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은 히틀러 치하의 독일 나치가 수백 만 명의 유태인을 감금하고 학살했던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감금당했던 유태계 정신과 의사다. 그는 가족들이 모두 가스실에서 죽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 남았다. 그는 그곳에서 살아 나온 후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을 원래 익명으로 낼 생각이었는데, 그의 의도와 달리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 같은 의학도가 수용소에서 제일 먼저 배운 것은 ‘교과서는 모두 거짓’ 이라는 사실이다. 교과서에는 사람이 일정 시간 이상 잠을 못자면 죽는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히 틀린 말이었다... 수용소에서는 이를 닦을 수 없었다. 그리고 모두 심각한 비타민 결핍증에 시달렸다. 하지만 잇몸이 그 어느 때보다 건강했다. 흙일을 하다가 찰과상을 입어도 동상에 걸린 경우가 아니라면 상처가 곪는 법도 없었다. 수용소 밖에서는 옆방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잠이 깼던 예민한 사람도 바로 귀 옆에서 코를 곯아도 잠을 잤다. 생존의 가장 밑바닥에서 유태인들은 동질성을 잃어버리고 파편화 되어갔다. 인간이 보일 수 있는 모든 본능이 표출되었다. 생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 한 조각의 빵을 위해 벌이는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 하루하루의 일과였다. 그래서 수용소에서 몇 년 지내다 보면 양심이라곤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만 살아남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있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인간의 면모를 보았다. 하루에 한두 번 지급 되는 게 전부인 목숨과도 같은 자신의 빵을 자기보다 처지가 못한 이들에게 나눠준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가장 절망적인 것은 수용소 생활을 얼마나 해야 하는지, 특히 언제쯤 전쟁이 끝난다는 이야기가 밑도 끝도 없이 전해지면 근거도 없는 희망이 사람들 마음속에서 부풀어 오르곤 했다. 그러한 희망은 절망이 보여주는 신기루였다. 수용소에 오기 전 꽤 유명한 작곡, 작사가였던 한 동료는 언제부턴가 그에게 ‘혼자만 알고 있으라는 듯’ 조용히 말하곤 했다. ‘꿈에서 누군가 1945년 3월 30일에 고통이 끝날 것이라고 알려주더군’ 그의 말은 ’그날‘ 이후 엄숙해졌다. 하지만 그날이 다가와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나치도 멀쩡했다. 그는 그날 하루 전인 3월 29일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고, 이틀 만인 31일에 죽었다. 직접 원인은 발진티푸스였지만, 빅터프랭클은 이 사건으로 인간의 정신상태가 육체의 면역력과 얼마나 밀접한 연관을 가지는지 절절히 체험했다. 그만이 아니었다. 1944년 성탄절부터 1945년 새해에 이르는 일주일 동안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했다. 원인은 성탄절에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었던 이들이 그 시간이 왔는데도 희망적인 뉴스가 들리지 않자 절망에 빠진 데 있었다. 근거 없는 낙관이 죽음을 부른 것이다자신의 삶에 더 이상의 느낌이 없는 사람, 이루어야 할 목표도, 목적도, 의미도, 없는 사람은 파멸했다. 하지만 그는 나약해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고통과 대면해야 했다. 눈물 흘리는 것을 부끄러워 할 필요도 없었다. 눈물은 그 사람이 엄청난 용기, 시련을 받아들일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다. 수용소로 끌려갔을 때 그는 거의 완성 단계에 있던 필생의 원고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 빼앗겼다. 원고를 다시 쓰기로 하였고, 머릿속으로, 마음속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작은 종이조각 이라도 보이면 요점이 되는 단어를 적어 몸에 보관했다. 그런 목적의 덕분에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남았고 나중에 그 체험을 기반으로 ‘로고테라피’(Logotherapy, 의미치료) 새로운 정신치료 분야를 개척할 수 있었다. 로고테라피의 핵심은 간단하다.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수용소에서 힘들 때마다 그 시련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중요한 것을 그곳에서 체험했다.
그는 지난 1997년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그때 이렇게 말했다 한다. ‘수용소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진정한 기회가 자기들에게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곳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 있었다.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자신을 구원해 주는 것이 미래에 대한 기대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위기가 닥쳤을 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허둥지둥 대처한 후 나중에 후회한 적은 없었을까? 모두 그런 경험을 해 본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좀 더 적절히 대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최악의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선택할 수 있다. 상실과, 실패, 괴로움과 슬픔은 인생의 한 부분이며 이런 고통 속에서도 기대감은 살아남아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일이 닥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다. 이 세상 누구도 늘 행복할 수는 없다. 괴로울 때 마다 망연자실하여 낙심하지 말고 기대감을 갖고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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