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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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 부활 후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받은 제자들이 “방언”을 하자, 유대인들이 그들을 새 술에 취했다고 희롱하였다. 이때에 베드로는 긴 연설을 통하여 자기들이 새 술에 취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들이 죽인 예수님을 살리시고, 그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자기들을 새언약의 선지자로 인증하는 성령의 도장을 찍으신 결과 그들이 방언을 하게 되었다고 자신들을 변증한다. 자신들의 과오를 깨달은 유대인들은 사도들을 향하여 “그러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탄식하며, 그들이 살길이 무엇인지 묻는다. 베드로는 이들에게 “회개하라. 그리고 너희가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각각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너희가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성령세례룰 받은 베드로는 이들에게 자기들처럼 성령세례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베드로가 받은 “성령세례”와 베드로가 말한 “성령의 선물”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선물, 성령세례, 나아가서 성령의 선물과 같이 쓰여 지고 있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확실한 상이점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다. 성령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일을 하셨다. 창 1:2에 보면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감돌고 계셨으며, 하나님의 모든 창조의 일을 기획하시고, 준비하시고, 이루시는 일을 했다. 뿐만 아니라 아담의 범죄로 타락한 이 세상을 구원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일도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고, 결국은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을 죄와 죽음 안에 가두어 버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새 아담을 세워 아담의 죄 값을 그의 죽음으로 대신 치르게 하고 죄와 죽음의 권세에 갇혀 있는 만물을 해방시키고 구출하는 하신 것이다. 따라서 새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세상 역사에 있어서 옛 아담과 그의 나라의 종언(終焉)과 더불어 새 아담과 그의 나라의 개시(開始)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 창조의 시작이며, 새 하늘과 새 땅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새로운 백성을 모으는 시작이다. 새 언약의 발효점이다. 나라는 백성이다. 백성이 새로워져야 나라가 새로워지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새로워져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불 수 없다”(요한 3:3). 또한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 3:5)고 선언하셨다. 여기서 물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물은 씻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물로 씻어주시고(요한 13), 15:3에서는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깨끗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베드로는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곧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 것이다.”(벧전 1:23)고 가르치신다. 이들의 말씀에 따르면 물은 말씀이고, 말씀이 거듭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거듭나는 것은 물과 성령, 곧 말씀과 성령이 하는 것이다.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성령이 임하고,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일하신다. 이 둘은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성령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신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다(요한 3:8). 성령을 통한 거듭남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성령이 언제, 어디로부터 나에게 임하는 지 알 수 없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중생의 역사가 언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다. 마치 우리가 육신의 생명을 얻을 때도 언제 임신이 되었으며, 언제 낳았는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어머니가 우리가 낳았던 생일을 알려주어야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중생을 성령세례와 동일시 할 수 없다. 성령은 우리가 중생하고, 성장하는 모든 과정을 주관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론이라고 할 때는 전통적으로 구원론을 의미한다. 성령이 예수께서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 놓은 구원을 우리 각각 개인에게 적용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성령은 우리 구원의 모든 과정을 주관한다.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 예수께서는 이 고백을 받으시고 그를 그의 백성으로 인증하는 성령의 도장을 찍으신다. 물세례이다. 물세례를 통하여 중생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몸의 지체가 된다(롬 6:3). 그래서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님과 불가분리의 신비롭게 밀접한 관계에 들어가게 되며, 중생과 세례에 더불어 그리스도와의 언약적 연대성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세례는 우리의 신앙적 정체성을 확고하게 한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에서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 복음 사업을 처음 시작하실 때, 물로 세례를 받으셨는데, 이때에 예수님 위에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셨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가리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사건을 예수님의 메사야로서의 취임식이라고 해석한다. 말하자면 예수께서는 복음 사역을 시작하며, 물세례를 받으셨으며,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임했다.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다. 따라서 물세례는 성령세례의 가시적인 예식(visible ceremony)이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새 아담이요, 하나님의 복음 사역의 일꾼, 곧 선지자로 인치시는 인증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께서 그의 메시지를 그의 백성들에게 대언하게 하기 위하여 그의 손을 예레미야(렘 1:9)나 이사야(사 6:7)의 입에 대어 그를 선지자로 세우고 인치시고, 그  선지자를 “여호와의 입”이라고 지칭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 점은 그의 공생애를 선지자로서 살으셨던 예수께서 부활 후 그의 제자들에게 선지자적 대사명을 주시고 인류 구원 사역을 맡기실 때도 같은 절차가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족속에게 세례를 주고 그의 말씀을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명령을 살펴보면 세례와 선지자적 직분을 연관시키신다(마 28:16-20; 행 1:5, 8; 2:3). 땅 끝까지 이르러 세상 끝 날까지 그의 말씀을 가르치려면 사도들을 이어 대대로 선지자를 세워야 한다. 따라서 세례를 주라는 말씀은 구원의 복음이 계속 전파되어야 한다는 점과 더불어 이 일을 위하여 선지자들이 계속 세워져야한다는 의미가 내포된 명령임을 알 수 있다. 오순절에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불같이 갈라진 혀들이 제자들 위에 임하여 그들의 혀를 움직여 제자들은 성령이 그들에게 말하게 하시는 대로 각 나라 언어로 말을 했다.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미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 중생한 신자들이다. 이들은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대로 예수님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된 자들이요(요 15:3), 예수님의 친구들이다(요 15:15). 이들에게 더 이상 중생이 필요한 자들이 아니다. 따라서 성령세례는 중생과는 다르다. 성령세례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하나님의 입, 곧 새 언약의 선지자로 세우시는 위임식이다. 이 성령세례는 바로 물세례와 병행되는 것이다.
이상을 정리해보면 물세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 세례의 가시적인 표현이다. 우리는 물세례를 받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의 지체가 되는 것이며, 이를 통하여 우리는 새 아담의 나라,  새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음으로 새언약의 선지자가 되어 구약성경의 선지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하나님의 입”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세례를 받는 자는 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다 선지자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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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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