사의 전반부 사역은 교회신축이었고, 후반부 사역 역시 교육관 건립을 위한 대지확장과 건축비 모금으로 또 한번의 큰 역사를 이루었다.
그의 후반부 목회활동 가운데 기억할 만한 것을 정리해 보면, 교회성장을 위한 총동원주일 실시와 40일 다락방 새벽기도회와 교회의 영적부흥을 위한 금요철야기도회, 해체되고 없어진 여전도회 재건과 기드온 신앙운동과 매년 개최한 전교인 여름수련회, 교회의 다음세대 육성을 위한 신현유치원을 설립(1985년 3월 11일 개원)하여 교인들 자녀들뿐 아니라, 지역사회 복음화를 위한 선교적 차원에서 지역의 어린이들까지 입학할 수 있는 교육봉사 사역을 펼친 것이다.
재부임한 후 교회는 안정을 되찾아 갔고 교인수도 늘어 2부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발 맞추어 교회의 질적 성장을 도모해야겠다는 목회철학을, 정 목사는 교인들에게 말씀훈련의 필요성을 느끼고 월간 목회사에서 시행하고 있는 크로스성서대학(Cross Bible College)과 한국루터교회 총회에서 실시하고 있는 신·구약성경을 구속사론적인 입장에서 가르치는 벧엘 성서대학(Bible College) 과정을 교회에 도입, 전 신자들을 대상으로 성경말씀을 제대로 교육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이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 먼저 교역자들이 해 기관에서 진행하는 지도자 과정에 등록연수를 받은 후, 1987년 2월부터 전 교인들 대상으로 개강하였다. 이는 초기 한국교회기 실시했던 부흥사경회의 재현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막연한 심령부흥회가 아니라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와 같이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라는 말씀처럼, 정 목사는 모든 성도들 마음 속에 성경말씀을 아로새기는 작업을 진행했다.
말씀을 귀로만 듣고 잠시 후엔 잊어버리는 바람같은 부흥이 아니라, 음식물을 음미하며 꼭꼭씹는 것처럼 성경말씀을 가슴깊이 생기는 사경(査經)에 촛점을 둔 교육과정으로 벧엘 성서대학과 크로스 성서대학 과정을 도입한 것이었다.
이 과정을 전 교인들에게 단계별로 실시한 결과 온 교인들의 삶과 봉사의 태도가 확 달라졌다. 이같은 결단과 실천계획은 아마 자신의 목회와 부흥사로서 겪고 얻은 경험의 소산이기도 하였다고 본다.
당시 신현교회는 두 번의 교회분열이라는 아픔에서 벗어나는 계기이기도 하였고, 정 목사의 성역 40주년을 맞이하는 순간이기도(1988년 9월 28일) 했다. 1999년 11월 11일 정 목사는 은퇴를 앞두고 신현교회 원로로 추대되었다.
그는 교정(敎政)에도 신현교회 부임 이후 서울노회 노회장, 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 회장, 교단지 기독신문 실행이사, 총신대학교 운영이사, 기독교TV 이사(CTS), 총회 유지재단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1994년 9월 27일 대구 동부교회에서 모인 제79회 총회에서 부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1995년 9월 19일에서 22일까지 서울 논현동 충현교회(당시 김창인 목사 시무)에서 개최된 제80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인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그가 재직했던 제80회 총회의 결의안을 살펴보면, ① 21세기 교단부흥발전기획단을 구성하기로 하다. ② 당시 유행했던 소위 무료신학교(대표 이만희)를 일고의 신학적, 신앙적으로 가치없는 집단으로 밝히기로 하다. ③ 각종 주일실시를 폐지하고 연1회(5월 첫 주일)을 총회주일로 실시키로 하다. ④ 미주총회와는 우호관계를 증진토록 하다. ⑤ 미조직교회도 안수집사를 세울 수 있는 것으로 가결하다. ⑥ 선교사의 이중 교적(소속노회와 현지노회)은 불가하지만 선교후원금은 계속 지원하기로 하다. ⑦ 어린이 찬송가 증보판 발간은 허락하기로 하다.
정석홍 목사는 슬하에 1남2녀를 두었으며, 모두들 아버지의 신앙을 따라 돈독한 신앙인으로 국·내외에서 살아가고 있다.
정 목사는 신현교회를 마지막으로 사역을 마치고 자녀들이 살고 있는 미국 L.A로 가서 자녀들과 함께 노년을 보내던 중 2000년 5월 12일 74세의 일기로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총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주관으로 총회장(總會葬)으로 마지막 예를 갖추었다.
※본란 제1057호(2016.10.2) “제88회 총회장 손계웅 목사”는 제53회 총회장으로 바로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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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제80회 총회장 정석홍(鄭錫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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