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예수님과 사도바울은 전혀 그런 기법을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역설적이고 어리석은 이야기를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팔복 설교도 당시는 힘과 정복을 통해서 땅을 차지하는 것이지 어떻게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까? 고린도전서1장에 나타난 바울의 설교 역시 설교자의 바보스러움을 말하는 것이며 십자가를 선포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고 미련함의 극치였다는 것입니다. 광대가 무엇입니까?
광대는 시대의 아픔과 한, 정서를 마음에 담아 말과 음악과 춤 등을 통해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전하며 마음을 치유하고 힘과 용기를 주는 존재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광대 설교자는 본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광대적 감성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본문이 웃기면 웃기는 것이고, 본문이 슬프면 슬프게 전달하고, 본문이 진지하면 진지하게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자가 먼저 자기비하와 자기부인을 해야 합니다. 점잖아 가지고 어떻게 광대 설교를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지금까지 기존의 설교학은 목회자의 고상함과 우아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품격과 본문의 메시지를 드러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설교가 정형화, 제도화, 화석화 되다 보니까 설교자만 드러나고 진정한 하나님의 복음이 드러나지 않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광대 설교는 때로 설교자가 망가지고 품격이 떨어지더라도 하나님의 마음, 숨겨져 있는 감정이 설교자를 통해서 청중들에게 전달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설교자에겐 전령, 목양자, 스토리텔러, 그리고 증인의 이미지와 역할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마음과 아픔, 사랑과 기쁨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 본문의 사건과 이야기가 설교자의 감성을 호흡하게 하고 파도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호흡과 파도를 통하여 역설적 복음과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자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광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맨 먼저 광대 설교론을 쓴 분이 김덕현 교수님의 스승이신 요한 H. 실리에 교수님입니다. 저는 몇 년 전 그 분이 쓴 ‘하나님의 어릿광대’라는 책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나는 철저하게 광대 목회자요, 광대 설교자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생태적으로 광대의 끼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게다가 맨땅, 맨몸, 맨손으로 개척한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이 환경적으로 광대 목회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개척할 때 오신 분들은 대부분 상처와 아픔이 많고 낮은 자존감을 갖고 있어서 위로와 힐링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광대 사역을 하게 된 것입니다. 교인 집에 심방을 가도 그들의 아픔을 가슴으로 함께 느끼며 광대적 기도를 해 주었고, 복음을 역설적으로 전하며 반전의 꿈을 심어 주었습니다. 또한 설교 할 때도 이중시점을 사용하면서 본문의 절정을 극화시키기 위해 중간 중간에 찬양을 하고 필요할 때는 대중가요도 개사하여 부를 때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김덕현 교수님에 의하면 본문만 확실하게 잘 드러내고 절정을 극화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언어를 쓰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설교의 기준이나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사실 제 설교가 방송으로 나가면서 많은 비판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목회자들이 저의 광대적 설교 스타일을 따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광대설교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제 설교를 이론적이고 신학적으로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책이 나왔고 지지하는 교수님이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저는 광대 설교론을 잘 발전시켜서 정말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고 복음을 역설적으로 전달하며 수천 년 전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의 언어와 혼과 노래로 전달하는 광대 설교자의 모델이 되어갈 것을 다짐했습니다. 김덕현 교수님을 알게 된 것이 참 감사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