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이 다가 왔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다. 부활이 믿지 못하는 사람은 기독교인 아니다. 기독교 신자는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살리셨다는 것을 믿는다.
또한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아담과 함께 죄와 죽음의 쇠사를 묶여 있던 자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죄와 죽음의 사슬에서 풀려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이야 말로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핵심이고 본질이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은 부활의 역사성과 부활이 주는 의미는 항상 새롭게 음미하고, 더욱 견고하게 믿고, 항상 부활의 정신과 능력으로 살아야 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신화나 사람이 꾸며낸 허탄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훈련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비과학적이고 객관성이 결여된 주장이라고 말하며, 역사적인 사건으로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은 그의 제자들이 죽은 그의 스승을 보고 싶어하는 동경심과 뜨거운 열정에서 우러나온 환상으로 돌리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선지자들에 의하여 예언되고, 예수님 본인이 생전에 말했고, 그의 사후 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이미 충분히 확인된 사실이다. 예수님은 기절한 것이 아니라 죽었다. 군병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에 피가 쏟아진 것이 아니라 피와 물이 쏟아져 나왔다(요 20:34).
물이 쏟아졌다는 것은 예수께서 이미 완전히 목숨이 끊어졌고 이미 부패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로마 군병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 묻혔다. 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의 시신을 훔쳐갈까 염려하여 로마 사람들은 그의 무덤의 문을 인봉하고, 경비병이 그것을 지키게 하였다.
예수님은 잠깐 기절하신 것이 아니다. 식물인간이 된 것도 아니고 뇌사 상태에 빠진 것도 아니다. 분명 숨이 끊기고 심장이 멈췄다. 그리고 묻혔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직접 자신을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만지고, 함께 말하고, 먹고 마시는 가운데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확인했다.
예수님은 또한 일시에 오백여명이 보는 가운데도 나타나셨는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쓰던 당시에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대부분이 아직도 살아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람이 꾸면 낸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듣고, 만지고, 증거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우리 기독교의 대 전제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고, 태초에 계신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이다.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것을(creation out of nothing, creatio ex nihilo) 다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다. 권능의 하나님, 무한한 능력을 소유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처녀가 어린 아이를 잉태할 수도 있을 것이요, 죽은 자를 살릴 수도 있을 것이고, 반석에서 샘물이 나게 할 수도 있을 것이고, 홍해 바다를 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성경의 초자연적인 사건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의 신이다. 우리는 이러한 천지창조의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부활은 죽음을 전제한 것이다. 죽음이 없다면 부활도 없다. 사람은 다 죽는다. 그러나 죽음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사람의 죄 때문이다. 성경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다(롬 6:23).
세상에 죽음이 들어온 것은 하나님께 반역한 아담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징벌 때문이다.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기 때문에 아담과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아담과 함께 죽음을 같이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제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을 세워 아담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하시고 모든 믿는 자를 새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안으로 묶어 들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죄와 죽음의 굴레를 벗어나게 하신 것이다. 바울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아담을 오실 분의 모형이라고 했다(롬 5:14).
하나님께서 새아담을 살리셨다. 죽기까지 순종한 새아담의 피를 아담의 죄 값으로 받으신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 아담과 그의 언약적 연대성 가운데 있는 피조물들을 죄의 사슬로 묶어 둘 필요도 없었고, 묶어둘 이유도 없었다. 그들을 붙잡고 있는 죄와 죽음의 세력들로부터 그의 백성을 해방시켜 주신 것이다.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 먼저 예수님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어야 옳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자들을 살려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아담을 대신한 새하늘과 새땅의 언약적 우두머리, 곧 새로운 왕이 되셨다. 마치 아담이 하나님께서 창조한 모든 피조물의 왕이 되어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들을 통치하였듯이, 이제는 예수께서 새로운 왕이 되어 아담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왕이 된 것이다. 베드로는 그러한 의미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라는 고백을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왕이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왕으로 인정하고 고백한 것이다. 우리 신자들은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함으로 이제 아담의 백성에서 새아담의 백성이 된 것이고, 그리스도와 함께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예수님 안에서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여자의 후손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사탄의 무기인 죽음을 파괴하고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이 더 이상 예수님과 예수님의 연대성 안에 있는 자들에게 그의 권세와 능력을 부릴 수 없게 죽음이라는 무기를 회수하고 무장해제시켰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우리의 육신을 벗어나 신령한 몸을 입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함께 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부활 신앙으로 살아야한다. 우리 인생은 죽음이 결코 그 종착역이 아니다. 사람들은 죽음이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가 살아있는 동안의 삶을 즐기려한다. 예수님 말씀대로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에 일생을 소비하고 동물이나 다름없는 삶을 연장하기 위하여 발버둥 친다. 내일 죽을 터이니 오늘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것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철학이다.
그래서 세상을 마치 바람에 나는 겨처럼 시류를 따라 산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영원을 사모하며 살고, 영원한 일을 계획하고 산다. 부활을 믿는 자에게는 내일이 있고, 미래가 있고, 비전이 있다. 죽음으로 내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 이 하루가 귀중하고, 내일이 있기 때문에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며 뜻있는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 신자들은 부활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세상은 결코 악이 승리하는 세상이 아니다. 마치 이 세상은 악이 승리하는 세상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선이 승리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다(롬 8:28) 만일에 예수께서 나뭇가지를 든 저 악인들의 함성에 묻혀 십자가를 지고 처참한 죽음을 당했는데, 부활하지 못했다면 이 세상은 진정 악이 승리하고 악인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선하게 살아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살리심으로 그가 이 세상을 공의와 정의로 심판하시고,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고 계심을 보여주셨다(히 9:27). 이 무질서한 세상에 도덕과 윤리를 세우셨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잠시 억울한 꼴을 당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바르게 살고, 정직하게 살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부활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이기에 세상의 불의와 부정 앞에 비굴하게 타협하며, 눈치 보고 숨죽이며 사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정의와 진리와 사랑을 천명하고,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이라도 내놓으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 한국의 신자들은 부활 신앙은 있어도 부활 정신으로 불의한 세상을 도전하는 부활 정신은 흐릿한 것 같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부활신앙과 부활정신으로 살 것을 요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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