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개혁의 기초가 가정이었습니다. 개인과 개인이 모여 가정을 이루며 가정들이 모여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청교도들의 삶에서입니다. 어떤 학문적인 이론이 아니라 그들이 순수하게 오직 성경 중심적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고백한 교리나 시행하던 예배나 그리고 교회 안에서 유지하려고 했던 정치사상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교리 개혁에 대하여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은 전통과 미신으로 오염된 교회를 성경적 교회로 되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생활과 교리의 표준과 척도가 된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들은 성경에 근거하여 로마 천주교회에 의하여 오염된 그릇된 교회, 미신적인 예배, 폭정을 일삼는 교회정치를 개혁하고자 했습니다. 이들의 신학적인 전제가 종교개혁과 함께 다양한 교파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이유가 성경을 보는 개혁자들의 신학적인 전제 때문이었습니다.
보는 사람의 관점이나 또는 전제에 따라 변화된 것입니다. 오늘도 다양한 형태들의 상황이 이단으로서만이 아니라 정통이란 점에서도 다양한 모습으로 혼란하게 변화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이단과 그릇된 교파들은 성경에 대한 그릇된 전제에 근거했습니다. 그들은 성경만이 명하거나 교훈하는 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주장에 성경을 뜯어 맞춘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천국의 통치 원리를 평등과 자율이라고 제시했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면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된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천주교도들의 계급 구조적인 정부형태를 취했는데 그것을 모방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성경을 가져다가 맞추는 것이 바로 그릇된 신학운동입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모아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통함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바르게 해석될 때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알 수 있으나 그릇된 전제에 의하여 해석되면 성경이 제시하고자 하는 그 의미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뜻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른 신학적 전체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이 요구됩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이란 성경을 가장 바르게 이해하는 이유가 예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적 입장은 성경에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비추어 성경이 보여주는 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은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께서 풀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이같은 바른 신학을 재발견한 신학자가 요한 칼빈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고자 하는 원래의 의미를 바로 터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역사적, 문법적, 성경해석에 기초하여 로마 천주교회나 재침례교회의 성경해석을 비판하고 개혁주의적인 신학운동을 펼친 것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기독교 신앙과 행위의 규범이라고 고백하면서 성경의 권위에 기초하여 교리를 체계화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것은 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통하여 계시하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구원에 대하여 가르치십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무능한 존재이며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전능하신 분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영적으로 죽어가는 존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들을 찾아와 그의 왕국의 말씀과 성령으로 살리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죽어있는 자에게 선포될 때에 하나님의 성령은 그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것뿐 아니라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내어놓은 세상의 변화를 위한 프로그램이나 방법은 무용하고 헛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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