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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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저의 목양칼럼 광대 목회, 광대 설교의 글이 네이버와 다음에 실렸는데 반향이 제법 컸다고 합니다. 많은 분들에게 신선한 충격이 되었지만 개중에는 비판하는 분도 있었다고 하지요. 비판의 골자는 설교자와 복음의 격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죠. 즉 약장수 같은 설교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백번 옳은 말이라고 여겼습니다. 왜냐면 광대 설교론을 잘못 이해하여 설교자가 청중들에게 엔터테인먼트나 하는 유사광대노릇을 할 수 있기 때문이죠.

광대 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 설교자의 바보스러움과 역설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행동과 설교를 봐도 당시 정황에서 보면 바보스럽고 역설적일 때가 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 역시 자신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 구경거리(광대)가 되었다고 했잖아요.(고전4:9-10)

두 번째 중요한 것은 성경 본문과 청중을 향한 애절함과 열정입니다. 억지로 청중을 웃기고 폭소를 자아내려고 하는 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설교가 개그콘서트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가수들도 대중적 소통과 감동을 위하여 청중을 향한 애절함과 예술적 투혼을 발휘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설교자는 시대와 소통하고 청중을 감동시키기 위하여 이런 애절함과 열정이 더 있어야 하겠지요. 바로 그 애틋한 열정과 신앙적 투혼으로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마음과 아픔, 그리고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청중의 가슴에 울렁거리도록 전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세 번째는 필요에 따라 설교자의 자기 부인, 자기 비하가 필요합니다. 일부러 설교자가 바보가 되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복음을 더 잘 드러내고 하나님의 마음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하여 자기 부인이나 비하를 통하여 하나님의 광대가 되자는 것이죠.

지금까지의 기존 설교학은 성경 본문 속에서 설교의 씨앗을 찾아내어 신학적 논리로 3대지 설교를 만들어왔습니다. 그리고 3대지의 메시지를 잘 전달하기 위해 본문과 적절히 연결되는 예화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다가 조금 발전한 설교가 스토리텔링이었습니다. 80년대 이후에 생겨난 미국의 새로운 교회, 곧 커뮤니티 처치는 대부분이 스토리텔링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미국의 설교학자 스콧 깁스의 표현대로 교회 공동체성이 상실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남아공의 스텔른보쉬대학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광대 설교이론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광대 설교를 하게 되면 몇 가지 결과가 나타난다고 하는데요, 첫째는 바보스러운 교회 공동체, 둘째는 역설적 교회 공동체, 셋째는 교회의 공공성과 공동체성이어야 한다고 하죠.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교회 모습이기도 합니다. 물론 설교자가 광대가 되지 않고 설교자의 격을 높이며 설교 전달 방법 역시 아주 중후하고 격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하면서도 교회가 바보스러운 공동체를 이루고 역설적 공동체를 이루며 공공성과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면 말이죠.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는 설교자의 격이 정형화되고 고품격 콘텐츠의 메시지가 전달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교인들은 영악하고 똑똑해 지는 걸까요? 왜 그토록 자기 선악의 논리와 윤리적 기준으로만 판단하며, 서로 증오하고 다투며 분열을 반복하고 있는 걸까요? 지금 한국교회는 과연 공동체 회복과 공공성의 교회를 세우고 있습니까? 서로 힘을 모아 교회 생태계를 지키려고 킹덤처치를 세우고 있는가요?

광대 설교론이란 절대로 엔터테인먼트나 각설이 타령식의 속화적 설교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복음과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더 드러내고 시대와 청중을 향해 대중적 소통을 하기 위해서 애절함의 혼을 가지고 때때로 바보스러움과 역설적 자기비하를 하자는 것이죠. 그러면 진정한 광대 설교와 짝퉁 광대 설교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청중을 울리건 웃기건 간에 그 목적이 하나님께 유익이 되고 영광이 되며, 동시에 청중의 가슴에 울먹이는 감동을 주기 위함에 있다면 진정한 광대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의 자기 유익과 인기를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은 사이비 광대 설교요, 짝퉁 광대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 교회는 철저하게 바보스러운 공동체를 이루어 왔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가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12년째를 해 왔잖아요. 더구나 우리 교회 부흥과는 전혀 관계도 없는 한국교회 생태계 보호를 위한 사역을 변함없이 해 왔지요. 이런 바보스러운 공동체를 이루지 않았더라면 저는 진작 우리 교회에서 쫓겨나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성도들의 바보스러움 때문에 우리 교회는 여전히 역설적 공동체를 이루고 있고 사나 죽으나 전도와 기도, 사명 밖에 모르는 젊은 교회로 매주 다시 태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공공성과 공동체성을 발휘하여 묵묵히 한국교회를 섬기며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결코 설교자의 격을 운운하다가 청중에게 전혀 감동을 주지 못하는 고지식한 설교자보다는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대와 소통하며 청중에게 울먹임과 감동을 주는 진정한 하나님의 광대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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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광대 목회, 광대 설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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