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07(월)
 
1.jpg
 오늘도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를 다섯 번 돌았습니다. 개나리가 꽃봉오리를 피워올리고 있었고, 벚꽃도 제법 꽃잎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단지 안은 정오가 가까운 때인지라 한가롭게 거니는 몇몇 사람을 제외하곤 적막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미세 먼지로 인하여 하늘은 거무튀튀하였지만, 그나마 햇빛도 나무 그늘 사이를 비집고 들어섭니다.
오늘도 나는 살아 있습니다. 건강을 위하여 일정한 보폭으로 걸을 수 있고, 눈으로는 나무들 사이를 건너가는 까치도 볼 수 있습니다. 손가락을 움켜쥐기도 하고, 팔을 힘차게 저을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 출근 안 한다고 나무라는 사람도 없으며, 형사 죄를 지어 법정에 갈 일도 없습니다. 세금은 제 때 냈으며, 마음만 먹으면 가까운 지인들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이제 내 나이 예순을 넘겼지만, 서재에서 언제든 필요한 책을 꺼내 읽을 수 있으며, 한가한 때를 만들어 한천 가를 산책하며 벚꽃을 구경할 수도 있습니다. 새벽에는 차를 몰고 우이동에 있는 W교회에 가서 기도를 드리고, 아들의 취업과 딸의 임신을 위해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이 믿음과 건강과 행복을 가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직장을 은퇴하였으니 각종 문학 단체에서 얼마든지 열심히 일할 수가 있습니다. J낭송문학회에서는 춤과 노래와 시낭송이 어우러진 ‘몸시’ 공연을 하였고, H시인협회 임원회에서는 한 해의 마스터플랜과 로드맵을 제시하였으며, 기독문인단체에서는 협회의 발전을 위한 아이디어도 내놓았습니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K동호회에서는 시창작 강의를 하였고, P동호회원들과는 전주 문학 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전주 문학 기행에서는 한옥마을에 들러 경기전을 둘러보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보았으며, 돌담길 안과 밖을 걸으며 여행객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경기전 뒤편의 고향집도 둘러보았습니다. 현재는 삼층 건물이 들어서 있어서 옛 한옥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옛 풍경을 그려보았습니다. 큰누나가 매형과 데이트하던 동문 사거리의 제과점 ‘조화당’을 떠올려 보았고, 명절이 다가오면 어머니가 떡가래를 뽑아달라 했던 방앗간을 그리며 옛 동무들을 그려보기도 하였습니다.
고향의 옛 자취가 사라진 것을 보면서, 딸아이가 결혼해서 미국에 가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내와 아들이 매일 직장에 출근하는지라 가끔 거실 안이 공허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한 달 전만 해도 직장 동료들과 어울려 지내다가 집에 있으려니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아 몇 번이나 수첩을 뒤적여 봅니다. 다음 주에는 탈장 수술을 받은 매형 병문안을 가야 하고, 11일에는 P시인 시비 제막식에 참석해야 하는군요. 22일에는 종로3가에 있는 C홀에서 ‘몸시’ 공연을 하기로 되어 있고, 27일에는 H시인협회 세미나에 가서 주제 발표를 해야 합니다. 이를 보면 작가 생활이라는 것이 바쁘기도 하고, 공허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내는 “당신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고도 아깝지 않아?” 하면서 은근히 직장 생활을 더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고, 얼마 전 잠깐 귀국했던 딸아이는 “아빠를 보면 박지원의 『허생전』에 나오는 ‘허생’이 생각나.” 하면서 실용성이 부족하였던 양반에 나를 빗대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주변의 시선으로 인해 34년을 직장 생활하여 가족을 먹여 살렸던 나를 백수로 취급하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서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렇지 않은 것은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예레미야 애가> 3:24). 주님은 내가 고달플 때 “애썼다”며 위로해 주시고, 내가 외로울 때 동행해 주시며, 내가 힘들 때 강한 기운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주님은 내가 눈 앞의 안위를 도모할 때 영원을 보게 하시고, 죄로 인해 괴로워할 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내가 작가로서의 진정성을 도모하는 것은 주님이 나와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에게 주께서 주신 달란트로 기독 시학을 정립하라 하시고, 날마다 영감을 주시면서 멋과 낭만이 있는 푸른 초장으로 나를 이끄십니다. 주님은 주일날 예배 시간에 내가 애교를 부리며 부르는 찬양을 열납하시고, 나를 ‘일 對 일’로 만나 주십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기업이 내가 하는 일이 되고, 행복한 작가가 되어 행복하게 일하게 하십니다. 나는 그 여호와의 기업이 이 땅에서 빛을 발하게 하기 위하여 나의 달란트를 최선을 다하여 활용합니다.
주님이 동행함으로 나는 사람들 앞에서 배꼽춤을 출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사무엘하 6:14). 다윗은 “하나님의 궤”와 함께 함에 너무 기뻐 춤을 추었습니다. 나 역시 주님이 동행하심을 찬양합니다.
태그

BEST 뉴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기독교인의 행복론 - 51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