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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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은 본문을 예수께서 부활하신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이야기라고 명시하고 있다(14).이 사건 이전에 예수께서는 안식 후 첫날 새벽에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그리고 그날 저녁에는 유대인들이 무서워 문을 잠그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20:19). 8일 후 예수께서는 두 번째 도마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못자국난 손과 구멍 뚫린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그가 확실히 죽은 후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 시켜 주셨다. 8일 후에 다시 나타나신 것은 안식 후 첫 날에 나타나심이 결코 예수께서 잠간 기절했다거나 잠간 의식불명의 상태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과 부활을 확증시켜 주시기 위함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요한복음 20:20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땅에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내보신 것처럼 제자들을 죄사함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세상에 내보내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21절에서는 이들에게 숨을 내쉰 후,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을 하신다. 제자들이 앞으로 해야할 일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숨을 제자들을 향하여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동시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그리고 그는 이것을 말씀하시며 숨을 쉬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성령을 받으라.’”숨을 쉬셨다는 뜻의 “에네푸세센”(ε’νεφυ、σησεν)은 과거부정형(Aorist) 형이다. 이미 숨 쉬는 동작이 끝났다. 분사형으로 “(성령을) 받으라”(람배태, λα、βετε)는 말을 수식하지 않는다. “이것을 말씀하시며”할 때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앞 절의 사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내보낸다는 것을 이들에게 말씀하셨다는 말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쉬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다. 이때는 “말씀하신다”(λε、γει)라는 말은 현재형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숨을 내 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마치 숨을 내 쉬신 것과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는 것이 동시에 일어난 일로 번역하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서양의 대부분의 역본이나 한글 역본들은 숨을 내시며 동시에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하신 것처럼 번역하고 있으나 이는 선입견을 가지고 본문을 대하는 주의깊지 못한 번역들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는 말씀은 마태복음(28:16-20)과 사도행전(1:1-2:4)에서는 이 사건을 좀 더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예수께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이 첫 번째 성령세례이고,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이 두 번째 성령 세례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복음서 저자들은 같은 사건을 각각 다른 시각과 강조점을 가지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요한복음의 이 기록을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을 염두에 둔 예비적인 말씀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공관 복음이나 요한복음이 다같이 같은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평안을 기원하고, 이들을 죄 사함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내 보내시며, 이들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도들임을 확증하고 인치는 성령을 주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 이은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세례의 사건을 아주 간단하게 처리하고 있다. 요한의 강조점은 낙향한 제자들을 찾아가시어 아침밥을 먹이는 사건에 두고 있는 것 같다.
이제 21장에 보면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 마지막 부탁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낙향하여 옛 사람, 어부들이 되어 버렸다. 이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따를 때는 나름대로 꿈이 있었고, 소망이 있었다. 예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고, 그때에는 자기들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을 수 있을 것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그들의 인생을 올인한 것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는 마치 왕이 대관식을 하기 위하여 입성하는 걸로 생각하고 그들의 옷을 벗어 양탄자를 대신하며 호산나 찬송을 불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를 져버리고 로마 군병들에게 체포되어 십자가에 매달려 숨을 거두어 버렸다.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그들의 모든 꿈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그들에게 부할하신 예수께서 주신 죄사함의 복음을 전하라는 선지자적 사명은 그들의 낙향과 함께 그들의 마음을 떠나고 없었다. 그들은 실망과 좌절을 안고 이제 새로운 살 길을 모색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다. 당장 입에 풀칠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잡힌 것이 하나도 없었다. 마치 3년 전 처음 예수님을 만났던 밤과 마찬가지로 빈 그물이었다.  
날이 밝아 오자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신 예수께서 이 실망과 좌절에 빠진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애들아 너희들에게 물고기가 하나도 없느냐?”고 물으셨다. 예수께서는 이들을 “얘들아!”하고 부르신다. 마치 아비가 자식을 부르고, 선생님이 그의 학생들을 부르듯이 정감어린 어투로 부르신 것이다. 그리고 “애들아 좀 고기를 잡았느냐?”하고 부르시지 않고 “애들아 너희에게 물고기가 하나도 없느냐?”하고 부정적으로 물으신다. 아마도 “아니요”라는 대답보다는 “예”라는 대답을 더 원하신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누군가가 그들을 “얘들아” 하고 불렀을 때는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했음즉도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내리라고 했을 때도 그러한 명령을 내리는 자가 누구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다. 고기를 잡아 돌아와야 할 아침에 그물을 내리라고 하는 것도 말이 안 되고, 더구나 조그마한 배 오른쪽에 그물을 내리든 왼쪽에 내리든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생각이 있는 어부라면 이 말이 얼마나 비상식적인 말인지 금방 알 수 있었을 것이고, 거기에 대하여 한마디라도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정체불명의 그 사람의 말대로 그물을 내리는 것을 보면 그들에게는 그러한 것을 생각하고 따질 여유가 없다. 그들에게 고기 잡는 것이 현실적으로 너무나 절실한 문제였지 않나 생각된다. 예수님이 살아 계시리라고는 전혀 그들의 의식 속에 없는 것 같다.
예수께서 보실 때 이 제자들은 자기를 버리고 자기 살 길을 찾아간 한심스러운 자들이었다. 베드로는 이미 대제사장의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그의 선생을 모른다고 했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숨을 거둘 때에도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제자 중 제일 먼저 물고기 잡으러 간다고 발걸음을 갈릴리로 옮긴 사람이었다. 이들은 배신자들이다. 어쩌면 가룟 유다와 별로 다를 바가 없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이들을 찾아 오셨다. 이때 제자들의 의식 속에는 예수라는 분이 지워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이 배신자들을 찾아오시어 추위에 떨고 있을 제자들이 몸을 녹이도록 불을 피우고, 아침 식사를 마련하여 기다리고 계신 것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러한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들이 내게 어땋게 이럴 수 있어?”하며 한 마디라도 섭섭한 마음의 표시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히려 이런 배은망덕한 제자들을 찾아오시어 고기를 잡도록 도와주시고, 아침상을 마련하신 것이다. 책망이나 원망은커녕 오히려 이들의 상실한 마음을 위로하시는 것이다.
요한은 성만찬 기사를 기술하며,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한 13:1)라고 시작하고, 자기를 팔아넘기기 위하여 자기 곁을 떠나는 유다에게 자기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빵조각을 떼어 주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예수께서 이제는 자기를 버리고 제 갈 길을 간 제자들을 찾아오시어 다시 밥상을 차리고 제자들을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한 컷 찍은 것이다. 예수님의 끝까지의 사랑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랑하기 힘든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신 것이다. 사랑이란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끝까지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세리들의 사랑이다. 예수께서는 자기중심적으로 손익을 계산하는 동물적인 사랑은 세리들이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마5:46). 구약성경의 “헤세드”(דסח)는 변함없이 꾸준하고 성실하게 사랑하는 한량없는 하나님의 사랑, 갚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일컫는 말이다. 예수님의 사랑도 같은 “헤세드”의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우리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하여 밥상을 차리는 예수님을 본받아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죄사함의 복음을 전하라고 주신 선지자적 사명은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위하여 조반을 차리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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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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