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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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 시작되는 날, 정릉에서 칼바위를 넘어 성곽이 바라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외국인 두 사람이 엉뚱한 데로 빠져들고 있어 그 쪽은 길이 아니니 이 쪽으로 가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북한산을 찾는 외국인들이 늘어나는 추세라 가끔은 길을 묻는 이도 있고, 방향을 몰라 서성대는 것을 볼 때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안내를 해주곤 한다. 2년 전 2016년 이때쯤에도 성곽 길을 따라 대동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가벼운 차림의 반바지에 노르웨이 국기가 꽂힌 배낭을 멘 키가 큰 중년의 금발미인과 훤칠하고 중후한 신사와 마주치게 되었다. 의례적인 인사만 하고 내 길을 가려는데 영어를 하느냐고 정중하게 묻는 여자가 한쪽 다리에 피를 흘리고 있다. 물티슈를 꺼내주어 상처를 닦게 하고 알콜로 응급조치를 해주자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하면서 대화가 시작되었다. 나는 노르웨이가 한국전쟁 때 병원선을 보내주었고 이후 스칸디나비아 병원을 건립해준 은혜를 잊지 않는다고 했다. 이때 남자가 명암을 꺼내어 주는 것을 받아 살펴보니 그는 주한노르웨이 대사(Jan Ole Grevstad)였다.
조금 전 두 사람도 성곽 길을 제대로 찾아 오르게 되어 감사하다며 인사를 한다. 스페인에서 왔다는 빌렛(vliet)과 네덜란드에서 온 죤(Joan)은 한국여행이 처음인데 북한산이 대단히 유명하다는 것을 알고 등반을 결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좋은 시간을 가지라고 덕담을 하고나서 나는 북한산에서 제일 높은 곳 백운대로 가는데 그대들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둘이는 서슴없이 나와 함께 백운대에 오르고 싶다며 따라 나설 자세다. 이에 나는 연전에 은퇴한 목사라서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등반을 하는데 오늘은 두 나그네의 인도자가 되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성곽 길을 따라 대동문에 이르렀을 때는 낮12시가 넘었다. 근로자의 날이기도 해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 곳곳에서 푸짐하게 점심 판을 벌이고 있다. 그들이 이채롭게 보는 것을 감지하면서 점심을 먹을 만한 자리가 있나 주변을 살폈으나 여의치 않아 보인다. 아무래도 좀 더 가서 점심을 먹는 게 좋을 것 같아 20여분을 더 전진한 후에 북한산 대피소에 도달했다. 자리를 정하고 내가 배낭에서 김밥과 바나나, 오이, 과자류와 음료수를 꺼냈다. 한국인들이 등반을 즐기면서 노중에 점심 먹는 것도 보여줄 참이다. 두 사람은 내 눈치를 살피면서 어디서 샀는지 배낭에서 김밥 한 줄과 육포 한 봉지 과자 몇 개에 물 한 병을 꺼냈다. 나보다 체구가 훨씬 크고 젊은 편인데 점심준비가 빈약해 보였다. 내가 짐짓 김밥과 과일을 권하는 대로 받아 먹으면서 옆에서 많이들 차려놓고 즐겁게 먹는 것을 은근히 넘겨보고 있다.
아무튼 한국의 풍요로움과 산에서도 넉넉하게 먹는 것을 보여주면서, 배낭에 한 권씩 넣고 다니는 <<산을 품다>>라는 나의 수필집을 꺼냈다. 딸의 결혼식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치르느라 십 여 일 간 채류했던 일과 스페인을 여행한 기행문이 수록된 에세이다. 두 사람이 다 가졌으면 하지만 한 권뿐이라 죤이 빌렛에게 양보하면서 책을 두 손으로 바쳐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서 호연지기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지금부터의 행로는 굴곡이 심한 암반요철지대라 칼바위에서보다 더 힘든 코스라 조심을 더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기꺼이 오르겠다는 눈빛들이다. 특공대로 지원한 두 용사를 데리고 적진을 돌파하여 목적을 달성하고 무사히 복귀해야 하는 작전수행과도 같다. 노적봉 삼거리에서 멀리 바위산정의 백운대를 올려다보며 저기가 바로 우리가 점령해야 할 암벽의 요새라며 깃발이 휘날리는 것을 바라보게 했다.
우리의 수도 서울에 이렇게 좋은 북한산이 있다는 게 더없이 자랑스럽다. 겨울이 별로 없는 곳에서 온 두 사람이 눈에 덮여 빙판이 되었을 때 내가 사고를 당했던 지점을 통과하게 되었다. 2010년 2월10일 빙판에서 3번을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오른편 갈비뼈 3대가 부러졌다. 그때 상황을 이야기 하면서 지금도 나는 계절에 관계없이 어느 산이건 최고봉을 향해 적의 진지를 점령하겠다는 각오와 기도하는 믿음으로 우리나라의 유명산을 거의 다 찾아 몇 번씩 등반하고 있다고 했다. 네덜란드에서 온 죤은 반바지에 배낭을 메었지만 스틱은 없고 신발도 보통 운동화다. 스페인에서 온 빌렛은 그나마도 아닌 평상복차림이다. 북한산 등반길에서 만난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이 두 사람처럼 등산복 아닌 평상복 채로 다니고 있다. 최근 들어 우리의 산행열기에 따른 패션유행은 글로벌아웃도어시장을 선도하면서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런 때문에 전국의 유명산들도 화려해지고 있다.
백운대 입구의 '위문'은 사방에서 모여드는 등반객들의 교차로다. 오늘도 다양한 색깔의 등산복 차림들이 북적댄다. 우리도 북새통 대열에 끼어 물 한 모금씩을 마시고서 가파른 암벽에 걸린 쇠줄을 붙잡고 발걸음을 옮긴다. 앞이나 뒤나 뉘나 할 것 없이 씩씩거리며 먹이를 움키려는 야수들처럼 이다. 아니면 꼴인점을 바로 앞두고 혼신의 힘을 쏟고 있는 경주자들의 처절함이다. 북한산 등반의 백미는 백운대다! 누구나 한번쯤 오르고 싶어하는 백운대에 또 올라섰다. 나름대로 빌렛과 죤에게 베테랑의 본을 보여 주었고 뒤따라 올라 온 그들은 최고라는 표시로 내게 답하며 감격해 한다. 두 사람을 축하해 주고, 자랑스럽게 휘날리는 태극기와 백운대라고 새겨진 표지석 앞에서 포옹을 나눈 후에 기념사진으로 말미를 장식했다.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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