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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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새벽 하늘이 물감을 풀어 놓은 듯이 아름다울 때가 있습니다. 이른 새벽 남빛이었다가 포도주빛으로 변하면서 해가 뜰 즈음해서는 옅은 하늘빛을 띠는 과정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지요. 그 하늘 아래 있는 정경도 어둠을 말갛게 씻어낸 듯이 아름답지요. 그럴 땐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나에게도 삶의 새벽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다섯 살 때인 1960년대에 전주에서 Y초등학교 교감을 하신 아버지를 따라 학교 앞의 관사에서 생활한 적이 있습니다. 옆집의 교장 관사와는 돌담을 사이에 두고 쪽문이 나 있어서 교장 선생 사모님인 장여사가 가끔 놀러오곤 하였습니다.
“아이고. 사십대 중반에 웬 막내다요. 부부 금슬이 좋으신가 봐.”
그러면 어머니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서름여덟에 난 막내지요.“ 하며 웃으시곤 하였다.
“얘. 막내야. 춤 좀 춰 봐라. 옛다 춤값이다.”
그러면서 백 원짜리 지폐를 앞치마에서 꺼내면 어머니는 ‘애 버릇 없어진다’며 극구 사양을 하였고, 서로 주고 떨치고 하다가 결국 오십원 짜리 지폐로 낙착을 봅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차이코프스키 Pyotr Ilyich Tchaikovsky의 「백조의 호수」가 들어 있는 레코드판을 턴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레코드플레이어를 작동시켰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머니와 장여사 앞에서 새처럼 날아오르고 나비처럼 내려앉는 동작을 하며 춤을 추곤 하였습니다. “야 잘 춘다. 멋진 구경 하고 가네요. 쟤는 발레리노 시켜도 되겠다.”고 잔뜩 칭찬을 하고 가곤 하였습니다.
며칠 후에는 점심 때쯤 되어 학교 여선생들이 십여 명 우리집으로 몰려왔습니다.
“갑자기 웬일이라요?”
“아드님이 아주 무용을 잘 한다면서요. 그래서 구경 왔어요.”
“아이고 집이 지저분헌디 워쩐대.”
“괜찮아요. 아드님 무용만 잠간 보고 들어가려고요.”
“아이고. 얘는 정식으로 무용을 배운 것도 아니고, 그냥 전축을 틀어 놓으면 저 혼자 춤을 추는디.”
“예. 그것 좀 보려고요.”
그리하여 어린 나는 여선생들 앞에서 쑥스럽기도 하고 해서 엄마 품에 달려들어 그 젖무덤에 얼굴을 파묻었는데, 어머니는 “얘. 착하지. 니가 평소에 하던 대로 한 번 해 봐.” 그래서 한참을 어머니 가슴에 얼굴을 대고 있다가 겨우 일어나 춤을 추었습니다. 새처람 날아오르고, 나비처럼 내려앉으며 팔을 흔들고를 반복하며. 그러자  무용을 전공하였다는 여선생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아드님은 정말 무용에 재주가 있습니다. 무용학원에 다니지 않았는데도 저토록 기발한 안무를 하는 것은 천부적 재능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발레리노를 시켜도 될 것 같습니다.”
“아이고, 그런 건 생각해 보지도 않았는디.”
이런 일이 있은 후로 어머니는 만나는 지인들마다 “야는 무용에 천부적 소질이 있대야.”라는 말을 반복해서 말하였습니다.
나의 춤사위가 있고 난 일 년 뒤, 장여사의 부군은 K군의 교육장으로 발령나고, 아버지 역시 K군 초등학교 교장으로 발령나, 부모님과 나는 식구들과 떨어져 초등학교 뒤에 있는 관사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이사를 간 며칠 후 눈발이 진하게 흩날리던 날 어머니는 곱게 한복을 차려 입고 읍내에 있는 교육장 관사를 찾아갔습니다. 그 집은 일본식 집이어서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면 마당과 넓은 툇마루가 있는 거실이 있었고, 방은 다다미 방이었습니다. 다다미방 위에서 장여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하면서 곶감을 한 접시 꺼내왔습니다.
“야가, 그 춤 잘 추던 막내둥이 아니여?”
“야. 너 인사 잘 드려야지.” 하면서 어머니는 손으로 내 뒷덜미를 누르며 더 정중히 인사하게 하였습니다.
“아, 괜찮혀. 아직 어린앤디, 뭘.”
그러면서 두 사람은 그동안 못했던 얘기를 한참동안 늘어놓는 사이에, 나는 접시 위에 있는 다섯 개의 곶감을 다 먹고 한 개를 남겨두었습니다. 한참동안 얘기를 나누던 장여사가 말했습니다.
“아니, 왜 곶감을 한 개만 남겨놨다냐. 이거 마저 먹어라이.”
그래도 나는 “아니예요.”하면서 끝내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장여사는 “야가 다과를 내어 놓으면 어른들이 조금 남겨 놓는 것을 많이 봐서 그러는 거구먼.” 하면서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한껏 웃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집을 나와 집으로 걸어가면서도  “야가 어른들이 음식을 앞에 놓고 예의를 차리는 모습은 언제 배웠다냐?”면서 몇 번이나 살포시 미소를 지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와 내 앞으로 눈발이 더 많이 휘날렸지만, 날은 그다지 춥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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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행복론 -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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