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의 범주 속에 넣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종교이기 이전에 생명 자체이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들이 고행과 인간의 노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학문과 행동에 불과하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의 종교요 계시적인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구원 을 얻고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1. 떨기나무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
이 떨기나무는 어떤 나무인가? 떨기나무라 불리는 이 나무는 한 마디로 버림받은 나무이다.꽃을 피워 향기를 내는 화초나 열매를 맺는 유실수나 더구나 재목으로 쓸 수 있는 나무도 아니다. 사람 뿐만 아니라 짐승조차도 가까이 하지 않는 나무요 저주 받고 버림받은 나무였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런 버림받고 저주받은 나무에 임하셨을까? 그 이유를 생각해 보자.
(1) 애굽속의 이스라엘 백성이었다.
모세는 당시 처가살이하면서 장인의 양 무리를 돌보고 있었다. 동족들은 애굽 땅에서 인간 이하의 짐승처럼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다. 모세를 포함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형편은 떨기나무와도 같았었다. 인권은 물론 경제적인 착취를 당하고 종교적인 자유마저 누릴 수 없는 가련한 형편 이었다. 이스라엘 이야말로 소망은 보이지 않았고 고통의 연속이었던 어느 날 하나님은 떨기나무 가운데 임하셨던 것이다.
모세는 40세에 자기의 힘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려 했으나 그는 실패 하게 된다. 광야로 도망한 모세는 40년 동안 꿈마저 사라져 버리고 소망도 사람도 가까이 하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2) 우리 에게도 하나님은 임재 하신다.
우리가 돌아 볼 때 가시떨기 처럼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님이 임재하고 계신다.
모세가 자기 자신을 신뢰 하였을 때는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셨지만 임재 하시지는 않았다. 그것은 아무 육체라도 주 앞에서 자랑 할 수 없게 하려 하심이다(고전 1:27-31).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신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나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임재 하시게 된다
구약의 예언자가 끊어진지 400여년 아무 희망이 없는 암흑시대에 가시나무 같은 곳에 예수님이 오셨다. 그러므로 자기가 가시 떨기나무같이 형편없고 보잘 것 없다고 낙심할 필요 없다. 왜냐하면 우리 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이다.
비록 떨기나무 같이 보잘 것 없고 아무 쓸모없는 것 같이 보여도 우리 속에 하나님이 임재 하셔서 역사하시기만 하면 큰 광경을 이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시느냐 이다. 예수를 믿어도 하나님의 임재 하심이 없이 내가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 하시기만 하면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이 형통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의 형통이다. 이 형통하게 되는 비결은 광야로 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요한 자리를 찾아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그분께서 주시는 힘을 덧입으며 그분을 바로 알고 바로 배우며 자기를 발견하여 자 기 허물을 찾아 고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은 아무 짝에도 쓸데없다고 고백하고 깨어지고 낮아진 떨기나무 가운데 우리에게 임하신다. 바로 그분을 만나는 일야 한다. 바로 지금 이 그분을 만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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